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512
12화
도망치려던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몸을 돌린 운연이 물끄러미 황신을 바라보았다.
황신은 어금니를 악물고 계속해서 각출이 세운 계획을 이어 갔다.
그가 말했다.
설마하니 도사까지 된 놈이 불쌍한 처지를 보고 무시하겠냐고.
쪽팔려서 차마 얼굴을 들 수가 없을 지경이었지만, 다행히 통했는지 걸음은 잡아 둘 수 있었다.
“살려 주세요, 무사님. 집에 병든 노모가 계세요……. 흑흑.”
“…….”
소녀 황신이 애원하는 모습에 산적들은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누가 누굴 살려?
당하고 있는 건 우리 만산챈데?
그리고 병든 노모?
그딴 게 있기는 한 거냐?
억울함이 절절히 묻어나는 그들의 눈빛 질문에 대한 답은 금세 돌아왔다.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은밀하게 고개를 돌린 황신의 눈빛으로.
협조 안 해?
니들 다 뒈지고 싶니?
“이, 이, 이년! 어디서 감히! 이리 오지 못할까!”
보기만 해도 단번에 의미를 알 수 있을 것 같은 섬뜩한 눈빛에 구일식이 눈치 빠르게 황신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아악!”
살살 잡아, 이 새끼야! 가발 벗겨져!
되는 대로 비명을 내지른 황신이 머리에서 떨어지려는 가발을 두 손으로 꽉 움켜쥔 채 질질 끌려갔다.
이 정도 했는데도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각출의 계획이 잘못됐거나 산적 놈들의 연기가 어설펐던 거다.
속으로 씩씩대며 끌려가는 와중에도, 황신은 운연을 연신 힐끗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제길.”
욕설과 함께 인상을 팍 구긴 운연이 차갑게 말했다.
“너, 그 손 놔라.”
“…….”
구일식은 하마터면 냉큼 손을 놓을 뻔했다.
살을 엘 듯한 눈빛에 한순간 숨이 턱 막힌 것이다.
분명 사람 대 사람이건만, 마치 범을 마주한 토끼처럼 오금이 저리고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사, 사람이 어찌 저런 눈을…….
“꺼지라고 했을 때 꺼졌으면 좋았잖아.”
“…….”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운연이 가늘게 뜬 눈으로 주변을 힐끗거렸다.
아무도 없다.
자신이 묵룡기를 사용해도 이상하게 여기며 문제 삼을 사람은.
옷까지 갈아입고, 죽립까지 쓴 지금의 자신은 무당 도사 운연이 아니라 야율성…… 아니 한경홍이어도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다.
즉, 이곳의 일은 그저 이곳의 일로 잊히는 것이다.
푹, 푸푹.
결심을 마친 운연이 천천히 자신의 혈도를 눌렀다.
팔문금제의 해제였다.
쿠우우우…….
감추었던 기운이 서서히 몸집을 키우고, 묵빛 광휘가 그의 몸을 감쌌다.
묵룡기.
그 사악하고 섬찟한 기운에 곁에 있던 산적들이 흠칫 놀라며 물러났다.
“크으…….”
봉인을 모조리 해제한 운연이 고개를 쳐들고 온몸을 휘돌며 날뛰는 묵룡기를 만끽했다.
마치 수십 년 앉은뱅이를 흉내 내며 살아오다 일어난 느낌이랄까?
“역시…… 좋아, 이 느낌.”
잠시 흥취에 빠져 있다 천천히 고개를 내린 그의 눈동자는 심연처럼 깊었고, 흑요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너, 그 손 놓는 게 좋아.”
눈빛만큼이나 확연하게 달라진 목소리와 함께 운연의 몸에서 끈적한 기운이 흘러나와 주변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그가 걸었다.
한 발자국 걸을 때마다 그의 몸이 커다래졌다.
마치 공간이 밀려오는 것만 같은 위압감이었다.
사아아…….
바람이 분다 느낀 것은 착각이었을까?
저벅, 저벅.
산새들의 지저귐조차 없는 적막 속에서, 오직 그의 발걸음 소리만이 산적들의 귓가에 강제로 때려 박히듯 파고들었다.
스산하고, 섬찟하다.
고작 발소리인데…….
마른침이 절로 삼켜지고, 털이란 털은 모조리 곤두섰다.
그리고 그가 황신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구일식과 이 장 정도의 거리를 두고 멈췄다.
“안 놓는다 이거지?”
“…….”
또 놓을 뻔했다. 아니, 이번에는 놨다.
하지만 황신이 자신의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못 놓도록…….
“좋아. 그래, 그런 놈들이라 들었지. 산적이라는 족속들은…….”
“아, 아니…… 그게…….”
