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499
499화
하늘을 가득 메운 먹구름으로 컴컴해진 사위를 뚫고 칙칙한 독기를 머금은 한무화의 안광이 진무를 향해 불을 뿜었다.
폭풍처럼 밀려드는 거대한 기운에 진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직 닿지도 않았건만 온몸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본래보다 강해졌으리라는 것은 짐작했지만, 자신을 상회할 정도의 기운이라니.
잘못 판단한 것인가?
“으으…….”
앙다문 입술 사이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멈추지 않는다.
태극의 힘.
가일층 짙어진 푸른 기운이 진무의 전신을 한차례 휘돌더니 손안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가 손을 뻗었다.
휘몰아치는 마기를 뚫고 들어가, 짐승처럼 달려드는 한무화의 머리에 닿았다.
턱.
우우웅!
가볍게 얹은 손 아래로 마기에 대항한 선기가 급류처럼 흘러 한무화의 뇌리를 강타했다.
콰아아앙!
멈춘다.
폭풍이 가라앉고, 쇄도하던 그의 움직임이 정지했다.
그리고 서서히 뒤로 꺾였다.
됐다.
이변은 없었다.
진무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어리는 순간이었다.
“……!”
꺾였던 고개가 제자리로 돌아오며 진무의 손을 밀어 냈다.
설마?
네놈의 원독이 이토록 강했단 말인가?
화등잔처럼 크게 뜨인 진무의 눈동자에 지옥의 악귀를 닮은 한무화의 칙칙한 눈동자가 각인되듯이 틀어박혔다.
푸욱!
“…….”
묵직한 통증에 진무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크크크, 무당 도사 놈…… 네놈은 너무나 오만하였구나. 나는 세상의 지배자다!”
“……!”
가슴뼈를 뚫고 깊숙이 박힌 그의 양 손목에 힘줄이 불거졌다.
찌지지직!
진무가 다급하게 몸을 빼 보려 했지만, 한무화는 놓아주지 않았다.
“찢어 주마!”
푸하하학!
한무화의 손이 활짝 펼쳐져 진무의 가슴을 찢었다.
이토록 허망하게…….
스르륵.
한무화의 머리에 닿았던 진무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의 몸이 허물어졌다.
털썩.
무릎을 꿇은 진무가 한마디의 말조차 내뱉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허억, 허억…….”
바닥에 쓰러져 차갑게 식어 가는 진무를 바라보는 한무화의 입가에 드디어 승리자의 미소가 떠올랐다.
이겼다.
무당지검을 죽였다.
비로소 이 전쟁을 끝내고 세상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한참을 진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한무화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태자, 정무맹의 무인들, 그리고 황군들.
놀란 눈동자와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모습들.
음습한 눈동자로 그들을 바라보며 비웃던 한무화가 차갑게 내뱉었다.
“가거라. 모조리 죽여 중원을 피로 물들여라.”
“와아아아!”
한무화의 명령에 홍건들이 떼 지어 나아갔다.
전의를 상실한 중원의 무인들은 채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고, 겁을 집어먹은 황군은 지리멸렬하였다.
전장이 피로 물들고, 사방에 중원인의 시체가 쌓였다.
그리고.
“어린 핏덩이 놈.”
“…….”
한무화가 겁에 질려 도망치지도 못하고 자신의 앞에 주저앉아 떠는 태자를 응시했다.
더 이상 대화는 필요하지 않았다.
죽어야 할 주씨의 일족 중 하나.
콰직.
들어 올린 발이 바닥에 놓였을 때, 태자는 없었다.
그저 머리를 잃어버린 핏덩이의 시체가 남았을 뿐이었다.
“크하하하하!”
미친 듯이 웃었다.
그의 앙천광소가 전장을 울리자 세상이 두려움에 떨었다.
그리고 걸었다.
당당하고 고고하게.
오랫동안 꿈꾸어 왔던 자신의 거처, 자금성을 향해서.
가로막는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찢어발긴 뒤에서야 드디어 도착했다.
