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491
491화
궁은 어째서 용의 분노를 진노(震怒)라 부르는지 알 것 같았다.
마치 천지에 벼락이 떨어지는 듯했고, 무엇보다 무자비했다.
걸음 한 번에 그의 전면에 있던 이들이 폭발하는 지면과 함께 터져 나갔고, 손짓 한 번에 십여 장 안의 모든 것이 찢겨 나갔다.
그리고 그가 행동을 멈추었을 때, 그를 중심으로 십여 장의 대지 안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적들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많은 수로 그 둘을 포위하고 있으면서도 감히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용, 진무가 만들어 놓은 지옥 같은 참상 때문이었다.
그가 서 있는 자리는 오롯이 그의 영역이었다.
그 경계 안으로 발을 들인다는 행위 자체가 신성한 무언가를 침해하는 듯한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게 했다.
스윽.
여유롭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가볍게 내딛는 걸음에 맹렬한 살기가 휘몰아쳤다.
적들은 흠칫 놀라며 몸을 물리기 바빴다.
그것은 뒤이어 쫓아온 천력대의 무인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고작 한 번의 손짓으로 황신을 쫓아갔던 무인들이 형체도 남기지 못하고 갈가리 찢기는 꼴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본 뒤였다.
그들의 육신은 진무의 발아래 육편이 되어 짓밟혔고, 피는 바닥을 검붉게 물들였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인간이 아닌 듯 강한 존재.
그것이 한없는 두려움으로 변해 그들의 심장을 무겁게 짓눌렀다.
“후우…….”
진무는 긴 숨을 내쉬었다.
황신이 다친 것에 대한 분노는 대충 가셨다.
뭐 뒈진 것도 아니고, 황신 녀석이 내 말을 어기고 너무 깊이 들어간 탓도 있으니까.
그는 감히 다가서지도 못하고 거리를 벌리는 적들을 오연하게 바라보았다.
참으로 희한한 적이다.
그의 주위를 에워싼 것은 백건을 쓴 천력대의 무인만이 아니었다.
무공을 조금이라도 맛본 홍건, 그리고 그보다 많은 수의 무공을 모르는 홍건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기 든 손을 달달 떨며 연신 입에 고인 침을 삼켜 댔다.
결속력이 약하고 실전 경험이 부족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직접 본 적들의 본진은 정말이지 말도 안 나올 정도로 한심했다.
이런 힘도 없는 백성으로 중원을 어찌해 보려 했다니.
“천주님.”
“…….”
“놈들이 주력을 빼돌려 하북으로 갔습니다.”
당장에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깊은 상처를 입었음에도 제 역할을 다하는 황신.
쉬라 말하고 싶었지만, 진무는 일단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 나름의 직업의식이라는 것도 있을 것이고, 어차피 여유도 있지 않은가?
적들은 지금 겁에 질려 자신의 근처에 다가서지도 못하고 있으니.
“하북으로?”
“예. 이곳에 남은 것은 천력의 수하들과 일만의 홍건, 나머진 대부분이 그들을 따라 중원으로 온 백성들입니다.”
거친 호흡을 몰아쉬면서도 자신이 알아낸 바를 말하는 황신의 모습에 진무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랬구나.
어쩐지 좌군이 너무 허술하다 했더니.
“듣기로 북쪽 전역에 공격 명령이 내려진 모양입니다.”
“…….”
진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북쪽에서 공격을 감행하는 시점에서 본진의 주력을 빼돌려 하북의 측면을 친다면?
망할 대궁주 놈.
양동을 노린 것인가?
그런데 어째서 천력을 복귀시킨 것이지? 이곳을 방비하기 위해?
아니다. 그것으로는 복귀의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차라리 하북의 북쪽을 공격하도록 해야 했었다.
“그리고…… 대동을 막고 있는 맹부라는 자를 복귀시켰다 했습니다.”
“대동을 사수하는 자를?”
“예.”
“…….”
진무는 적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눈을 가늘게 좁혔다.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수장이나 다름없는 자들 본진으로 후퇴시킨다고?
망할 놈들. 머리 복잡하게시리 더럽게 잡스러운 수를 쓰고 있다.
대체 놈이 원하는 것이 무엇……?
순간 진무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설마? 정무맹을 유인하기 위해서?
그래, 그렇다면 말이 된다.
찰나의 발상이었지만, 그로 인해서 뭔가 실마리가 풀리는 것만 같았다.
지금의 형세.
마교는 신강에 발이 묶여 있고, 사패천은 하북에 잡혀 있다.
놈들이 움직인 것을 알면 정무맹이 병력을 꺾어 곧장 놈들의 뒤를 칠 것임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맹부는 미끼다.
승리를 던져 주고 본진으로 유인해서 저들이 하북을 치는 동안 시간을 벌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력이라는 놈은?
순간 머리가 확 맑아졌다.
“하, 이거 봐라?”
“……?”
난데없는 혼잣말에 황신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설명은 없었다.
어쨌거나 진무는 이제야 천력을 본진으로 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 역시 미끼였다.
