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481
481화
치열했던 밤이 지나고 환하게 동이 터 왔다.
철검단의 피해는 생각보다 컸다.
죽은 이는 없었으나, 만궁대가 끝까지 항전하는 바람에 첫 번째 전투보다 많은 부상자가 발생한 것이다.
“천주님. 부상당한 녀석들은 어찌할까요?”
“경미한 놈들은 제외하고, 달릴 수 없는 녀석들을 추려 후방으로 보내라.”
“알겠습니다. 그리 지시하겠습니다.”
진무는 천우명에게 명을 내리고 앞선 전투를 되새겼다.
복기(復棋)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비무에서도, 전쟁에서도.
하물며 패배한 전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언뜻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것이라 생각할 법하지만, 그때라도 고치지 않으면 다시는 소를 기를 수 없으니까.
어쨌거나 지나간 싸움을 머릿속에서 처음부터 다시 살피는 것.
그것이 진무가 지금까지 해 온 방식이었고, 중원의 강자로 군림해 온 비결 중 하나였다.
함께 훈련을 받았던 놈들은 대부분 비슷한 성향을 가진다.
두 전투 사이에서 공통점을 찾는다면, 다음 전투에서 분명 도움이 될 터였다.
승리할 방법이나 부상자를 줄일 방법 등등.
그리고 대충 찾아내기도 했다.
적들의 취약한 부분을.
“천주님?”
“……취약한…… 쌍.”
천우명이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말을 걸어오는 바람에 생각의 흐름이 끊어져 버렸다.
너도 복기라는 걸 좀 해라, 복기.
“왜?”
“이제 다음은 어디입니까? 천력의 무향이라는 놈을 공격할 준비를 할까요?”
“…….”
연이은 승리로 천우명뿐 아니라 모두의 기세가 바짝 오른 듯했다.
좋은 일이긴 하지만 성급해서는 안 된다 여긴 진무가 고개를 저었다.
응조에게서 알아낸 정보에 의하면 지금 하북 북쪽에 숨어 있는 무향은 모두 다섯, 무인들의 수는 일만에 달한다.
궁이 보유한 전력 전체의 삼 할.
무향 둘과 그들이 이끄는 핵심 전력을 모조리 잡았으나 섬멸한 적의 수는 겨우 이천이 조금 넘을 뿐이었다.
고작 삼백이라는 수로 이룬 성과치고 대단하기는 하나 더는 안 된다.
황신이 저쪽을 시기적절하게 교란했다고는 해도 공격당했다는 사실을 금세 알게 될 터였다.
적이 뭉치기 시작할 것이고, 전투가 점점 힘들어질 것은 당연지사.
잘못 치고 들어갔다가는 진무가 있다고 해도 오히려 역공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지금 진무가 하는 싸움은 적들에게 돌을 던져 혼란을 주는 깽판이지 전면전이 아니었다.
그리고 아직 대궁주라는 놈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으니만큼 전력을 아껴야만 한다.
진무가 자신의 손에 들린 전서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황신에게 전서구로 상황을 전해 들은 적생이 보낸 서신이었다.
때마침 써먹을 수 있는 묘책이 적힌…….
“우명, 다들 모이라고 해. 모처럼 다 같이 식사라도 하지.”
“알겠습니다.”
* * *
모처럼 여유로운 식사 자리가 마련되었다.
전투에서는 전력을 다하는 것 이상으로 휴식을 통해 힘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했다.
철검단의 무인들이 휴식을 취하는 동안 진무는 수뇌들을 불러 차후의 일을 논의했다.
“황신.”
“옙!”
진무의 부름에 황신이 각 잡힌 자세로 앞으로 척척 걸어 나와 설명을 시작했다.
“적 총사께서 연락을 보내셨습니다. 현재…….”
모두가 귀를 열고 그의 보고를 경청했다.
중원 무림의 방어선을 뚫지 못한 적들이 흑살서의 독을 대규모로 살포하는 바람에 정무맹은 대동을 빼앗겼고, 북진을 시작했던 북리도천은 더 나아가지 못하고 방어선을 형성한 채 멈췄다.
