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497
497화
두두두.
질주하는 발걸음에 대지가 진동했다.
탁, 슈우우.
대열을 이탈한 사내가 거칠게 지면을 밟고 도약해 한 마리 비응(飛鷹)과 같은 몸짓으로 날아들어 전장에 착지했다.
쿠우웅.
정확히 서로를 향해 다가서던 두 무리의 중간에 내려선 사내의 족적이 땅에 깊이 새겨졌다.
쉬이이이.
묵직한 충격에 일어난 먼지가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후우…….”
내려앉은 모습 그대로 땅을 짚고 있던 사내가 가쁜 숨을 한 번에 몰아 내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난데없이 전장에 난입해 이마의 땀을 훔치는 그가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도는 전장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기 때문일까?
모두가 멍한 표정으로 정지한 듯 멈춰서 사내를 바라보았다.
다가서던 한무화도, 마주 다가가던 정무맹의 무인들과 황군의 장수들도.
그리고 그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두 진영 사이의 분위기가 극명하게 갈렸다.
나타난 사내, 진무.
그의 모습에 막아서는 이들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참을 수 없는 반가움이었고, 한무화의 얼굴은 신경질적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무당지검…….”
그 얼굴을 모를 리가 없었다.
오래전부터 궁의 숙적이나 다름없는 그였으니까.
한데 폭화멸진이 실패했단 말인가?
지금에서야 나타난 것을 보면 분명 천립이라는 미끼를 물고 냉산에 들어갔었음이 분명할 것인데.
절대로 살아 나올 수 없다 여긴 죽음의 진에서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히 돌아온 그의 모습에 당황한 한무화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허공을 날아온 그가 대지를 짓밟는 순간, 사방을 압박하던 한무화의 살기와 기세가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다행이네. 아직 안 늦었어.”
“…….”
모두가 바라보고 있는 와중에 호흡을 고른 진무가 새까만 검을 어깨에 턱 걸친 채 짝다리를 짚으며 해맑게 웃었다.
냉산, 혹은 귀수라 불리는 곳을 떠난 진무는 하북을 향해 내리 육백 리를 쉬지 않고 달렸다.
혹시나 늦을까 봐서.
막 도착했더니 때마침 두 세력이 대치하고 있었다.
서로를 향해 다가서는 모습을 보고 막아야 한다는 일념하에 다른 이들보다 미리 몸을 날린 것이다.
그리고, 멈춰서 버린 전장에 진무를 따라온 천우명 등이 철검단과 함께 대열에 합류했다.
“사숙!”
“……?”
순간 진무의 귓가에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하나.
뭐야? 무당에 처박혀 있으라고 했더니 니가 왜 여기 있어?
반가움을 못 이기고 헐레벌떡 뛰어온 탓에 흐트러진 상의 안쪽으로 칭칭 동여맨 붕대가 보이자 진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몸은 또 왜 이래?
“넌 꼬라지가 왜 그 모양이냐?”
“아, 그, 그게…….”
진무의 핀잔에 청상이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진무야! 이놈아!”
청상의 답을 들을 새도 없이 양소방과 등여평, 벽운영이 반가운 얼굴로 인상을 구긴 진무를 에워쌌다.
이 거지 노예 영감이 오랜만에 봐서는 어디다 대고 이놈 저놈이야? 수염을 죄 뽑아 버릴라.
그나저나 다들 어디 갔나 했더니 검성을 안 따라오고 여기 와 있었던 모양이네.
제갈 얌생이 놈이 저들의 양동작전을 눈치채고 뒤를 치는 대신 앞을 막기로 한 건가?
때마침 군병들도 잔뜩 와 있는 모습을 보니 제대로 방어진이 갖추어진 모양이었다.
“진무 도장.”
“…….”
무인들의 뒤로 다가와 인사하는 태자의 모습에 진무가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이건 또 뭘까?
왜 있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자꾸만 모습을 보이는 걸까?
오랜만에 만난다고 다들 모여서 성대한 환영식이라도 준비한 것도 아닐 텐데.