이제 자신을 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모두가 엎드려 자신의 발 앞에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한무화는 몸을 꼿꼿이 세우고 걸음을 옮겼다.
뚜벅, 뚜벅, 뚜벅.
자신의 힘 앞에 무릎 꿇은 이들의 경배를 받으며 권좌를 향해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했다.
배덕한 이들의 핏줄이 아니라, 원래 자신의 것이어야 할 금빛 옥좌.
세상의 주인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
한무화는 천천히 몸을 돌려 자리에 앉아 팔걸이에 손을 올렸다.
반개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니, 모두가 자신의 앞에 다시 한번 고개를 조아렸다.
세상의 주인이 된 것이다.
이제 명을 내려야 할 때였다.
그들이 오랫동안 당해 왔던 핍박을 그대로 되돌려 주어야만 했다.
주씨의 일족을 모조리 참살하라!
그들을 도왔던 중원의 무림을 피로 물들여라!
그리 명했어야 했다.
한데 어찌하여 말이 입을 통해 나오지 않는가?
놀란 눈으로 조아린 이들을 바라보았지만, 그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째서?
의아함이 극에 치닫는 와중, 멀리 열린 문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푸른빛으로 은은히 빛나는 이가 자신을 향해 다가왔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앉은 옥좌가 몸을 칭칭 동여맨 듯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갑자기 숨이 막혔다.
내쉬어지지 않는 숨이 폐에서 맴돌아 그를 고통스럽게 했다.
저벅, 저벅, 저벅.
그리고 푸른빛 기운을 머금은 이가 자신이 걸어온 그 길을 따라 다가왔다.
자신의 눈동자에 선명하게 그려지는 저 얼굴은 분명…… 무당지검?
어떻게 된 거지?
저놈은 분명 죽었는데?
자신의 손에 가슴이 찢겨 바닥에 쓰러진 채 차갑게 식어 가고 있지 않았나?
턱.
“……?”
옥좌의 앞에 선 그가 자신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뭐야? 그 표정은? 마성에 잠식당한 채로 허황된 꿈이라도 꾸고 있나 보지?”
“……?”
진무가 낭랑한 목소리로 이죽거리는 순간, 청량한 선기가 그의 뇌리를 강타했다.
쩌어어어엉!
뇌가 흔들리고 눈앞의 풍경이 어그러지더니, 돌풍을 맞은 먼지처럼 흩어지기 시작한다.
대전을 가득 채웠던 이들의 모습이 잔상처럼 옅어져 모습을 감췄다.
도대체 어찌 된 조화란 말인가?
점점 더 커지는 눈동자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한무화가 문득 넋 나간 표정을 지었다.
자욱한 먼지와 황폐해진 전장.
홍건들이 보이고, 멀리 자신들을 가로막았던 중원의 무인들과 황군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게 대체…….”
과거로 돌아와 버린 것처럼 변해 버린 광경에, 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설마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것들이 신기루에 불과했단 말인가?
너무도 현실감 있었던 그 모두가 마성에 접어든 그의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상상이었단 말인가?
옥좌가…… 옥좌가 바로 눈앞에 있었는데…….
주륵.
문득 코 부근이 뜨끈해져 왔다.
피?
진득함을 머금은 선혈이 그의 코를 타고 흘러 바닥에 뚝뚝 떨어지더니, 귀와 입에서도 울컥거리며 새어 나왔다.
“크윽…….”
종내 눈에서마저 흐르니, 마치 피눈물을 흘리는 듯했다.
고통스럽다.
힘이 들어가지 못한 몸이 물먹은 솜처럼 축축 늘어졌다.
평생을 몸 안에 채웠던 내공이 한 올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기가 날아가는 그 순간 모조리 흩어져 버린 것이다.
“대체…… 어찌 이런 일이…….”
“이 새끼 왜 이래, 이거? 뭐? 이제 와서 불쌍한 척이라도 해 보게?”
“…….”
힘없이 들리던 한무화의 고개가 홱 당겨졌다.
꽈악.
