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514
14화
귀신인가?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소녀…… 아니, 소녀로 위장한 그 씹어 먹을 개자식을 공격하는 순간 무언가가 후두부를 강타했고…… 그리고 깨어났는데…….
저 귀기마저 느껴질 듯한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놈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운연은 살아오면서 겪은 수많은 역경과 위기 따위보다, 지금이 가장 위험한 순간임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 새끼 눈깔 굴리는 거 봐라. 꼴이 꼭 남의 구역에서 동냥질하다 걸린 거지새끼 같네.”
“…….”
제일 처음 말하는 큼지막한 몽…… 응? 웬 뼈다귀?
누더기 같은 옷차림하며 드는 비유하며 거지는 확실한데, 제 팔뚝만 한 뼈다귀를 들고 다니는 놈이라니.
서, 설마. 빌어먹는 게 사람 고기는 아니겠지?
눈을 있는 대로 부릅뜨고 살핀 후에야 짐승의 그것임을 알아본 운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어째서…….
“요런 귀여운 녀석. 오들오들 떠는 것이 비 맞은 고양이 같은데?”
“…….”
이번엔 옆에 있는 멀대같이 키 큰 놈이 피식피식 처웃는다.
생겨 먹은 건 그럭저럭 귀공자 상인데 기운은 영 스산한 게, 죽음을 늘 곁에 두고 사는 살수를 보는 것 같고…….
마지막 세 번째.
“씹어 먹을 새끼. 네놈 인성 평가인지 뭔지 하느라고 내가 여장까지…… 크읍! 포를 떠 버리고 싶었는데, 온몸 장기를 죄 털어다 작품 하나 만들고 싶었는데.”
“…….”
그 염병할 도동 놈이다.
소년 주제에 소녀로 위장해서 자신을 꼬드긴 그 개자식.
“…….”
자, 잠깐만.
거지, 살수, 그리고 어린 꼬맹이.
세상에 둘은 없을 기괴한 조합…… 그렇다면?
뎅-
순간 운연의 머릿속에서 거대한 범종 소리 같은 게 울려 퍼졌다.
이런 젠장! 왜 몰랐지?
그토록 기억에 담고 또 담았는데.
그래 저 뼈다귀는 분명…… 각출일 테고.
그럼 나머지 놈들은 당연히 소동보와 황신!
명성 자자한 진무의 따까, 아니 개인 호위이자 전령!
아, 저 빌어먹을 꼬마 자식의 상스럽기 짝이 없는 욕설을 들었을 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최소한 저 흉악한 뼈다귀를 보자마자 알아채고 튀었어야 했는데.
마구 떨리던 운연의 눈동자가 도르륵 굴러 모닥불을 향했다.
그리고 보았다.
방만하기 짝없는 자세로 술을 입에 버리며,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이쪽을 쏘아보는 사내를.
……그다.
구국의 영웅, 천하제일인 진무.
운연은 해일처럼 덮쳐 오는 절망에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아아, 내가 호랑이에게 물려 온 것이구나. 이곳이 호랑이 굴이구나.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마치 백지가 되어 버린 듯 새하얬다.
이제…… 이제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천주님, 어찌할까요? 일단 제가 천주님께서 하사하신 토 선생의 왕골(王骨)로 말하기 좋게 좀 다질까요?”
“아닙니다. 일단 제가 몇 군데 포부터 뜰게요. 설마하니 생으로 살점이 뜯기는 마당에 입을 다물고야 있겠습니까?”
“제게 맡겨 주십시오. 제가 그동안 익혀 온 살막의 비전으로…….”
“…….”
이런 미친놈들을 보았나.
다지긴 뭘 다지고, 포는 왜 떠? 그리고 살막의 비전?
듣자마자 느꼈다. 셋 중 뭐든 간에 이 세상 고통일 리 없다.
생각해야 한다.
아직 자신의 힘은 턱없이 부족하다.
불공대천의 원수 진무는커녕, 생양아치나 다름없는 호위 하나조차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복수를 꿈꾸지는 않는다지만, 이 망할 놈들의 손에 스러져 간 동족들의 핏값을 받아 내기는커녕 몸에 생채기조차 내지 못했는데 여기서 죽을 순 없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지?
모른다고 해도 맞을 테고, 안다고 해도 맞을 것이 뻔한 이 상황에서, 대체 어떤 방법을 써야 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지?
한경홍! 야율성! 운연!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셋이서 머리를 맞대 방책을 떠올려라!
지금 너는 잘 벼려진 칼날 위에 서 있다.
