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535
5화
“천시원(天市垣)은 천계에서도 가장 낮은 곳에 해당합니다.”
“그렇군요.”
미리 연락받고 나온 천시원 등록 관리소 소속 십령(十靈)의 설명에 청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무당 후학이랍시고 신경 좀 써 준 모양이었다. 보패를 준 것도 모자라 안내원까지 붙여 주다니. 그것도 십령으로.
십령이라 하면 천시원을 관리하는 신선 바로 아래의 직위로, 열 번의 윤회 동안 하늘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산 순수한 혼이다.
맑고, 깨끗하고…… 말도 드럽게 많은…….
“귀천령(歸天靈)들이 살아가는 도시랄까요?”
“귀천령이요?”
“예.”
“모두가 청상선인처럼 신선의 반열에 오르는 것은 아니니까요.”
“아…….”
의아해하던 청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생각해 보면 평생 도 닦다가 죽은 청우도 신선이 되지 못했다 하지 않은가.
“이 천시원이 이래 보여도 규모로만 따지면 천계에서 가장 큽니다.”
진무는 십령의 말이 끝날 때마다 열의 넘치는 학동처럼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청상을 보며 피식 웃었다.
자신이야 이미 이곳에서 만 년을 살면서 다 아는 지긋지긋한 내용이라 지겹기만 했지만, 청상은 아니지 않은가?
막 등선한 몸이라 모르는 것이 많으니, 저런 말 많…… 의욕 넘치는 놈의 안내가 제격인 듯했다.
“이곳의 규모는 하계의 상황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하계와요?”
“예.”
“어찌?”
“가령 전쟁 같은 것들이요. 그때마다 귀천령들의 수가 폭등하기도 하지요. 참, 청상선인께서도 만 년 전 그때 하계에서 일어난 큰 난리를 막는 데 기여하셨다면서요?”
“예?”
“그, 대악(大惡)의 운명을 타고난 인물로 인해 생긴 혼란을 해결하셨다고…….”
“아!”
한무화에 대한 이야기임을 알아챈 청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정말이지 그때 옆에 계신 두장군님께서 활약하시지 않았다면 천시원의 동쪽 구역이 터져 나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군요.”
“어휴, 그때 생각만 하면 정말 아찔합니다.”
십령의 말에 청상이 새삼 존경해 마지않는 눈빛으로 진무를 쳐다봤다.
사숙은 정말로 위대하시구나. 하계에서는 황제와 백성, 무림인들에게 추앙받으시고 천계에서는 선인들에게 이리 추앙받으시니, 참으로 무당의 자랑…….
어, 잠깐.
“한데, 죽은 자들이 자꾸 늘어나면 천시원의 규모가 계속해서 커지겠습니다.”
“아, 그건 아닙니다.”
“예?”
“귀천령들에게는 수명이 정해져 있습니다. 인간이 하계에서 나이 들며 기억을 쌓는 것과 달리, 귀천령들은 천시원에서 점점 기억을 잃어 가지요.”
“기억을 잃어요?”
“예. 그리고 모든 기억을 잃게 되면, 윤회의 문을 지나서 저마다의 모습으로 환생합니다. 또다시 하계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렇게 균형이 유지됩니다.”
“아!”
“두장군님처럼 죽자마자 기억을 가지고 다시 살아나거나 하는 특별한 상황을 제외하면, 대부분 그런 과정을…….”
“야!”
한창 신나게 설명하던 십령이 별안간 내지른 진무의 호통에 찔끔하며 입을 다물었다.
“필요한 이야기만 하면 될 것을, 어디서 쓸데없는 부연 설명이야? 확 그냥 소멸시켜 버릴까 보다.”
“……죄, 죄송합니다. 한데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
잘못? 없지. 굳이 꼽자면 주둥이랄까?
그가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죽은 선휘의 몸으로 환생한 혁련무강에 대해서였다. 몇만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상황이라 천계에서도 제법 유명한 이야기였던.
하지만! 청상은 자신이 혁련무강이었는지 전혀 모른다.
뭐, 안다고 문제 될 것은 없지만, 또 굳이 안다고 좋을 건 뭐란 말인가?
생각해 봐라. 청상의 눈빛에 자리 잡은 존경심이 다 어디서 왔겠는가? 그게 다 옆에서 별 볼 일 없는 도동의 몸으로 무의 극의에까지 이르는 걸 지켜봤기 때문이다.
근데 사실은 혁련무강이었다? 그건 아니지. 뭔가 반칙이라도 한 것 같지 않은가?
그래, 이참에 엄포를 놔야겠다. 혁련무강이니 환생이니 어쩌고 하는 놈들을 발견하면 입을 찢어 버리겠다고.
청상이 절대 알 수 없도록…….
“사숙.”
“으응?”
“왜 갑자기 화를?”
“아, 그…… 화는 무슨? 핫핫핫!”
“…….”
진무가 웃으며 어물쩍 넘어가려는데, 청상이 빙긋 웃으며 물었다.
“혹, 혁련무강이었다는 과거 때문에 그러십니까?”
“당연하지, 그…… 응?”
“…….”