뭐가 이리 초대 손님이 많단 말인가?
“아니 너…… 태자 전하께선 또 왜 여기 있습니까?”
평소대로 반말하려 했던 진무가 주위의 눈을 의식해 존대로 따져 물었다.
“저들이 하북을 공격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소. 그대가 저들과의 대화에 실패한 듯하여…….”
“…….”
태자의 말에 진무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대화? 그딴 건 나눠 보지도 못했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제 놈이 직접 설득을 하겠다고 직접 전장에 나서?
이놈은 제 위치를 제대로 알기나 하는 건가?
만약에 그러다 뒈지면?
나와 약속한 보상은 어찌하려고 기어 나왔단 말인가?
놈들이 오면 꼭꼭 숨어 있을 생각을 해야지.
내 참, 성군도 이런 미친 성군이 따로 없네.
마음 같아서는 한 대 쥐어박아 버리고 싶었지만, 역시나 보는 눈이 많았다.
대책 없이 무모한 태자를 한심하게 꼬나보던 진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또 다른 인물들이 멀리 방어선에서 뛰어왔다.
명현과 무당의 장로들이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긴, 청상이 여기 있는데 무당의 도사들이 없으면 이상한 일이겠지.
한데 어째 다들 상태가 좋지 못해 보였다.
청상 만큼은 아니었으나 모두가 상처를 입고 있었다.
“설마 다들 싸우다 다치……신 건 아니죠?”
“허허, 그리되었다.”
“…….”
그리되었어?
그게 지금 할 말이냐?
그토록 나오지 말라고 했는데, 정말이지 들어 처먹을 생각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고집스러운 도사 놈들 같으니…….
그래도 스승님께서 없는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진무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는데, 명현이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청상 덕분이니라.”
“……예? 뭐가요?”
“청상이 활약해 준 덕에 이곳의 방어선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청상이 대궁주라는 자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았다면 아마 정무맹의 지원과 태자께서 황군을 끌고 오는 시간까지 버티지도 못했을 것이다.”
“…….”
명현의 말에 청상이 머쓱한 표정으로 또 머리를 긁었다.
진무가 붕대로 칭칭 감긴 청상의 상체를 쳐다보았다.
아! 그럼 지금 그 상처가?
미쳤네, 다들 아주 미쳐도 단단히 미쳤네.
앞서 진무와 싸운 네 명의 궁주와 소궁주 한승.
아직 싸워 보지는 않았으나 그들보다 훨씬 강할 놈이 바로 대궁주다.
그런데 이제 막 성강 언저리에 오른 놈이 대궁주라는 자와 맞짱을 떴다고?
아직 꽃도 피워 보지 못한 주제에?
이러라고 무당지검 시킨 게 아닌데.
황신, 청상, 태자, 그리고 무당의 말코 도사들까지.
하여간 이놈이나 저놈이나 하지 말라면 하지 말 것이지 뭘 그리 잘났다고 말을 안 듣고 지랄인지 모르겠네.
따악!
“윽!”
진무의 무시무시한 딱밤에 청상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제 이마를 움켜쥐었다.
“사숙…….”
“사숙이고 오숙이고, 넌 나중에 제대로 혼날 줄 알아.”
“…….”
“그리 누누이 일렀는데 기어 나와? 와중에 다쳐? 내 원 어이가 없어서…….”
진무가 한바탕 잔소리를 늘어놓으려다가 별안간 고개를 푹 꺾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말해 봐야 뭐할까?
망할 도사 놈들.
하여간에 정말 손이 더럽게 많이 가는 놈들이다.
이러니 예전에도 지금도 정이 안 가지.
진무는 청상에게 향했던 시선을 떼고 슬쩍 고개를 돌려 대궁주를 바라보았다.
저 새끼…… 드디어 만났네.
어찌나 보고 싶었는지.
넌 아마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것이다.
그의 시선이 매서워지자 모두가 화기애애했던 표정을 지우고 얼굴을 굳혔다.
