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522
22화
운연이 처참한 몰골로 널브러진 뒤, 소동보가 짐승처럼 우리에 갇혀 있던 한씨의 사람들을 이끌고 비사당의 본 장원에 도착했다.
노인, 사내, 여인, 아이…….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초췌하고 겁에 질린 모습을 본 진무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신아.”
“예.”
“시합원이라는 곳에 대해서 좀 알아봐라.”
“음, 알겠습니다.”
반문은 없었다.
웃음기 없는 나지막한 목소리는 그가 지금 상당히 화가 났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각출.”
“예?”
“근처에 개방 지부 있지?”
“예.”
“거지들 좀 싹 모아라.”
“왜요?”
“…….”
이 자식은 몇 해가 바뀌었는데 용기가 변함이 없어, 어째.
반문도 분위기 봐 가면서 해야지.
니가 그래서 아직까지 신이 동생…… 됐다, 말은 해서 뭘 하냐.
진무가 살짝 웃으며 슬쩍 손을 올리자 각출이 잽싸게 담을 넘어 뛰어갔다.
“동보.”
“예.”
“저 새끼 좀 깨워 봐.”
“…….”
진무의 턱짓에 소동보가 맨 처음 정신을 놓아 버린 뒤로 여전히 땅바닥에 늘어져 있는 이역근을 끌고 왔다.
“자결은 안 할 거야. 그래도 괜히 몸부림치면 귀찮으니까 사지근맥만 잘라.”
“예.”
무엇보다, 타인을 짐승처럼 대한 대가는 치러야지.
하명(下命)과 복명(復命)은 들숨과 날숨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진무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소동보의 단도가 이역근의 양팔과 다리를 긋자 피가 솟구치며 이역근이 눈을 번쩍 떴다.
“끄아아악!”
아무리 정신을 잃었기로 생으로 팔다리의 인대를 잘렸으니 그 아픔이 오죽할까?
순식간에 무인으로서도 사람으로서도 제 몫을 하지 못하게 된 그였지만, 바라보는 진무도 팔다리를 그어 버린 소동보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마치 모닥불에 올리기 전에 사냥감을 손질하는 듯한 태도였다.
“……끄으으.”
아픔에 몸부림치며 땅바닥을 구르던 이역근이 독기 가득한 눈으로 진무를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짓이오. 나는 시합원의 행수로 관의…….”
“…….”
흔히 멧돼지가 저렇다.
원체 생명력이 질긴 놈이라 죽어 가면서도 꽥꽥거리곤 하지.
“거 새끼 아까부터 궁금하지도 않은 걸……. 동보.”
이름이 불리자마자 소동보가 매질을 시작했다.
퍽! 퍽퍽퍽퍽!
멍석은 없지만, 멍석말이를 당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아까와는 다른 고통에 이역근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웅크렸다.
사람 명줄 자르는 것에 익숙한 소동보는 맞을 줄은 알아도 패는 방법을 모른다.
해서 더 고통스러울 터다. 그 매가 당최 어디로 향하는지 패는 본인조차 예상하지 못하니까.
그로부터 얼마나 매질이 이어졌을까?
소동보는 익숙하다는 듯 볼에 튄 피를 닦으며 정신을 잃은 이역근의 팔다리의 피를 지혈하고 붕대를 감았다.
그의 저런 무심한 모습은 가끔 진무도 소름 끼쳐 하는 부분이었다.
과연 살막의 후계자, 인간 백정…….
“깨워.”
간결한 명에 차가운 물이 부어지고, 이역근이 다소 겁에 질린 모습으로 정신을 차렸다.
이제 겨우 자신의 처지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나, 나에게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것 같소? 공명정대하며 의협의 상징과도 같은 당신의 평판이…….”
이역근의 말에 진무가 비릿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꺾었다.
“누가 그래?”
“뭐?”
“내가 공명정대하고 의협하다고 누가 그러더냐고?”
“……?”
“잘 모르나 본데, 난 태생부터가 나쁜 놈이야. 아마 중원에서 가장 나쁜 놈일걸?”
