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501
1화
흔히 세월을 빗대 유수(流水)라 한다.
아마 가까이서 보면 그리도 치열하나 멀리서 보면 흐름조차 느낄 수 없어서일 것이다.
세상이 그러했다.
당시엔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뒤흔들었던 일도, 지나고 나면 그저 역사의 일부분에 불과한 법이었다.
오 년.
궁과의 치열했던 싸움이 끝난 뒤 오 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사건은 금세 세인들의 입을 떠나고, 각자의 상처는 풍화되는 기억과 함께 서서히 치유되었다.
궁의 마수에서 무림을 구한 불세출의 무인, 진무.
전 중원을 떠들썩하게 울렸던 그 이름은 이제 몇몇 추종자들의 입에서나 간간이 흘러나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나마도 그가 등선했다는 말이 나돌기 시작하면서는 저자의 야담꾼들조차 그를 잊어 가고 있었다.
다만, 누군가는 여전히 그때를 추억하곤 했다.
* * *
저벅, 저벅.
이제 갓 스물쯤 되었을까?
아직 어린 티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젊은 사내가 천천히 무당산에 오른다.
인적이 드문 길.
번잡한 것을 싫어하는 듯 사내는 여러 갈래 길 중 사람들이 오가지 않는 험로를 택했다.
험로라고 해도 다른 길에 비해서였을 뿐, 무당의 산문인 해검지까지는 그럭저럭 완만한 터라 별다른 무리 없이 오를 수 있었다.
하나 신기한 일이었다.
완만하다고는 하나 경사가 매양 같지 않음이요, 바닥의 울퉁불퉁한 정도 또한 저마다 다를진대 그의 보폭은 자로 잰 듯이 일정했다.
뿐일까?
이마에는 땀조차 흐르지 않으니, 마치 평지를 다니는 것 같았다.
사내가 산책이라도 나온 듯 유유자적 걸은 지 한참.
마침내 산 중턱의 연못 하나가 수풀 사이로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
일순 그의 눈동자를 스치는 이상하리만치 잔혹한 살기.
볕이 따사롭게 내려앉은 못을 한동안 응시하던 사내의 붉고 얇은 입술 사이에서 싸늘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무당…… 드디어 왔다.”
마치 오랜 원수와 조우하기라도 한 듯, 사내의 얼굴에는 비틀린 환희가 내려앉아 있었다.
하나 해검지는 잔잔했다.
늘 그랬듯 파랑 하나 없이…….
오가는 손님 없이 고요한 산중의 도문.
그 자리에 붙박은 듯 서서 그 시작점을 망막에 하나하나 새기던 그가 문득 요대에 걸린 패를 꺼내 들여다보았다.
“운남, 역문현, 임신생, 야율성.”
내용이야 간단했다.
운남 역문현에서 임신년에 태어난 야율성.
나이가 차면 누구나 지니고 다니는 평범한 호패였으나, 사내에게는 몹시 각별한 물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작은 패 하나를 얻기 위해 운남 오지에서 무려 오 년이라는 시간을 허비한 것이다.
연고도 없는 곳에 자신의 이십 년 삶을 기어이 녹여 내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던가?
덕분에 이제는 역문현에 오래 산 사람들조차 그를 역문현 토박이로 여기고 있지만…….
그때를 돌이켜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울컥 치밀었다.
추억에 잠겨 호패를 응시하던 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우습군. 태어나 처음 가져 본 신분패가 가짜라니…….”
얄궂은 일이나 어쩔 수 없다.
그는 이제 자신의 모든 것을 감추고 야율성이 되어야만 했다.
한경홍.
이제는 의미가 없어진 그의 본명.
한때 그는 세상을 뒤집으려 했던 대궁주 한무화의 사생아였다.
하지만 그 이름 따위에 무슨 미련이 남아 있겠는가?
버려지고, 방치된 그에게는 어떤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몸을 움츠리고, 눈치 보며 숨을 죽여야 했다.
그러나 영 죽으란 법은 없었는지, 하루하루 비참하게 연명하던 그에게도 어느 날 볕이 들었다.
아비의 벗이며 충직한 수하였던 상관평이 찾아온 것이다.
그들이 세운 뜻이 퇴색되었다며.
그러니 힘을 합쳐 한씨를 다시 규합하고 세상을 뒤집자며.
하나 어찌 모를까?
한경홍이 보기에 상관평도 변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역천을 논하는 그의 눈에 가득 들어찬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를 향한 탐욕.
