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523
23화
“누, 누가 왔다고?”
“대무군입니다.”
“…….”
대전 내관의 말에 금빛 용포를 두른 채 상소문을 살피던 젊은 황제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대무군(大武君).
전에 없던 관직이었으나, 모두가 아는 관직이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해 황제가 직접 교지를 내린 것이다. 벗이자 스승이며, 은인이나 다름없는 진무라는 무인을 위해서.
“하핫! 그리 청하여도 등선한다고 코빼기도 비추지 않더니 어쩐 일이란 말이냐?”
“그게…….”
“되었다. 무슨 용무면 어떻단 말이냐? 어서 안으로……. 아니다. 내 직접 맞으러 갈 것이다.”
황제가 자리에서 냉큼 일어나는 순간, 대전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그리고 활짝 열린 문으로 쏟아지는 빛과 함께 그가 나타났다.
“여, 황제. 오랜만.”
“……!”
대충 입어 준다는 느낌으로 걸친 관복, 예의 따위는 애초에 차릴 생각도 없어 보이는 거친 말투에 황제의 얼굴이 기쁨으로 물들었다.
누군가에게는 대역무도함을 논할 법한 인사였으나, 진무에게는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고 해야 하나?
다만,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대전 내관들이 얼굴을 찡그리고, 그를 감시하듯 따른 금의위의 무장들이 은은한 살기를 품었다.
아무리 구국의 영웅이라 칭송받는 그이지만 마땅히 지켜야 할 법도가 있다.
그의 앞에 있는 자는 다름 아닌 천하의 주인. 세상 어떤 누구도 그의 앞에서 고개를 빳빳하게 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것도 용납할 수 없는 죄이거늘 반말이라니…….
“대무군은 말을 삼가고 예를 지키시오.”
“……?”
언짢음이 가득 묻어나는 어조에 진무가 인상을 와락 구겼다.
안 그래도 적잖이 짜증이 난 참이었다.
뭔 놈의 입시 절차가 이리도 까다로운지.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황제를 만나러 왔다 하면 예! 하고 들여보내면 될 걸 가지고 수차례 검문검색에, 창검이 번뜩이는 골목을 몇 번이나 둘러 지나고…….
지붕 몇 개 밟고 곧장 대전으로 뛰어들려다가 나름 예를 차린다고 순순히 따라 줬더니 이번엔 뭐? 관복?
진짜 다 패 버리려다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관복까진 웃으며 걸쳐 주었다.
그랬더니 뭐? 산공다안?
이런 미친놈들이. 태극을 이룬 마당이니 먹는다 해도 아무런 효력이 없겠지만, 기분이 그렇지 않은가?
누가 황제를 죽이기라도 한대? 해서 깔끔하게 거절해 줬더니만…….
궁을 지키는 놈들이 죄 튀어나와서 대전 앞을 가로막고, 지휘사의 직책에 있는 모빈(牟斌)이라는 놈이 금의위 최정예 백을 이끌고 죽자 사자 쫓아왔다.
백 명으로 뭘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끗만 더 해라. 여차하면 황제만 빼고 다 날려 버리려니까.
“그만! 천무장군은 그만 물러나라.”
“폐하! 아니 됩니다. 어찌 한낱 무부가 무례를 범함을 용인하십니까?”
“어허! 물러나라지 않는가?”
“폐하!”
“짐이 자네의 마음을 모르지 않으나 그는 나의 벗이며, 조정을 지켜 낸 은인이다. 찾아온 것만으로 기쁨을 금할 길이 없는데, 자네가 지금 짐의 즐거움을 막는 것인가?”
“…….”
엄한 질책에 모빈이 마지못해 진무의 곁에서 물러나며 꾸역꾸역 말을 덧붙였다.
“송구합니다, 폐하. 허나 대전 내에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지키는 것만은 허락하시옵소서.”
“음…….”
모빈의 말에 황제가 슬쩍 진무의 눈치를 살피다, 진무가 피식 웃자 이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라.”
“황공하옵니다.”
“…….”
방귀만 뀌어도 뒈질 놈들이 지키거나 말거나.
“자, 이리 가까이 와서 앉으시오, 대무군.”
“…….”
황제의 들뜬 손짓에 입구에 섰던 진무가 성큼성큼 걸어 그 앞으로 다가가 풀썩 주저앉았다.
“어허, 어찌 그리 불편한 자리에 앉는단 말이오? 뭣들 하느냐! 서둘러 대무군의 자리를 마련하지 않고!”
황제가 내관들을 독촉하자 진무가 손을 휘휘 저었다.
“됐어. 오래 있을 것도 아니고, 몇 마디 말만 전하면 되니까.”
“그래도…….”
“됐다니까.”
“그럼 이해하시게. 내 신분이 신분인지라 옥좌에 앉아 맞이하겠네.”
“…….”
그러거나 말거나.
“한데 옆에 있는 이는 누구인가?”
