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505
5화
인간의 적응력은 때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더위와 추위.
고난과 시련.
그 수많은 외적 요소들에 적응하고 변해 가며 그리 긴 역사를 만들어 세상의 주인이 되었지 않은가?
여기 그런 인간 중 지독스러울 정도로 적응력이 빠른 인간이 있었다.
바로 오룡궁의 신입 수련생 야율성.
사생아로 태어나 오랫동안 핍박받았던 그의 주식이 무엇이었겠는가?
곡식? 풀? 고기?
아니다.
눈칫밥이었다.
삶이 그러하다 보니 후천적으로 길러진 재능이라고 할까?
어쨌든 처음에는 황당과 당황의 연속으로 제대로 파악을 못 해서 수차례 위기에 빠지기도 했으나 이제는 다르다.
“그만!”
새벽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청우의 외침과 동시에 어떤 제자보다 빠르게 주저앉는 사내, 야율성.
쉬는 시간은 천금보다 중요했다.
고작 일각.
다음 훈련을 위해 몸을 풀어야 했다.
“오늘도 자소궁까지…….”
늘상 반복되어 온 훈련이다.
일찌감치 몸을 푼 야율성은 누구보다 빠르게 모래주머니를 차고 대열의 선두에 섰다.
“호오! 야유리! 너?”
“…….”
누구보다 빠르게, 누구보다 앞서서 준비를 마친 야율성의 모습에 청우가 볼살을 한껏 올려 웃었다.
“이놈들아! 좀 보고 배워라! 몇 년씩이나 수련한 놈들이 어찌 열흘 된 야유리보다 못해?”
“…….”
제자들을 향한 청우의 말에 야율성이 살짝 찡그린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었다.
지옥 돼지 놈.
야유리가 뭐냐? 야유리가.
그건 성씨다.
부르자면 응당 이름인 성이라고 불러야지.
그래, 지금까지 파악하기로는 과연 듣던 대로 멍청함이 하늘도 놀라게 할 만한 위인이니 그렇다 치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찌 저리 멍청하고 분위기 파악을 못 할까?
자라나는 새싹들을 타인과 비교해 질책하면 어쩌자는 건가?
그것도 엄마 친구 아들같이 잘난 자신과의 비교는 새싹 교육 방법에 있어 가장 금기시되는 사항이 아니던가?
살생부에 네 번째로 이름이 오른 운천이 좀 지나면 친해질 거라고 했지만, 그건 꿈 같은 현실이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했다.
무시무시한 적응력으로 하루가 다르게 앞서 나가기 시작한 야율성을 좋게 볼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직 도명도 받지 못한 수련생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것이 어찌 좋을까?
하물며 시기와 질투를 기본적으로 탑재하고 있는 나이대가 모여 있으니, 은근한 견제와 따돌림이 따라오는 건 당연했다.
와중에 저 돼지 놈이 때때로 기름까지 부어 주니…….
젠장, 뭐 상관없다.
인생 혼자 사는 거다.
늘 그래 왔지 않은가?
어차피 최강의 힘을 손에 넣으면 운현을 시작으로 죄 모가지를 따서 줄 세울 놈들이다.
그리고 고작 이대인 놈들 따위가 자신을 어찌 보든 뭔 상관인가?
지금까지 숨죽여 파악한 결과, 오룡궁에서 주의할 점은 일단 세 가지였다.
첫째, 순박함에 멍청함까지 더해진 청우의 몽둥이질.
어찌하여 저런 자가 일대제자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그 구타 교육은 정말로 기예에 가까웠다.
어찌나 잘 패는지…….
그러니 맞아 죽지 않으려면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했다.
둘째, 현 무당지검이자 오룡궁의 실무인 청상.
그에게 절대로 주목받아서는 안 된다.
안 그래도 청우가 식사 때마다 조잘조잘 떠들어 대어서 자꾸만 시선이 닿는 참이었다.
아직 만나 보지 못한 진무를 제외한 무당의 최고수가 아니던가?