“자네가 왔으니 이제 승산이 조금 더 생긴 셈이네.”
“옳네. 실로 엄청난 자라네. 멀리서도 느껴지는 그 오싹함이라니.”
“잠시만 대궁주라는 자를 맡아 주게. 나머진 우리가 처리하겠네.”
“저희도 돕겠습니다.”
“…….”
양소방 등등이 결의를 불태우고 천우명이 씩씩거리면서 말을 보탰다.
이 인간들은 참 한결같이 나를 모른다.
승산? 웃기는 소리.
제 능력이 안 돼서 약자들을 이용하고, 뒤에 꼭꼭 숨어서 음모나 꾸미는 놈이다.
실력이 없으니 독 같은 것을 만들어서 사용한 머저리라, 이거야.
하물며 청상 따위에게 칼침이나 맞는 놈을 상대로 내가 그딴 걸 계산해 봤을 리가 없지.
만나지 못했다면 몰라도, 내 눈앞에 둔 이상 십 할의 승률로 저 시팔 새끼가 뒈진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다 처리하긴 뭘 다 처리해요?”
“응?”
“뭐?”
“왜?”
진무의 말에 모두가 의아한 듯 눈을 깜빡였다.
멍청한 표정 짓기는.
이 싸움에 니들이 낄 자리는 없다.
자고로 전쟁의 꽃은 원래 마지막 대장전이 아니던가?
그리고 대궁주의 뒤를 가득하게 채운 수많은 홍건의 무인.
애초에 막연한 기대감을 품고 중원 침공에 손을 보탰던 놈들이다.
과거의 복수?
그딴 건 몸소 겪지 못한 자들에게는 무의미한 역사 교육에 지나지 않는다.
결속력 따위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놈들이 이미 태자의 말에 휘둘려 눈치를 살피고 있지 않은가.
대궁주라는 놈만 죽이면 그대로 무너질 것이다.
“하아, 다들 물러나서 구경이나 하시죠.”
“…….”
“뭐, 죄 죽여 버리는 건 이쪽에 계신 미래의 성군분께서 바라지도 않을 것이고……. 대궁주 놈 목만 따면 끝날 일이기도 하고.”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을 휘휘 젓고 돌아서는 뒷모습을 모두가 멀뚱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태자의 눈에는 그들이 참으로 이상했다.
진무, 그의 존재 하나로 긴장감으로 가득했던 전장이 이리도 여유로워지다니.
대체 그의 존재가 무엇이길래 모두가 저리 멍한 표정을 하고서도 신뢰가 가득 어린 눈길을 보낸단 말인가?
하지만 의문을 곱씹던 태자도 종국에는 피식 웃고 말았다.
뭐 하긴, 자신도 비슷한 것을.
그사이 진무는 홀로 대궁주를 향해 걸었다.
다른 놈들은 보이지 않았다.
진무의 눈동자에는 오직 그 한 사람만이 담겨 있었다.
그래, 궁.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양의심공부터 시작해서 사사건건 나를 방해해 왔지.
망할 야욕 덩어리 노인네.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 줄 알아?
고작 자리 하나 차지하겠다고 복수 어쩌고 하면서 이 난리를 쳐?
아, 그러고 보니 화양이를 나에게 보내서 무병장수했어야 할 나에게 팔자에도 없는 병, 아니 흑살서의 독에 중독되게 한 것도 네놈이렷다.
우명이가 불로초를 안 찾아 왔으면 꼼짝없이 죽었다.
그때 온 저승사자 놈에게 머리 가죽이 벗겨질 뻔했던 걸 생각하면…….
그리고, 니가 만들어 놓은 그 망할 놈의 살진 때문에 황신이가 귀를 다쳤다.
내가 아껴 마지않는 소음 감지기인데 말이지.
그리고 이젠 청상까지.
저거 내가 점찍은 놈들 중 하나다. 부하 이 호이자 무당지검의 후계자라고.
그런데 애를 저 지경으로 만들어 놔?