머리카락을 힘껏 움켜쥔 진무가 그를 악귀처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 왜? 누가 너 좋으라고 마성에서 깨워 준 줄 알아?”
“…….”
“이제 시작이야.”
“…….”
“니놈의 죄를 묻자면 칠 주야 내내 패도 모자라. 그러니까 마성 따위에 허우적거리면 안 되지. 이제부터 정신 똑바로 차리고 온몸 구석구석 느껴 봐라.”
번뜩이는 송곳니, 차디찬 눈빛.
그리고 섬뜩한 말은 이내 현실적인 고통이 되어 돌아왔다.
쩌어어억!
머리를 움켜쥔 진무가 한무화의 얼굴에 거칠게 주먹을 박아 넣었다.
“커어억!”
그제야 온몸을 옥죄었던 마비가 풀린 듯, 한무화가 비명을 토했다.
“감히 황신 귀를 다치게 해?”
쩍, 쩌적! 쩍쩍!
연이은 주먹이 코뼈를 부수고 광대를 찍어 눌렀다.
“청상이 등도 다치게 하고!”
빠각! 뻑뻑뻑!
“네놈 하나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은 줄 알아?”
마성에 빠져 원정까지 끌어 올렸고, 선기로 인해 그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가 버린 한무화는 이제 힘없는 노인에 지나지 않았다.
“으어…… 으어어어!”
사무치는 고통에 한무화가 억눌린 신음을 토하며 사력을 다해 바르작대기 시작했다.
“이런 쌍! 이 새끼가 진짜!”
한무화의 발광에 머리카락을 놓쳐 버린 진무가 신경질적으로 눈을 치켜떴다.
그래, 무리하긴 했지.
놈이 하북으로 갔다는 소리를 듣고 귀수의 살진을 빠져나온 뒤에 한시도 쉬지 않고 육백 리 길을 달려온 진무였다.
숨을 고르기도 전에 대궁주라는 놈을 발견하고 미친 듯이 싸웠다.
망할 인간 같지도 않은 새끼가 세기는 왜 그리 센지.
시종일관 묵룡혼원공에 육양진기까지 모조리 뽑아 쓴 데다가, 마지막엔 놈의 마성을 잠재우기 위해서 태극의 힘까지 사용했다.
육체의 피로에 내공까지 바닥이니 손에 힘이 빠질 만도 했다.
그런데 씨발, 사람에게 손만 있겠어? 어?
“이런 빌어먹을 새끼가! 이리 안 와!”
콰직, 콱콱콱!
손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진무가 기어서 도망치는 한무화를 미친 듯이 짓밟기 시작했다.
늘 그랬듯 몸에 고통을 한 땀 한 땀 새기며 정신을 또렷하게 만드는 그의 구타였기에 더욱 고통스러웠다.
퍼억!
발길질에 채여 바닥을 뒹굴던 한무화가 또다시 필사적으로 기었다.
“……저.”
모두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말려야…….”
벽운영의 말에 태자를 비롯한 모두가 시선을 회피하며 딴청을 피웠다.
“하아…….”
조금 전, 진무가 보여 주었던 엄청난 무위를 생각하면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경외를 품어도 좋을 광경이었다.
피를 증혈시켜 원정지기까지 뽑아내 대기의 흐름마저 바꾸어 놓았던 한무화였다.
진무는 진한 독기를 줄기줄기 내뿜으며 마성에 물들어 가는 그에게 다가가 가볍게 손을 뻗었다.
경공이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가볍고 자연스러운 발걸음.
마치 깃털이 바람에 날려 가는 듯한 진무의 운신에 모두가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손안에서 뿜어진 푸른 선기가 한무화의 마성을 잠재우고 전장의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세상을 가득히 채우는 선기의 향연이라니.
마치 치열했던 전쟁이 꿈처럼 느껴질 정도의 청량감이었다.
한순간에 전장을 선계의 한 단면으로 탈바꿈시킨 그였거늘, 지금의 모습은 대체 뭐란 말인가?
