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540
10화
겨우내 꽁꽁 얼었던 개울이 녹아 흐르고, 앙상했던 나뭇가지며 황량했던 들판에 새순이 기지개를 켜며 돋아 오른다.
춘풍에 하늘거린 나무들은 이내 무성히 자라 그늘을 만들어 더위를 가리고, 성숙하게 자린 잎들은 절정에 치달았다가 나이 든 노인처럼 늙고 지쳐 힘없이 떨어진다.
낙엽이 찬바람에 날리고, 생명력을 잃고 말라 발길에 사각이며 부서질 즈음이면 눈이 소복하게 그 위에 이불처럼 덮이니 이것이 사계의 끝이다.
하지만 끝이 있으면 시작도 있는 법이라. 삭풍이 몰아치는 시간이 지나가고, 꽁꽁 언 개울가에 머리를 내민 개구리가 울면 사람들은 다시 봄이 찾아왔음을 깨닫는다.
그렇게 생명이 순환하는 과정이 하계에서 몇 번, 혹은 몇십 번이나 반복되고 난 뒤의 어느 날 밤.
진무가 지계로 갈 모든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쯤, 옥황이 미리 알기라도 한 것처럼 찾아왔다.
“준비는 끝났느냐?”
옥황의 물음에 진무가 청상을 힐끗거리곤, 움켜쥔 주먹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원하신다면 귀모의 모가지도 딸 수 있을 것 같네요.”
“허세는…….”
자신감 넘치는 진무의 대답이 싫지 않았던 것인지 옥황이 피식 웃곤 말했다.
“가자.”
“어딜요?”
“지계로 통하는 통로.”
“바로요?”
“준비가 끝났다는데 머뭇거릴 이유는 없지.”
“아니, 인사라도…….”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고, 또 혹여 일이 잘못되면 영영 볼 수 없을지도 모르니 인사라도 하고 가려 했던 것인데, 그러한 의견을 피력할 새도 없었다.
“어?”
옥황이 손을 휙 내젓자 눈앞이 변했다.
고작 눈 한 번 깜빡했는데, 조금 전까지 봄 내음 가득하던 장춘곡이 칠흑 같은 어둠이 가득한 지하 공동으로 바뀐 것이다.
정말 대단한 분이네.
이렇게 막 풍경도 맘대로 막 바꾸고, 아니 위치를 바꾼 건가?
진무가 왠지 부러운 눈빛으로 옥황을 바라보는데, 옆에서 털썩 소리가 들렸다.
“우웩!”
“……?”
고개를 돌려 보니, 청상이 바닥에 엎드린 채 토악질하고 있었다.
“쯧, 귀모 모가지도 따 오겠다더니……. 저리 약해서야 원.”
“…….”
진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혀를 차는 옥황을 바라봤다.
이게 대체 뭔 일이란 말인가? 멀쩡하던 청상이 대체 왜?
“순간적으로 먼 거리를 이동한 터라 몸에 무리가 간 게야.”
“먼 거리요?”
“그래.”
“얼마나요?”
“인간의 기준으로 대략 육십칠만 리쯤 되나?”
“유, 육…… 예? 눈 깜빡했는데요?”
“내가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게냐?”
“그럴 리가요? 그럼 대체 여긴 어디인데요?”
“하계.”
“하계라고요?”
“그래.”
“아니, 옥황상제씩이나 되시는 분이 하계에 막 와도 되는 겁니까?”
“이놈아, 이 산 저 산 할 것 없이 명산이란 명산에 산신령이 잔뜩인데 신경은 써야지. 가끔 불시에 시찰하고 그런다. 그리고 너도 들어 봤지? 옥녀지라고? 나도 가끔 거기 가서…….”
옥황의 말을 듣고 있던 진무가 수상쩍은 이야기에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산신령까진 괜찮았는데…… 옥녀지? 거길 갔어?
이런 음흉한 노인네! 선녀들이 목욕하는…… 아차! 생각 읽힐라!
아니나 다를까, 무방비하게 이어지던 생각을 부랴부랴 지우고 눈치를 살피니 옥황이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너 어째 눈깔이 매우 불손하다?”
“예?”
“이 자식이, 내가 하계에서 쓸 수 있는 힘이 제한적이라 네놈의 마음을 읽지 못한다고 해도, 그 표정이면 유추는 할 수 있거든?”
“…….”
아, 하계에서는 못 읽는 거였다?
어찌나 다행인지.
이참에 욕이나 실컷 해 주마, 이 음흉한 노인네야.
“너 지금 내가 파렴치한 짓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지? 그치?”
“암요! 설마하니 제가 상제씩이나 되는 분께서 선녀들 목욕하는 거나 훔쳐봤을 거라는 불충한 생각을 했겠어요?”
“매우 그래 보이는데?”
“오해세요.”
“아아~! 그래?”
“무척이나 그렇습니다.”
진무가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을 못 읽어서 다행이다.
지금도 욕하고 있는데……. 열심히 잡아떼야지.
“진짜지?”
“그럼요. 그나저나 대체 여긴 어딥니까?”
“…….”