하북 북쪽에 배치한 무인대가 공격받았고, 만궁과 응조가 죽었다는 사실은 붕어 대가리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알았을 터다.
놈은 천력이라는 미끼를 이용해서 자신을 꾀어낸 것이다.
“그 뻔한 수작을 덥석 물다니. 이런 빌어먹을.”
비열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자신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대궁주라는 놈이 미끼를 쓴 이유는 간단하리라.
걸리면 천력을 쫓아와서 비어 버린 본진에서 시간을 허비할 터였고, 걸리지 않는다 해도 하북의 북쪽에서 싸우느라 양동은 생각도 못 했겠지.
결국, 결론은 한 가지.
이곳을 빠져나가서 하북으로 향해야만 한다.
하지만 아직 시간은 충분하다.
놈이 무슨 수를 쓴다 해도 자금성은 절대 무너뜨릴 수 없었다.
대궁주라는 놈은 애초에 승산 없는 전투를 시작했다.
놈들이 백년대계라 불렀던 그 계획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어그러져 있었다.
아니, 붕괴에 가까웠다.
만약 놈이 두 가지 선결 조건을 충족했다면 성공했을 것이다.
첫째, 일단 무림이 그의 수중에 들어가 있어야만 했었다.
그래야 무림의 힘까지 얹어서 중원을 공격할 수 있었을 테니까.
둘째, 화양이, 아니 귀비를 통해 황실과 군부를 완벽하게 장악했어야만 했다.
이 나라에 비상령으로 동원할 수 있는 병력만 백만이다.
평시 운용되는 병력만 해도 성마다 몇만에 달한다.
비록 귀비로 인해 정국이 안정되지 못한 상태에서 태자가 권력을 잡았다고 해도, 또한 중원 전역에 퍼진 병력 중 외세에 대한 경계를 제외한 이들을 동원하는 것이 꽤 오래 걸렸다고 해도.
고작 무인 삼만 정도로 나라를 무너뜨리겠다고?
미친 새끼, 꿈이 커도 너무 컸다.
그렇게 무너질 나라였으면 애초에 내가 다 해 먹었지.
물론 흑살서의 독에 대한 대비가 없었다면 가능성이라도 엿볼 수 있었겠지만 흑살서의 독은 이미 해독약이 만들어져 유명무실해진 상황.
즉, 두 가지 선결 조건을 이루지 못한 대궁주는 무조건 패배한다.
하북에 대한 양동?
당장에 황신을 통해 전서구 한 장 날리면 끝이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얼마나 적은 피해로 승리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놈이 그런 사실을 왜 모르지?
자신이 중심에 있기에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것인가?
당장 드러난 게 하나같이 너무나 멍청하다 보니 오히려 대궁주라는 놈의 생각을 읽을 수가 없었다.
패배가 분명할 전투에 악착같이 나선 그 저의가 진무의 머리를 더욱 복잡하게 했다.
그나저나 어찌한다.
적의 본진에서 대궁주라도 만날 줄 알았건만 쏙 빠진 데다, 적들은 저 모양이니.
자신을 향해 세워진 창검의 끝이 위협적이기라도 해야 긴장이 되지.
이거 원 애들 골목 싸움도 아니고.
“신아.”
“예?”
“운기라도 해라. 고만 할딱거리고.”
“……예? 아! 알겠습니다.”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음에도 황신의 답은 빨랐다.
누가 있어서 진무를 의심한단 말인가?
그의 말대로 자신은 그저 운기를 해서 내력을 회복하기만 하면 됐다. 나머지는 진무가 알아서 다 할 터였다.
황신이 피를 지혈시키려 몇 군데 혈도를 누르고 좌정하자 진무가 적을 살벌하게 바라보았다.
힘없는 자들.
아마 자신들이 그저 미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도, 제 주인에게 버려졌다는 사실조차도 모를 것이다.
아까는 황신이 다쳐서 너무 화가 난 탓에 잔혹한 면이 없잖아 있었다.
눈앞의 적은 너무나 약하고 가련했다.
또한 전부 죽이기에는 너무 많은 수였다.
백성들은 살려 주기로 한 성군 꼬맹이와의 약속도 있지 않은가?
그래, 현실을 알려 준 뒤 투항하는 놈들은 받아들이고, 끝까지 덤비는 놈들만 죽이자.
“흐흡…….”
모두가 들릴 정도로 외치려 진무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려는 순간이었다.
“네놈은 뭐냐?”
“…….”
저 천력인지 뭔지 하는 놈이 나타나는 바람에 김이 새 버렸다.
그런데 참, 빨리도 왔다.
왔어도 벌써 왔었어야지.
실력을 알 수 없는 대궁주라면 몰라도 고작 강기 언저리에 있는 저런 놈과는 싸울 마음도 들지 않았다.
“하아.”
진무가 외치려고 들이마셨던 숨을 고스란히 한숨으로 내뱉자 그를 노려보던 천력의 눈동자에 놀람이 어렸다.