생각해 보니까 제 아들놈을 괴물로 만들어서 그 어린것들의 목숨을 빼앗게 한 적도 있었지. 그 불쌍한 애들을 말이야.
씨발, 너무 많아서 일일이 다 열거하기조차 힘들다.
말해 무엇 할까?
대궁주, 니가 품은 뜻이 무엇이든지, 어떤 무공을 익혔든 얼마나 대단한 경지를 이루었든지 상관없다.
너는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포기했고, 나를 열 받게 만든 것만으로도 죽을 이유는 충분하다.
지금까지의 일들을 되새길 때마다 점점 더 화가 치민 그의 눈빛이 깊이 가라앉고, 살기 어린 안광이 갈수록 형형해졌다.
대궁주를 향하는 진무의 걸음마다 분노가 담겨 그 족적에 새겨졌다.
쿠릉, 쿠르르릉.
대기가 비틀려 괴성을 지르고 폭풍이 몰아치는 듯이 세찬 기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그리고 점점 빨라진 걸음이 달음질로 변하더니, 이내 지면을 밟은 진무가 섬전처럼 쏘아졌다.
쐐애액!
갑작스러운 돌진에 대궁주의 뒤에 있던 흑건들이 위급을 느끼고 진무를 막아섰다.
이런 씨벌 놈들.
막아? 니들이 나를?
슈가각!
거세게 뽑혀 나온 두 자루의 검이 궤적을 교차하며 진무의 허리를 향해 휘둘러졌다.
슈우우욱!
완벽한 포물선을 그려 낸 검의 궤적이 허공을 가르며 끝자락에 닿았다.
“……!”
목표를 놓쳐 버린 두 명의 흑건이 진무의 위치를 찾아 고개를 들어 올린 순간, 솟구쳐 올랐던 진무가 회전과 동시에 가슴까지 끌어 올렸던 두 발을 흑건들의 머리를 향해 힘차게 뻗었다.
묵룡혼원공 용보, 쌍랑(雙埌).
콰아아아앙!
볼 필요도 없었다.
여기가 니들 무덤이다.
머리를 짓밟은 진무가 흑건 둘을 땅속에 파묻어 버렸다.
동시에 땅을 차고 달리는 진무를 향해 또 다른 흑건들의 공격이 날아들었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뒈지지나 않을 것인데……. 도대체 저 대궁주 놈이 무얼 약속해 주었기에 이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정말 계속해서 열 받게 한다.
참을 인(忍) 자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말이 있다.
근데 왜?
그걸 왜 참는단 말인가?
니들이 나를 몰라서 그러는 모양인데.
살인 한 번으로 그 귀찮은 세 번의 인내를 면하는 사람이 바로 나다.
한 번에 모조리 죽여 주마.
우우우웅!
진무의 주먹에 푸르른 선기가 알차게 모여들었다.
그리고 대지를 굳게 디딘 발과 함께, 푸른 강기가 힘차게 뻗어져 나갔다.
진무의 손에서 무당의 기초공이 전설의 권각술로 화했다.
무당 칠성권, 칠성발파(七星發破).
일곱 번의 발걸음이 각기 다른 방위에 놓일 때마다 휘둘러진 주먹이 허공을 때려 터트렸다.
콰아앙! 콰쾅! 쾅! 쾅!
일곱 곳에 몰려 폭발하는 선기의 모습은 마치 하늘의 별자리가 그대로 내려앉은 듯했다.
폭발이 끝나자 흔적만이 남은 그곳에 피떡이 되어 쓰러진 흑건들의 시신이 쌓였고, 진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슈우우우!
흑건들을 모조리 때려 죽인 진무가 폭발이 만든 먼지를 뚫고 대궁주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그리고 외쳤다.
그동안 만나지 못해 꾹꾹 눌러 놓고 있었던 그 한마디가 목구멍을 타고 치솟아 오르고, 개쌍욕이 사자후처럼 터져 나왔다.
“야이, 개 같은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