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52
52화
“허허, 제갈분가주께서는 우리 무당을 너무 우습게 보시는 모양입니다.”
제갈무린과 명충이 서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한 치의 밀림도 없이 대화의 승기를 잡기 위해 팽팽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누가 봐도 여위강이 노린 것은 일해상단이다. 그럼에도 몇 마디의 말로 사실을 은폐하고 있었다.
하지만 반박할 수가 없었다. 언급하는 바에 거짓은 없었으니까.
역시나 제갈무린이었다.
어설프게 흉내나 내는 모익상과 달리 지금 앉은 이들 중 누구보다 심계가 깊은 자였다.
이미 다양한 예행연습을 끝냈을 터였고, 화려한 말발로 상대를 무력화시킬 준비까지 마쳤을 것이다.
그리고 기회가 오자마자 곧바로 대화의 주도권을 잡아 분위기를 제갈 쪽으로 가져간 것이다.
그는 여위강에게 진술을 요구하지 않았다.
자신이 유리하게 사실에 근거한 진술을 만들고, 여위강에게는 대답만 하도록 만들었다. 여위강에게 다시 묻는다 해도 앵무새처럼 제갈무린의 말을 반복하리라.
이미 철골개의 확인까지 거쳤으니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셈이다. 그리고 기세를 살려 모든 잘못을 진무에게 뒤집어씌우고 있었다.
칼날 없는 전쟁터에서 제갈무린은 최고수였다. 그 어떤 이도 범접할 수 없을 만큼 치밀하고 비열한 자.
그런 자에게 정석적인 대화법으로 맞서는 우진궁주 명충이나 진궁은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제갈분가주. 이렇게 나오시다니 본 도장은 심히 기분이 좋지 않구려. 그대들은 복면을 쓰고 무당의 제자를 암습하려 했소.”
“그런 적 없다 말씀드렸소만.”
딱 잡아떼며, 제갈무린은 여유롭게 자신 앞에 놓인 찻잔에 손을 가져갔다.
“허, 본파는 지금 지난번 이성상단을 움직여 수로 이용권을 빼앗고 일해상단의 상행을 방해했다는 사실조차 묵인하며 양보를 보였거늘.”
대화의 승기를 빼앗겼음을 느낀 명충이 다른 사건을 통해 공격을 하려 했다.
하지만 오히려 제갈무린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지어졌다. 마치 그 말을 기다린 것처럼.
딱.
입으로 가져가려던 찻잔을 내려놓자 짧은 마찰음이 생겨났다.
노린 것이다.
그 한 동작으로 좌중의 주의를 집중시키고 기세를 잡는다.
“우진궁주.”
“…….”
“말을 가려 하시오.”
“뭐라?”
“내 그런 소문을 듣기는 하였으나, 전부 사실무근이오.”
“사실무근이다?”
“그렇소. 우리 제갈분가를 음해하는 자들이 소문을 퍼트린 것이라 이미 확인을 마쳤소.”
“…….”
“이성상단의 어느 누구도 그러한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소.”
“뭐요?”
“필요하면 당장 이성상단에 확인을 해 보아도 좋소.”
이미 이성상단에 손을 써 두었다는 것이다. 확인한다 해도 딱히 얻을 것이 없으리라.
이후로도 명충은 상대에게 ‘뭐라?’, ‘뭐요?’라는 말만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제갈무린의 세 치 혀에 의해.
졌다. 처절하게 진 것이다.
무당은 순찰 중인 제갈세가의 무인들을 공격한 것도 모자라 헛소문으로 음해한 파렴치한 취급을 받게 되었다.
혀는 때때로 칼보다 날카롭다.
우진궁은 뛰어난 대외 협상 능력을 가졌다. 진무도 진궁에게 살짝 놀랐을 정도니까.
하지만 수가 모자라거나 정상적인 놈들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다. 비열함으로 무장한 놈들에게 그따위 방법은 통하지 않는다.
협잡에는 협잡으로 응해야 하는 법인데.
진무는 몇 번이나 주먹을 움켜쥐었다. 복잡한 정파 놈들이다. 그냥 싹 줘 패고 의사를 관철시키면 될 것을. 지금 이 자리가 사패천이었다면 주저 없이 그랬을 것이다.
모익상, 제갈무린.
사패천이었다면 아마 지금쯤 피떡이 되어 있겠지. 하지만 영 나설 방법이 없었다.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데.
[사숙.]귓가에 들려온 전음.
청상이다.
전음을 듣는 순간 진무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떠올랐다. 맨 처음 잡은 놈에게서 무엇인가 알아낸 것이 분명했다.
