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490
490화
“하악, 하악…….”
황신은 거친 숨을 내뱉으며 지친 눈동자로 주위를 노려보았다.
시간이 갈수록 포위망이 촘촘해지고 있었다.
퇴로가 정해진 것은 도주하는 이에게 좋지 못했다.
다른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었다.
숨어든 그를 알아챈 적들은 곧바로 외부로 향하는 입구부터 막은 뒤 짐승을 몰듯이 압박했다.
은신술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그였다.
평소라면 그들의 옆자리에 서서 이목을 속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피를 잔뜩 뒤집어쓴 데다 내력마저 달리는 지금의 상황에서 은신에 내공을 투자하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이제부터는 남은 내공을 모조리 도주에만 쏟아붓는다.
적과 싸우다 죽는 것은 무인에게 있어 그리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적의 의도를 진무에게 알리는 것이 그 자신의 명예보다 중요했다.
그가 고개를 쳐들었다.
분지를 꽃잎처럼 둘러싼 절벽.
너무 높았다.
와중에 안쪽으로 휘어진 형태를 가지고 있어 내공이 충분했어도 오르기 힘들었을 터였다.
저런 건 개천주님 정도는 되어야 기어오르겠지.
결국 통로를 향해 가는 수밖에 없다.
막아선 적은 어떻게든 뚫는다.
목숨을 잃는 한이 있어도 자신이 알아낸 정보만큼은 반드시 전하리라. 그는 굳게 다짐했다.
“여기 있다!”
“놈이 지쳤다!”
“지금이라면 잡을 수 있다!”
“…….”
몇 놈의 외침에 기세가 오른 적들이 더욱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지쳐?
전방을 노려보던 황신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지쳤다. 염라대왕이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게, 기분이 아주 엿 같다.
씨발, 근데 그게 뭐. 언제는 편하게 싸웠는 줄 알어?
말석이라고 해도 전직 은위단의 무인이었다.
하오문 소속이자 사패천주 직속의 정보기관.
은위단은 임무의 특성상 늘 위험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어 있었다.
사패천주가 명령하면 정무맹의 한가운데 숨어들어서 검성의 속옷 색깔까지 알아내 와야 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으니까.
그래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상황을 만들고 그 안에서 벗어나는 훈련을 수없이 해 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황신은 진무의 개인 호위이기까지 했다.
말이 좋아 호위지, 개천주 수발드는 게 얼마나 일일이 목숨의 위기인지 알기는 하냐?
내가, 어? 뒈지기 싫어서 손으로 나무를 파내 배를 만든 적도 있어.
그것도 고작 일각도 안 되는 시간 만에.
지금 생각해도 개떡 같지만…… 아무튼.
소동보, 각출, 괴충, 능서현.
그 쟁쟁한 놈들을 제치고 황신과 아이들이라는 수식어를 쟁취한 것이 나다, 이거야.
사패천에 마교에, 그 승산 없는 싸움을 승리로 이끈 개천주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던 내가 고작 이거 포위됐다고 포기할 것 같냐?
나, 황신. 포기를 모르는 남자.
죽더라도 임무는 완수한다.
황신은 가슴을 부풀렸다가 깊이 숨을 내뱉으며 비수를 쥔 손에 힘을 더했다.
이제부터 은신은 없다.
정면 돌파다.
남은 내공으로 자신이 가진 최고의 속도를 발휘했을 때, 버틸 수 있는 시간은 대략 이각.
가장 가까운 통로는 서쪽이다.
적들의 머리를 밟고 도망치는 것은 좋지 않다.
한 번에 먼 거리를 도약할 수는 있으나 위치가 고스란히 노출되어 화살의 표적이 되기 쉬웠다.
그렇다면?
황신은 자신의 주변을 빼곡하게 채운 이들의 다리 사이를 쳐다보았다.
지금 자신을 가로막은 놈들은 수는 많지만 고수라 부르기에는 부족하다.
저런 놈들은 항상 하체가 약하지.
눈빛에 스산함을 가득히 머금은 황신이 비수를 역으로 쥐고 자세를 낮췄다.
꾸우우우.
대지를 디딘 발이 지면을 묵직하게 파고들고, 굽힌 허벅지와 종아리 근육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남은 모든 내공을 용천혈에 때려 박는다.
