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531
1화
흑암갑(黑暗鉀) 차림에 검은 공작 깃을 머리에 꽂은 젊은 장수가 막 황톳빛 길에 올라 그 끝자락에 있는 산을 바라본다.
이곳에 올 때마다 늘 그렇듯, 장수의 입가에는 자연스러운 미소가 피어올라 있었다. 자주 오는 길은 아니지만, 언제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곳이랄까?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으니 고향이라 느껴서일지도 모른다.
사방에 퍼진 구름은 부드러운 연기처럼 흘렀으나 시야를 가리지 않았고, 흙바닥은 새로 튼 솜처럼 부드러워 발을 편안케 했다.
뿐이랴. 길가에 형형색색 피어난 기화요초의 수려한 자태는 눈을 즐겁게 하고, 코끝에 스치는 향은 마음을 상쾌하게 한다.
그리고 항시 부는 바람.
꽃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게 흔들리는, 귀밑머리 한 올만을 건드려 귓가를 간지럽게 하는 산뜻한 그 느낌을 만끽하려는 듯 잠시 멈춰 선 흑암갑(黑暗鉀)의 장수가 눈을 감고 고개를 젖혔다.
“후우…….”
가볍게 숨을 내쉰 그가 눈을 뜨고 근처에 자신의 키만 한 풀을 쓰다듬자, 제법 기분이 좋았던 것인지 잎사귀가 절로 움직여 장수의 손을 부드럽게 휘감았다. 그 재롱 같은 몸짓에 장수가 싱긋 웃으니, 이번엔 꽃대가 살짝 꺾이며 감겼던 이파리가 풀렸다.
참으로 붙임성이 좋은 이 녀석은 수명초(壽命草)라고 한다. 이곳에선 길바닥에 널리고 깔린 흔한 놈이지만, 하계(下界)에서 발견되었다가는 한바탕 난리가 날 영초였다.
본시 살아 있는 것에는 하늘이 정한 명(命)이 있어서 시간이 다하면 사그라들어야 하는 법이지만, 이 신통방통한 놈은 그 시간을 늘려 준다. 만병통치, 생명 연장의 명약쯤 된달까?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당시 숨넘어가는 자신을 살려 준 것도 바로 이 녀석이었다.
불로초라고 해서 그런 줄로만 알았지, 수명초의 씨앗 하나가 세상으로 내려가 싹을 틔운 것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아마 직접 구해 온 천우명도 몰랐을 것이다.
“그놈, 잘 있나 모르겠네.”
어쩌면 벌써 뒈졌을지도 모르겠다. 아니지, 이곳의 시간과 그곳의 시간은 다르니까 살아 있을지도…….
흑암갑의 장수, 진무는 과거의 인연을 떠올리곤, 눈이 시릴 정도로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며 잠시 그리움에 젖었다.
생각해 보니 시간이 참 많이 흘렀다. 처음 등선했을 때만 해도 그리 더디게 느껴지더니…….
정확하진 않지만, 어느새 대충 만 년 정도 흐른 것 같았다. 꽤 긴 시간이었지만, 하계의 시간과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시간의 흐름이 아예 달랐으니까.
이곳의 시간은 흐르는 물과 같았다.
때론 좁은 곳을 통과하는 급류처럼 빠르게 흐르기도 하고, 때론 너른 곳을 통과하는 완류처럼 느리게 흐르기도 했다.
쉽게 설명하자면 하계에서 찰나라고 부르는 순간이 이곳에선 백 년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반대로 백 년이 한 호흡일 수도 있고.
딱히 시간의 흐름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며, 정확히 아는 자도 없었다. 실은 다들 관심도 없었다. 불의의 사고로 소멸하지 않는 한 거의 영원불멸한 삶을 사는데 시간 따위야 알 게 뭐람.
그래도 굳이 찾자면 아는 사람이 있기는 하다. 삼계(三界)를 나눠 다스리는 옥황(玉皇)과 귀모(鬼母).
정확히는 몇 대째 이어온 태초의 후대들이다.
원래는 사이가 좋았던 천계와 지계가 서로 잡아먹을 듯이 싸우게 된 이유에 대해 수많은 소문이 있었지만, 그중 가장 흥미를 끄는 것은 부부였던 둘 사이에 벌어진 싸움에 대한 것이다.