짐짓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진무가 청상의 말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허허, 그러셨군요. 전 또 왜 그러시나 했습니다.”
“……니가 그걸 어떻게?”
“천 대협이요.”
“천…… 누구?”
“벌써 잊으신 겁니까? 사숙의 수하였던 천우명 대협이요.”
“우명?”
“예. 사숙께서 돌아가시고 난 뒤, 술만 취하면 자신이 불로초로 사숙을 되살렸었다고 자랑삼아 떠드셨는걸요?”
“…….”
“처음엔 믿지 못했는데, 원 방주도, 가부자께서도, 살막주께서도 이미 알고 계셨더라고요, 허허.”
아, 그래?
진무는 멍한 눈길로 허허 웃는 청상을 쳐다봤다.
그랬구나. 다 아는 이야기였는데, 나 혼자 제 발 저렸구나.
그런 줄도 모르고…… 다 알고 있는 줄도 모르고, 아닌 척 오지게 했구나.
염병, 쪽팔려라.
몰아치는 머쓱함을 견딜 길이 없어 먼 하늘만 쳐다보는데, 마침 십령이 걸음을 멈췄다.
“아, 저기 있네요.”
그가 손으로 가리킨 작고 아담한 초옥.
다른 초옥과 별반 다르지 않은 평범한 그곳에, 너무나도 익숙한 체구의 뚱뚱한 귀천령이 평상에 앉아 있었다.
“저자가 두장군님과 청상선인께서 찾으시던…….”
“처, 청우야!”
십령의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청우를 알아본 청상이 반가움을 금치 못하고 헐레벌떡 뛰어갔다.
“청우야, 이놈아! 살아 있었구나.”
“…….”
너무 반가웠던 모양이네. 죽은 놈을 보고 살아 있었구나라니…….
그런데.
“누구……신지?”
“……어?”
“댁은 뉘시길래? 그리고 청우는 또 누구인지?”
“으응?”
청우가 얼굴을 찡그리며 자신을 꽉 끌어안은 청상을 떼어 놓았다.
“청상선인.”
“……?”
“이미 윤회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귀천령입니다. 과거의 기억은 남아 있지 않지요. 청상선인도, 두장군님에 대해서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아!”
십령의 말이 믿기지 않는 듯, 청상이 안타까운 눈빛으로 주저앉아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 모습에 진무도 마음이 아팠지만, 이미 등선한 지 오래인 그는 대범함을 잃지 않았다.
“슬퍼할 것 없다. 청우를 그리워했던 마음이야 오죽하겠냐마는 어쩌겠느냐? 그것이 하늘의 이치인 것을…….”
“흑흑, 사숙……. 그래도 안타깝습니다. 청우가, 청우가 우리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
“……녀석.”
진무는 청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겨 위로했다.
하긴, 청상이 울 만도 했다.
사람이 죽음에 이르면 살아온 기억을 주마등(走馬燈)처럼 되새기게 되고, 그 과정에서 각인된 기억은 선인이 되어서도 잊지 못한다. 아니, 좀 더 또렷해진다고 해야 하나?
그러니 더욱 슬플 것이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자가 모든 것을 잊어버린 자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니까. 야속하고, 안타깝겠지.
“사숙, 흑흑.”
“원, 녀석. 그만 울거라. 감정을 초월하고 선인이 되었다는 놈이 이리 마음이 약해서야…… 대범해져야지.”
“흑흑…….”
“그래도 얼마나 다행이냐? 비록 등선하지 못했다고는 하나, 착하게 살아온 덕에 귀천하여 이제는 환생한다고 하지 않느냐?”
“하지만…….”
“이놈아, 청우보다 못한 놈들이 한둘인 줄 아느냐? 하계에서의 죄업에 지계로 간 이들은 윤회조차 하지 못한 채 요괴의 몸으로 고통받느니라. 그에 비하면 청우는 얼마나 다행이냐?”
“…….”
진무가 여러 번 등을 쓸어 주고 나서야 청상은 겨우 눈물을 삼켰다.
“이제 괜찮으냐?”
“예.”
“그래, 허허.”
청상을 달랜 후, 진무는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청우를 힐끗 보곤 십령에게 물었다.
“이보게.”
“예, 두장군.”
“저 아이, 환생지는 정해졌는가?”
“에, 어디 보자…….”
십령이 품에 있던 서책을 펼쳐 뒤적였다.
“아, 여기 있군요. 평소 식탐이 있었던지라 그에 걸맞은 자리로 정해진 모양입니다.”
“그곳이 어딘가?”
조금 망설이는 기색으로 십령이 입을 뗐다.
“자금성 황궁의…….”
“오! 황궁? 황가란 말인가?”
“예.”
“그거 잘되었구만! 하면 황족으로 태어나는 건가?”
“예? 아니 그건 아니고…….”
“아냐? 그럼 뭐, 대신의 자제?”
“그건 아니지만, 아마 평생 배고프지는 않을 것입니다.”
“정말입니까? 아아, 너무나 다행입니다. 사숙.”
“허허, 그러게나 말이다. 그래, 어느 집인가? 내 축복 기도라도 올려야 할 것인데…….”