다행히 소집된 황군이 전선에 투입되기 시작했으나, 해독제가 모자라 공격을 감행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음, 그나마 안정적으로 전투가 이어지는 곳은 하북의 방어선뿐이군요.”
“그래.”
“초반에 대동을 놓고 다투느라 방어선이 무너진 정무맹 쪽의 상황이 심각한 모양인데 돕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도와?”
“…….”
진무가 같잖다는 듯 피식 웃었다.
“정무칠성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텐데?”
“……아!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죄송은 무슨.”
모원려가 고개를 숙이자 진무가 손사래를 쳤다.
“정무칠성은 오랫동안 자신들의 의지로 중원을 지켜 온 자들이야. 나는 그들이 호락호락하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본인들 나름대로 사력을 다해 막고 있으니 섬서와 산서는 그들에게 맡겨.”
“…….”
“문제는 궁의 전력. 알다시피 응조라는 놈의 말에 따르면 저들이 끌고 온 전력은 모두 십만, 그중 칠 할이 힘없는 백성이다.”
좌중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대궁주.
그는 이 전쟁에 본 전력이 아닌 힘없는 백성들을 선두에 세워 칼받이로 소모하고 있었다.
정무맹의 피해가 컸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공격해 온 자들의 틈에 백성들이 섞여 있었기에 쉽게 검을 쓰지 못하고 머뭇거리다 당한 것이다.
그들이 살포하는 흑살서의 독도 문제였다.
시간이 갈수록 독에 중독된 이들은 늘어나는 데 반해 해독약은 여전히 턱없이 부족했다.
“이 전쟁은 길어질수록 양측에 막심한 피해를 입힌다.”
“…….”
“결국은 시간 싸움이라는 뜻이지. 우리는 피해를 줄여야 하고 저들은 군이 완전히 자리 잡기 전에 방어선을 뚫어야 하니까.”
“……하면 어찌?”
“놈들이 방패막이로 삼은 일반 백성들을 와해시키고 뒤에 숨은 놈들의 실질 전력을 최대한 빨리 끌어낸다.”
“하지만 겨우 저희만으로 가능하겠습니까?”
진무와 함께 온 철검단의 수는 고작 삼백이다.
두 번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머쥐었으나 그것은 고작 적들의 일부에 불과했고, 진무의 기상천외한 계략이 통했기 때문이었다.
“해서 적생이 우리도 독을 쓰자는군.”
“독이라고요?”
“그래.”
“…….”
독이라니, 아무리 전황이 급하다고 해도 어찌 저들과 똑같은 짓을 한단 말인가?
“뭘 놀라고 그래?”
“예?”
“우리가 써야 할 독은 허기(虛飢)다.”
허기…… 배고픔…….
“설마! 청야전술을?”
잠시 되뇌던 모원려가 깜짝 놀라 외쳤다.
어째서 청야전술인가? 그것은 지금의 상황에 맞지 않은…….
“……그게 뭔데?”
“예?”
“그 청야 뭐시기가 뭐냐고?”
아, 깜박했다.
지금까지 천주가 사용한 계책이 워낙 뛰어나기는 했으나 전술에 관해서는 천우명만큼이나 무지하다는 사실을.
“천주님, 청야전술이라는 것은…….”
모원려가 자신이 아는 바에 관해서 설명을 늘어놓았다.
청야전술(淸野戰術).
후퇴하는 방어군이 침공군을 상대하는 방법의 하나로 적군에게 사용될 물자를 모조리 불태우는 것. 일명 초토화 전술이라고도 불린다.
“……군이 투입되어 방어선이 형성되었으니 물러날 리는 없고, 물러난다고 해도 적들의 식량이 완전히 바닥나고 나서야 실효를 발휘합니다. 또한 그 피해는 적들뿐 아니라 아군에게도…….”
따악!
“큭!”
장황하게 설명을 이어 가던 모원려에게 기어이 응징이 가해졌다.
“뭔 개소리야?”
“예?”