“그, 그게 무슨?”
“너 같은 놈의 팔다리를 생으로 뜯어내고, 인두로 눈을 지지며,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끔 고통스럽게 한다 해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말이야.”
“……!”
진무의 차분한 자기소개(?)에 이역근이 눈을 휘둥그레 뜬 채 학질 걸린 사람인 양 몸을 떨었다.
저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을 보면 진짜로 그리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내, 내게 그럴 순 없소. 관이 당신의 행동을 절대로 좌시하지 않을 것이오.”
“…….”
거, 새끼 참 끝까지…….
문득 궁금해졌다.
대체 어떤 관가의 개자식을 뒷배로 두고 있길래 겁을 한껏 처먹은 상황에서도 이리도 기대는 것인가?
“하아……. 좋아, 말해 봐. 그 관이 어떤 새끼들인지.”
“…….”
“세세하게, 빠짐없이 말하면 살려는 드릴게.”
“…….”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였고, 귀찮다는 듯한 표정이었으나 이역근은 누군가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듯 자신이 아는 바를 낱낱이 토해 냈다.
생존에 대한 욕망에 눈이 뒤집힌 한 인간이 토설하는 추악한 진실에 진무는 물론 소동보의 미간까지 찌푸려졌다.
오 년 전, 진무는 역천을 꿈꾸던 한씨의 발호를 막았다.
뜻있는 태자가 보위에 오르고, 한씨의 백성을 품에 안았다. 그들의 죄를 불문에 부치기로 하고…….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부터였다.
모든 것이 끝났다 여긴 진무는 무당으로 돌아갔고, 세상은 다시 평화로워졌다.
정사마를 발아래 꿇린 진무로 인해 무림은 한동안 다투지 않았고, 황제는 새로이 맞이한 신하들과 함께 무너진 국조의 기틀을 세우느라 바쁜 시간을 보냈다.
하나 그들은 그저 미끈하기만 한 과일의 겉모습에 속아 그 안에 벌레가 알을 까고 있다는 사실을 놓친 것이다.
녹림, 수적, 야금당, 흑사방…… 사패천이 무너진 뒤 그들이 다 어디 갔겠는가?
잠시 수면 아래에 숨은 것이다. 소나기가 지나갈 때까지.
그리고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어찌 올곧기만 할까?
정의를 부르짖던 이들도 권력의 맛에 취하면 타락하기 십상이다.
더 많은 권력, 더 편안한 생활, 더 윤택하고 부유한 삶.
이역근이 뱉은 이름들은 권력을 탐해 추악하게 변해 버린 놈들과 그들에게 붙어 콩고물을 주워 먹는 놈들이었다.
언제나처럼 반복되는 역사 속, 먹음직한 과일 속에 숨어 기회만 노리던 벌레들이 대가리를 내민 것이다.
놈들이 저지른 비리들이 어디 한두 가지겠는가?
납치와 매매는 수많은 비리로 인한 문제 중 하나였을 뿐이다.
호패조차 가지지 못하고 백성의 이름에 포함되지 못한 한씨의 잔당들은 뒤탈 없는 좋은 먹잇감이었으리라.
여인은 기녀로 팔리고, 아이는 노비로 팔렸다. 장정은 부호들이 소유한 일터에 새경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노비로 부려졌고, 일하다 죽은 노인들은 묘지조차 없이 들판에 버려졌다.
하나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죄인이라는 굴레를 뒤집어쓴 이들이기에.
으드득.
한참을 듣고 있던 진무의 어금니 갈리는 소리에 이역근이 흠칫 놀라며 말을 멈췄다.
“하오문, 개방, 그리고 각지의 세력들이 네놈들이 행한 일을 몰랐다고?”
“…….”
범의 그르렁거리는 양 포악함이 실린 음성에 이역근이 차마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내리깔았다.
“아, 알아도 어쩌지 못했을 겁니다.”
“뭐?”
“그, 그것이…….”
이역근의 말이 다시 이어진다.