상관평의 말에 따르면 팔문금제의 술로 봉인한 내공은 어떤 이도 읽어 낼 수가 없다고 했다.
하나 만약이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혹시나 그가 자신의 몸에 봉인한 묵룡기의 흔적이라도 읽어 내면?
당장에 무당에서 쫓겨날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니, 자신에 대해 속속들이 알아내고자 할지도 모른다.
그러다 최악의 경우 자신의 과거가 밝혀지면 평생 쫓기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해서 그는 일부러 오후 수련에서만큼은 더딘 척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당세령.
말이 필요 없었다.
그 미친년만은 절대로 건들지 말 것.
“좋아! 야유리가 이리 잘 따라와 주니 기분이다! 오늘은 무당산 아래까지 갔다 온다!”
“……사, 사숙!”
한껏 격앙된 청우의 말에 울상을 지은 도사들이 야율성을 죽일 듯 째려보았다.
저 하등 도움이 안 되는 돼지 같으니…….
천하제일인 되기도 전에 저 눈빛들에 찔려 뒈지겠다.
남몰래 한숨을 내쉰 야율성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뛰어어~!”
“앗!”
“갓!”
두두두두.
오전 훈련 종료에 이은 풀때기 식사.
야율성은 최대한 신속하게 천산설초를 입에 욱여넣었다.
이 풀 맛 나는 풀도 먹다 보니 쌉싸름한 게 나름 나쁘지 않았다.
서둘러 먹고 남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쉬며 체력을 회복해야 했다.
그래야 남은 오전 훈련을 버틸 수가 있었다.
앞으로 남은 수련 일정은 보름여.
그것만 버티면 정식으로 무당의 도명을 받을 수 있다.
도명을 받게 되면 진무 이후로 장서각에 비치되어 무당의 모든 이들이 익힐 수 있게 되었다는 양의심공.
그 하나에 전력을 다할 것이다.
남은 천산설초를 모조리 입에 쓸어 담고 우걱거린 야율성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늘 가던 뒷간의 구석진 수풀로 향했다.
“야율…… 어?”
대사형이라는 신분을 가졌기에 청우와 둘이서만 탁자를 차지하고 앉았던 운천이 먼저 일어나는 야율성을 부르려 했다.
오룡궁에 온 이후로 항시 혼자 있는 그와 친구가 되어 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가 식당을 나서자마자 이대제자 몇몇이 식사를 채 끝내지도 않고 일어났다.
운현, 운상, 운효.
그 힘든 수련 기간을 이겨 내고 도명을 받았지만, 아직 인성이 제대로 함양되지 않아 걱정되는 녀석들…….
저들이 왜?
운천의 미간이 살짝 찡그려진다.
아닌 척 행동하지만 필시 야율성을 따라간 것이다.
그들이 야율성에게 평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졌음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녀석들…….
내 분명 주의를 주었건만.
운천이 먹다 만 천산설초를 두고 슬며시 일어났다.
“어? 양진, 아니 운천아. 어디 가냐?”
“…….”
천산설초를 입에 가득 문 청우의 말에 운천이 잠시 멈칫했다.
“그게…….”
청상이라면 몰라도 청우에게 곧이곧대로 말해서는 안 된다.
존경해 마지않는 사숙이지만, 그가 끼어들어서 쓸데없이 커진 사건이 어디 한두 가지이던가?
설령 일이 일어난다 해도 이대에서 벌어졌으니 이대에서 마무리하는 것이 옳았다.
“아, 사숙. 실은 뒷간이…….”
“…….”
운천이 제 배를 움켜쥐고는 미간을 살짝 찡그리자 그새 입 안에 있던 천산설초를 꿀꺽 삼킨 청우가 인상을 팍 썼다.
“뭐? 갑자기? 설마 너 이 녀석?”
“…….”
청우의 고개가 삐뚜름해진다.
설마 연기에 오점이 있었나?