파아앙!
황신의 몸이 적들의 전면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어헉!”
놀란 적이 다급히 검을 휘두르는 순간, 황신의 신형이 아래로 푹 꺼졌다.
스걱.
“크악!”
비명과 함께 주저앉는 적들의 숲을 황신이 뱀처럼 파고들었다.
많은 힘은 필요하지 않았다.
노린 곳은 무릎 뒤와 발목의 힘줄.
“놈이 다리를 노린다! 하체를…… 크악!”
주위에 경고하던 놈이 중심을 잃고 힘없이 허물어졌다.
조심한다고 피할 수 있으면 내가 황신이 아니라 각출이다.
이미 놈들의 포위망 깊숙이 들어왔다.
저들이 준비를 갖추기 전에 뚫고 나간다.
비수의 움직임은 더욱 간결하고 날카로워지고, 적들의 틈을 누비는 황신의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이노옴!”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적이 갑자기 공격의 방향을 바꾸어 지면을 향해 무기를 수직으로 꽂아 넣었다.
취리릭! 파가각!
“……!”
무기가 지면에 틀어박히는 것과 동시에 황신이 사라지더니, 별안간 불쑥 솟구쳤다.
누군가가 잔혹하게 웃는 그의 입 모양을 읽었다.
멍청이들.
퓻, 퓨퓻.
“꺼억!”
순식간에 서너 명의 무인이 제 목을 양손으로 움켜쥐고 비틀거렸다.
적의 공격이 모조리 아래에 쏠리자 이번에는 역으로 그들의 목을 노린 것이다.
상대에 맞춰 적절히 공격 방향을 바꾸어 쓰러뜨리며, 황신은 계속해서 통로를 향해 내달렸다.
적들은 빽빽했고, 속도는 평소보다 느렸지만 차근히 나아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모든 공격을 피한 것은 아니었다.
추아악!
적의 무기에 걸려 옷자락이 찢어지고 피가 튀었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멈춘 즉시 죽을 것임을 알기에 치명상만 피한 황신은 상처가 더해지고 더해짐에도 달리고 또 달렸다.
이제 곧 서측의 통로다.
앞으로 조금만 더 가면 된……?
순간 막대한 기의 파동이 측면에서 느껴졌다.
황신은 다급히 몸을 비틀었다.
퍼어엉! 콰드득!
“……?”
바닥에 몸을 굴렸다 일어난 그가 본 광경은 제가 있던 곳에 서 있던 적들이 피떡이 되어 쓰러지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주위에서 나타난…… 천력의 수하들.
망할, 벌써 뒤쫓아 온 것인가?
“쥐새끼 같은 놈.”
“…….”
수좌로 보이는 자가 통성명도 없이 황신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후우웅! 퍼엉!
“크윽!”
주먹이 날아오는 궤도를 계산해 피하면서 비수로 목을 노리려던 황신이 비틀거리며 물러나 신음을 흘렸다.
주륵.
귀가 찢어져 흐른 피가 볼을 축축하게 적셨다.
그냥 주먹이 아니라고?
극점에 다다르는 순간 주먹에 실렸던 기운이 폭발하며 귀를 찢었다.
적의 공격을 최소한으로 움직여 피한 것이 독이 된 것이다.
“크크크, 미친놈. 우리 천력대의 무공을 너무 우습게 보는구나.”
“…….”
어지간히 재수 없는 비웃음이었지만 열 받을 겨를이 없었다.
어느새 홍건들이 주변으로 물러나 포위망을 갖추고, 천력대의 무인들이 통로로 향하는 황신의 앞을 막아섰다.
좋지 않다.
느껴지는 기운으로 봤을 때, 그들의 경지는 대략 의기에서 탄기.
더욱이 대장으로 보이는 여유만만한 놈의 무위는 의기를 상회한다.
빠져나가려면 무조건 저놈을 죽여야 하는데…….
“후우…….”
거칠어진 호흡을 고르며 비수를 움켜쥐고 자세를 취하던 황신이 갑자기 비틀거렸다.
어? 이게 무슨?
다리가 풀린 것도 아닌데 갑자기 머리가 빙빙 돌고, 몸이 비틀거렸다.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다.
설마 조금 전 공격에 귀를 다쳐서 균형 감각을 잃은 건가?