아무리 세상의 모든 정보를 모으는 하오문과 개방이라지만, 그들의 눈과 귀는 도시, 즉 제도권에 집중되어 있다.
사람들에게 배척받고 산으로 들어간 화전민들은 그들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이다.
하물며 납치된 이들은 시합원이라는 곳에서만 은밀하게 거래되니 누구도 그 실상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설사 그 과정에서 몇몇이 잡힌다고 해도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시합원의 진짜 주인은 황제의 그늘에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운 좋은 몇인가는 하오문과 개방에 의해 구해지기도 하였지만 이내 다시 배척받았고, 또다시 짐승처럼 우리에 가두어졌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잡힌 이들은 관의 비호 아래 얼마 가지 않아 풀려났다.
무인들과의 싸움에서 죽은 그들의 손발을 대체할 나쁜 놈은 너무도 많았으니까.
이역근의 길고 긴 토설이 끝을 맺었다.
어지간히도 살고 싶었는지 어떻게든 꾸역꾸역 말을 이어 나갔지만, 더는 들을 말이 없었다.
진무는 얼굴을 구긴 채 한참 동안 침묵했다.
세심하지 못했다.
어쩌면 이리될 것을 모르지 않았는데…….
자신이 세상의 구원자는 아니지만, 이 일만큼은 자신의 책임인 듯해 마음이 무거웠다.
어느 순간 자신은 과거에 거리를 떠돌며 불우한 삶을 살았던 어린 혁련무강을 수도 없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꽈아악!
“네놈이…… 네놈들이…….”
“……?”
언제 깨어났는지, 운연이 이역근의 멱살을 틀어쥐고 분노를 토했다.
그의 또 다른 이름 한경홍. 그 무게와 책임에 기인한…….
진무는 천천히 일어나 운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단단히 멱살을 틀어쥔 그 손을 부드럽게 잡아챘다.
“놓으십시오. 이런 놈은, 이런 놈은!”
“…….”
진무가 자신을 쏘아보는 운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한무화의 사생아.
아직 그의 삶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다. 아니 듣고자 하지 않았기에 묻지도 않았다.
어쨌거나 참 우라질 인연(因緣)이다.
거리를 떠도는 부랑패의 꼬마로 살다 어느 날 몰매를 맞고 죽어 가던 자신에게 묵룡기를 전수한 스승.
그때 얻은 힘으로 낭인의 삶을 거쳐 사패천주가 된 자신.
그때 무너뜨린 무당의 도동 진무의 몸에 들어가, 청무 조사가 익힌 양의심공을 찾아 중원을 유랑하며 맺어 온 과거와 현재의 인연들.
그 청무가 쫓아냈던 한씨의 세력, 궁과의 싸움.
정, 사, 마.
그리고 다시 묵룡의 연으로 만나게 된 운연.
어쩌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모두 기다란 끈에 연결되어 이어진 듯하지 않은가?
마치 자신이 직접 한경홍에게 내린 이름 ‘연(緣)’처럼…….
그러고 보면 제 삶은 구름이 흘러가는 듯 자유로우면서도, 인연의 연속이었다.
어쩌면, 북리도천의 몸을 차지했던 불꽃 귀신 놈과의 싸움에서 태극을 이루었던 그 날.
선경(仙境)을 보았음에도 발 들이지 못했던 것은 아직 인연의 끝자락에 닿지 못해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묵룡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진 긴 끈의 마지막에는 자신이 완전히 수습하지 못한 한씨의 잔당에 대한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운연이라는 놈과 만나게 된 것이나, 그를 통해 지금의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 모두가 사실은 인연의 실타래에 얽혀 있는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기나긴 생각 끝에 피식 웃은 진무가 운연에게 말했다.
“이놈 하나 죽인다고 세상이 달라질 것 같으냐?”
“…….”
“아서라. 세상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
“강자에겐 한없이 너그러우나 약자에겐 매일이 지옥 같은 곳이지. 그건 변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모두가 권력을, 힘을 가지려 아등바등하는 게지.”