“네, 네놈은!”
반응이 천편일률적이라 이젠 무감각해진다.
잘게 떨리는 눈동자와 긴장한 표정, 그리고 무게 중심이 뒤로 쏠린 듯 살짝 물러나는 몸.
“무당지검!”
그럴 줄 알았다.
다음 말은 분명 ‘네놈이 어떻게!’겠지.
“네, 네놈이 어찌?”
“…….”
개성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놈들 같으니.
식상하다, 이놈아.
매번 뒤늦게 나타나서 똑같은 반응이라니. 어디서 단체로 교육이라도 받고 오는 건가?
됐다, 됐어.
어차피 궁의 주력이라는 놈들만 죽일 생각이었다.
무인 자존심에 겁주면 떨어질 쭉정이들을 상대하고 싶지는 않았다.
차라리 이놈을 죽여 본을 보이자.
믿고 따르는 수좌가 힘없이 죽어 버리는 모습을 보고 나면 그들의 결정이 훨씬 빨라질 테니까.
콰아아앙!
“길을 뚫어라! 황신을 구하라!”
진무가 천력에게 다가가려는 그때, 능서현과 천우명을 앞세운 철검단이 강렬한 폭음과 함께 분지의 안쪽으로 뛰어들자 주변에서 진무를 포위하고 있던 적들이 웅성거렸다.
“이, 이런……. 네놈 설마? 저 입만 산 놈을 미끼로 하여 안을 휘저은 틈에 본진을 노린 것인가?”
“…….”
철검단의 등장에 천력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개소리에 가까운 추측을 내놓았다.
하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겠네, 지금 상황이면.
근데 너무 뻔하지 않냐?
덩치 큰 놈이 머리가 나쁘다는 속설은……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당장 우명이나 청우만 봐도…….
어쨌든 그런 전략 따윈 애초에 세우지 않았다.
내가 원한 것은 대궁주와 궁의 핵심 전력이었지 이딴 힘없는 백성들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아무렴 내가 우리 신이를 미끼로 썼을까?
각출이라면 몰라도.
“망할!”
“…….”
천력의 일그러진 얼굴을 잠시 응시하던 진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깍지를 낀 손가락을 우두둑거렸다.
딱 우리 신이 몸에 남은 상처의 두 배 정도만 맞고 뒈져라.
진무가 다시금 천력을 향해 다가서는 그 순간……!
콰아아앙!
또다시 폭음이 울렸다.
이런 젠장, 대체 오늘 뭔 날이야?
뭘 하려고만 하면 자꾸 방해자들이 끼어들어?
짜증이 울컥 치민 진무가 고개를 돌려 폭음이 울린 쪽을 째려보았다.
어떤 새끼가?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남쪽 입구를 향해 미친 듯이 뛰어드는 외팔이와 도끼 든 무인들.
무언가에 쫓기듯이 겁에 질린 표정을 한 그들이 안으로 뛰어드는 순간.
슈아아악!
한 줄기 섬광이 날아와 그의 등 어림을 꿰뚫었다.
털썩.
달리던 그대로 꼬꾸라지는 외팔이……는 그렇다 치고, 저 섬광은?
그리고 외팔이를 꿰뚫고 허공에 둥둥 떠올라 다음 먹잇감을 찾는 검이라면?
“이기어……검성?”
진무의 예상을 확인시켜 주듯 철지량이 엄청난 속도로 분지 안으로 난입했다.
그 뒤를 이어 달려오는 용봉관의 무인들까지.
젠장, 역시나 저들도 미끼를 물어 버린 모양이군.
뭐, 어쩔 수 없지.
이놈을 죽이고 시급히 분지 안을 정리한 뒤, 검성과 함께 하북으로 가야겠다.
진무는 이번에야말로 천력을 향해 살벌한 기세를 뿌리며 걸어갔다.
* * *
“부궁주님! 검성입니다!”
“…….”
분지의 외곽을 둘러싼 돌산의 남쪽 지점.
삐죽 솟아있는 돌들 사이에서 분지를 천리경으로 감시하던 무인의 외침에 중년의 사내, 천립이 매서운 눈빛을 발했다.
비록 정무맹 전체를 끌어들이지는 못했으나 먼저 뛰어든 것은 무당지검과 철검단이었고, 후에 뛰어든 것은 검성과 정무맹의 무인 일부였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중원을 이끄는 자, 그 밑에서 정무맹을 대표하는 자.
그 둘의 죽음으로도 적들은 심대한 타격을 입을 것이다.
미끼를 물고 사지로 걸어 들어왔으니, 대궁주의 계략을 실현시킬 때가 온 것이다.
“폭화멸진을 가동한다.”
“예!”
이곳에서 모두 죽을 것이다.
나지막한 명령에 무인이 커다란 각적(角笛)을 힘껏 불었다.
뿌우우우!
길게 울려 퍼져 메아리를 만드는 각적의 소리에 이어 분지의 여덟 통로에서 화광이 치솟았다.
콰아아앙!
거대한 폭음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