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527
27화
표변한 말투와 함께 진무의 기세가 싸늘해졌다.
앞을 지킨 무장들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검의 손잡이를 잡았고, 황신과 아이들이 당장에 튀어 나갈 듯 자세를 잡았다.
하나 영왕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은 모습으로 웃었다.
“진무 도장. 내 말하지 않았는가? 나는 황실의 종친일세. 황제의 숙부이며…….”
“지랄하네.”
“…….”
진무가 피식 웃으며 말을 끊자 영왕의 눈가가 잘게 씰룩거렸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냐?”
“……뭐?”
“말 상대를 해 줬더니 지가 아직도 황실의 종친인 줄 아나? 그리고 황실의 종친이면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는 거냐?”
“죄라고?”
“왜 그랬는지 어디 들어나 보자.”
“…….”
“한무화와 그 일당이 죽음으로써 끝난 일이었다. 그들은 이제 아무런 힘도 없는 백성일 뿐이었어.”
진무의 말을 끝까지 듣고 있던 영왕이 벌떡 일어났다. 곁에 있다 떨어져 깨진 찻잔 조각처럼 날 선 표정이었다.
“누구 마음대로?”
“뭐?”
“누구 마음대로 그들이 이 땅의 백성이란 말이냐?”
“…….”
짓씹듯 내뱉는 그의 눈동자에는 어느새 시뻘건 열기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한낱 무뢰배인 네놈은 모르겠지.”
“…….”
“백성? 웃기는 소리. 그들은 후환의 씨앗이다. 그들을 끌어안아? 멍청한 소리.”
“…….”
“종묘사직을 지키기 위해 그 많은 이들이 죽었다. 그들을 뒤쫓던 충의지사들이 놈들의 칼날 아래 죽었다. 왜인지 아느냐?”
“…….”
“태조께서 세운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다. 이 나라가 만대에 걸쳐 존속하기 위해서란 말이다.”
“…….”
“멍청한 황제 놈은 모른다. 그들을 포용한 것이 선정이라 착각하는 것이지. 언제고 제 놈의 목줄을 쥘지도 모르는데 태평하게 미래를 대비치 않고 있다, 이 말이다.”
“…….”
“해서 나는 황제를 대신하여 지키려는 것이다. 분란의 씨앗을 제거하여……!”
가만히 그의 말을 듣던 진무가 언짢은 표정으로 툭 내뱉었다.
“염병할 망령이네.”
“뭐?”
“영왕.”
“…….”
“이미 이 나라의 시작이 배신에서 비롯되었음을 모두가 안다. 태조는 자신이 모신 주군을 시해하고 이 나라를 세웠다. 그런데 무슨 분란의 씨앗이고 자손만대 이어질 나라란 말이냐?”
“이놈! 닥치지…… 흡!”
심장을 관통하는 듯한 서늘한 묵빛 눈동자에 노성을 지르던 영왕이 숨을 집어삼켰다.
“닥칠 건 너다. 모르는 것도 너고.”
“…….”
“그래. 한무화 그가 꿈꾼 건 역천이지. 제 백성을 사지로 몰아넣으면서 나라를 되찾으려 했어.”
“…….”
“그는 적어도 직접 나섰다.”
“…….”
“종묘사직을 지키고, 자손만대에 물려줄 나라를 위해서였다고? 하하, 하하하.”
진무가 차갑게 비웃으며 일갈했다.
“네가 무엇을 했나?”
“…….”
“한무화가 역천을 꿈꾸었을 때 칼 쥐고 전장에 나선 적도 없는 놈이 나라를 지켜? 웃기는 소리 마라, 영왕. 너는 안전한 뒷방에 숨어서 그저 너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전전긍긍했던 소인배에 지나지 않는다.”
“이, 이놈…….”
진무의 말이 이어질수록 영왕의 얼굴이 잘 익은 홍시보다 붉게 달아오르고, 움켜쥔 두 주먹이 쉴 새 없이 떨렸다.
“나라를 위한다는 핑계를 내세워 태자를 찾고자 했던 것도 그저 귀비보다 많은 권력을 잡으려 한 것이며, 허수아비 같은 황제를 세워 나라를 네 마음대로 주무르려 했던 것이지.”
“…….”
“태자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여 도망친 것이다. 귀비, 그리고 네놈의 손아귀에 잡히지 않으려고.”
“닥치거라.”
“아니, 귓구멍 열고 끝까지 들어라, 영왕.”
“…….”
“네놈이 귀비나 한무화와 무엇이 달랐을까?”
“…….”
“당시에 너는 나를 이용하려 했었지. 네놈이 가진 힘으로는 한무화와 맞서기 힘들다는 이유로. 귀비도 마찬가지였다. 너희는 나의 환심을 사기 위해 금은보화를 내밀고, 관직을 제수했었지. 하나 태자는 달랐다. 지키려 했고, 책임지려 했으며, 끝내 자신의 신념을 굳건히 밀고 나갔다.”