[제갈세가임을 확인했습니다. 자신을 암천대 소속의 주학이라고 대답했습니다.]역시.
청상에게 맡겨 두길 잘했다.
아주 시기적절하다.
진무가 하는 말에 무조건적으로 충성을 보이는 녀석이니 아마 모르긴 몰라도 팔다리 하나씩은 자르지 않았을까.
어쨌든 돌파할 방법이 생겼다.
저 잘난 세 치 혀를 잘라 버릴 만한 방법이.
“장로님.”
가만히 듣고만 있던 진무가 앞으로 나서자 진궁이 그의 손을 잡았다. 높으신 분들이 말씀 중이니 나설 자리가 아니란 뜻이겠지.
하지만 나설 때가 되었다. 패배한 무당의 도사들을 구원하기 위해.
여기서 지면 끝이니까.
업적도, 평판도.
“오룡궁의 제자 진무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진무가 아랑곳하지 않고 나서자 잠시 생각하던 명충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무는 천천히 자신에게 최면을 걸었다.
나는 무당의 도사다.
예와 도를 아는 정파의 제자다.
사패천주 혁련무강이 아니다.
공손하고, 절도 있게, 예의를 다해서.
제갈무린이 좀 열 받게 해도 절대 주먹은 쓰지 말자. 욕도 하지 말고.
“제갈분가주께서는 무당을 감시하지 않았다는 말에 책임을 지실 수 있습니까?”
당돌한 일대제자의 말에 제갈무린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공적인 자리니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네.”
“그렇군요.”
진무가 사악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명충을 바라보았다.
“장로님, 실은 제가 일전에 출타 중 습격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습격이라고?”
제갈무린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침을 진무가 놓치지 않았다.
“예. 습격입니다.”
잠시 말을 끊는다.
궁금하겠지. 어떤 말이 나올까 생각지도 못하고 있겠지.
“계속 말해 보거라.”
“잠시 강변의 정취를 느끼고 싶어 거닐던 중에 저를 은밀히 따르는 이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때로는 취객으로, 또는 행인으로. 변장에 무척이나 능한 자였습니다.”
“허!”
명충의 감탄사와 동시에 제갈무린의 눈동자에 변화가 생겼다.
정말로 변장술만큼은 뛰어났다. 사패천에서도 그만한 놈을 본 적이 없었다. 또한 그런 능력을 가진 부하라면 제갈무린이 모를 리가 없겠지.
“그는 저를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진무의 말에 모두가 시선을 집중했고, 어느새 진궁은 그의 손을 놓고 있었다.
“확인해 본 결과 그의 이름은 주학이라더군요.”
“……!”
무릎을 꿇고 있던 여위강이 고개를 쳐들었다.
‘제길. 잊고 있었다.’
상황이 묘하여 미리 제갈무린에게 언질을 주지 못한 그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가득했다.
하지만 진무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리고 그는 제갈분가의 암천대 소속이라고 했습니다.”
“닥치시게!”
불시의 공격.
예상치 못한 공격에 제갈무린의 평정심이 깨어졌다.
주학에 대한 내용은 보고받지 못한 일이었다. 제갈각은 그저 암천대주와 십 호에 대한 이야기만 했다. 그런데 뜬금없이 주학이라니?
하지만 상대의 틈을 잡은 진무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상처가 생겼을 때는 놓치지 않고 소금을 뿌려야 더욱 쓰라린 법이다.
“그는 제게 살수를 펼쳐 왔습니다.”
“말도 안 되는!”
치명상을 입은 제갈무린의 볼이 씰룩거렸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전환되었다.
“무당의 일대제자 진무는 그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느냐?”
“예. 본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누구냐?”
명충이 기대감을 품은 눈으로 진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진무의 시선은 개방의 단강구 분타주 용선개를 향했다. 제갈무린이 개방을 이용했던 것처럼 똑같이 이용해 줄 생각이었다.
“분타주께선 알고 계시지요?”
모두의 시선이 진무를 따라 용선개에게 집중되자 그의 얼굴이 더 이상 힘들 정도로 찡그려졌다.
“용선개.”
명충이 엄한 목소리로 추궁하듯이 물었다.
“아는 사실이 있소?”
“그게…….”
용선개는 한숨만 내쉬었다.
알고도 말할 수 없으니 답답했고, 듣고 싶어도 듣지 못하는 자들은 그의 입만 쳐다보았다.
순식간에 그가 사건의 열쇠가 되어 버렸다. 제갈이든 무당이든 그의 한마디에 입장이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말해! 양소방이 내 뒷조사시켰다고! 양소방이 주학이라는 놈과 싸우는 걸 다 봤다고! 왜 입을 가지고 말을 못 해!