“뭣들 하느냐! 놈을 생포해라!”
“…….”
황신이 제게 닥친 상황에 채 적응하기도 전에 천력대의 무인들이 공격을 시작했다.
하나도 버거운데 수없이 많은 주먹과 발이 날아왔다.
균형을 제대로 잡을 수 없는 황신에게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황신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닥을 구르며 비수를 휘둘렀다.
슈우욱!
하지만 닿지 않았다.
천력대 무인들의 경지가 홍건들에 비해 월등하게 높은 것도 있었으나 그보다는 몸이 둔해지고, 거리 계산이 제대로 되지 않는 탓이었다.
퍼어억!
헛손질해 버린 황신의 복부에 진한 충격이 느껴진다.
“커억!”
튕겨 나간 황신은 속이 뒤집히는 고통을 애써 참으며 비수를 휘둘렀다.
아직은 길은 있다.
놈은 자신을 생포하려 한다.
그러니 주먹이 둔해질 수밖에 없다.
통로에서 멀어지긴 하겠지만 일단 이곳을 벗어난 뒤에…….
곧장 몸을 돌려 뛰려던 황신의 몸에 재차 둔탁한 충격이 가해졌다.
쩌어억!
공격에 격중당한 황신의 몸이 땅바닥에 패대기쳐졌다가 튕겨 가득히 쌓인 상자에 처박혔다.
“크으…….”
등뼈가 아스러지는 듯한 충격으로 일그러진 눈동자에 퇴로를 차단하고 고개를 살짝 쳐든 채 비웃는 거구의 사내가 들어왔다.
망할…….
어찌 모르겠는가?
“천력의…… 무향.”
“……호오? 나를 알아?”
황신의 중얼거림에 천력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주 거창한 쥐새끼군. 고작 한 놈이 본진을 이리 휘둘러 놓다니.”
“…….”
“모두 물러나라! 괜히 얼쩡거리지 말고.”
천력의 명령에 홍건과 천력대의 무인들이 강기가 만들어 낼 수 있는 폭발의 범위에서 물러났다.
“보아하니 상처가 많은 것 같은데 그만 포기하지?”
듣기 싫은 음성에 황신이 얼굴을 찡그리며 비수를 역으로 들어 올렸다.
“제법이군. 끝까지 포기하지 않다니. 다 죽어 가는 놈과 싸우는 것은 별로지만, 이번만큼은 특별히 상대해 주마.”
“하아, 나 참. 뭔 개똥 같은 소릴 길게도 짖어 대고 지랄이야.”
“……뭐?”
“생긴 건 꼭 바닥에 뭉갠 멧돼지 상판 같은 게 처웃기는, 씨발. 야, 어디서 사람 같지도 않은 게 사람 흉내를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별로인 김에 특별히 뒈져 볼래?”
“…….”
외모 비하에 인신공격까지 탑재한 욕설에 천력이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하! 이런 하룻강아지 같은 놈을 봤나?”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천력을 똑바로 마주 보고 씩 웃으며, 황신은 앉은 채로 손을 까딱거렸다.
“이런 새끼들이 꼭 혓바닥은 더럽게 길어요. 잘라 줘? 혀짤배기소리 한번 내 볼래?”
“…….”
“드두와, 드두와! 이 때끼야!”
눈을 흉흉히 뜨고 입을 나불거리는 모습에 천력은 황당함을 금치 못하고 머뭇거렸다.
온몸에 상처가 그득해 당장 움직일 힘도 없어 보이는 게, 주둥이는 천군만마를 상대로 호령해도 모자라 보이지 않는다.
와중에 혀짤배기소리로 도발까지?
“재미있는 놈이군. 하나 죽여서야 되겠는가? 반드시 잡아서 뒤를 캘 것이다.”
“…….”
천력이 깍지를 끼고 주먹을 우두둑거리면서 다가오는 모습에 황신이 비수를 고쳐 쥐었다.
사실 좀 전의 도발은 방심이라는 틈이라도 만들어 볼까 해서 부린 허세였다.
상대는 강기의 무인.
암습이라면 몰라도 정면 승부에서는 전력을 다해도 상대가 될까 말까였다.
놈이 포위망을 뒤로 물린 덕에 멀긴 해도 통로를 향하는 길이 생긴 건 다행이지만…….