“…….”
“해서 나는 그를 도왔다. 니들보다 훨씬 더 나라를 생각하고 백성을 아꼈으니까.”
“…….”
진무의 신랄한 힐난에 영왕이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입을 다물었다.
“영왕, 너는 그저 화풀이를 한 게다.”
“화, 화풀이라고?”
“그래. 천자가 되지 못한 네 운명을, 아무리 노력해도 권력을 잡지 못한 네 놈의 처지를 비관해서 아무 힘도 없는 이들에게 책임을 전가한 거다.”
“…….”
서로를 치열하게 노려보는 가운데, 긴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한참 만에 영왕이 입을 열었다.
“네놈을, 네놈을 그때 끌어들이지 말았어야 했구나.”
“…….”
침묵을 깬 그의 눈동자에는 원독이 서려 있었다.
말을 마치고 부서져라 이를 갈아 대는 그를 빤히 바라보던 진무의 입가에 문득 냉소가 떠올랐다.
“멍청이. 아직도 모르는군?”
“뭐라?”
“네가 끌어들인 것이 아니라 내가 접근한 거다.”
“……?”
“네놈들이 그랬듯, 나 역시 너희를 이용하기 위해서.”
“뭣이?”
“…….”
그때는 그랬다. 네놈들이 그랬듯 황제를 발아래 꿇리고 싶었다.
만약 지금의 태자를 만나지 못했다면 정말로 그랬을지도 모르고…….
“뭐, 지나간 일 새삼 길게 말할 이유는 없지. 영왕, 이제부터 네게 죗값을 받겠다.”
“닥쳐라! 네놈이 무슨 권리로 나에게 죄를 묻는단 말이냐! 한낱 무뢰배 따위가!”
“이거 원, 소식이 느려도 너무 느리네.”
“…….”
“말했잖아. 넌 이제 황실의 종친이 아니야. 황제가 널 버렸다는 소리고, 어떻게 되어도 황제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이지.”
“뭐, 뭣이?”
“놀라기는. 그래도 전엔 제법 세상을 볼 줄 알더니. 눈과 귀까지 먹어 버렸구나. 하면 알려 주마. 이미 너와 관련된 이들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네놈이 전서구를 보내 준 덕분에 동창과 서창이 아주 바쁘게 움직이고 있지.”
“그, 그런…….”
“그러게 하야했으면 뒷방 노인답게 화초나 키우며 노후를 즐겼어야지.”
폭풍 맞은 돛배처럼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를 빤히 보던 진무가 주먹을 움켜쥐고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차자자작!
“…….”
갑주를 걸친 무인들이 진무의 앞을 가로막으며 군진을 펼쳤다.
“크흐흐흐. 미친놈, 듣자 듣자 하니 나를 너무 우습게 보았구나. 나에게 죗값을 물어? 내가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더냐?”
“…….”
“네놈의 강함이야 익히 안다. 하나 아무리 네놈이라도 쉽진 않을 게야.”
“…….”
“이들은 후일을 대비해 내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자들이다. 한씨 놈의 족속들을 노예로 팔아 번 돈으로 무엇을 했을 것 같으냐? 관리들을 포섭하고 군비를 투자해 이들을 만들었다. 보검에 보갑, 영단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부족함 없는 최강의 군대를 만든 것이다. 내 원하지 않았던 미래이나, 네놈을 죽이고 그길로 오군을 규합하여 황성을 칠 것이다. 그런 뒤 금군을 움직여 무림을 뿌리째 뽑을 것이야.”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하는 영왕의 눈빛에는 언뜻 광기마저 비쳤다.
결국 이놈이나 저놈이나 역천만을 꿈꾸는구나.
멍청한 것들. 세상을 쥔다는 것이 어찌 힘만으로 가능할까?
“쯧, 역시나 너 같은 족속들이 꿈꾸는 결과는 항상 같은 방향인가?”
진무는 혀를 차며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무인들을 바라보았다.
언젠가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영왕을 처음 만났던 그때, 자신의 앞을 막았던 좌군의 무장들…….
하나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당시의 싸움은 동맹을 위해 사정을 두었던 싸움이고, 지금의 싸움은 모조리 때려 부수기 위함이니까.
“영왕, 백성의 위에 군림하는 것은 힘이 아니라 덕(德)임을 모르는구나.”
“……뭐?”
“힘이 통용되는 곳은 무림뿐이다. 또한 그 힘조차도 언젠가 더 강한 힘에 무너질 테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보여 주마. 네놈이 힘으로 꿈꾼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진무는 과거의 그때처럼 무장들을 향해 걸었다.
“죽여라!”
