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525
25화
“천주님, 어찌할까요?”
당당하게(?) 형 자리를 차지한 각출이 다가와 의젓하게 물었다.
그사이 황신의 엉덩이는 각출 못지않게 설움이 쌓인 소동보에게 넘어간 채였다.
“똑바로 대!”
“…….”
“어디 둘째 형님 앞에서 눈을 부라리고!”
황신은 그야말로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수년간 켜켜이 쌓인 업보를 감당해야 했다.
어쩌겠는가? 지금까지 지가 한 짓이 있는 것을.
그러게 처음부터 인정으로 베풀었어야지, 쯧쯧.
곡소리 터져 나오는 그 상황에서도 진무는 그저 스산한 눈으로 환히 불을 밝힌 영왕의 장원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결과는 정해졌다.
영왕이 이렇게 막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종친이라는 그 고귀한 피를 믿었기 때문일 테다.
아마 그를 따른 놈들도 철석같이 믿었겠지. 황가의 핏줄이자 큰 어른인 영왕을 도우면 설사 잘못된 일이라 해도 면책이 가능할 것이라고.
시합원과 관계를 맺은 모든 놈들이 그리 생각했을 것이다.
하나 고귀함이라는 것은 출발점의 차이일 뿐, 살아가며 지키지 못하면 절대로 유지되지 않는다.
타락하지 않고, 스스로 수신(修身)함으로써 지켜야만 하는 것이다.
하기에 타고나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어렵다.
영왕이여…… 안타깝구나.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짓이 황신을 한풀이용 북으로 대하는 소동보와 각출의 모습과 무엇이 그리 다르겠는가?
나는 지금 매를 들었고, 황신의 엉덩이가 부푸는 것처럼 너도 네가 한 짓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새 부대에 새 술이 담겼으면 인정하고 물러났으면 좋았을 것을. 과거의 너는 황실과 조정을 지키는 든든한 기둥이었으나, 지금은 그 집착에 찌들어 패악을 일삼는 괴물이 되었구나.
영왕이여, 나는 정의의 사도 따위가 아니다. 누구보다 탐욕스럽고, 누구보다 비열하고 나쁜 놈이다.
남들은 마치 세상을 구원이라도 한 것처럼 포장하여 말하지만, 나는 그저 나의 세상을 지키고자 싸웠을 뿐이다.
하나, 나 같은 무뢰배라 할지라도 반드시 지키는 것이 있다. 내가 가진 힘을 무림 안에서만 휘두른다는 것이다.
칼을 든 자는 칼 쓰는 자들의 세상에 존재했을 때만 의미가 있는 것. 하나 너는 뽑아서는 안 될 칼로 베어서는 안 될 이들을 베었다.
위정자로서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할 책임을 등지고, 되레 그들의 삶에 해악을 끼치다니…….
세상이 나누는 옳고 그름의 가치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의 너는 타인의 세상을 범했고, 내가 지켜 온 가치를 무시했다.
내가 만든 울타리를 범하였으니, 내 친히 벌을 내려 주마.
진무의 눈동자가 어둠보다 짙게 물들었다.
“각출아.”
“예, 천주님.”
“관계없는 이들이 피해를 봐서는 안 되겠지?”
“……예?”
진무의 말에 각출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린다.
“관계없는 이들…….”
“예?”
“……?”
“뭐가요? 어떤 사람들요? 다 죽이는 거 아니었어요? 그건 걱정 마십시오. 제가 놈들의 대가리를 모조리 깨 버리겠습니다!”
“…….”
각출이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이 새낀 참…….
기껏 분위기 오지게 한번 잡아 봤구만.
신이는 한 번만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었는데. 신이는…….
그래, 구관이 명관이란 말이 괜히 있겠는가?
“휴, 신아.”
“크으윽, 예.”
“그냥 니가 형 해라. 그게 편하겠다.”
일순간 소동보가 들고 있던 뼈다귀가 허공에 정지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황신이 형이라고.”
“…….”
다시 한번 그들의 처지에 대해 정의하는 진무의 말에 엎드린 황신의 눈동자에 독기 어린 희열이 감돌고, 소동보의 눈빛이 당황으로 잘게 떨렸다.
그리고…… 황신과 시선을 마주친 각출은 밀려드는 섬뜩함에 눈을 둥그렇게 떴다.
잠깐만요. 천주님?
예고도 없이 그렇게 형의 위치를 다시 바꿔 버리면 어떻게 하나요?
다 갚아 주려면 아직 한참 남았는데 일장춘몽이라니요?
“마, 말도 안 됩니다!”
“뭘?”
“한번 정했으면 끝이지, 결정을 번복하시다니요? 이런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
자신에게 닥쳐올 미래를 예상하고도 남았던 각출이 바득바득 대들자 진무가 눈을 가늘게 떴다.
허, 이 새끼 보게? 잘하면 치겠는데?
“인정할 수 없습니다!”
“…….”
어쭈? 점점?
억울함에 사로잡혀 눈까지 치뜨는 각출의 모습에 진무가 슬쩍 주먹을 움켜쥐었다.
참, 말로 해서는…….
빠가가각!
“……?”