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젠장, 찰나의 틈이라도 있다면 좋겠는데.
타들어 가는 속내를 감춘 황신이 다가오는 천력을 향해 비수를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쐐애애액!
대기를 꿰뚫는 소음이 귀를 찢어지도록 울렸다.
순간적으로 고개를 쳐든 황신의 눈에 무언가 떨어져 내리는 물체가 보였다.
저건?
드드드, 쿠아아아앙!
이어진 폭발에 대지가 잘게 진동했다.
천주님?
설마 소란이 생긴 것을 확인하고 자신을 구하기 위해 직접 뛰어든 건가?
저 높디높은 절벽을 뛰어내려서?
황신의 얼굴에 놀람과 반가움, 감동이 동시에 어렸다.
그 어떤 괴물보다 포악한 용이 지상에 강림했다.
그리고 생겼다.
개천주가 분명한 인물이 일으킨 소란에 천력의 관심이 돌아간 찰나의 틈이.
천재일우의 기회가.
사지에서 살아날 구명줄이!
꾸우, 파아앙!
스가가각!
황신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곧장 천력을 향해 쏘아지며 목을 노렸다.
천력이 곧바로 되돌린 고개를 옆으로 꺾었다.
찌이익!
황신의 송곳이 천력의 목덜미를 찢었다.
아깝다.
한 치만 깊었어도 지옥에 모가지를 배달해 줄 수 있었을 텐데.
“이 개자식이!”
쓰라림을 느낌과 동시에 천력의 주먹이 황신을 향해 휘둘러졌다.
후우우웅!
하지만 그의 주먹은 힘차게 허공을 갈랐다.
“……!”
황신이 다음 공격을 날리지 않고 냅다 튄 탓이었다.
“이런 쌍!”
목덜미에 생긴 상처로 상의가 순식간에 피로 물든 천력이 쌍심지를 돋웠다.
“놈을 쫓아라!”
분기탱천한 명에 천력대의 무인들이 황신을 뒤쫓기 시작했다.
황신이 향하는 곳은 통로 쪽이 아니었다.
폭발이 일어난 곳.
개천주가 강림하신 그곳.
그곳이 그의 살길이었다.
하지만 힘이 빠진다.
내력이 한계에 도달하자 속도가 떨어졌다.
조금만, 조금만 더.
그야말로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짠 황신은 드디어 사방을 폐허로 만들어 놓으며 시신 탑을 쌓는 진무를 발견했다.
“황신?”
누구보다 반가운 그의 목소리가 명확하게 귀를 파고들자마자 황신의 다리에 힘이 빠졌다.
그 위로 천력대의 무인들의 주먹이 우르르 쏟아졌다.
황신은 진무를 바라보며 사력을 다해 눈빛으로 애원했다.
천주님! 살려 줘요!
눈빛이 닿은 것일까?
진무의 손이 휘둘러지는 순간 맹렬하게 응축된 검은 구체가 쏘아져 나왔다.
황신은 눈을 질끈 감으며 최후의 힘을 짜내 바닥에 냅다 엎드렸다.
슈우우, 콰드득 콰아아앙!
거대한 폭발이 황신을 공격하던 천력대의 무인들을 집어삼키고,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졌다.
후두둑.
시신을 대신해 쏟아지는 살점들과 피의 비.
그리고 똬리를 틀듯 앞을 가로막고 선 묵룡이 황신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많이 상했구나. 황신.”
“…….”
무미건조한 감상과는 반대로 사방으로 퍼지는 그의 존재감이 대기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그의 눈빛을 본 황신은 대번에 깨달았다.
개천주가 화가 났다.
그것도 아주 많이…….
자신에게 향했을 때는 너무도 두려운 분노였으나 적들을 향했을 때는 든든하기 그지없는 분노였다.
황신은 최대한 가련한 표정을 지으며 슬며시 손가락을 들어 적을 가리켰다.
천주님. 쟤들이요, 단체로 저를 괴롭혔어요.
여기 막 이렇게, 베고, 때리고…… 귀때기도 찢었어요.
혼내 주세요, 네?
그의 의도가 먹혔을까?
한층 살벌해진 진무의 흉흉한 눈빛이 적들을 향했다.
황신은 속으로 음흉하게 웃었다.
니들은 이제 다 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