대전 시비들이 진무의 앞에 서둘러 작은 탁자를 놓고 음식을 차리는 사이 황제가 물었다.
“얘? 한경홍.”
“한……?”
“어, 한무화의 사생아라더군.”
심상한 투에 운연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안 그래도 성으로 들어오는 순간부터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적이나 다름없는 주씨의 심장부가 아니던가?
혹여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날까 봐 노심초사했는데……. 대놓고 자신의 이름을 알려 줘? 와중에 친절하게 출신까지 거론해?
저 사조 놈이 미치지 않고서야!
당당해도 너무 당당하게 퍼질러 앉은 진무의 뒤에 고개를 처박은 채 엎드렸던 운연이 연신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슬쩍 들었다.
“…….”
“…….”
아, 제기랄.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버린 황제하고.
거기다 대전 안 벽을 가득 메운 무장들에게서 살기가 살기가…….
이제 어쩐단 말이냐? 이 염병할 사조 놈아.
너는 상관없을 수도 있겠지. 근데 나는?
강자의 면모 보기도 전에 목이 뎅겅 베이게 생긴 나는!
“그가 한무화의 사생아란 말인가?”
황제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지자 진무가 시큰둥하게 답했다.
“왜? 그럼 안 되나?”
“…….”
입을 꾹 다문 황제를 빤히 응시하던 진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혀를 찼다.
“쯧쯧, 이럴 줄 알았지, 이럴 줄 알았어.”
“……이럴 줄 알았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무슨 말은. 윗물이 이 모양이니 아랫물이 개판이라는 말이지.”
“뭐?”
“너도 그렇고, 네 뜻을 가장 가까이서 따르는 무장 놈들도 그렇고, 다들 이딴 반응이다 보니 나라 꼴이 개판이라는 소리다.”
“…….”
진무의 거침없는 나무람에 황제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철컥!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무기를 움켜쥐는 쇳소리가 울려 퍼지고, 무장들이 뿜어내는 살기가 진무에게 집중되었다.
“대무구운!”
금의위의 수장, 모빈이 대전을 쩌렁쩌렁 울리는 호통과 함께 검을 뽑으려 했다.
“왜, 덤비려고?”
“뭐라?”
“해 봐. 내 기분이 그래. 아주 어이가 없어. 지금 기분 같아서는 싸그리 목 따고 황궁을 뒤엎고 싶거든.”
“…….”
“결과가 궁금하면 뽑아 봐도 돼. 내 말이 진짜일까 아닐까 대가리 굴리지 말고.”
흘려들어도 좋을 만큼 지나가는 말투였지만, 모빈은 검을 뽑을 수가 없었다.
나른하게 그를 바라보는 진무의 눈빛에 압도당한 탓이었다.
“……해 보라니까?”
진무가 피식 웃는 순간.
드드드드.
대전 바닥이 통째로 진동하기 시작했다.
끄그그그, 우지직.
대전의 지붕을 받친 아름드리나무 기둥들이 빨래 짜듯 비틀어져 갈라지고, 천장이 무너질 듯 흔들리며 먼지가 쏟아졌다.
찰나의 변화였다.
그의 무학이 하늘에 닿았다는 말을 귀가 닳도록 들어 온 모빈이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이게 일개 사람이 가진 힘이란 말인가?
마치 수렁 속에 빠진 것처럼 옴짝달싹도 못 하는 몸에 점차 힘이 빠지고, 시간이 흐를수록 숨 쉬는 것조차 답답해졌다.
“끄으…….”
진무가 지배한 공간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무장 중 하나가 거친 신음을 토했다.
“그만!”
“…….”
“대무군, 그 정도면 되었네. 저들도 충분히 알아들었을 것이니 그만하고 힘을 거두시게.”
얼굴을 잔뜩 찡그린 황제의 외침에 진무가 무장들에게서 서늘한 시선을 거두었다.
“커허헉, 헉, 헉…….”
힘이 한순간에 걷혔기 때문일까?
벽채를 채웠던 무장들이 일제히 쓰러져 바닥을 짚은 채 가쁜 숨을 토했다.
그나마 무릎만 꿇은 모빈은 체면을 지킨 셈이었다.
“내가 말하고 있는데 다시 끼어들면 전부 모가지가 분리된 채 실려 나갈 줄 알아.”
이제는 누구도 그 흉흉하기 그지없는 경고에 답하지 못했다.
“휴우, 어찌 된 게 그 거침없는 성격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는가?”
“사람이 변하면 죽는다는 말도 몰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황제의 물음에 진무가 퉁명스럽게 답했다.
“어쨌든 좀 놀랐네. 한무화의 아들이라니…….”
“말했잖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나라 꼴이 개판인 거라고.”
“…….”
황제의 표정이 다시금 굳었다.
그가 아는 한 진무는 허튼소리를 할 위인이 아니었다.
“음, 사연이 있나 보군. 자세히 말해 보게.”
