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488
488화
은신(隱身).
말 그대로 몸을 숨기는 것.
이는 정보를 수집하는 이들에게 그 효용성이 지대하여, 오랜 세월을 거치며 꾸준히 발전하다 하나의 무공으로 정립되었다.
은신술, 은잠술, 잠형술…… 등등.
뭐, 부르는 이름은 많지만, 요는 결국 하나였다.
타인의 눈에 들키지 않는 것.
방법이야 차고 넘쳤다.
기장 기초적인 것은 몸을 감출 만한 사물 뒤에 위치하는 것.
하지만 사람을 감출 수 있는 큰 사물이 어디에나 있지는 않은 법이라, 은신이 뛰어난 자들은 사물에 몸을 맞추기 위해서 축골공을 익혔다.
하지만 그조차도 한계가 있었다.
해서 다음 단계가 시선을 속이는 것이었다.
사각에 해당하는 위치와 무관심의 영역에 숨는다.
어? 저쪽에 누가 숨어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흔하디흔한 사물을 골라야 했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가 은신의 꽃이라 불리는 동화(同和)였다.
사물처럼, 길 가다가 무심코 발에 채는 돌처럼 변하는 것.
기척을 줄이는 것으로는 안 된다.
냄새를 없애고, 소리를 없애고…… 뭐, 여하튼 인간이 가진 본능적인 감각마저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 되어서야 비로소 초일류 은신자로 거듭날 수 있다.
그리고 부수적으로 뛰어난 경공.
이 또한 빠르기만 해서는 안 된다.
흔적을 남기지 않아야 하고, 상대가 자신의 숨은 곳을 눈치챘을 때 기민하게 빠져나갈 수 있어야 한다.
그 모든 것이 합해졌을 때 은신은 비로소 완벽한 기예가 된다.
황신은 그런 자였다.
앞선 모든 훈련을 거친 은위단 소속의 무인이었고, 지상 최강의 괴물을 통해 한 단계 나아갔다.
들키면 맞았다.
정말 뒈지게 맞았다.
그냥 죽고 싶을 정도로 맞았다.
살기 위해서는 무조건 더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은신은 곧 생존이었고, 그 생존에 대한 욕구가 오늘의 황신을 있게 했다.
그리고 지금, 황신은 자신의 기예를 마음껏 뽐내며 궁의 본진으로 향했다.
벌건 대낮에 두 눈 똑바로 뜨고, 외곽을 감시하는 경계의 중심으로 대놓고 잠입했다.
“응?”
“왜?”
“아니, 그냥 뭔가 좀…….”
“싱겁기는.”
경계병 중 하나가 수상하다는 듯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자 대번에 핀잔이 날아왔다.
“눈 똑바로 뜨고 경계해. 다들 떠나고 난 뒤야. 천력 님이 돌아오시긴 했지만, 좌군을 습격했다는 적이라도 나타나면 큰일이니까.”
“음, 그래야지.”
숙영지 외곽을 지키는 경계 무인들이 다시금 주변을 세세히 살폈다.
하지만 눈을 양옆으로 찢어서 뜬다 해도 황신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그는 이미 지나가 있었으니까.
숙영지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간 황신은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인적 없는 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은신을 너무 오래 사용하는 것은 좋지 못했다.
그건 초짜나 하는 짓이다.
내력이 무한정한 것도 아니고, 온종일 이 거대한 숙영지를 살피자면 가성비를 따져야만 했다.
적은 내력을 효율적으로 사용해 은신을 펼쳐야 하는 것이다.
자, 어쨌든 안쪽으로는 들어왔고.
이제 살피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잠깐, 황신은 경비병들의 대화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모두가 떠나?
대체 무슨 소리지?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좀 더 확인이 필요했다.
천막의 그림자에 몸을 숨긴 황신은 주변을 은밀하게 살폈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미루어, 진의 경우 통상적으로 내부에 경계가 배치되지 않는다.
외곽의 방어선에서 적의 수괴가 숨은 지휘부의 공간까지는 경계가 허술했다.
그 핵심까지만 다가서지 않으면 된다. 약간의 주의만 기울이면 마음껏 활보할 수 있었다.
황신은 때마침 적당한 놈을 발견했다.
무리에서 떨어져 소피를 보러 나온 녀석.
저런 경우 대개 죽는다.
참으로 불쌍하기 그지없는 운명…….