안 될 새끼……는 맞는데.
내가 지금 이기어주먹을 썼나. 휘두르기도 전에 웬 타격음?
“이런 망할 거지새끼가! 천주님 말씀하시는데 얻다 대고 눈깔을 부릅떠? 눈깔 빼서 보물찾기 한번 해 볼래?”
언제 일어났는지 각출의 뒤통수를 냅다 후려친 황신이 눈을 부라리며 호통을 쳤다.
“이노옴! 감히 형님 뒤통수를 까? 이게 무슨 짓이냐!”
졸지에 동생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생긴 각출이 머리를 움켜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도, 동보는 뭐 하느냐! 이 버르장머리 없는 동생 놈을 당장 꿇리지 않고!”
아까는 형이라는 지위로 찍어 눌렀을 뿐, 각 잡고 맞붙으면 아무래도 가망이 없었다. 각출이 동아줄을 쥐는 심정으로 소동보에게 도움을 청했다.
“하아, 정말…….”
눈을 요리조리 굴리던 소동보가 한숨을 쉬며 가세했다.
“천주님 계시는데 이 무슨 짓이란 말이냐! 버릇이 없어도 어찌 이리 없어!”
“옳지, 잘한다! 이 동생 놈을…….”
반색하며 소동보를 응원하던 각출이 문득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어째 노려보는 방향이…….
“도, 동보야, 저쪽, 저쪽에다가 야단을 쳐야지.”
“이노옴! 무슨 개소리냐! 천주님께서 방금 하신 말씀을 못 들었느냐! 황신 형님께서 다시 형이 되었거늘…….”
“…….”
“형님, 좀 전까진 죄송했습니다. 제가 아주 잠시 헛된 꿈을 꾸었던 모양입니다. 저 빌어먹을 거지 놈을 믿고 형님의 몸에 손을 대다니.”
“음, 이해한다.”
“감사합니다. 형님의 은혜가 하해와 같습니다.”
“…….”
“하니 이제 이 둘째에게 명을 내리십시오. 저 버르장머리 상실한 거지 놈을 제가 책임지고 혼쭐을 내겠습니다.”
냉큼 황신에게 고개를 숙이는 그의 간사한 작태에 각출이 나라 잃은 표정으로 눈을 끔벅거렸다.
저 망할 살수 새끼. 니가 박쥐냐? 박쥐야?
내가 전서구를 세 마리나 지원해 줬는데…… 이런 식으로 나를 배신해? 둘째 자리만 지키면 그만이라 이거야?
“각출아…….”
황신이 음울한 목소리로 그를 부르며 소동보로부터 뼈다귀를 넘겨받았다.
더도 덜도 말고 딱 죽일 것 같은 눈빛에 각출이 다급히 운연을 쳐다봤다.
그의 눈빛에 어린 절절한 생존 의지에 운연이 안타깝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근데 이랬다저랬다 해도 되는 건가요? 이해는 안 되지만, 왠지 저들에겐 사활이 걸린 문제 같은데.”
“황신이 일을 더 잘하는 걸 어쩌냐? 생각해 보니 각출이와 아이들은 좀 이상하기도 하고. 거지 패거리 같잖아.”
“뭐, 그런 느낌이 없잖아 있긴 하네요.”
“…….”
진무와 운연의 대화를 들은 각출의 얼굴이 황당하다는 듯 일그러졌다.
각출과 아이들이 어때서!
황신과 아이들보다 입에 쫙쫙 달라붙는 게 정감도 가고 좋구만!
하지만…… 아무래도 저 망할 개천주가 이미 마음을 정한 모양이니…….
“형니임! 이 둘째 동생 놈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요!”
각출이 황신의 앞에 납작 엎드리며 소리 높여 외치자 둘째 자리를 고수해야 했던 소동보가 냉큼 끼어들었다.
“용서해선 안 됩니다, 형님! 저놈을 매우 쳐야 합니다. 제게 둘째 자리를 주신다면! 형으로서 막내가 다시는 반항하지 않도록 철저하게 교육하겠습니다!”
둘째 자리를 놓고 아웅다웅하는 그들을 바라보던 운연이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곧 전투가 벌어질지도 모를 심각한 분위기에서도 참……. 무슨 야유회를 나온 것만 같지 않은가?
“심심하진 않으시겠네요, 사조님.”
“음. 아무래도?”
운연의 말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진무가 황신을 불렀다.
한 편의 경극 같은 그들의 서열 싸움을 계속 구경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먼저 닥친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였다.
“신.”
“예? 예, 천주님.”
“적당히 하고 움직이자.”
“……음, 알겠습니다. 저들을 섬멸하는 것은 일도 아니나, 혹여 그 과정에서 관계없는 이들이 피해를 당할까 걱정하시는 거지요?”
“…….”
“하면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일단 제가 먼저 들어가 내부를 살피겠습니다. 저들이 깊이 잠들면 사람들을 구해 내고, 신호를 보내겠습니다.”
“좋아.”
따로 지시하지 않아도 앞서서 해야 할 일을 척척 말하는 그의 일머리에 진무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형은 이래야지.
“동보.”
“예.”
