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53
53화
“어르신.”
한참이나 고심하던 제갈무린이 천천히 입을 뗐다.
“말하게.”
“주학이 진무 도장을 노린 것은 저도 알지 못했던 사실이었습니다. 허나 무당은 이를 두고 제갈세가를 음해하였음은 물론, 없던 잘못까지 뒤집어씌웠습니다.”
“음…….”
양소방의 얼굴에 짜증이 서렸으나 제갈무린은 물러날 수 없었다.
이미 청화대 전체를 동원해 일해상단을 압박한 지 이틀.
단강구의 모두가 둘의 마찰을 알고 있었다.
여기서 잘못을 인정하고 물러난다면?
기 싸움에서 지게 된다.
승리는 못 할지라도 무승부는 이루어야만 했다.
“어찌한다?”
양소방이 고민을 하자 진무가 슬며시 앞으로 나섰다.
“어르신.”
“응?”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거라. 어차피 이 모든 사건의 중심에 네가 있는 듯하니.”
양소방의 허락이 떨어지자 진무가 고개를 숙인 채 입가에 사악한 미소를 머금었다.
양소방이 나타난 건 의외였으나 쓸모가 있으면 최대한 이용해 준다. 진무가 고개를 들고 당당한 표정으로 양소방부터 시작해 좌중의 모두를 바라보며 말했다.
“문답무용(問答無用)이라 했습니다.”
문답무용(問答無用).
오랫동안 정사마를 가리지 않고 무림을 유지시켜 온 불변의 진리.
묻고 답함은 쓸데가 없다.
무인은 주먹으로 말하고 칼로써 뜻을 세운다.
진무는 절묘한 순간에 사태를 해결할 절묘한 방안을 꺼내 들었다.
제갈분가도 무당도 한 치의 물러섬 없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서로가 물러날 수 없는 입장이기 때문이었다.
서로에게 내세워진 명분은 더 이상 대화로 해결될 수가 없었다. 두 곳 모두 정파의 거두이니 전쟁을 일으킬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팽팽하게 당겨진 매듭을 풀어낼 수 있는 것은 절단이다. 그것은 최후의 방법이자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진무의 말에 양소방이 가만히 진무를 바라보았다.
그가 찾아온 것은 비단 개방 때문이 아니었다.
개방에서 조사한 진무에 대한 내용.
겉으로 보기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근래 단강구에서 보인 진무의 행적은 누구보다 정의감 넘치는 도사라 할 만했다.
하지만 그 과정 안에 자신이 쫓고 있는 자들과의 연관성이 발견되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얼마 전 단강구에 있었던 화약 밀거래. 그리고 그들 중 한 사람의 흔적이 남은 무너진 무월루. 그 모든 곳에 진무의 행적이 남아 있다.
또한 얼마 전에 겪은 진무의 무공.
그들의 것과 동일했다.
그리고.
‘이놈 봐라? 무공뿐 아니라 제법 영악하기까지 하구나.’
자신의 방문을 당황스러워한 표정이 역력했는데, 이제는 이용하려는 수작까지 보인다.
심계까지 제법 출중하다.
‘오냐, 일단은 이용당해 주마. 네 녀석에게는 물어볼 것이 많을 듯하니.’
양소방이 피식 웃으며 진무가 깔아 놓은 판에 발을 들이밀었다.
“네 말인즉, 자존심을 걸고 승부를 보잔 말이더냐?”
“예. 서로 간에 대표자를 내세워 승부를 보고, 지는 쪽이 깨끗이 물러나는 것으로 하시지요.”
대표자.
양소방은 진무가 스스로 나서려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뜻 보이는 그의 성격상 확신 없는 일에는 나서지 않을 게 분명했다.
또한 간밤에 보였던 그의 무위라면?
‘제갈세가가 꽤 낭패를 보겠어. 하나 모든 것은 제갈세가가 초래한 일. 내가 관여하는 것은 여기까지다.’
양소방은 정무맹을 대표하는 무인이었다.
무당과 제갈의 싸움.
어느 누구의 편을 들어서도 안 되었다.
그저 중재만 가능할 뿐이었다.
“의뭉스러운 놈. 좋다. 자네들의 뜻은 어떠한가?”
양소방의 말에 명충은 잠시 고민했고, 제갈무린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체면을 중시하는 무당이니 명충이 나설 리는 없었다.