진무가 빠르게 화제를 돌리자,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바라보던 옥황이 툭 내뱉었다.
“틈.”
“틈이요?”
“그래, 원래 삼계에는 수많은 틈이 존재하지. 각 계를 오갈 수 있는 통로 같은 거랄까?”
“아! 그런 게 있었군요.”
“하지만 모든 틈에 길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정확히 지계로 가는 틈도 있지만, 어디로 가게 될지 모르는 틈도 있는 것이지.”
“그럼, 여기가?”
“천계가 관리하던 틈 중의 하나다.”
“아!”
진무가 탄성을 터트리며 신기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오랫동안 찾지 않은 것인지 사방에 이끼가 가득했고, 벽면에 얽히고설켜 자란 덩굴이 팔뚝만큼이나 두꺼웠다.
정말 이곳에 지계로 통하는 틈이란 게 있다고?
진무의 얼굴에 의문이 떠오를 때쯤, 옥황이 걸음을 옮겼다.
슥, 스윽.
얼마 안 가 멈춘 그가 한곳에 가득히 쌓여 있는 수풀을 걷어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러난 것은…… 우물?
“이리 오너라.”
“…….”
진무와 청상이 다가가자 옥황이 볼품없이 무너진 우물을 가리켰다. 옥황의 손가락을 따라 우물 안쪽을 바라본 진무는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이미 밤낮을 초월한 지 오래인 제 눈에 우물의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그곳은 마치 한번 떨어지면 영원히 헤어나지 못한다는 무저갱처럼 느껴졌다. 보고 있자니 조금 섬뜩한 느낌이 들었달까?
“천계와 지계의 전쟁 때 사용하던 곳이다.”
“…….”
“당시에 지계를 살피기 위해 수많은 세작이 들고 났던 통로였지. 하나 평화 협정 이후 닫아 두었고, 열지 않았다.”
“그럼 귀모도 여길 아는 겁니까?”
“아니다. 이곳은 천계에서만 사용하는 틈이니까.”
“……그럼 천계를 공격해 오는 놈들은 대체 어디로 오는 건데요?”
“틈을 우리만 알까? 귀모가 알고 있는 틈도 있겠지.”
“평화 협정을 맺었다면서요?”
“귀모 하는 짓이 원래 그렇다. 자신이 보낸 게 뻔한데도 항의할 때마다 모르쇠로 일관하지.”
“못된 성미네요.”
“그래. 하나 우린 다르다. 평화 협정 이후로 단 한 번도 지계로 선인을 보낸 적이 없어.”
“흠, 정의로우시네요.”
“옥황이니까.”
“…….”
“오래 유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귀모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아주 잠깐 여는 것이야.”
“…….”
“지계로 가는 것은 확실하나 어느 곳에 도착할지는 나도 모른다. 다만 그곳이 어디든 무도(無道)하고, 무법(無法)하며, 무자비(無慈悲)할 것이다.”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고, 어조는 전에 없이 엄중하다.
그러나 정작 진무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진한 미소였다.
무도, 무법, 무자비…… 캬아, 이 얼마 만에 들어 보는 흥분되는 단어들인가?
생각만 해도 심장이 뛴다.
그래, 삶이라는 것이 자고로 그래야지. 막 피 튀기고, 살점 찢기고, 어!?
그간 어울리지도 않는 신선 노릇 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던가? 이제야 맞는 옷을 입는다고 생각하니 흥분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음, 내 비록 너를 보내기로 마음먹었으나, 조금 후회가 생긴다. 이게 과연 옳은 선택인지…….”
“어울리지 않게 웬 걱정입니까? 그리고 그런 걱정은 좀 진심 어린 표정으로 하셔야지요.”
“원래 무표정하다.”
거짓말, 아까 화가 잔뜩 난 표정을 내가 봤는데.
하지만 괜히 시비 걸었다가는 맞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진무는 얌전히 우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자, 어서 열어 주시기나 하시죠.”
진무의 기대에 찬 눈빛에 옥황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말하지만, 너희들이 이곳을 통해 지계로 갔다는 것에 대해 나와 천계는…….”
“부정(否定)하시겠다는 말이죠?”
“그래.”
“지난번에 들어서 그런지 별로 충격적이지는 않네요.”
“…….”
“청염의 위치는요?”
“모른다.”
“혹시나 해서 그냥 물어봤어요.”
“다만, 업경(業經)은 육계마왕 중 하나인 사타가 가지고 있을 게다.”
“…….”
옥황의 말에 진무가 우물을 바라보던 눈을 홱 돌려 그를 빤히 쳐다봤다.
뭔 경? 뭔 타? 그게 뭔데?
“응? 내가 말 안 해 줬냐?”
“…….”
“이런, 순서가 엉망이구나. 업경은 네가 찾고 있는 그 물건이다.”
“예?”
“혼들의 모든 과가 적힌 서책.”
“아!”
“사타는 음…… 천계로 치면 보화와 비슷한 일을 하는 놈이라고 해야 하나?”
옥황의 설명에 진무가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멈칫했다.
잠깐만, 보화라고?