“서푼의 힘을 가지고 더 약한 이들의 돈을 뺏는 자들.”
“…….”
“싫어했었다. 옛날부터. 나도 힘이 없었거든. 핍박받았고……. 빌고 또 빌어도 봤어. 하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지. 지금 네 손에 잡힌 그 소녀처럼…….”
운연이 턱을 살짝 치켜든 채 가늘게 뜬 눈으로 구일식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 잠깐만 일단 내 말을…….”
“상황이 뻔한데 들어야 할까?”
“…….”
운연의 말에 구일식은 누군가 양손으로 목을 움켜쥐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어떻게 사람이 이리도 달라질 수가 있단 말인가?
“아, 아니 이, 이봐, 그러니까 이게…….”
정말 울고 싶었다.
자신들은 그저 시킨 대로 했을 뿐이었다.
갑자기 찾아와서는 해 줘야 할 일이 있다고 해서…….
그때, 구일식의 귓가에 한 줄기 전음이 파고들었다.
[야!]“…….”
[쫄지 마! 싸워! 뒤는 그분께서 지켜 주신다고 방금 말씀하셨어.]“…….”
자신의 손에 잡혀 있는 소녀, 아니 형님이 전음으로 열띤 응원을 보냈다.
뭐? 싸워?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오금이 저리는데 그런 소리가 나오냐, 이 미친놈아?
그러고도 니들이 무림을 구한 영웅이야?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우린 그냥 과객에게 푼돈이나 뜯는 산적이라고!
하지만 무섭다.
눈앞의 놈도 무섭지만, 자신의 손에 잡혀 있는 이 망할 여장 소년 놈도 무섭고, 그 뒤에 있는 놈은 더 무섭다.
제기랄…… 그래, 지들이 시켰으니 설마하니 나 몰라라 하겠는가?
어떻게든 끝까지 가 주마!
“이, 이 새끼가 어디서 허세를 부리고 있어?”
“…….”
“어, 어린놈의 새끼가 감히 우리 만산채를 뭘로 보고! 얘들아! 쳐라!”
구일식이 될 대로 대라는 식으로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외쳤다.
그와 동시에 움직일 힘을 얻은 산적들이 운연을 향해 뛰어들었다.
원래가 쪽수라는 것이 그렇다.
상대가 아무리 강해도 자신들의 수가 월등히 많으면 겁대가리를 상실하기도 하고…….
또한, 그들 역시 이 모든 일의 뒤에 그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천하제일이자 중원 삼패의 모두가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진무가…….
“와아아아!”
“…….”
사방에서 날아드는 산적 떼의 모습에 운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죽어!”
날아오는 월도.
운연은 움직이지 않고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슈아아악!
베였다.
월도가 그의 몸을 베고 커다란 호선을 그리며 지나갔다.
산적의 얼굴에 희열이 생기는 그 순간, 잘려 나간 운연의 몸이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어?”
턱.
“……?”
산적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 순간 머리를 움켜쥐는 손 하나.
치켜뜬 산적의 눈에 보인 것은 자신의 머리를 잡고 물구나무를 선 듯한 운연의 모습이었다.
“죽이진 않으마. 니들도 사람이니까.”
“……그게?”
의문은 길지 못했다.
운연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 산적은 짜부라지듯 바닥에 처박혀 버렸다.
콰드드득! 콰아앙!
자신을 공격한 산적의 머리를 잡고 그대로 짓눌러 처박아 버린 운연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파앗!
그러곤 땅을 박차며 멈춰 선 산적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뻐어억!
“크아악!”
휘두른 주먹에 맞아 날아가고.
휘릭! 콰지직!
휘돌려 찬 발에 다리뼈가 부러진 산적이 힘없이 주저앉는다.
쩌어억!
운연은 마치 늑대 무리에 뛰어든 범 같았다.
손발을 움직일 때마다 묵빛 광채가 폭풍처럼 휘몰아쳤고, 뛰어든 산적들은 불을 쫓은 불나방처럼 아스러졌다.
“저, 저기…… 황 호위님?”
“왜?”
구일식이 아직도 자신의 손을 꼭 쥐고 있는 황신을 향해 말했다.
“이러다 저희 애들 다 작살나겠는데요?”
“그러게.”
“…….”
그러게라니!
끝이냐? 그게 다야?
“좀 기다려 봐. 아직 다음 지시를 내리지 않으시네? 뭔가 확인하실 게 있는 모양이다.”
“……아, 예.”
확인, 확인 좋지.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고 했고…….
근데 그럼 우리 애들은?
“끄아아악!”
“케에엑!”
“커어억!”
“…….”
포악하게 날뛰는 운연으로 인해 산적들이 반수 이상 나가떨어졌을 때였다.