“나는 남쪽, 너는 북쪽을 맡는다. 안으로 들어가 일단 놈들의 경계망과 전서구실부터 무력화시켜. 최대한 조용하고 깔끔하게.”
“알겠습니다.”
“각출!”
“예? 예! 형님!”
“지금 즉시 인근에 포진한 무인들에게 포위망을 좁히라고 전해라. 안쪽의 상황이 정리되면 사람들부터 안전하게 피신시킨다.”
“……예.”
각출이 빵빵하게 부풀린 볼을 하고서도 즉시 대답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어.”
진무의 허락이 떨어지자 황신과 아이들이 각자의 무기를 들고 몸을 날렸다.
은신으로 모습을 감춘 그들 셋을 보며 진무는 생각했다.
각출이는 평생 형이 되기는 글렀을지도…….
* * *
시간이 지루하게 흘렀다.
어느덧 깊었던 밤이 지나가고, 멀리 동쪽 하늘이 밝아 오기 시작할 때쯤, 운연이 진무를 불렀다.
“사조님!”
“…….”
진무가 팔짱을 풀고 몸을 일으켰다. 내내 기다렸던 황신의 신호가 드디어 온 것이다.
안전하게 피신시키느라 시간이 제법 걸린 모양이었다.
워낙 꼼꼼한 녀석이니 사람들을 빠짐없이 구해 냈을 것이고…….
이제 장원에 남아 있는 것은 때려 부숴도 상관없는 놈들뿐이렷다?
“가자.”
“예.”
천천히 걷는 듯하던 진무의 걸음은 어느새 장원의 담벼락에 닿아 있었다.
“사조님?”
“……?”
진무가 막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 순간, 그보다 살짝 늦게 도착한 운연이 의문을 제기했다.
“문은 저쪽인데요?”
“알아.”
“……예?”
눈이 있는데 모를 리가 있나.
운연의 말대로 문은 담벼락의 좌측 끝자락에 있었고, 앉아 있던 곳에서 직선으로 내려온 곳은 담벼락의 한중간이었다.
해소되지 않는 의아함에 운연이 고개를 살짝 꺾자, 진무가 피식 웃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난 직진밖에 해 본 적이 없거든. 돌아가는 건 성미에 안 맞아서.”
“예? 그게 무슨?”
무슨 소리긴, 이런 소리지.
슈우욱! 콰아아앙!
진무가 아이 머리를 쥐어박듯 담벼락을 주먹으로 톡 건드리자 돌을 쌓아 올려 만든 담벼락이 포탄을 때려 맞은 것처럼 터져 나갔다.
“문 생겼다.”
“…….”
운연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히죽 웃으며 안으로 발을 옮기는 진무를 쳐다보았다.
내가 저런 인간을 죽이려고 했었구나……. 포기하길 잘했다.
그가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고 뒤따라 안으로 들어서는 사이, 그 거친 폭음에 잠을 깬 장원의 호위 무인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하긴, 그 소리를 듣고 안 깨는 것이 더 이상하긴 하지.
순식간에 대형을 갖춘 그들이 무너진 담벼락으로 들어온 진무와 운연을 발견하고 당장에 칼을 빼 들었다.
“뭐 하는 놈들이냐!”
“뭐 하는 놈들이긴. 이 시간에 담벼락 부수고 온 사람이 손님이겠냐?”
“뭐? 이런 미친놈이, 예가 어딘 줄 알고!”
“거, 새끼 참. 설마하니 어딘지도 모르고 왔을까 봐?”
신새벽에 장원의 담벼락을 부수고 들어와 또박또박 말대꾸하는 진무의 조롱 섞인 미소에 무인의 미간이 와락 찌푸려졌다.
“뭣들 하느냐? 저 정신 나간 놈을 당장에 잡아 꿇리지 않고!”
그의 외침에 나머지 무인들이 일제히 진무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니, 달려들려 했다.
슈각! 퓨퓻! 뻐어억!
서로 다른 세 가지 소리가 허공을 가르고, 무인 셋이 쓰러졌다.
뼈다귀에 맞고 쾌속하게 튕겨 나간 자, 날카로운 백광에 머리가 몸통과 분리된 자…….
“크어억, 커컥.”
“…….”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것은 목에 구멍이 뚫린 자였다.
몇 걸음 걷지 못하고 털썩 쓰러진 그의 앞에, 세 명의 사내가 나타났다.
“이 새끼들이 미쳤나? 뉘 앞이라고 칼을 빼 들고 지랄이야?”
혓바닥으로 비수를 핥으며 스산한 위협성을 뱉는 황신이 무인들을 노려봤고, 그 옆으로 양손에 비수를 든 채 살기를 뿌리는 소동보와 뼈다귀를 어깨에 걸쳐 든 각출이 무인들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사람들은?”
“모두 구했습니다. 장원 외곽은 물샐틈없이 포위했고, 남은 것은 장원을 지키는 무사들뿐입니다.”
“그래.”
절도 있는 황신의 보고에 고개를 끄덕인 진무가 앞으로 나서서 왈패처럼 짝다리를 짚었다.
“가서 영왕 불러와라. 전부 뒈지기 싫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