슈슛, 푹!
“꺽…….”
황신의 습격을 받은 홍건의 무인이 비명도 못 지르고 바지춤을 내린 채 주저앉았다.
무릎이 땅을 찍는 소리가 났지만, 그 작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놈은 없으리라.
목이 뚫렸으니 비명을 지를 수도 없다. 아니, 낸다 해도 바람 빠지는 소리가 전부다.
황신이 항상 목구멍을 뚫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남의 소리는 모조리 듣되, 자신의 소리는 철저히 감추는 무음의 암살자, 황신.
세심히 주위를 살펴 동향을 파악한 그가 시신을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갔다.
딱 하루 동안만 발견되지 않으면 된다.
시신의 옷을 벗겨 갈아입은 황신이 이마에 붉은 띠를 질끈 동여맸다.
이제 자신은 사방에 깔린 홍건의 무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 있는 곳에서만 조심하고, 없는 곳에서는 경공을 최대로 발휘해 돌아다니며 적진을 살핀다.
그냥 주변만 배회해도 상관없었다.
근처의 모든 소리가 자신의 귀에 들려오니까.
* * *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며 세상을 붉게 물들이는 시간.
“천주님.”
“…….”
막 도착한 천우명과 능서현이 돌산을 기어올라 진무의 곁으로 다가왔다.
“철검단은?”
“혹시 몰라 인근에 대기시켜 두었습니다.”
“잘했다.”
고개를 끄덕인 진무의 어깨 너머를 바라본 천우명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적들의 본거지군요.”
“그래.”
“젠장, 엄청 많군요. 천막 수를 감안하면 못해도 몇만은 되어 보입니다.”
드넓은 분지를 가득 메운 숙영지에 천우명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었다.
그럴 만했다.
돌려보낸 부상자들을 제외하면 이제 철검단의 수는 이백 남짓.
그 수로 몇만이나 되는 적들의 진영에 뛰어든다는 것은 미친 짓이다.
진무는 물론 그 할애비가 와도 불가능한 숫자였다.
“어찌할까요?”
“황신이 내부를 살피러 들어갔다.”
“본진에요?”
“그래.”
천우명과 능서현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냥 보내셨다고요? 적진의 한가운데에? 뭐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지가 황신이래.”
“…….”
그럼 황신이 황신이지 각출인가요?
도무지 이해가 안 가 눈만 깜박이는 둘을 본 진무가 낮게 웃었다.
“그런 게 있어.”
“…….”
그들의 의문을 한마디로 일축한 진무를 향해 능서현이 물었다.
“각 호위가 보이지 않는군요.”
“전서구 보내러 갔어.”
“아!”
그렇지. 아무래도 적진 근처에서 전서구를 날린다는 것은 꽤 위험한 일이기도 하고, 인근에 전서구를 사용할 만한 거점이 있어야 하니까.
“하면 황 호위가 내부를 살피고 돌아온 다음 움직입니까?”
“그래.”
“하지만 이전처럼 적들을 돌파해서 식량을 불태우기에는 숫자가 너무 많은데요?”
“…….”
“저만한 숙영지라면 식량을 보관하고 있는 곳도 여러 군데에 나누어져 있을 테고요.”
“맞아.”
“결국, 각 호위의 전서를 받은 중원 무림의 지원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군요.”
“아마도.”
진무는 추임새만 넣었다.
그가 하려는 말들을 능서현이 알아서 척척 내뱉고 있었으니까.
“어쨌든 황신을 기다린다.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서현이 너는 전장을 예의 주시해라. 우명이 너는 철검단에게 언제든지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하라 하고. 만약 황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밤이든 낮이든 곧바로 공격을 시작해야 해.”
“예.”
“알겠습니다.”
명을 받은 능서현은 넘겨받은 감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움직였고, 천우명은 철검단에게 명을 전하기 위해 움직였다.
능서현에게 전장 감시를 맡겨 한결 눈의 피로를 덜 수 있었던 진무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숙영지를 응시했다.
고요했다.
곳곳에 불을 밝힌 채 쉬고 있는 적들이 너무도 평온해 보였다.
하나 최후의 격전지가 될지도 모르는 곳, 귀수.
과연 그 이름에 걸맞는 평온함이다. 하지만 지금의 고요는 폭풍 전의 그것이리라.
황신에게 다짐받은 하루의 시간에서 이제 반나절이 남았다.