언뜻 든 생각으론, 항상 주위에 하늘거리는 옷을 입은 선녀들을 끼고 사는 옥황이 바람을 피운 게 아닌가 싶다.
원래 험담 중에서도 가장 나쁜 쪽에 마음이 끌리는 법이 아니던가? 믿거나 말거나지만…….
그리고 등선하고서야 알게 된 사실.
혁련무강의 혼을 진무의 몸에 집어넣은 멍청하기 짝이 없는 놈이, 인계의 혼을 죄의 경중에 따라 두 곳으로 분류해 인도하는 고위급 관리였다는 것이다. 인계의 말로는 차사, 이쪽의 말로는 선별관이라더라.
다시 생각하니 새삼 머리 가죽의 고통이 기억나 짜증이 절로 치밀었다.
“악력만 세 가지고는…… 빌어먹을 새끼.”
만약 그때 한빙곡의 주인이 된 풍환자가 헐레벌떡 뛰어와 말리지 않았다면 그 새끼는 분명 제 손에 소멸당했을 것이다. 물론 그랬다면 지금의 자신은 여기에 없겠지만.
다행히 그 차사 놈이 지은 죄가 명백하여 벌을 받지 않았고, 악선의 운을 타고난 한무화를 죽인 공로로 천계에 남을 수도 있게 됐다. 말하자면 특채.
운이 좋았다.
공과(功過)의 양으로만 따지자면 응당 지계로 가서 죄지은 자들과 함께 요괴의 모습으로 벌을 받아야 했을 터인데……. 짧은 시간이었으나 진무로 살았던 것이 어찌나 다행인지.
그런데 잠깐, 왜 선계가 아니라 천계라고 하냐고?
“……나도 처음엔 그냥 선곈 줄 알았지.”
그런데 아니더라.
선계는 천계의 작은 지역 중 하나일 뿐이었다.
해탈한 불가 놈은 극락에서 살고, 착한 일 해서 온 놈은 중선천에 산다. 그 외에도 옥황이 선녀들과 사는 자미원, 천계의 장수들이 있는 태미원, 천시원 등등……. 그걸 다 뭉뚱그려 천계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어쨌든, 그때 천계에 살게 된 후 곧바로 진로를 결정해야 했던 자신에게 청무와 풍환자는 등선한 선인 놈들이 가장 선호한다며 입을 모아 산신령을 추천했다.
대충 착한 나무꾼에게 도끼나 나눠 주고, 착한 심마니의 꿈에 나타나서 산삼의 위치도 알려 주고, 또 가끔 산군(山君)으로 불리는 범이 되어 나쁜 놈들 혼내 주는 아주 한가로운 직위라는데…… 거절했다.
종합하면 이것저것 아낌없이 주는 놈이어서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외모.
머리고 얼굴이고 신체 조건이고 선택 사항은 다양했지만, 조합하면 결국 노인이었다.
이런 꽉 막힌 놈들. 그 무슨 미친 소리냔 말이지. 젊은 몸뚱이를 두고 뭐 하러 노인네의 모습으로 돌아간단 말인가?
당차게 거절한 자신은 진무의 모습을 택했고, 이어 천계의 네 곳 방위를 지킨다는 방위군 이십팔수(二十八宿) 예하의 군병에 지원했다.
그 편하다는 산신령이 될 기회를 걷어차 버린 자신을 두고, 뭐 하러 그런 힘든 곳으로 가냐며 청무와 풍환자가 한참을 아쉬워했다. 잘못하면 싸움 중에 소멸할 수도 있다나 뭐라나.
하여간 노인네들이 편한 자리에만 찌들어서는……. 낮은 직위면 어떻고 어려운 자리면 어떻단 말인가? 무릇 싸움꾼은 싸워야 하는 법이다.
어쨌든 만 년 동안 부단히 노력한 결과 신선의 다음 경지인 상선(上仙)에 올랐고, 북방칠수(北方七宿)에서 가장 높은 두(斗)장군이 되었다.
자신 밑으로 장군만 여섯이요, 수천의 천군병이 있었…… 아니, 수만인가?
젠장, 수천이면 어떻고 수만이면 어떤가? 정확히 세 보지도 않았거니와, 지계를 탈출해 온 요괴들과 싸움 중에 뒈지는 놈들이 부지기수라 늘 숫자가 바뀌는걸.