아차 하는 순간 온몸이 난자당하지 않으려…… 아!
다시없을 대위기를 맞아 기적적으로 팽팽 돌아가던 그의 머리에 퍼뜩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갑자기 떠오른 것치고는 너무도 기똥찬 생각이었다.
이 방법이라면……!
운연은 저도 모르게 속으로 급급여율령을 외며 혼신의 힘을 다해 입을 열었다.
“누구……세요?”
“…….”
말똥말똥하게 뜬 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
“하, 이 새끼 봐라? 시작부터 모르쇠로 가시겠다 이거지?”
“…….”
믿지 않으리라는 건 예상했다. 하나 굴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누구이던가?
사생아로 태어나 먹은 눈칫밥이 얼마며, 약자 행세를 하며 살아온 날이 얼마인가?
더군다나 지난 오 년.
짧고도 긴 그 세월, 뚝 떨어진 듯 옆집에 나타나서 끝내는 수십 년 알 박고 살았다고 믿게 만든 자신이었다.
“……예? 그게 무슨?”
“…….”
“대체 여긴 어디죠? 여러분은 누구시고요? 제가 왜 여기에?”
“…….”
만약 운연이 눈 부라리면서 욕을 내뱉거나 하면 당장에 안면에 주먹부터 박아 넣고 시작하리라 벼르던 황신, 소동보, 각출이 멈칫했다.
어째 모양새가 영 이상하다.
저 눈빛하며 표정하며, 당최 영문을 몰라 하는 멍청함까지…….
“그러고 보니…… 난 누구지? 으윽, 머리가 깨질 것 같아.”
“…….”
갑자기 얼굴을 찡그리면서 제 머리를 잡고 고통스러워하는 운연의 모습에 셋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 모양새가…….
그러다 황신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런 씨발, 야! 각출!”
“어…… 예?”
“너 뒤통수 잘못 후린 거 아냐?”
“아니, 전 그냥…….”
황신의 불같은 짜증에 뼈다귀를 들고 흉흉하게 다가섰던 각출이 눈을 끔벅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어? 진짜 그런 모양인데요. 뒤통수, 뒤통수를 보자…….”
재빨리 운연의 뒷머리를 헤쳐 귀엽고 깜찍하게 솟아난 혹을 발견한 소동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맞네요. 맞아. 허, 참. 더러 이런 경우가 있다고 하긴 하던데…… 아무래도 맞은 충격으로 기억을 잃은 것 같습니다, 형님.”
“뭐어?”
이 거지새끼가 시작도 전에 산통을 이 지경으로 깨?
황신이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 같은 표정으로 손을 냅다 치켜들었다가, 슬며시 진무의 눈치를 살폈다.
어…… 어떻게 하지?
이제부터 놈의 가족 친지 조상신까지 탈탈 털어 내야 하는데, 초장부터 기억 상실이라니.
이래서야 아무 소용도 없지 않은가?
와중에 개천주의 얼굴은 일그러지다 못해 흉신악살이요, 나찰을 방불케 한다.
빌어먹을,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지.
“얘가 팼습니다!”
“…….”
황신이 진무를 바라보며 재빨리 손가락을 곧게 펴 각출을 가리켰다.
“제가 제일 관계없습니다! 아시잖습니까? 저는 천주님과 줄곧 함께 있었습니다!”
“…….”
뒤이어 소동보가 잽싸게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면서 발뺌을 했다.
“그러게 선무당이 왜 애를 이렇게 패 가지고는…… 쯧쯧.”
“그러게요. 이름만 불리면 좋다고 정신을 놓더라니…… 제가 한 번은 사고 칠 줄 알았다니까요?”
“…….”
실로 의리라고는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매몰찬 책임 전가였다.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각출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개자식들. 이것들도 동료라고……. 개천주보다 니들이 더 나빠.
저 악독한 천주 아래서 같이 굴렀답시고 정 주고 마음 준 세월이 아깝기 그지없었다.
하나 어쩌겠는가?
자신의 단매에 애가 저리되어 버린 것도 사실이니…….
산중에 자신들밖에 없기 망정이지,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개방도가 무당의 파릇파릇한 새싹 제자를 기억을 잃을 정도로 줘 팼다는 걸 누가 알기라도 하면 자신은 물론, 개방까지 얼굴을 들 수가 없게 될 터였다.
하나 그보다 두려운 건…… 역시 저 개천주다.
원하는 건 죽어도 하는 인간이 하려는 일에 의도치 않게 재를 뿌렸으니…….
