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487
487화
뿔피리가 들려올 때마다 홍건들의 숫자가 늘어났다.
그리고 세 번째 뿔피리 소리가 들렸을 때였다.
“하아압!”
쾅! 콰쾅! 쾅쾅!
수세에 몰렸던 맹부가 이기어검에 팔 하나가 잘리고 난 뒤 광폭하게 강기를 때려 박고 뒤로 물러났다.
“놓칠 것 같…….”
도끼를 든 맹부대의 무인들이 진을 형성하며 뒤쫓으려던 철지량을 가로막았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다지도 악착같단 말인가?
하지만 더 이상 봐주지 않으리라 결심한 후였다.
철지량은 단번에 그들의 머리를 날리고 사지를 베었다.
그리고 맹부는…….
비겁하게도 그 짧은 찰나에 몰려드는 홍건들 사이를 빠져나가 대동 쪽으로 도망쳤다.
하나 철지량에게는 그를 쫓아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다행히 양소방 등이 앞장서서 몰려오는 적들을 밀어 내고 있었다.
“속히 적들을 몰아내고 방벽을 만들라! 절대로 밀려서는 안 된다!”
반나절에 달하는 전투 끝에 그들은 겨우 다시 대동으로 향하는 길목 하나를 수복했다.
그리고 그제야 적들의 시신이 가득한 곳에서 정무맹이 입은 피해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하아, 하아…… 맹주님.”
“…….”
가쁜 숨을 몰아쉬며 철지량을 부르는 청년, 남궁가의 차남이자 새롭게 갑무반의 수좌가 된 남궁창위.
그가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화타가 살아 돌아온다 해도 너덜너덜해진 그의 몸을 어쩌지 못할 것을 안다.
온통 붉게 물든 몸을 하고도 질기게 버틴 그가, 기어이 숨이 넘어가려는지 회광반조의 증세를 보였다.
머지않은 것이다.
“제가요, 도망치려고 했거든요. 이딴 전쟁…… 저랑 아무 상관도 없는 전쟁…….”
“…….”
회한 어린 말이 듣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구해 주는 척하면서 방패막이로 삼으려고요, 그랬어요. 어떻게든 살아 보려고요.”
회개하듯 속마음을 늘어놓는 그의 씁쓸한 웃음에 철지량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청상과 함께 그를 가르쳤으나 탐탁지 않았다.
늘상 남을 탓하고, 시기와 질투를 일삼는 그를 못났다 여겼다.
“보여 주고 싶었는데……. 비록 차남이지만…… 모두의 앞에 당당히 서서…… 그러고 싶었는데.”
“…….”
넋두리처럼 중얼거리던 그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남을 향한 시기, 질투…… 그리고 거들먹거려 보고 싶어 하는 마음.
그리고 타인을 이용해서라도 살고자 하는 욕구.
저 나이 때는 모두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것인데. 인간이라면 누구나 품고 있는 마음이었을 뿐인데.
명문가에서 태어났다는 자부심이 그러했을 것이고, 차남으로 살며 겪은 설움에 점차 그리 변했을지도 모르는 것인데.
갓 스물이 넘은 청년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했던 것은 아닐까?
그가 살인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남을 해친 것도 아닌데…….
선입견에 얽매여 거목이 될 수 있었던 어린싹들을 말로써, 행동으로써 잘라 버렸던 것은 아닐까?
먼저 인생을 살아 보았다는 오만함을 가르침으로 포장하며 안 된다, 하지 마라, 옳지 않다고만 하고 칭찬에 인색했던 것이 후회되었다.
웃어 줄 것을. 한 번이라도 이해하고 다독거려 줄 것을.
정무맹을 대표한다는 자가 되어서, 어찌하여 그런 넓은 마음을 가지지 못했단 말인가?
“제기랄, 이렇게 죽을 줄 알았으면 그냥 좀 멋질 걸 그랬나 봐요. 청상, 그 망할 녀석처럼…….”
마지막 말, 마지막 미소.
그가 스르륵 눈을 감으며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아프다.
그의 입가에서 닦아 낸 피가 소매를 물들인 것이, 그와 수많은 동량의 죽음이 철지량의 가슴을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었다.
이게 아닌데. 앞길이 구만리 같은 꽃다운 청춘들을 대신해 살 만큼 살아온 자신들이 죽었어야 마땅한데…….
먹먹한 가운데 거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을 향해. 그리고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세상을 향해.
그리고 그 속에서 이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대궁주를 향해.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짓씹으며 분루를 삼키던 철지량은 검을 놓고 천천히 일어나 죽어 간 모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수고했네. 그리고 미안하네. 절대로 자네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겠네.”
잔잔히 전장을 울리는 그의 목소리가 그 자리에 선 모두의 가슴에 긴 여운을 남겼다.
한참을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던 철지량이 몸을 돌렸다.
눈빛은 혹한을 닮은 듯 차가워졌고,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의 손에는 다시 검이 들려 있었다.
아직 애도하기에는 이르다.
죽은 이들을 대함이 고통스럽고, 다시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어 갈지 모르지만 싸워야만 했다.