어쨌든 만 년 전에 신선이 된 놈 중, 자신만큼 출세한 놈은 한 놈도 없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일례로 자신보다 한참 전, 천계의 시간으로는 만 년도 훨씬 더 전에 등선한 도동 선휘 녀석은 아직도 장춘곡 문지기에 불과했다.
“그 녀석은 참……. 재능이 없는 건지, 원.”
진무가 문득 떠오른 선휘 생각에 혼잣말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데, 누군가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오! 이게 누군가? 우리 두장군 아니신가?”
듣기만 해도 누군지 알 정도로 익숙한 목소리였다.
대우선인(大禹仙人)이다.
하계에서 꽤 유명한 왕이었다는데 나라를 잘 다스려서 등선했고, 지금은 하계의 치수(治水)를 살피는 일을 한다. 가장 최근에 선계에 든 것이 자신이라, 이런저런 하계 잡담을 하다가 친해졌다.
“대우 님 아니십니까? 한데 어딜 그리 급히 가십니까?”
“그게…… 에휴.”
진무의 물음에 대우가 찌푸린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또 홍수가 난 모양이군요.”
“맞네. 옥황께 불려 가서 한바탕 혼이 났지 뭔가? 이놈의 신진철(神珍鐵)이 오래돼서 그런가…… 영 안 맞아.”
“…….”
대우가 손에 든 쇠몽둥이를 원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며 투덜거렸다.
거무튀튀한 빛을 내는 투박한 몽둥이는 대우가 강과 바다의 깊이를 측정해 홍수가 날지 안 날지 살피는 도구이다. 대우가 깊이를 재고, 위험하다 싶으면 풍우를 주관하는 선인이 비의 양을 조절한다. 한 번씩 그게 안 맞을 때마다 하계는 물난리를 겪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무는 그냥 쇠몽둥이가 탐났다. 자유자재로 늘었다 줄었다가 하는 그 모습이 어찌나 신기하던지, 무기로 쓰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든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꼭 언제 한번 빌려다가 써 봐야지.
“이참에 신공(神工)께 바꿔 달라고 하세요. 매번 고생하지 마시고.”
“그게 가능한 일이면 내 신공의 소매라도 붙잡고 늘어졌겠지.”
“아! 지계에서만 생산된다고 했었죠?”
“으응.”
대우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신진철은 오래전, 몇 대 전의 옥황 때부터 전해진 물건으로 신공이 제련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그러니 두 세계의 사이가 나빠진 지금, 천계에는 신진철을 구할 방법이 없고 지계에는 신공선인이 없으니 같은 물건을 만들 수가 없었다.
세상에 유일한 보물이랄까?
“그나저나 자네가 사계산(四季山)에는 어쩐 일인가? 듣자 하니, 근자에 지계의 요괴들이 천지간(天地間)에 자주 출몰해서 정신이 없다고 하던데?”
“아, 청무 님께서 불러서요.”
“장춘곡주께서?”
“예.”
“허, 둘은 자주 만나는구먼.”
“지난번 선인 회합 때 뵈었으니, 한 오백 년쯤 됐겠네요.”
“젠장, 오늘도 술판이겠군.”
“부르신 이유를 듣지 못하긴 했는데……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진무가 빙긋 웃자, 대우가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젠장, 나도 끼고 싶구먼. 술은 자네랑 마셔야 즐거운데…….”
“어쩔 수 없죠. 지금 한잔하셨다간 옥황께서 또 노발대발하실 텐데.”
“그러게 말이야.”
“어서 가세요.”
“그래,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내 조만간 자네 군영에 한번 찾아감세.”
“예.”
대우가 진무에게 손을 휘휘 젓고는 멀어졌다.
조만간이라…… 몇백, 몇천 년쯤 뒤에야 오시겠군. 남는 것이 시간이니까.
멀어지는 대우의 뒷모습을 잠시간 바라보던 진무는 원래 가려던 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계산, 진무가 처음 등선해서 선계라고 오해했던 그곳. 이름 그대로 산에 사계절이 전부 존재하고 있기에 그리 불린다. 그중 봄이 존재하는 장춘곡의 주인은 청무이고, 겨울이 존재하는 한빙곡의 주인은 풍환자이다.
“진짜 모처럼이네. 이곳은 정말 시간이 가도 하나도 안 변해.”
진무가 피식 웃으며 사계산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걸었을까?
퍼덕, 퍼덕, 퍼덕.