자신을 허수아비로 세우고 세상을 맘껏 주무르려는 야욕을.
하지만 그딴 게 뭐가 어렵겠는가?
그건 하늘이 내린 기회였고, 한경홍은 그의 손을 잡음으로써 운명을 바꿀 수 있게 되었다.
더는 찾아오지 않을 기회임을 알기에 악착같았고, 누구보다 독하게 단련했다.
상관평이 원하는 모든 것을, 그 이상으로 해냈다.
신뢰를 얻기 위해.
그를 자신의 발판으로 이용하기 위해.
이미 한승이라는 괴물에게서 실패를 맛본 그는 진무라는 자가 화산 금룡협에서 얻었다는 전 사패천주 혁련무강의 무공, 묵룡혼원공을 구해 왔다.
연자에게…….
그 서문처럼 묵룡은 한경홍에게 꼭 맞춘 옷 같았다.
욕심이 생겼고, 기대가 커졌다.
복수?
한씨의 재건?
그딴 건 안중에도 없었다.
사생아로 태어나 버려진 그에게 부모 형제가 다 무엇이며, 성씨가 다 무엇이겠는가.
그의 관심은 오직 하나.
천대받던 시절 가장 절실하게 손에 넣고 싶었던 무(武)로써 천하에 우뚝 서는 것.
참고, 버티어 드디어 힘을 모은 그는 상관평을 죽여 자신에게 씌워진 모든 굴레와 족쇄를 끊었다.
그렇게 떠났고, 야율성이 되어 돌아왔다.
“……기다려라, 진무.”
이제 무당에 들어갈 것이다.
선기와 묵룡기의 합일.
누구나 천하제일인이라 일컫는 그자가 걸었던 양의의 길을, 자신 또한 걸을 것이다.
그리고 세속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등선했다는 소문이 도는 그가 살아 있다면 죽인 뒤, 지상 최강의 무인이 될 것이다.
하니, 이제 감추어야 한다.
묵룡기를 감추고 야율성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때를 기다릴 것이다.
“후우…….”
한경홍, 아니 야율성은 숨을 한차례 길게 내쉰 뒤, 자신의 혈도를 순서대로 찔렀다.
쿡, 쿠쿡! 쿡!
상관평이 가르친 팔문금제술.
여덟 혈도에 몸 안의 기운을 모조리 봉인해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술법이었다.
그의 손가락이 몸 일곱 군데를 훑고 지나갈 때마다 눈동자에 서린 광채가 줄어들고, 체외로 발산되던 사나운 기운이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남은 한 개의 혈도.
그 안에는 고작 충기(充氣) 정도의 내력만이 남아 있었지만, 이것만으로 충분했다.
자신이 묵룡혼원공을 익혔다는 사실을 모르게 하는 것이 중요했으니까.
양의를 얻고 나면 모든 기운을 개방할 것이다.
그리고 그땐 무당을 지워 버리리라.
남보다도 못하다지만, 그래도 아비의 원수가 아니던가?
그 정도의 복수는 해 줘야지.
이윽고 그의 전신에 은은하게 감돌던 살기마저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야율성은 비릿한 미소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무당의 해검지를 향해서.
* * *
“멈추시오!”
“…….”
그를 제지하는 산문 제자의 외침에 야율성이 걸음을 멈추었다.
“이곳은 무당의 산문이외다. 찾아오신 도우께서는 신분을 밝히시오!”
제법 호방한 목소리에 야율성이 입가에 온화한 미소를 머금었다.
비록 위선일지라도 잠시간 한 식구가 되어야 할 사람들이다.
굳이 척을 지어 좋을 것이 없었다.
“저는 운남에서 온 야율성이라고 합니다.”
그가 공손하게 포권을 하며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산문 제자가 미소 지으며 마주 포권했다.
“그러시군요. 한데 우리 무당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딱히 도문에 제를 올리실 분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아, 실은 멀리서 무당의 고명을 듣고 제자가 될 수 있을까 하여 찾아왔습니다.”
“…….”
산문 제자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아, 입도(入道)하시는 분이시오?”
“예.”
“흠, 근자에는 영 뜸하였는데…….”
“…….”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야율성에게 다가왔다.
“음, 입도자를 받는 시기는 아니나 일단은 올라가시지요. 때마침 교대 시간이니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
응?
아니, 잠깐만.
너무나 선선한 입산 허가에 이번에는 야율성의 눈이 커졌다.
“아니 가십니까?”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질문이…….”
“질문이 왜요?”
“아니, 그게 답니까?”