“그 손! 놓으라고 했지!”
“……!”
운연이 시커먼 안광을 토하며 구일식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 어어?”
그 순간 황신의 귀가 쫑긋거렸다.
그리고…….
투우웅! 빠가가각!
동시에 두 개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큭!”
구일식이 발에 챈 공처럼 붕 떠서 튕겨 나가고, 공격했던 운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러났다.
뭐지, 방금?
설마 산적 두목의 무공이…….
믿기지 않는 사실에 운연이 재빨리 고개를 돌려 구일식을 쳐다봤다.
그런데…….
“아, 끼어들어서 미안.”
“…….”
있어야 할 구일식은 저만치 날아가 처박혀 있었고, 눈앞에 서 있는 건 조금 전까지 머리채가 잡혀 살려 달라 눈물로 애원하던 그 소……녀?
그런데 목소리가…….
눈으로 보았고, 귀로 들었음인데 지금의 상황이 머리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와중에…….
부우욱!
치, 치마를 찌, 찢어?
쓰으윽.
응? 화장도 닦아?
훌렁.
후, 훌렁이라니!
머, 머리카락이 왜 벗겨…… 어?
황당함이 짙게 어린 운연의 눈동자를 가득 채운 것은 열대여섯 정도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이게 대체 뭔?
한데 어째 익숙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어디선가…….
“아! 도동! 그 싸가지 없던 욕쟁……인데 니가 왜? 여장은 또 왜?”
“…….”
운연이 손가락을 세워 놀란 표정으로 가리키자 황신이 잔뜩 구겨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좋아서 한 줄 아냐, 이 새끼야?”
“…….”
“뭐 어찌 됐건, 너 좀 만나시잔다.”
“……응?”
“따라와.”
“…….”
누가? 왜?
내가 지금 상황 파악이 좀 덜 됐거든?
일단 이유를 설명해 줘야…….
“거 새끼, 말 안 들으면 줘 패서 데려와도 좋다고 하셨거든? 어쩔래? 그냥 갈래, 사람인지 피떡인지 모르는 채로 갈래?”
“…….”
줘 패? 누가 누굴?
니가?
그런데 잠깐. 이거 상황이 어째…….
지금까지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해월각.
산적, 여장…….
그럼 소화산에 있다는 묵룡동도 혹시?
“니들 설마 나를 농락한 거야?”
“…….”
묵묵부답, 혹은 무언의 긍정.
몇 차례 눈을 끔벅거리던 운연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런 씨발! 어린놈의 새끼가 어서 장난질이야!”
운연이 두 눈을 세모꼴로 뜨고 욕설을 내뱉자 황신이 지친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하아, 그냥 따라오면 안 될까? 내가 지금 이 꼴을 하고 되지도 않는 연기까지 한 터라 심적으로 상당히 불안정해. 그래서 욕 듣고 싶지 않거든?”
“지랄하고 있네. 이 자라다 만 어린놈의 새끼가 어디서!”
“…….”
침까지 튀겨 가며 길길이 뛰는 운연의 모습에 황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자라다 만…… 자라다 만…….
안 그래도 남보다 청력이 수배 이상 뛰어난 그의 귓가에 같은 말이 징징 울리고, 그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툭 끊어졌다.
퓻! 쩌어억!
“크억!”
콧잔등이 시큰한 충격에 운연이 뒷걸음질하다 겨우 몸을 멈췄다.
뭐, 뭐지?
보이지도 않았는데?
“묵룡기? 하! 너 그 정도로는 턱도 없어.”
“뭐?”
“진짜 마지막이야. 말로 할 때 따라와라.”
“……이 망할 자식이!”
황신이 손가락 하나를 들어 좌우로 까딱거리는 모습에 운연의 눈이 시커멓다 못해 검붉게 변했다.
쿠아아악!
동시에 포악한 묵빛 기운이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왔다.
“하아, 이거 쉽게는 안 되겠고…… 칼을 쓰자니 지금 기분으론 목에 바람구멍 씨게 낼 것 같고…….”
황신이 분노한 멧돼지처럼 달려드는 운연을 보며 음울하게 중얼거렸다.
“몸이 튼튼하길 비는 수밖에.”
“죽어, 이 개새끼야!”
후우우웅!
기운을 잔뜩 머금은 채 날아오는 주먹의 궤적을 피하며, 황신이 나지막이 말했다.
“각출아.”
쉬이이이이익!
몸을 뒤로 빼는 황신을 재빨리 뒤쫓던 운연의 귓가에 한 줄기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힐끗 쳐다본 하늘에서 셀 수 없을 만큼의 많은 뼈다귀가 쏟아졌다.
빠바바바바바바바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