등선한 선인들의 등록 관리소를 책임지고 있는…… 무지하게 강하신 무당의 초대 조사?
“저기요, 옥황상제님?”
“응?”
“혹시 그 사타라는 놈이 보화 님 정도로 강하지는 않지요?”
“보화는 상대도 안 되지. 아직 상제가 되지도 못했는데.”
“사, 상제요? 그럼 그 사타라는 놈이 상제급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까?”
“당연한 소릴. 귀모가 다스리는 여섯 세상 중 하나의 주인이다. 최소 지계에서 여섯 번째 실력자라는 소리이지.”
“…….”
순간 진무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그렇다는 말인즉, 지금 지계에서 최소 여섯 번째로 강한, 천계의 상제급 정도 되는 놈에게서 그 업경을 빼앗고, 명진과 청우의 기록을 지워야 한다……. 뭐 그런 말인가?
“그런 말이지.”
“아아…….”
진무가 망연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옥황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뭐야, 마음 못 읽는다면서?
“허허, 니 표정에 빤히 보인다. 이놈아.”
“별의별 능력을 다 가지고 계시네요.”
“기본이지.”
“……거 좋으시겠습니다.”
“…….”
빈정거리는 진무의 말에 옥황이 주먹을 슬며시 들었다 내렸다.
마음 같아서는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지계에서 소멸당할지도 모를 놈이 아니던가?
“지금이라도 포기하면…….”
“절대로요. 되레 강하다고 하니까 은근히 도전 의식이 샘솟네요. 기대하십시오. 제가 지계 놈들에게 천계 무장의 신위를 똑똑하게 알게 해 줄 테니.”
“…….”
진무의 야무진 포부에 옥황이 자신도 모르게 풉 웃을 뻔했다.
뭔가…… 상황과 너무 어울리지 않는 녀석이랄까?
“뭐죠? 그 표정? 그게 사지로 가는 신선에게 지을 표정입니까?”
“오해다.”
“쳇, 오해는. 딱 봐도 비웃었구먼.”
“어허 아니라니까? 내 지금도 너를 얼마나 걱정하는데?”
“잘도 그러시겠습니다.”
“이놈이?”
“됐고요. 빨리 열기나 하시죠. 지계로 가는 틈.”
“고얀 놈…….”
찌푸린 눈으로 진무를 쳐다보던 옥황이 품을 뒤져 작은 구슬 두 개를 꺼내 내밀었다.
“이건?”
“나의 힘을 담은 귀환주(歸還珠)다.”
“귀환주요?”
“그래. 바닥에 놓고 깨면 곧바로 천계로 돌아올 수 있을 게다.”
“아!”
고개를 끄덕이던 진무가 문득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럼 안 되는 거 아닙니까?”
“뭐가?”
“분명 은밀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잖습니까? 잘못하면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어서 걸려도 부정할 거라고.”
“…….”
“근데 이걸 쓰면 옥황께서 저희를 보냈다는 것을 귀모가 알아챌 텐데요?”
“크흠흠! 쓸데없는 소릴. 줄 때 받아 챙기고 준비나 하거라! 이제 틈을 열 것이다.”
갑자기 어색하기 짝이 없는 헛기침을 한 옥황이 우물 앞에 서더니, 심호흡하며 양손을 활짝 펼쳤다.
아, 표정을 보고 마음을 읽는다는 게 이런 거였네. 아닌 척 시치미 떼면서 걱정은…….
와중에 원래가 무표정하시다더니 얼굴은 왜 빨개지시나요?
뭐 어쨌든 준다는데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구명줄이라는데.
진무와 청상이 옥황에게 받은 귀환주를 품에 소중히 갈무리했다.
스으으으.
그사이 옥황의 몸에서 은은하게 뿜어진 빛이 점차로 강해져 지하 공동의 어둠을 모조리 잡아먹기 시작했다.
쿠루루루.
“어?”
신기했다.
우물 속의 어둠이 마치 물처럼 나선 모양으로 회오리치더니, 점점 더 빨라졌다.
“가거라! 열렸으나 금세 닫힐 것이다! 시기를 놓치면 틈에 영원히 갇힌다!”
“…….”
옥황의 외침에 진무는 무어라 외치며 우물을 향해 뛰어들었고, 청상이 재빨리 그 뒤를 따랐다.
쿠우우우우!
그리고 어둠이 둘을 집어삼킴과 동시에 옥황이 신력을 끊어 버렸다.
오래 유지할 수는 없었다. 자신의 힘으로 통로를 이었으니 자칫 귀모가 눈치를 챌 수 있는 일이었다.
쿠우우.
“…….”
어느새 처음의 모습으로 돌아간 낡은 우물을 바라보던 옥황이 진무가 마지막으로 외쳤던 말을 떠올렸다.
“놈, 무슨 마실 가는 것도 아닌데…… 다녀오겠다니.”
말은 핀잔이었지만, 옥황의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분명 다녀오겠다고 했으니 편도가 아닌 왕복일 테지.
또한, 운명이 그를 이끌어 준다면…… 가능하고도 남을 일이다.
그러니, 부디 잘 다녀오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