모든 것이 끝났을 때, 잘 익은 술 한 잔을 받아 놓은 뒤에야 그들의 무덤에 절을 올릴 것이다.
그것이 그들에게,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형제자매들에게 어떤 위안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이 싸움을 종식하기 위해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홍건들이 밀려드는 전장으로.
“소방!”
“예.”
“이곳을 맡아 주게.”
“……맹주님께선?”
“놈이 대동으로 도망쳤다네. 상황이 바쁘고 급한 것은 아네만…… 저들을 죽음을 몰고 간 이에게 알려 주고, 보여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자신이 무슨 잘못을 한 것인지 말일세.”
“알겠습니다. 곧 정리하고 따르겠습니다.”
“그래. 부탁함세.”
양소방에게 명을 내린 철지량이 홍건들을 향해 일갈했다.
“지금부터 나를 막아서는 이들이 있다면 모조리 참할 것이다!”
그리고 쏘아진다.
거력이 담긴 검이 한 줄기 빛이 되어 홍건의 무리 중심을 꿰뚫었다.
쿠아아아!
단숨에 조각 난 시신과 피로 이루어진 혈로(血路)를 내 버린 철지량이 양손에 기검을 만들어 쥐고 달렸다.
“용봉관은 서둘러 맹주님을 따르라!”
아무리 검성이라 할지라도 홀로 보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양소방이 명에 등여평과 용봉관의 무인들이 힘차게 철지량이 낸 피의 길을 향해 뛰어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양소방과 검혜를 필두로 적들을 섬멸하던 그곳에 제갈협진이 뛰어들었다.
“비흔 어른!”
“응? 자네가 왜?”
“맹주님은, 맹주님은 어디 계십니까?”
“적의 수괴를 쫓아 대동으로…….”
“제길!”
“……?”
“멈추어야 합니다.”
“…….”
후방에 있어야 할 전략의 책임자가 전장의 선단에 나타난 것도 놀랄 일이었지만, 어째서 멈추어야 한다는 것인가?
“양동입니다. 놈들이 양동으로 하북을 칠 생각입니다.”
“뭐라고? 그게 무슨?”
“확인하고 오는 길입니다.”
“…….”
“적의 본진이 대동에서 동측으로 방향을 꺾었습니다.”
제갈협진의 말에 양소방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하필이면 맹주가 없는 틈에.
“지금의 공격은 그저 우리의 눈과 귀를 가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
제갈협진은 방어선이 적들의 습격을 받고 모두가 전장으로 이동한 뒤, 관도를 확인하기 위해 직접 움직였다.
개방의 정보개들과 함께 서둘러 대동과 하북을 잇는 관도로 말을 달렸고, 그곳에서 적들을 보았다.
수만의 병력이 관도를 가득 메우고 파도처럼 하북을 향해 밀려가고 있었다.
대동을 버려야 했다.
“하북으로 가야 합니다. 이미 후방에 있던 이들에게 하북으로 이동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
묵묵히 듣고 있던 양소방이 멀리 대동의 시가지를 바라보았다.
“맹주님께서…….”
“적들이 모두 하북으로 간 시점입니다. 그분이라면 크게 위험하지 않을 것입니다. 일단 출발한 뒤에 맹주님께 전갈을 띄우도록 하지요.”
양소방은 한참을 고민했다.
맹주가 적을 쫓아 전장을 이탈한 시점이니 누군가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알겠네. 그리하세.”
양소방은 휘하 무인에게 명을 내려 철지량에게 이 사실을 전하도록 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정무맹! 속히 이곳을 정리하고 하북을 향해 진격한다!”
“예!”
정무맹의 행보가 결정되었다.
어쩌면 마지막 전투가 벌어질지도 모르는 하북을 향해 양소방을 필두로 한 정무맹의 무인들이 쏜살같이 내달렸다.
* * *
하북의 북부에서 좌군을 공격하던 진무 일행이 북쪽 초원의 대지에 도착했다.
“이게 대체?”
천력을 뒤쫓아 온 진무 일행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을 떡 벌렸다.
평원의 중심에서 발견한 거대한 화구 모양의 지형.
외곽을 둘러치며 칼날처럼 솟구친 돌산의 통로를 통해 천력이 사라진 것이다.
진무가 주변에 경계가 있는지 살핀 뒤, 황신과 각출을 데리고 돌산을 은밀하게 기어올랐다.
“와! 엄청난 규모네.”
비로소 드러난 내부의 전경에 진무가 감탄사를 뱉었다.
돌산의 안쪽에 반대편 산이 흐릿해 보일 정도로 드넓은 분지가 평원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내부에 빽빽이 세워져 도시를 이룬 천막들.
세기도 힘들 정도니 그 안에 대체 몇 놈이나 있을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대단한 곳이다.
솟아오른 돌산이 둘레를 피다 만 연꽃처럼 감싸 내부를 가리고, 내부의 분지가 바닥을 향해 수십 장이나 움푹 내려앉아 높이를 더하니 외곽에서 뛰어 내려가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대충 살피기에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라 부를 만한 곳은 모두 여덟 곳.