“청야는 뭔지 모르겠고, 적생은 그냥 적진에 침투해서 식량만 불태우라고 했어.”
“……예?”
놀라는 꼴하고는.
하여간에 이런 놈들이 아는 척은 오지게 해요.
전술을 글로 배운 주제에 말이야, 어? 종잇장처럼 얕은 지식을 가지고 말이지.
“이래서 선무당이 더 무섭다니까, 쯧쯧.”
혀를 차면서 고개를 젓는 진무의 모습에 모원려가 세상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부터 우린 적들과 전면전을 벌이지 않고 철저하게 식량만 노린다.”
“…….”
“적생의 말로는 허기가 깊어지면 분명 혼란이 발생할 거라더군. 혼란은 반드시 와해로 이어질 테니…… 적들은 무조건 본진을 움직일 수밖에 없겠지.”
진무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고, 모원려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입을 댓 발이나 내밀며 삐죽거렸다.
젠장할, 이거나 저거나.
적생의 계책은 말하자면 기습과 청야전술을 혼합해 만든 것이었다.
다만 그 전략이 돌파력이라면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철검단에게 굉장히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주군, 저들이 우리의 노림수에 호락호락 걸려들까요? 더욱이 이미 우리가 공격을 시작한 것을 알았다면 필시 뭉치려 할 것인데…….”
능서현의 우려에 진무가 씩 웃으며 단언했다.
“무조건 걸려들어.”
“예?”
“싸워 보니 알겠더군. 저들의 단점이 뭔지.”
“…….”
단점이라니, 그게 무슨 소릴까?
진무의 자신만만한 표정에 모두가 궁금한 표정으로 귀를 쫑긋 세웠다.
“첫째, 놈들은 그리 결속력이 강하지 않다.”
“……결속력?”
“첫 번째 전투에서 응조라는 놈이 패배한 이후, 목숨을 거는 놈들이 하나도 없었어.”
“그야…….”
하긴 그렇다.
진무의 위협이 워낙 살벌하기도 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응조대를 제외한 홍건의 투항은 지나치게 빨랐다.
“당연한 이야기지. 대가리라는 놈은 도망칠 생각부터 하고 있고, 수하들 목숨을 개미 새끼 취급하는데 누가 목숨을 걸고 따르겠어?”
“…….”
“그리고, 운암이 잡았다는 암향에게 듣자니 대궁주라는 놈, 저들에게 정착할 땅과 금은보화를 약속하며 침공을 시작했다더군.”
“흐음, 대가라…… 그렇군요.”
대가라는 말에 각출과 능서현을 제외한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무맹이나 마교라면 몰라도 사파인들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사파는 이득 없는 싸움을 하지 않는다. 또한 명예나 자부심 따위에 미련하게 목숨 걸지도 않는다.
대가를 받지 못하거나 대가를 지급할 놈이 사라지면?
“그래. 저놈들 핵심만 부수면 나머진 그대로 와해될 거야. 즉,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은 십만이 아니라 삼만이라는 뜻이지.”
하지만 여전히 천생 마교인인 능서현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사람이 명예가 아닌 대가 때문에 목숨을 걸다니…….
“그런데 주군.”
“……?”
“식량이 중요하다는 것은 저들도 알 것입니다. 어떻게든 방어를 하려 할 것인데…….”
“뚫을 수 있어.”
“……?”
대답이 빨라도 너무 빨라서 물어본 사람이 무안할 정도였다.
저 천주가 또 무슨 기발한 수작을 부리려는 것일까?
“놈들이 가진 두 번째 단점.”
손가락 두 개를 펼친 진무가 빙긋 웃었다.
“이 새끼들이 흑살서의 독을 남발하는 이유가 있었어.”
“예?”
“생각해 봐. 내가 과하게 뛰어난 부분도 있지만, 전투가 너무 쉽지 않았어?”
과하게 뛰어난 것은…… 그렇다 치고, 전투가 쉽기는 했지.