필시 일대제자. 이변이 없는 한 진궁이 될 것이고, 진무가 나선다면 더욱 좋다.
“어르신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제갈무린의 대답에 양소방이 명충을 바라보았다.
걱정스러운 표정.
자파의 진무가 제안했으니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고, 그러자니 상대가 내밀 패가 너무 뻔해 보였다.
“이보게. 명충.”
“아, 죄송합니다. 저 역시…… 어르신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명충과 제갈무린이 동의하자 양소방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단 살수는 안 된다. 무당과 제갈에서는 각 파를 대표할 무인을 천거하라.”
양소방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명충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진무가 나섰다.
“제가 사건의 중심이니 무당에서는 제가 나서겠습니다.”
“진무야!”
생각했던 대로 명충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소리쳤다. 당연히 진궁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리라.
“사부님.”
“…….”
“괜찮습니다.”
이미 한번 처맞아 본 경험이 있는 진궁이 자신 있게 막아 준다.
그리고.
제갈무린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머금어졌다.
격이 있으니 본인이 나서지는 않겠지. 다만 확실하게 승리를 가져다줄 수 있는 최고수로 정할 것이다.
“청화대주!”
그의 말에 명충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하지만, 진무는 씨익 웃었다.
역시. 예상대로다.
안 그래도 별로 감정이 좋지 않았다.
모익상, 피똥을 싸게 해 주마. 기저귀는 덤이다.
진무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넘쳐 흘렀으나 명충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청화대주 모익상.
비록 분가의 무인이지만 호북성 전체에 그 이름이 알려진 무인.
그의 이름이 단강구 너머 중원에 알려진 것이 벌써 십 년이 넘었다.
일개 분가 소속 무인대의 수장에 불과한 그는 녹림을 토벌하며 그 이름을 드러내었고, 그 과정에서 검기를 쏘아 당시 녹림 산채의 수장이던 용패력의 목을 자름으로써 탄기의 고수임을 입증했다.
그로 인해 수차례 본가의 부름을 받았으나 단강구 분가에 남아 충성을 지킨 그 절개를 모두가 입이 닳도록 칭찬했다.
분가주인 제갈무린에 비교해도 모자람 없는 실력의 무인. 진궁보다 훨씬 더 전에 탄기에 이른 고수.
무당의 장로 중 몇몇과 비견해도 모자람이 없을 그의 무위를 알기에 명충의 구겨진 얼굴이 펴질 줄 몰랐다.
“저 녀석이 어쩌자고.”
모두가 물러나며 마련된 중앙의 공간으로 나서는 진무를 보며 명충이 중얼거렸다.
“사부님.”
“…….”
“걱정 마십시오. 진무는 강합니다.”
진궁의 말에 명충이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모익상의 무위에 대해서는 진궁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을 터인데 어찌 이리 자신만만하단 말인가?
“저 아이는 오룡궁의 실무제자이자 무당의 검입니다.”
확신에 찬 표정은 또 뭐란 말인가?
“다만 생각하신 것과는 조금 다를지도 모르지만요.”
“뭐?”
미소까지 머금는 진궁의 얼굴에 이제는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무당의 검’이라는 칭호까지 앞세우는 말에 당황스러움이 궁금증으로 변했다.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단 말인가?
명충은 한 줄기 희망을 품으며 진무의 등을 바라보았다.
“하핫, 이거 진무 도장께서 나설 줄은 몰랐습니다. 과연 나이처럼 주제 모르고 혈기 방장하군요.”
“…….”
주제를 모르고 혈기 방장(血氣方壯)하다. 어린놈이 분수도 모르고 날뛴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
비웃음을 머금은 모익상의 표정은 대충 저런 뜻이리라.
“자, 그럼 어찌한다? 분가의 명예가 걸렸으니 어린 도사님을 봐드릴 수도 없고.”
모익상이 주절거리는 사이 진무가 자신의 검을 꺼냈다.
그리고.
철거렁.
검을 뽑아 바닥에 던진 진무가 검집을 쥐었다.
“더럽게 말 많네.”
“……?”
“나불거리는 입만큼이나 실력이 좋았으면 좋겠는데.”
짝다리를 짚고 검집을 어깨에 걸친 도발적인 모습.