멀리서부터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때가 그렇게 됐나? 진무가 고개를 돌리자, 집채만 한 학 한 마리가 어린애를 하나 태우고 한빙곡 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선금(仙禽)이라는 이름의 학이었다.
“어이, 소경! 오랜만이다!”
“어? 두장군님!”
“벌써 열매가 익은 게냐?”
“아니요! 근데 일찍 따 오래요. 한빙곡주님께 말씀드려 놨다고!”
“그래?”
“예! 하도 빨리 따 오라고 성화를 부리시는지라……. 먼저 가 보겠습니다!”
“그래!”
“네! 다음에 찾아뵐게요!”
선금 위에 앉은 소경이 손을 휘휘 저으며 날아갔다.
그는 진무가 사계산에 들어서 가장 처음 본 소동으로, 옥황의 심부름꾼이었다.
매년 이맘때마다 한 번씩 학을 타고 날아와 한빙곡에서 열리는 적빙과를 따 가곤 하는데, 그 이유도 참……. 옥황이 만년설에 적빙과의 즙을 넣어 먹는 걸 즐긴다나 뭐라나. 옥황 팔자가 저렇게나 좋다.
“역시 사람은…… 아니 신선도 높은 자리에 있고 볼 일이란 말이야.”
그나저나 청무는 대체 왜 날 부른 거지? 오면 알 거라면서 이유도 안 알려 주고?
하여간 이래서 인맥을 함부로 만들면 안 된다. 바빠 죽겠는데 오라 가라……. 그래도 신선주는 제대로 담가 놨겠지?
쩝. 진무는 입맛을 다시며 바삐 걸음을 옮겼다.
* * *
장춘곡.
길고 긴 봄만이 존재하는 곳.
움트는 새싹에 봄 내음이 가득하고 막 피어난 기화요초는 서로를 뽐내며, 흘러가는 맑은 물에는 이름 모를 금빛 물고기가 한가로이 헤엄을 친다.
청무는 언제나처럼 드넓은 연못에 자리한 정자, 상춘정에서 진무를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상춘정에서 한가로이 담소를 나누는 인물들을 확인한 진무는 발 앞에 있는 중수를 보고 피식 웃었다. 처음 장춘곡에 도착했을 때는 중수(重水)로 이루어진 그 물에 빠져 허우적거렸지만, 지금이야 뭐.
찰박, 찰박.
여유롭게 물 위를 걸어 정자에 도착하자 먼저 와 기다리던 이들이 진무를 반갑게 맞이했다.
청무와 선휘, 그리고…….
“어서 오게.”
“얼레? 풍환자께선 어쩐 일이세요? 한빙곡 비워 놔도 돼요? 소경이가 적빙과 따러 가던데?”
“허허, 뭐 하루 이틀인가?”
“팔자 좋으시네요. 곡주씩이나 되는 분이.”
“허허, 실은 오늘 도착하는 이가 나도 아는 이라서 말이야.”
“……?”
풍환자의 말에 진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또 누가 오나?
“어, 마침 저기 오는구먼!”
풍환자의 웃음에 진무가 고개를 돌렸다.
상춘정의 입구로 웬 노인 하나가 신기하다는 듯 두리번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꽤 단정한 옷차림에 청수한 외모를 가진 노인이었다.
뭐, 신선 된 놈들 외모가 다 그렇지. 아마 어디 산중에서 도 닦던 놈 중 하나인 모양인데…… 어디서 본 적이 있었나? 어째서 얼굴이 익숙한 거지?
왠지 모를 익숙한 느낌에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는데, 눈이 마주친 노인이 몸을 바르르 떨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지? 왜 놀라?
“아, 아아…….”
“……?”
뭔가 아련함이 느껴지는 감탄사하며, 이내 허겁지겁 달려오는 발걸음하며.
그런데 저렇게 조심성 없이 뛰어오다가는…….
파파파, 풍덩!
“오고로로, 푸엑, 쿠에엑.”
역시나.
등선까지 했으니 아마 하계에서 익힌 무공에 꽤 자신이 있었을 테지만, 중수에 통할 리가 없지. 아마도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있나 싶을 테다. 과거의 자신처럼.
“이보게, 두장군.”
“예?”
“가서 구해 주지 그러나.”
“……선휘도 있는데, 제가 왜요?”
“허허, 이 사람. 당연히 자네가 가야지.”
“……?”
의아해하는 진무를 향해 청무가 웃으며 말했다.
“저 아이, 청상이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