“이 새끼들은 실전 경험이 부족해. 응조도, 만궁도…… 아마 궁이라는 곳에 처박혀 복수 어쩌고 하면서 냅다 무공만 익혔겠지. 뭐, 수하들이랑 알콩달콩 진법 훈련도 하긴 했겠지만.”
어우, 생각만 해도 지겹네.
진무는 장난스레 진저리를 친 후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훈련과 실전은 명백하게 다르잖아? 상대며 지형이며…… 다양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경험이 절실히 필요하단 말이야.”
“…….”
“다들 놈들의 숫자에 놀라 지레 겁을 집어먹었기에 전투를 어렵게 이끌어 가고 있을 뿐이야.”
능서현은 시원시원하게 말하는 진무를 한참 쳐다보다 속으로 웃고 말았다.
과연 자신이 섬길 만한 인물이라고 해야 하나?
전투를 대하는 시각이 자신들과는 너무도 달랐다.
자신들은 눈앞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적군이라는 나무를 보았고, 진무는 전장이라는 숲을 보며 적의 성향을 파악한 것이다.
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으면 약관밖에 되지 않은 자가 저런 통찰력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자, 앞으로 하려는 일들은 대충 설명했으니 수하들에게 잘 전달해. 다들 푹 자고, 열심히 쉬어 둬라. 이제부턴 외곽이 아니라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가야 하니까.”
말을 마친 진무가 능서현의 존경 어린 시선을 받으며 숲속으로 사라진 뒤에도 수뇌들은 좀처럼 자리를 뜨지 못했다.
모원려와 철검단의 대주들은 여전히 불안한 기색이었다.
“……단주.”
“응?”
“천주님을 믿어도 될까요?”
“……?”
모원려의 말에 천우명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직 어린 분이 아닙니까.”
“누가 어려?”
“천주님이요.”
“…….”
“무공이야 말할 것도 없고…… 앞선 전투에서 승리하기는 했어도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었지 않습니까? 그간 많은 전투를 치르신 것은 알지만, 천주님도 이런 대규모 전쟁은 경험이 그리 많지 않으실 터인데 저런 과한 자신감은 오히려 독이 될 수도…….”
누군가를 평가할 정도로 똑똑하지 않은 천우명이었지만, 모원려가 지금 아주 멍청한 소리를 하고 있다는 것만은 단언할 수 있었다.
앞선 전투?
철검단이 잘나서 이긴 것이 아니라 진무가 철검단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이긴 것이었다.
말하자면 용병술이다.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어찌 써야 할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매번 정상적인 전술이 아니라도 통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저 천주가 그 천주라는 사실을 모른다.
저 몸뚱어리 안에 팔십 넘은 노인네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어떤 반응일까?
말해 주고 싶지만 괜한 혼란을 불러일으킬 것이 뻔했다.
천우명은 근질거리는 입가를 문지르며 모원려를 불렀다.
“원려야.”
“예?”
“예전에도 지금도 내가 천주님을 따르는 건 그분을 믿어서가 아니다.”
“……?”
“뭐…… 신뢰도로 따지면 영험한 산에 널린 돌탑에 돌 하나 더 얹는 마음이랄까?”
돌탑에 돌을 쌓아 기원하는…… 그런 하찮은 믿음이라고?
겨우 그런 믿음으로 목숨을 걸고 충성한단 말인가?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모원려를 향해 천우명이 해맑게 웃었다.
“근데 말이지. 저분은 언제나 묘한 기대감이 들게 하거든. 그냥 돌 하나만 얹어도 이루어질 것처럼…… 사람 미치게시리.”
“…….”
“그러니까 걱정 말고 천주님 말씀대로 쉴 때 푹 쉬어 둬라.”
모원려는 얼빠진 표정으로 제 어깨를 툭 치고 진무가 사라진 곳으로 향하는 천우명을 응시했다.
묘한 기대감.
그의 말만 따르면 죽어서 극락을 갈 수도 있겠구나, 하는 그런 마음.
……저기, 단주님?
기대감에 목숨을 걸 정도면 거의 맹신인데……. 다들 그렇게 종교에 빠져드는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