소싯적에 대사부 진무에게도 칭찬을 받았던 자신인데?
운천이 재빨리 청우의 표정을 살폈다.
“…….”
젠장, 대체 어디를 보시는지 알 수가 없네.
주름조차 지지 않을 정도로 찐 살이 눈가까지 밀려 올라가 눈동자도 보이지 않았다.
잔뜩 긴장한 운천이 청우의 입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저 사숙이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남길 거냐?”
“예?”
“그거.”
“…….”
자신의 천산설초 그릇을 콕 짚는 두툼한 손가락에 운천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에……. 아무래도…….”
“쯧쯧, 음식 남기면 지옥 가서 다 먹어야 한다고 했는데…….”
“…….”
먹고 싶으면 그냥 먹고 싶다고 하시지.
도사라는 인간이 어찌 그런 말도 안 되는 미신을…….
“드실래요?”
“그, 그럴까?”
“…….”
침까지 흘리며 히죽 웃는 청우의 탐욕스러운 얼굴에 운천이 어색하게 웃었다.
참, 한결같으신 사숙이다.
정말 먹는 것이라면 풀이며 고기며 가리시지를 않는구나.
“예에.”
“그래. 그럼 얼른 다녀오거라. 참으면 병 된다.”
“예, 사숙.”
자신이 남긴 천산설초를 제 앞으로 당기며 싱글벙글하는 청우를 내버려 둔 운천은 급히 뒷간으로 향하는 척하며 앞서 나간 이들을 쫓았다.
* * *
야율성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막 쉬려 자리를 잡는데 자신을 뒤쫓아 온 세 명의 도사.
살생부의 첫째 줄, 운현.
그리고 나머지 둘은 운…… 모르겠다.
좌우지간 운자 배 세 놈이 다짜고짜 품(品)자로 자신을 둘러싸고 휴식을 방해했다.
“뭐, 그래서 어쩌라고?”
“어쩌긴? 작작 나대라는 거지.”
“나대?”
끄덕.
야율성의 물음에 앞에 선 운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뭐…….
저잣거리 왈패들도 아니고.
도명까지 받고 정식으로 도사가 되었다는 놈들이 하는 짓들하고는…….
하긴, 무당의 입관 절차가 너무 간소하긴 했다.
출신 성분이나 인성까지 고려하지 않고 받으니 이런 잡스러운 놈들이 섞이는 것도 당연했다.
자고로 본성은 바꿀 수 없다고 했는데…….
한심하다는 듯 운현을 꼬나보다 피식 실소를 흘린 야율성이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런 적 없으니까 방해하지 말고 꺼져 줄래? 니들은 안 쉬냐?”
“쉬어야지. 너한테 답만 듣고.”
“답?”
“그래.”
“…….”
“지금부터 우리가 어찌 행동할지는 네가 할 약속에 달려 있어. 수련생이면 수련생답게 적당히 설치라고, 알겠어? 다른 사람에게 피해 주지 말고.”
“내가 무슨 피해를 줬지?”
“몰라? 너 때문에 수련 강도가 늘었잖아.”
“그럼 더 좋은 거 아닌가?”
“오갈 데 없는 네놈에겐 더 좋은 일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우린 아니거든.”
“…….”
야율성의 짜증 어린 시선이 운현과 나머지 둘을 훑었다.
무당의 이대제자.
그들이 강해 봐야 얼마나 강하겠는가?
자신에 비하면 한나절 파리 떼에도 못 미칠 실력인 것을.
운현과 좌우의 도사를 곁눈질한 야율성의 머릿속에 벌써부터 싸움의 양상이 처음부터 끝까지 그려졌다.
튕기듯이 일어나 좌우를 무시하고 곧장 운현을 향해 파고든다.
무구를 들지 않았으니 놈이 쓸 수 있는 무공은 무당의 기본 권각인 칠성권.
품으로 다가온 상대의 공격을 좌측으로 피하며 측면을 노려 올 것이다.