거친 목소리로 내지르는 명에 무장들이 진무를 향해 달려들었다.
후욱!
높이 들린 발이 대지를 힘껏 짓밟았다.
쩌어어어엉!
내리찍은 발이 깊은 족적을 새기며 대지를 흔들어 놓자 군진이 흐트러졌고…….
쿠드드드.
삽시에 솟구친 검은빛 묵룡기와 푸른빛 선기가 진무의 몸을 휘감듯 타고 오르더니, 손안에 모여 하나로 합쳐져 길쭉하게 늘어진다.
태극공, 기검(氣劍).
슈아아아악!
그리고 가볍게 휘두른 태극의 검이 그어 낸 선이 세상을 정확히 반으로 갈랐다.
까드드득!
천금이 들었다는 보갑은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닿는 족족 잘렸고, 피가 튀었다.
쿵!
곧장 지면을 밟고 쏘아진 진무가 무장들의 군진을 파고들었다.
슈아아악!
검은 한 치의 머뭇거림 없이 휘둘러졌고, 스치는 모든 것이 그대로 베였다.
보검은 반으로 잘리고, 세운 방패는 무장들의 몸과 함께 조각조각 썰렸다.
“이, 이런! 활! 활을 쏴라! 놈을 죽여!”
인간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진무의 무위에 영왕이 피를 토하듯이 소리를 질렀다.
찌이이익! 슈슈슈슛!
시위가 당겨졌다 빠르게 당겨지고, 수백 발의 화살이 진무에게 집중되었으나…….
퍽! 퍼퍼퍼퍽!
화살에 꿰인 것은 영왕의 무장들이었다.
궁수들이 당황하며 재차 시위를 당겼으나, 진무는 그 자리에 없었다.
표적을 놓친 그들이 모습을 감춘 진무를 찾으려 황망히 두리번거릴 때였다.
순간 장원 전체를 짓누르는 막대한 압력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저절로 무릎을 꿇었다.
“하…… 하늘이다!”
누군가의 외침에 힘겹게 시선을 위로 올린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천신과도 같이 허공에 선 진무였다.
무심한 눈길로 아래를 내려다보던 그가 손을 높이 쳐들자, 손바닥에 맺혔던 태극의 검이 잘게 쪼개져 하늘을 메웠다.
궁수들이 필사적으로 활을 들어 화살을 메겼으나, 진무가 손을 내리는 것이 빨랐다.
쏴아아아!
그것은 갑자기 쏟아진 뇌우(雷雨)였고, 지상을 벌하는 천신의 창이었다.
푹, 푸푸푸푹!
시위는 당겨지지 못했고, 궁수들은 쏟아진 기의 섬전에 벌집처럼 꿰뚫려 쓰러졌다.
진무의 싸늘한 시선이 남아 있는 무장들을 향하는 순간, 이번에는 쏟아졌던 기의 비가 군진을 헤집었다.
쐐애애애액!
“크아아악!”
사방에 고통스러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여, 영왕 전하를 지켜라!”
얼마 남지 않은 무장들이 상대가 되지 못함을 깨닫고 재빨리 영왕을 보호하듯 뭉치자, 잠시간 그를 응시하던 진무가 손날을 세워 들었다.
“…….”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모두가 숨마저 멈추고 진무의 손끝만을 바라보았고, 어느 순간 그 손이 천천히 그어졌다.
스으으으.
그리고 하늘이 갈라졌다.
“……!”
하나 이내 그 균열은 신기루처럼 사라졌고, 놀람이 채 가시기도 전에 세상이 반으로 잘렸다.
쩌적, 쩌저저적!
땅이 베여 끝없는 어둠을 드러내고, 건물이 반으로 갈라지며 거친 소음과 함께 무너진다.
우드드득, 콰아아앙!
모두가 넋을 잃었다. 영왕도, 무장들도, 지켜보던 황신과 아이들은 물론 운연까지…….
툭.
말도 안 되는 무위를 보이곤 지면에 사뿐히 내려앉은 진무가, 이내 다시 걷는다.
그가 건조한 눈빛으로 다가설수록 영왕의 앞을 막아섰던 무장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힘없이 주저앉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공포나 두려움? 전의의 상실? 그런 것이 아니다.
그들이 느끼는 감정은 무력함이었다. 산을 허물고 물길을 바꾸어 놓는 자연의 힘을 마주할 때 비로소 느끼는…….
“영왕.”
“…….”
진무가 힘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영왕의 머리에 가볍게 손을 올리곤, 그대로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꽈아아악!
초점 없는 영왕의 눈동자에 진무의 새하얀 송곳니가 비쳤다.
“이제 좀 맞아야겠지?”
“……!”
콰지직!
어디, 오늘 한번 죽어 봐라.
네놈이 죽고 죽어 백골이 진토(塵土) 되고 나서도 두들겨 패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