진무의 걸걸한 말에 앞에 선 모익상뿐만 아니라 지켜보는 이들이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 공손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제가 생각하신 것과 조금 다를지도 모른다고.”
진궁이 명충을 향해 어색하게 웃으며 소곤거리는 사이 영 도사답지 않은 진무의 말이 이어졌다.
“맨손으로 할 거야? 봐주면 나야 고맙고.”
“하! 이거 참.”
어느새 눈동자가 드러날 정도로 매섭게 눈을 뜬 모익상의 손에 목검이 잡혀 있었다.
“무당에서 선배 무인에 대한 예의는 가르치지 않은 모양입니다?”
“선배? 예의? 그딴 건 필요한 사람에게나 지키는 거지!”
파학!
말이 끝남과 무섭게 진무의 발이 흙더미를 파헤쳤다. 목검이라 해도 이미 상대는 검을 뽑았다. 굳이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헙!”
일 보.
떨어짐과 무섭게 진무의 사악한 얼굴이 다가왔다.
생각지도 못했던 빠른 움직임에 모익상이 서둘러 목검을 가슴까지 당겼다가 곧게 펼쳤다.
쑤웅!
급한 움직임이었으나 맹렬한 기세가 뻗어져 대기에 회오리를 만들었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방향을 꺾은 진무가 낮은 자세로 모익상의 옆구리를 향해 검집을 휘둘렀다.
땅!
뻗었다 당겨 세운 목검과 검집이 맞부딪쳐 쇳소리를 만들고.
타다닥.
힘에 밀려 버린 모익상이 게걸음을 치며 물러났다.
파학!
봐줄 생각도 멈출 생각도 없던 진무는 곧바로 지면을 강하게 밟으며 신형을 직각으로 꺾고 검집을 맹렬하게 휘둘렀다.
촤촤촤!
‘큭!’
비틀어 내지른 검집 끝이 묘하게 흔들리자 수십 개의 잔영이 생겨나 공기를 헤집는다.
딱, 따다다닥!
방어하기도 급급했다.
모익상은 자신이 가진 바 검공을 펼칠 기회조차 잡지 못한 채 계속해서 밀리기만 했다.
그리고.
검집이 그의 목검에 닿는 순간.
취릿!
짧게 비틀리며 만들어 낸 회전이 목검을 튕겨 내고 가슴을 열었다.
‘이, 이런!’
곧게 찔러 들어오는 검집에 명치를 고스란히 내주게 생긴 모익상이 기운을 끌어 올려 주먹에 담았다.
투웅!
후려친 주먹이 검집의 방향을 틀었다.
그런데.
휘릭!
달려온 그대로 비틀어진 몸과 함께 곧장 뻗어 나오는 발이 그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피할 수 없음을 깨달은 모익상이 그대로 옆으로 몸을 굴렸다.
파아앙!
발바닥이 허공을 때려 터트려 버린 공기가 진한 울림을 만들어 내었다.
정적.
검집을 어깨에 걸치고 선 진무가 히죽거리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 좀 놀랐나? 내가 좀 너어무 혈기 방장하지?”
“…….”
흙투성이가 된 모습으로 엎드려 고개를 든 모익상. 주먹을 불끈 쥐며 희열에 찬 표정의 진궁과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는 양소방.
그리고.
지켜보는 다른 이들은 쩍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모익상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수치스럽게 바닥을 뒹굴었다.
고작 약관의 도사에 의해.
으드득!
이를 갈아 댄 모익상의 눈이 찢어질 듯이 부릅떠졌다.
수치스러웠다. 아무리 기운을 일으키지 않았다고 하지만 깨달음의 정도가 다르고 초식 운용에서 월등하게 뛰어나야 할 그가 방어만 하다 볼썽사납게 뒹굴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깔아 보며 비웃는 진무의 얼굴.
‘이 자식! 죽여 버리겠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모익상이 엎드린 채로 양손으로 땅을 파헤치듯 잡아당기며 뒷발을 힘차게 밀었다.
파학!
비스듬히 일직선으로 쏘아져 나가는 그의 신형이 진무를 향해 섬전처럼 쇄도했다.
네발?
이제 보니 네놈은 개로구나.
하면 복날 맞은 개처럼 패 주마.
진무의 얼굴에 지어진 미소가 더욱 사악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