진무는 마음속으로 열심히 다그쳤다.
그리고.
“명충은 개방의 제자를 너무 핍박하지 말게.”
어디선가 마치 거짓말처럼 들려오는 목소리.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돌아갔다.
어?
저 노인네가 왜?
넌 안 불렀어! 용선개만으로 충분해. 가! 가, 인마!
그를 알아본 진무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열려진 일해상단의 정문.
허리가 구부정한 죽립인이 외곽을 포위한 제갈세가의 무인들을 뚫고 천천히 다가왔다. 제갈세가의 무인들은 그가 어떻게 언제 자신들을 지나갔는지도 모르는 표정이었다.
“당신은?”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의아함을 드러낼 때쯤 죽립이 벗겨졌다.
“무, 무풍!”
“양소방!”
그의 얼굴을 알아본 이들은 모두가 눈을 찢어질 정도로 부릅뜨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당금 정무맹에서 절대라 불리우는 자들 중 하나이자 가장 신비한 행적을 가진 인물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개방의 제자들은 일제히 머리를 처박고 엎드렸고, 명충과 제갈무린이 급히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무풍개 어른을 뵙습니다.”
그 이름 한마디가 주는 위력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특히나 제갈무린의 눈은 찢어질 것만 같았다.
왜? 어째서 무풍개가 나타나는 것인가?
“허헛, 개방의 제자들은 그만 일어나라. 나로 인해 고초가 많았으이.”
“아닙니다. 저희가 실수를 하여 비흔께서 내린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만하게. 내가 다 낯이 부끄럽군.”
어느새 다가온 양소방이 용선개를 일으키고 고개를 돌렸다.
명충과 제갈무린은 여전히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그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무풍개 양소방이 가지는 이름값과 정무맹에서 차지하는 위치였다.
“그대들도 그만하고 앉으시게.”
“예. 어르신!”
하지만 명충과 제갈무린은 고개만 들었을 뿐, 차마 앉지 못했다.
용선개가 급히 의자를 내주어 양소방이 앉고 나서야 자리에 앉았다.
“명충, 무린. 오랜만일세.”
“예. 어르신. 근 이 년 만에 뵙습니다.”
명충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네 녀석은 지난밤과 딴판이구나.”
양소방이 진무를 보며 알은체를 했다.
“죄송합니다. 고명(高名)하신 분을 몰라뵙고 예를 다하지 못했습니다.”
예는 무슨. 그럴 리가 있나.
지금 자리에선 어쩔 수 없으니까 예의를 차리는 거지.
하지만 그 모습에 양소방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네놈 성격을 보면 알았어도 딱히 변할 게 없지 싶다만.”
이 거지새끼가.
하여간 더럽게 마음에 안 드는 놈이다.
“어쨌든 개방으로 하여금 저 아이를 감시하게 한 것은 나의 지시가 맞네.”
“아, 그러셨습니까. 제가 미처 알지 못하여.”
명충은 그에 대해 한마디도 따질 수 없었다.
천하의 양소방이 한다는데 어찌 무당의 일개 장로 따위가 감 놔라 배 놔라 한단 말인가? 진무를 반병신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잘하셨습니다.’ 할 일이었다.
“이 아이가 습격을 받고 있더군. 뭐, 습격을 한 건지 받은 것인지는 좀 애매하지만 말일세.”
필요한 말만 해라. 이 노인네야.
진무는 재빨리 끼어들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노인네가 괜히 다른 말을 해서는 곤란했다.
“그때 제가 습격당한 것을 무풍개 어르신께서 모두 보았습니다.”
진무의 말에 무풍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는 공인이다.
그 무엇보다 정확하고, 누구도 반문할 수 없는.
“보았지. 내가 이 아이를 감시하게 한 것은 다른 이유기는 하지만 말이야. 어쨌든 그에 관해 개방이 산 오해는 풀렸으면 좋겠구만.”
“당연합니다.”
명충의 대답에 진무는 조금 심기가 불편해졌다.
내가 안 풀었는데 네가 왜 대답을 하고 난리냐?
하지만 이걸로 끝이다.
다른 이도 아니고 양소방이 인정해 버렸으니 제갈무린은 외통수에 빠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 오면서 개방의 아이들에게 듣자 하니 제갈분가와 무당 간에 작은 마찰이 있었다 들었네.”
“예.”
“음,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제갈분가에서 무당에 실수를 한 게 맞는 듯한데. 어떤가, 내 얼굴을 봐서 이제 그만 물러나 주지 않겠는가?”
양소방이 은근하게 제갈무린을 압박하자 그의 얼굴이 시시각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