“뭘 더 물어야 합니까?”
“예?”
뭘 더 물어야 하냐니?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다.
하물며 그냥 산문을 지나는 게 아니고 입도를 하겠다 했다.
그럼 기본적으로 신분 확인 절차 정도는 거쳐야 하는 거 아니냐고 이 망할 도사 놈아!
“저, 저기. 질문을 빼먹으신 게 아닌지요?”
“무슨 질문요?”
“예?”
“출신이야 운남이라 하셨고, 성함은 야율성. 목적은 입도. 다 밝히셨잖습니까?”
산문 제자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하나하나 짚을수록 야율성의 얼굴이 당혹으로 구겨졌다.
“아니 왜, 그런 거 있잖습니까? 부모는 누구며, 어떤 삶을 살았는지, 주변에 아는 사람은 누가 있는지, 혹은 누구의 추천으로 왔는지 등등.”
“…….”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어째서 그런 것들을 묻지 않는지 따지는 그를, 산문 제자가 빤히 쳐다보다가 웃었다.
“이런, 운남까지는 소문이 나지 않은 모양입니다.”
“……소문이요?”
“예. 저희 무당에서는 제자를 받을 때 과거 내력을 묻지 않습니다.”
“…….”
어, 언제부터?
“혹, 진무 사조님의 도명을 들어 보셨습니까?”
“지, 진무.”
장난하나?
그에 관해 이야기하라면 서책으로 써도 십수 권은 쓸 정도다.
다름 아닌 자신의 목표이자 쓰러뜨려야 할 숙적이 아닌가?
이름 진무, 진자 배의 막내로 본래 명진자의 도동이었다가 정식 제자로 승격…….
저도 모르게 속으로 그의 이력을 줄줄 읊기 시작한 야율성을 웃으며 바라보던 산문 제자가 자랑스러움이 뚝뚝 묻어나는 투로 말을 이었다.
“진무 사조님께선 정무맹, 사패천, 마교에 이르기까지 두루 존경을 받으신 분입니다. 게다가 양의로써 혁련무강의 무공과 무당의 선도비기를 한데 이으셨지요. 그런 분이 계신 우리 무당이거늘, 어찌 입도자의 내력에 편견을 가지겠습니까?”
“…….”
“현 장문인이신 진명자께서도 앞으로 무당의 산문을 넘는 자에게 불의(不意)한 의도가 없는 한 길을 막거나 과히 묻지 말라 하셨습니다. 어차피 무당에 들어온 이상 속세의 탈은 아무런 관계도 없다시면서요.”
“…….”
야율성의 눈가가 씰룩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칼 뽑고 설치지 않는 이상 물어볼 일은 혹시라도, 절대로 없다 이거지?
“입도자로 오셨으니 인연이 닿아 도명을 받고 나면 무당의 제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 될 것이니, 묻는 것은 도적에 올릴 이름과 나이면 충분하겠지요. 무량수불…….”
이름 나이 말고는 전혀 아무것도 안 궁금하다 이거지??
야율성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지고, 숨이 수십 리를 뛴 양 거칠어졌다.
왜!
왜 안 물어, 왜!
오 년이다.
누구도 의심치 않을 신분과 이력을 만들기 위해서 운남의 그 오지에 짱박혀서 그 개고생을 했던 것이 무려 오 년이라고!
이거, 씨벌 이거!
내가 이 호패 얻겠다고 무슨 개고생을 한 줄이나 알…….
“저기, 야율 공자……?”
닥쳐, 웃는 얼굴에 침 뱉기 전에!
뭔 부처같이 대자대비(大慈大悲)한 미소를 짓고 지랄이야?
니가 땡중이야?
도사면 도사답게 비열하게 웃어!
산문 제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제 안색을 살피든 말든, 야율성은 속으로 목 놓아 울부짖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눈앞의 산문 제자부터 어떻게 해 버리고 싶었다.
저 사람 속도 모르는 개자식을 그냥……!
“자, 야율 공자. 어서 가십시다.”
“……예.”
그러나, 억울하고 원통해도 시작부터 깽판을 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야율성은 억지로 웃으며 산문 제자의 뒤를 따랐다.
참자.
억울해서 한 며칠 잠도 안 올 것만 같지만, 그래도 참아야 한다.
진무라는 자를 뛰어넘고 무당 전체를 피로 물들일 만큼 강해지기 전까지는 묵룡기를 감추고, 야율성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때를…….
아.
이런 줄 알았으면 그냥 상관평 죽인 날 찾아올 것을…… 씨부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