뻗어 온 팔을 꺾음과 동시에 목의 천돌혈을 노려 전투 불능으로 만든다.
그러고 나면 좌우가 뒤늦게 뛰어들 것이다.
취한 자세를 보면 우측보단 좌측 놈의 공격이 매서울 터.
상대를 무너뜨리려면 약한 쪽을 먼저 공격하는 것이 좋다.
재빨리 몸을 낮추어 좌측 놈의 하단을 차 중심을 무너뜨리고, 곧장 몸을 비틀어 띄우며 뒷발로 우측 놈의 머리를 찬다.
……상황 정리 끝.
십 중 십의 확률로 야율성의 승리였다.
그러나…….
야율성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소매에 가려진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직 싸움은 안 된다.
몇 번의 움직임, 몇 번의 주먹질이면 죄 나가떨어질 녀석들이지만 괜한 소란은 좋지 않았다.
제길, 자존심은 상하지만 어쩔 수 없지.
맞아 주마.
운 좋은 줄 알아라, 니들.
* * *
“이, 이런!”
일촉즉발의 상황에 몰래 숨어 지켜보고 있던 운천이 다급히 몸을 일으키는 순간이었다.
턱. 휘익!
누군가 그의 어깨를 강한 힘으로 잡아끌었다.
누, 누…….
“쉿!”
“…….”
손가락 하나를 입에 가져다 대고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 앳된 얼굴의 사내.
“황…… 호위님?”
운천의 어깨를 잡아당긴 것은 다름 아닌 진무의 호위 황신이었다.
그런데 이분이 왜 여기에…….
운천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황신이 말없이 손가락을 들어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누각의 지붕을 가리켰다.
황급히 고개를 돌린 운천의 눈에 빛바랜 검은 도포를 휘날리며 술병째로 벌컥거리는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순간 치미는 반가움에 운천이 상황도 잊고 활짝 웃으며 입을 크게 벌렸다.
“대…… 읍읍!”
“입도 뻥긋 마. 보이지? 누구보다 쌈 구경에 진심인 사람이 자리까지 잡은 거? 방해하면 아가리를 찢어 놓겠대. 송곳니까지 드러냈어.”
“…….”
“각출이랑 동보 녀석도 흩어져서 접근하는 사람이 없는지 지키고 있어.”
친절하게 주의 사항을 전달한 황신이 씩 웃었다.
대번에 알아들었다.
자신의 대사부 진무라면…… 그러고도 남는다.
운천이 고개를 끄덕이자 황신이 손을 떼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오셨대요? 한동안 산 아래에 계시겠다고 하시더니?”
“청상 도장이 불러서.”
“사부님께서요?”
“어.”
“왜?”
“나야 모르지. 언제 말해 주는 사람이었냐?”
“…….”
“어쨌든 그만 돌아가. 우리야 기척을 감추면 되지만 니가 있다가 괜히 쟤들 눈에 띄면 신상에 매우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테니까.”
“……하지만 저들은.”
“왜? 아가리 찢어지고 싶어? 미리 칼집 좀 내 주랴?”
“…….”
황신이 비수를 슬쩍 들어 보이면서 짓궂게 웃자 운천이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가, 걱정하지 말고. 천주님이 봤으니까 무슨 일이 생기든 알아서 하실 거야.”
“……예에.”
달리 뭐라 답하겠는가?
상대는 진무다.
무당, 아니 무림 최고수이자 구국의 영웅.
비록 전란이 있고 난 이후 얼마 되지 않아 각자의 이익에 따라 다시 정사마로 갈라져 싸우게 된 무림이지만, 진무가 잔기침이라도 하면 모두가 눈치를 살피고 그의 걸음 앞에 길을 비웠다.
하물며 현 황제조차도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매년 선물을 보내는 처지인데 누가 있어 그의 뜻에 반하겠는가?
그런 스승이 알아서 하겠다는데야 도리가 없었다.
운천은 찝찝한 표정으로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억지로 뗐다.
제발, 제발 별일 없어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