“…….”
“시간이 지나면 변할 것 같으냐? 누군가 바꾸고자 하면 바뀔 것 같으냐? 아마 수천 년의 역사가 흘러도 매한가지일 것이다.”
“…….”
답하지 않는 운연을 한참 응시하던 그가 담담히 말을 이었다.
“다만, 진정으로 바꾸고 싶다면 네가 강해지면 된다. 저들의 행태가 못마땅하고, 한씨의 굴레에 갇히게 된 이들이 가엽게 여겨지면 네가 강자가 되면 된다. 강자가 되어서도 네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행하면 된다.”
“하, 하지만……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이미 도처에서…….”
“착각하지 마라.”
“……?”
“네놈이 신이라도 될 수 있을 것 같으냐? 어차피 다 막을 수 없어. 눈앞에 보이는 것이나 해결하는 게 고작이지. 뿐이냐? 네놈이 지나갈 때는 숨었다가 지나가고 나면 또 또 버러지 같은 놈들이 활개를 치겠지. 역사가 그리 반복되어 온 것처럼…….”
“그렇다고 해도 이들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알아. 그래서 나서는 거야. 니가 아닌 내가.”
“예? 그게 무슨?”
“애송이인 너는 할 수 없지만 나는 할 수 있거든. 이건 처음부터 내 문제였기도 하고.”
“…….”
운연이 진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나 진무의 시선은 이미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그래, 이건 자신의 문제다. 자신이 완전히 끝맺지 못한 문제.
하니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
“운연.”
“……예?”
“이제부터 너는 연자라는 이름으로 묵룡을 이어 가라. 너와의 만남은 어쩌면 묵룡을 전하지 못하여 생긴 인연일지도 모르니까.”
“……?”
알 수 없는 말에 운연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뜬금없이 인연이라니……. 하지만 묻는다고 해서 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둘이 각기 다른 곳을 보며 나란히 침묵하는 와중이었다.
“헉헉! 천주님! 도착했습니다.”
“…….”
때마침 각출이 거지 떼를 잔뜩 이끌고 비사당으로 들어서자, 진무가 천천히 몸을 세웠다.
“개방은 들어라.”
“예!”
일백에 달하는 개방도가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강대한 존재감을 뿜어내는 진무의 앞에서 무당과 개방의 경계 따위는 무의미했다.
이제는 모두가 안다.
가볍게 걸을 때는 그저 무당의 도사에 불과하나, 무겁게 걸었을 때는 그가 곧 무림이라는 것을…….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을 원래 있던 곳으로 안전하게 돌려보내고, 그들을 잡아 온 놈들을 모조리 찾아내라.”
“예!”
고개를 숙이며 힘차게 외치는 개방도들에게서 시선을 뗀 진무가 고개를 돌렸다.
“각출!”
“명하십시오.”
이번만큼은 각출도 반문하지 않았다.
진무의 음성이 더없이 무거웠고 근엄했기 때문이다.
“지금 즉시 중원 모든 곳에 나의 뜻을 전해라.”
“……!”
중원 모든 곳. 사람들이 천하(天下)라 부르는 대지.
지금 진무는 정사마를 넘어, 무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모든 이에게 명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시합원, 그리고 그와 결탁해 죄를 지은 무림인들은 이유를 불문하고 모조리 색출한다.”
“예!”
“그리고 한 달 후 정무맹, 마교, 현 사패천의 모든 수좌에게 천중산에 모이라 전해라.”
“알겠습니다.”
우렁차게 외친 각출이 다시 뛰어나갔고, 개방도들이 비사당에 잡혀 와 고초를 겪고 있던 사람들을 수습했다.
그리고 얼빠진 표정으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는 운연을 향해 진무가 빙긋 웃었다.
“따라와라.”
“예? 어딜?”
“황궁.”
“예?”
“보여 주마. 진짜 강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진무가 걸음을 내디뎠다.
혁련무강 시절에도 그랬고 진무인 지금도 그렇듯, 대가리부터 조져 놓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