안을 가리고, 외곽을 감시하기에 최적이니 방어전을 펼치기에 이보다 좋은 조건은 없으리라.
가히 자연이 만든 천혜의 요새라 할 만했다.
젠장, 이런 곳이 있는 줄 알았으면 사패천 본성을 천중산이 아닌 이곳에 지을걸.
“냉산의 대분지입니다.”
“냉산?”
“예. 원래의 이름은 귀수(歸綏), 듣기로는 하늘을 떠도는 용이 잠시 쉬어 가려 둥지를 튼 곳이라는 전설이 있다던데요?”
“거창하지만 어울리는 전설이네.”
황신의 말에 진무가 피식 웃으며 분지 안을 살폈다.
용의 둥지, 귀수.
참 좋은 이름이다.
돌아와 편안히 쉬는 곳이라니.
중원으로 돌아온 궁의 휴식처 같은 느낌이 나는 게, 궁의 잡놈들이 노리고 여기다 본진을 꾸린 것인지…….
아니, 근데 그럼 휴양이나 하다 돌아갈 일이지 뭐 하러 공격하고 지랄들이야?
그나저나 이제 본진을 발견했으니 단단히 주의를 기울여야만 했다.
그동안 궁의 수좌들을 만나 싸워 본 진무였다.
놈들의 본진이니 그보다 더한 놈들이 있을지도 모를 일 아닌가?
“살펴볼까요?”
“괜찮겠어?”
“어차피 시키실 거잖아요.”
“…….”
이 자식이.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 이건가?
진무가 인상을 찌푸리자 황신이 급히 딴청을 피웠다.
보자, 어찌하는 것이 좋을까…….
아직 철검단이 도착하지 않았다.
대략 반나절?
공격한다고 해도 휴식을 취해야 하니 하루는 있어야 한다.
그냥 뚫고 들어가서 대궁주라는 놈에게 대장전이라도 신청할까.
하지만 만약에 이전에 싸운 궁주들과 비슷한 놈이 득실거린다면?
괜히 개죽음을 자초할 필요는 없다. 성격에 맞지도 않고.
일단 적부터 제대로 확인하고 싸운다.
그러자면 일단 정보가 필요한데…… 황신 혼자서는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
“……웬일로 걱정을 다 하시네요? 안 어울리게.”
“응? 뭐? 내가?”
“예.”
“……보이냐?”
“심각해요.”
“…….”
우리 신이가 눈치가 제법 늘었다.
하긴 서당 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자신을 가장 오랫동안 따라다녔으니 표정을 읽는 것 정도야 무에 어렵겠는가?
“조심해야 해.”
“천주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네요.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맘만 먹으면 천주님께도 안 걸릴 자신 있습니다.”
“…….”
이 건방진 새끼 봐라?
가기 전에 몸으로 나누는 정겨운 대화의 장을 열어 보고 싶지만, 위험한 상황에 기를 꺾어 놓을 필요는 없어서 참는다.
“무리해서 확인하지 마라. 대충 적이 몇인지, 천우명 이상의 고수가 몇인지만 알면 된다.”
“예.”
“대궁주라는 놈과는 절대 가까이하지 마. 있을 것 같은 천막이 있으면 무조건 도망쳐.”
“……예.”
“딱 하루다. 전부 확인할 수는 없어. 시간 되면 무조건 빠져나와라.”
“…….”
뭐가 그렇게 걱정스러운지 주절주절 덧붙이는 생소한 모습에 황신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진무를 불렀다.
“천주님.”
“응?”
“오늘따라 혓바닥이 기시네요. 저 황신이에요.”
“…….”
그럼 니가 각출이냐?
이 자식이 오글거리게 신뢰의 증거로 잘도 지 이름을…….
“다녀오겠습니다.”
“황…….”
진무가 몇 가지 더 주의를 주려고 입을 연 찰나, 황신이 잽싸게 모습을 감췄다.
십여 장 인근에서는 기감에도 잡히지 않을 만큼 깨끗하게.
허, 이 새끼 보게.
이젠 딴마음 먹고 덤벼들면 아차 하는 순간에 당하겠네.
처맞아 가면서 발전을 이룬 것은 구원개 각출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예?”
진무가 빤히 쳐다보자 각출이 눈을 끔벅거리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각출아.”
“예.”
“하오문이랑 개방에 전서구 날려라. 놈들의 본진이 이곳 냉산, 아니 귀수에 있다고.”
“…….”
진무의 명령에도 각출은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할 뿐,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왜?”
“전서구를…… 지금요?”
“그럼?”
“어떻게요? 암것도 없는데…….”
“황신은 아무 데서나 잘하던데?”
“……그건 황신 형님이고요.”
각출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그제야 알게 되었다.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나 전서구를 날릴 수 있는 것은 황신뿐이라는 사실을.
이 새끼…… 청각 말고도 다른 능력이 있었구나.
황신이 사라진 쪽으로 고개를 돌린 진무의 귓가에 문득 환청이 들렸다.
천주님, 저 황신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