“예?”
진무의 말에 십령이 당황한 표정으로 눈을 끔벅거렸다.
“왜?”
“그것이…….”
“……?”
“그…… 황궁 축사에서 기르는 돼지로…….”
“응?”
“네?”
“열 마리 중 다섯째로…….”
“…….”
당혹스럽기 짝없는 청우의 환생지에 일순 침묵이 흐르고, 청상의 얼굴이 차츰 일그러졌다.
“아이고, 이놈 청우야! 니놈이 그렇게 식탐이 많더니만, 결국 돼지가 된단 말이냐!”
이내 그의 대성통곡이 이내 초옥 전체에 울려 퍼졌다.
“…….”
진무는 착잡한 시선으로 청상을 바라봤다.
청우가 돼지가 된다니…… 너무 당연한, 아니 충격이긴 하지. 그러나 어쩌랴, 그것이 청우의 운명이라면 운명일 터.
축생이 된다는 것이 마음이 아프기는 하지만, 잘 길러져 누군가의 뱃속으로 들어간다는 것 또한 안타깝긴 하지만……. 살신성인(殺身成仁), 아니 살돈성인의 덕을 인정받아 분명 다시 귀천할 것이다.
평정을 되찾은 진무가 다시금 청상을 달랬다.
“청상아, 그만하거라. 이 또한 하늘의 이치니라.”
“사수우욱, 어찌합니까. 청우가, 우리 청우가……!”
“어허, 이놈! 대범해지라 하지 않았더냐?”
“어흐흑, 끅끅.”
진무가 근엄한 표정으로 나무랐지만, 청상은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후우, 그놈 참…….”
그래, 울어라. 선인이라고 어찌 슬픔이 없겠느냐? 울고 싶을 때는 울어야지. 실컷 울고 나면 또 한 번 성장할 것이다.
진무가 짧게 한숨을 쉬며 그의 어깨를 두들기는데, 갑자기 십령이 무언가 기억이 난 듯 서책을 뒤적였다.
“참! 두장군께서 아실 만한 분이 한 분 더 있습니다.”
“응?”
끼이익.
그때, 초옥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 때마침 나오시네요.”
십령의 말에 문을 힐끗 쳐다본 진무의 얼굴이 일순 딱딱하게 굳었다.
“알아보시겠습니까?”
“…….”
어찌 모를까, 저 익숙한 얼굴을, 저 온화한 미소를.
내내 보고 싶었던 사람인데, 사무치는 그리움에 떠올릴 때마다 눈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는데…….
차오르는 눈물을 억지로 참아 보려 입술을 깨물었지만 소용없었다.
“뉘시오?”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둑이 터지듯 눈물이 쏟아지고야 말았다.
“크헝헝, 스승니임!”
그는 명진, 제 스승이었으니까.
결국 진무도 청상 옆에 주저앉아 천시원이 떠나가라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대체 누구신데…….”
“어헝헝, 어찌, 어찌 저를 잊으셨습니까!”
당장에 실신이라도 할 듯 울어 대는 진무의 모습에, 옆에서 울던 청상마저도 젖은 눈으로 그를 안타깝게 쳐다봤다.
“사수욱, 흐흑, 이를 어찌합니까? 명진 사조님도, 청우도…… 어흑흑!”
“크헝헝헝!”
지켜보는 십령으로서는 이 상황이 난감하기만 했다.
아니, 막 선인이 된 청상은 그렇다고 쳐도, 천계에서도 몇 안 되는 상선에 두장군이라는 직책까지 가진 인물이 애처럼 울어 버리다니?
“두, 두장군님.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잘못하면 귀천령들의 기억에 혼란이…….”
십령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무와 청상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 그를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
“닥쳐! 이 십령 새끼야!”
“…….”
두장군? 상선? 그딴 게 다 뭐란 말인가? 명진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데!
아니, 그리고 어째서 명진 스승님 같은 분이 귀천령일 수 있단 말인가?
하늘의 이치고 나발이고, 진무가 명진을 반드시 신선으로 만들고 말겠다 다짐하며 이를 부득부득 가는데, 누군가가 초옥으로 들어왔다.
“거기 두장군이 아닌가? 내 풍환에게서 연락을 받았네. 자네가 이곳에…… 있을…… 어? 어어?”
“…….”
때마침 진무를 만나러 천시원에 도착한 선별관 은천이 무시무시한 진무의 눈빛에 멈칫했다.
“이게 누구야? 선별관 아니야? 니가 그랬지? 명진 스승님도 니가 여기 데려왔지?”
“…….”
진무의 살기에 은천이 오던 속도 그대로 뒷걸음질을 쳤다.
어어, 이보게, 두장군.
눈물 흘리면서 눈깔 그렇게 무섭게 뜨는 거 아니야.
“너 씨바, 거기 딱 있어. 오늘 아주 끝장을 볼라니까.”
네? 저요?
어느새 눈물을 멈추고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다가오는 진무의 모습에 선별관 은천은 생각했다.
아, 씨발……. 이거 때를 잘못 맞춰도 한참 잘못 맞춘 거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