모르긴 몰라도 소리 소문 없이 살해당해서 어느 강가에 떠오른다든지, 먼 훗날 인적 드문 산자락에서 유골로 발견될지도 모른다.
해결해야만 한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저어기…… 천주님?”
“…….”
“제, 제가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니고…….”
“하아…….”
“…….”
진무의 한숨에 각출이 냅다 대가리부터 박자 운연이 속으로 음흉하게 웃었다.
먹혔다.
혼신의 힘을 다한 연기에 그들이 속아 넘어간 것이다.
이걸로 비밀은 지켰다.
저 봐라.
무분별한 폭행으로 자신을 기억 상실에 이르게 한 각출에게 손을 내밀어 뼈다귀를 건네받았다.
잔뜩 움츠린 채 오들오들 떨어 대는 각출이 놈.
그리고 동료를 사지로 몰아넣고 멀찍하게 떨어져 방관하는 저 간악한 황신과 소동보 놈.
자신의 연기가 불러온 또 다른 이득이 아닐 수 없다.
맞서 싸울 수 없다면 내분을 조장하는 것이 현명한 법!
얍삽? 비열?
그러면 어떻단 말인가?
저딴 간악한 놈들에게…….
이것이야말로 이이제이(以夷制夷)며 차도살인(借刀殺人)의 묘 아니겠는가?
진무가 뼈다귀를 움켜쥔 채로 천천히 일어났다.
그래, 죽여라. 서로 물어뜯어라.
일단 각출이라는 저 빌어먹는 거지 놈부터 쳐 내는 것이다.
네놈들 스스로…… 응?
그런데 어째서 날 바라보지?
우, 웃어?
씩 웃는 입술 새로 삐죽 드러난 송곳니에 운연이 오한을 느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왜? 왜애? 왜 이쪽으로 와?
나 아니잖아. 각출을 패야지.
“…….”
운연의 앞에 딱 멈춰 선 진무가 내리깐 눈으로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이, 이봐. 무섭게 왜 이래?
진짜로 기억상실인지 확인이라도 할 참이야?
미친놈…… 그래 봐야 어쩌지 못할 것인……데, 왜 뼈다귀는 들어 올리는…….
“운연아.”
“…….”
한껏 입꼬리를 말아 올린 진무가 스산하게 웃는다.
하마터면 심장이 쪼그라들어서 냅다 예! 하고 대답할 뻔했던 운연이 극도의 정신력을 발휘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정신 똑바로 차리자.
이놈은 호랑이, 아니 괴수다.
“기억이 안 난다고?”
“예에. 정말 암것도 기억이…….”
“…….”
눈치를 살피며 말끝을 흐리는 그의 위로 뼈다귀가 기다렸다는 듯 힘차게 떨어져 내렸다.
빡! 빠바바바박!
“크아아악! 기억…… 크어어억! 사, 상…….”
“어 그래, 계속해 봐. 기억이 나나 안 나나 한번 보게.”
“꾸엑! 꾸에에엑!”
“이게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까 누굴 가마니로 아나. 이 새끼야, 내가 연기를 열아홉에 익혔다. 콧구멍 벌렁거리는 것도 못 감추면서 어디서 개수작이야!”
빠아악! 빠바박!
콰직, 콰직콰직!
빈틈도, 쉴 새도 없었다.
밀물과 썰물처럼 번갈아 조지는 뼈다귀와 발길질에 속절없이 온몸을 내맡기며, 운연은 깨달았다.
지옥 돼지의 매질은 안마였구나.
이 새낀 진짜구나.
정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간악한 새끼구나.
그러나 왜인가?
이렇게, 이렇게 아프고 고통스러운데 왜 정신은 더욱 또렷해지고 지랄인가?
“꾸에에에엑!”
“꾸엑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어디 끝까지 해 봐라! 니가 기억 상실이면 나는 충격 요법이다, 이 새끼야!”
진무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냥 패기만 했다.
그렇게 밤이 지나고, 해가 산 동쪽에서 빛을 뿌릴 때쯤 운연은 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고수는…… 체력도 좋구나.
밤새도록 매질을 해도 안 지치는구나.
“…….”
그나저나 이제 어쩌지?
씨발 너무 아픈데? 고통스러운데?
차라리 혀를 깨물까?
그럼 죽더라도 비밀은 지킬 수…….
“꾸에에엑!”
생각 많고 할 말은 더 많았지만, 무엇 하나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나오느니 비명뿐인 시간이 억겁처럼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