뒷골목 불량배를 방불케 할 정도로 무자비하게 한무화를 후려 패는 모습은 일견 황당하기까지 했다.
하늘 아래 저렇게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 또 있을까?
“어쨌든 저 아이가 또다시 세상을 구했구만 그래. 무당은 참으로 좋은 인재를 두었네.”
양소방의 칭찬에 명현이 살포시 미소를 머금었다.
무공이 폐해졌던 명진의 어린 도동이 이리도 장하게 성장하여 무림의 영웅, 아니 중원을 구한 구국의 영웅이 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아니할까?
그리고 그 역시 보았다.
마지막에 그가 선보인 도가 무학의 정점.
이제는 무학이 아닌 선술이라 해야 마땅할 무위였다.
그야말로 진정한 무당의…….
“야, 이 씨이펄 새끼야! 거기 안 서!”
“…….”
도…….
“이런 개쌔끼가! 서랬지!”
도…….
“죽어! 요놈! 죽어라! 죽어 버려!”
필사적으로 기어 다니는 한무화를 득달같이 쫓아가서 조지는 모습이 무척 신나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이, 이젠 말려야겠는데요?”
더 지켜보다가는 도사로서의 최소한의 품위마저 의심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명현이 다급히 양소방에게 말했다.
“크험험, 그, 그래야겠구만.”
양소방이 헛기침하며 나서자 모두가 그 뒤를 따른다.
“이, 이보게 진무 도장. 이제 그만하는 게…….”
가까이 다가간 양소방이 슬쩍 말을 건네는 순간, 고개를 획 돌린 진무가 눈을 부라렸다.
“이 씨발, 저리 안 가? 말리면 죄다 뒈질 줄 알아!”
“…….”
진무의 무지막지한 언변에 양소방은 물론 모두가 그 자리에 얼어붙듯 멈춘다.
이 씨발이라니. 뒈질 줄 알라니.
양소방인데?
무당의 장문인인데?
장차 보위에 올라 세상의 주인이 될 태자도 있는데?
진무는 모두의 망연한 눈빛도 아랑곳하지 않고 또다시 한무화를 찾았다.
“어쭈? 이 새끼 봐라?”
지칠 줄도 모르고 사력을 다해 엉금엉금 도망치는 모습에 진무의 눈썹이 역팔자로 치솟았다.
“너 이 새끼, 내가 오늘 반드시 관짝에 처넣는다.”
한차례 씨근벌떡한 그가 한무화를 뒤쫓았다.
태극의 힘을 사용한 뒤라 내공이 대부분 소진된 탓에 땅을 꾹꾹 지르밟으면서.
“그냥…… 내버려 두시죠.”
“…….”
환히 웃는 청상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정말 너무나도…… 평소의 사숙이신걸요.”
“…….”
“어쩌면 우리에게는 당장에 안위를 걱정해야 할 싸움일지도 모르지만, 저분에게는 그저 흔하디흔한 싸움의 하나였을지도 모르겠네요.”
하긴 그랬다.
그는 이미 초월자였다.
세상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한없이 무거웠어야 할 상황마저도 말도 안 되게 가벼워져 버린 것 같은 게 특히 그답다고 해야 할까?
“그래도 말려야…….”
진무의 체면을 의식한 명현이 재차 말해 봤지만 다들 진무다움을 되새기며 고개를 주억거릴 뿐이었다.
그사이 한무화는 홍건들에게 다가가 도와달라, 살려 달라 호소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한무화를 돕는 이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칼을 내려놓고 한무화에게서 거리를 벌리며 물러나 외면했다.
* * *
어느새 끝나 버린 전쟁.
서산으로 넘어가는 해가 하늘을 벌겋게 물들이며 대지에 뿌려진 피를 감췄다.
“이 개새끼야! 죽어! 죽어!”
물론 진무의 구타는 끝나지 않았고 한무화는 한없이 또렷한 정신으로 오롯이 그 고통에 몸부림쳐야만 했다.
밤새도록…… 숨이 다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