날이 밝으면 돌아올 것이다.
너무 무리하면 안 되는데…….
걱정하던 진무는 갑자기 피식거렸다.
참으로 우습다.
사패오왕을 제외하고는 누구와도 정을 쌓지 않고자 했던 그였는데, 그새 황신에게 정이 들어 버린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풍환을 비롯한 정무칠성도 그렇고, 무당의 수많은 도사에 청상, 청우.
개또라이이긴 해도 밉지 않은 당세령과 평생 죽이고 싶었던 숙적 북리도천.
성군을 꿈꾸며 자신에게 손해 막심한 일을 떠넘긴 태자 놈에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듯한 스승님까지.
팔십 년의 삶보다 지금의 짧은 삶에서 더 많은 인연이 생겨 버렸다.
나이가 들면 잔정이 많아진다더니, 그 탓인가?
그래, 다시 사는 삶이 과거와 같을 수는 없겠지.
나름 도사라는 삶에 흥미를 느끼는 중이기도 하고.
어찌 되었든 과거에 올라서지 못했던 정사마의 가장 높은 위치에 섰다.
이제는 소중해져 버린 중원.
나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내 것을 빼앗겨 본 일이 없다.
오롯이 내 삶의 터전이어야 할 곳에 찾아와 생짜를 부리는 궁 새끼들.
니놈들의 목적이 무엇이든, 과거의 원한이 무엇이든 간에 애초에 방법이 틀려먹었다.
감히 내가 보는 앞에서, 내가 듣고 있는 곳에서 타인의 목숨을 이용하고, 어린아이와 여인, 노인에 이르기까지 죽음으로 몰아넣은 네놈들 따위에게는 쓸모없는 땅 한 뼘도 넘겨줄 수 없다.
대궁주, 그리고 홍건 어쩌고 하며 놈들의 뜻에 따른 무리들.
반드시 죄를 물을 것이다.
사지 육신을 찢어 들판에 뿌려 짐승들의 배를 채워 줄 것이며, 그 피로 목을 축여 줄 것이다.
궁의 숙영지를 응시하던 진무의 눈에 새파란 살기가 어렸다.
* * *
숙영지 내부를 훑는 황신의 눈빛에 매서움이 더해지고, 움직임은 점점 더 빨라졌다.
시간이 갈수록 그는 당혹을 금치 못했다.
비었다.
초원을 가득 채운 천막 대부분이 비어 있었다.
어찌 된 거지?
숙영지를 비우고 다른 곳에 모였다면 그의 예민한 청각에 걸려들지 않을 리 없다.
이건 없는 거다.
그냥 빈 천막으로 그 수가 많아 보이게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면 어디로 간 것인가? 놈들이 본진을 비웠다면?
아직 천주님과 약속한 시각까지 조금 남았다.
지난 낮부터 다시 찾아온 밤까지 은신술을 펼치고 쉼 없이 달리느라 몸이 지쳐 가고 있었지만, 정보는 좀 더 세세해야만 했다.
그래야 천주님이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자신의 정보에 철검단의 목숨이 달려 있다.
적의 상황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공격하면 도리어 적의 암계에 걸릴 수도 있었다.
좀 더 살핀다.
천주님이 엄중히 주의를 주었지만 안으로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이곳은 군진.
고위급이 머무는 숙영지로 들어가려면 또 한 번의 경계를 넘어야 했다.
경계가 배는 삼엄해질 터였고, 고수들이 즐비하겠지만 쭉정이가 아닌 제대로 된 놈에게 정보를 캐내야만 했다.
황신은 잠시 멈춰 호흡을 골랐다. 은신한 상태에서 운기를 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버틸 만했다.
남아 있는 내공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하면…….
자신에게 남은 한계치까지의 내력을 가늠한 황신이 눈을 감고 청력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화르륵.
횃불이 혀를 날름거리는 소리.
찌르르.
밤벌레.
그리고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의 목소리.
그의 귓가에 와 닿는 수많은 소리를 구분하고 또 구분해 자신이 필요한 소리만 찾아야 했다.
그리고 찾았다.
자신들이 쫓아왔던 천력의 고성이 똑똑히 들려왔다.
하나 제대로 듣기에는 아직 먼 감이 있었다.
대화를 구분할 수 있는 곳까지는 가야만 했다.
한차례 주변을 살핀 황신이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빠르게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