“한무화의 백성.”
“……?”
“품는다 하여 그런 줄만 알고 있었더니…….”
진무가 차분히 그간의 일을 이야기하자 황제의 얼굴에 은은한 노기가 서렸다.
“보아하니 몰랐던 모양이네.”
“알았다면…… 내버려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를 꽉 다문 황제의 시선이 진무를 지나 운연에게 닿았다.
“한경홍이라 했던가?”
“……지금은 운연이오.”
감히 황제에게 반존대로 응했음에도 황제는 그를 조금도 나무라지 않고, 오히려 굳었던 얼굴을 펴고 진심으로 미안해했다.
“대무군의 말대로 그대의 이름을 듣고 놀라기는 했으나 그것이 그대가 가진 과거로 인한 편견은 아니었다네. 그저 아직 짐의 수양이 모자라 솥뚜껑을 보고도 놀랐음이지.”
“……!”
“미안하게 되었네. 과거에는 자네의 백성인지는 모르나, 이제 짐의 백성이 된 자들이 그와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지 몰랐네. 만인을 아우르는 위치에 있는 황제의 말은 농이라도 무거워야 함인데, 스스로 한 말조차 지키지 못했으니 자네를 볼 낯이 없네.”
황제의 진심 어린 사과에 진무가 실소를 머금었다.
뭐, 예상했던 그대로다.
황제. 아니,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을 피해 지하실에 숨어 살았던 태자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손안에 잡은 힘이 쥐꼬리만큼도 없으면서 자신에게 충성한 이들의 목숨에 책임을 지려 했고, 역천을 꿈꾸었던 이들마저 용서해 품에 안으려 했던 그때의 꼬맹이 그대로였다.
돼먹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면 볼기라도 때려서 바로잡아 줄 생각이었지만, 저 모습을 보니 굳이 그럴 필요는 없겠고…….
“신.”
나지막한 부름에 천장에서 무언가 툭 떨어졌다.
진무의 명을 받고 떠났다가 뒤늦게 합류하여 아까부터 대전 지붕에 숨어들어 대기하던 황신이었다.
“어헉!”
갑자기 떨어진 그의 모습에 황제와 금의위의 무인들, 심지어 운연까지 식겁한 표정을 지었다.
그 많은 병력이 지키고 있는 황궁을 저리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다니…….
“조사하라는 건?”
“여기 있습니다.”
황신이 진무에게 작은 서신 하나를 내밀었다.
시합원에 대한 내용이 적힌 서신에는 그들과 결탁한 관리들의 이름이 빼곡했다.
“시간이 부족해 완전히 조사하지 못했습니다.”
“됐어. 나머진 알아서 하겠지.”
진무가 받아 든 종이를 황제에게 던졌다.
휘이익.
허공섭물로 날린 종이가 곱게 날아가 황제의 손에 내려앉았다.
“음…….”
한참을 읽어 내리던 황제가 미간을 찌푸리며 깊이 침음했다.
생각지도 못한 이름들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훑어보니 그의 이름도 있던데? 이제 어쩔 셈이지?”
“어쩌긴? 이리 매를 맞았으니 당장에 움직여야지. 나의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는데 어찌 여가를 즐길까?”
“……좋아. 그럼 딱 한 사람만 내게 넘겨라.”
“……!”
딱 한 사람이라는 말에 그가 누구인지를 짐작한 황제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진무가 전한 종이의 맨 위에 적힌 그.
한씨를 따르던 이들에게 가장 많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백성으로 맞이하는 것을 오랫동안 반대해 온 인물…….
“뭐, 신경 쓰이면 말고.”
“…….”
진무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자네는 그와도 인연이 많으니……. 그에 대한 처분은 자네에게 맡기겠네.”
“괜찮겠어? 잘 생각해. 내가 가면 목을 베는 정도로 끝나진 않아.”
“이미 결정한 일이네.”
“좋아. 그럼 그렇게 알겠어.”
진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황제가 곧장 주위를 향해 외쳤다.
“금의위장, 천무장군 모빈은 지금 즉시 황명을 받으라.”
“……!”
대전을 낮게 울리는 위엄 가득한 목소리에 모빈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신 모빈! 황명을 받듭니다!”
“지금 즉시 동창과 서창의 제독을 입시하라 전하라!”
“예! 폐하!”
모빈이 한달음에 대전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럼 다음에 보지.”
“……벌써 가는가?”
“일 끝났으면 가야지. 관에 오래 머물러 봐야 좋을 게 있나?”
“여전히 정이 없어.”
“뭐 하루 이틀인가. 그럼 수고해.”
“…….”
씩 웃으며 가볍게 인사하곤, 곧장 몸을 돌려 걸어가는 진무를 바라보던 황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의 발길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황위에 오른 뒤, 관직을 내려놓고 한적한 시골로 내려가 조용히 지내겠다 했던 자신의 숙부.
영왕 주견린.
그가 시합원의 주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