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548
18화
사방에서 몰려드는 괴들을 닥치는 대로 쓰러뜨리던 진무의 행동이 일순 멈췄다.
“사숙! 위험합니다!”
청상이 다급히 외치며 갑자기 멈춰 버린 진무의 주위에 있던 괴들을 모조리 베어 내고 호위하듯 섰다.
“사숙?”
채찍처럼 늘어뜨린 자충을 회오리처럼 휘둘러 보호막을 친 청상이 진무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뭘 쳐다보고 계신 거지?
진무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어? 저자는?”
진무가 보고 있는 것은 이생이었다.
“아, 역시 살아났군요? 과연, 불사라는 말이 사실인 모양입니다.”
“…….”
그러나 진무의 눈동자에는 다른 이가 투영되어 있었다.
이생의 옆에 있는 인괴. 처음 보는 얼굴이고,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하나 잊을 수 없는 이름 하나를 외쳐 대는 그의 모습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분명 자신을 보며, 있는 힘껏 ‘황신’이라고…… 어째서?
“사숙! 괴들이 너무 많습니다.”
“……?”
진무를 지키며 베고 또 벴지만, 가진 힘이 아직은 부족했다. 벴다 하면 곧장 배가 넘는 괴들이 그 빈 자리를 채우니 자충으로도 막기가 버거워진 것이다.
“사수욱!”
급기야 이를 악물고 토해 내는 청상의 외침에 퍼뜩 정신을 차린 진무가 손에 든 여의를 힘차게 쳐들었다.
“그래! 고민할 거 없지! 궁금하면 가서 물어보면 그만!”
“……?”
송곳니를 한껏 드러낸 진무가 청상이 힘겹게 막고 있는 괴들을 쳐다봤다.
일단 가자면…….
“거치적거리는 것부터 치워야 된다, 이 말이지?”
“예? 그게 무슨?”
진무의 스산한 표정에 청상이 눈을 끔벅거리며 물었다.
무슨 말은, 지금부터 힘 좀 쓰겠단 말이지.
“청상아.”
“예?”
“대비 잘해라, 충격이 클 테니까.”
“예? 예!”
멈춰 있던 진무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강도를 급격하게 더해 가고 있었다. 청상은 서둘러 답하며 황급히 자충을 회수해 자신의 몸을 보호했다.
“크아아아!”
그와 동시에 괴들이 진무와 청상을 향해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콰득! 콱! 콰콰콱!
하지만 괴들은 완전히 다가서지 못했다. 마치 진무와 청상 주위에 보이지 않는 막이 둘러쳐진 것처럼 달려와 부딪칠 뿐이었다. 진무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기운이 만들어 낸 막이었다.
다만 이 많은 수의 괴들의 무게를 버틸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지금도 계속해서 막에 들러붙는 놈들이 더해지는 탓이었다.
“제법 많네.”
진무 역시 묵직함을 느꼈는지 미간을 잔뜩 찡그리더니, 입꼬리를 비릿하게 말아 올리며 여의를 움켜쥐었다.
청상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마른침을 울컥 삼켰다.
진무. 그가 가진 힘을 어찌 모르겠는가? 하나 자기가 아는 것은 이승에서의 모습이 전부이다. 천계의 북방을 책임진다는 두장군 진무의 힘은 아직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다.
과연 지금 그의 힘은 어느 정도일까? 청상이 의아함과 긴장감을 동시에 느끼며 바라보고 있던 그때, 진무 역시 생소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우우우웅!
검은빛을 더하며 울음을 토하는 여의의 약한 진동에 이어, 뇌리를 묵직하게 강타하는 듯한 느낌.
“하, 이거 봐라?”
자신의 마력을 개방해 싸우려던 진무는 문득 신기함을 느꼈다.
지금껏 선인들이 사용하는 법보를 힘을 증폭시키는 무구 이상으로 생각해 보지 않았다.
여의를 각성시켰을 때도 그저 좋은 몽둥이를 하나 얻었다 여겼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의 느낌은 뭐란 말인가?
적을 앞에 둔 여의는 마치 살아서 펄떡이는 물고기 같았다. 제발 자신을 써 달라고 소리 지르는 것이 귓가, 아니 머릿속에 생생하게 울렸다.
“햐, 이놈 재미있네. 자아가 있어? 그저 무기만은 아니란 말이지?”
진무는 힘차게 진동하며 풀어 달라고 요구하는 여의를 온몸으로 느끼며 실소를 머금었다.
여의는 대우의 손에서 각성해 치수의 법보로 사용되었다. 그때만 해도 여의에게서 느꼈던 것은 차분함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손에서 두 번째 각성을 맞이한 뒤로는 전혀 달랐다. 신력을 통해 금빛 광채를 뿜어낼 때의 여의가 신성함을 느끼게 했었다면, 마력을 받아 검은빛을 뿜어내는 지금의 여의는 흉포한 짐승 같았다.
“그렇군. 법보는 주인 된 자의 힘을 증폭해 주는 물건. 즉, 어떤 힘을 담느냐에 따라 그 자아(自我) 또한 바뀐단 말이지? 좋다! 네 뜻이 정히 그렇다면 어디 한번 하고 싶은 만큼 날뛰어 봐라!”
진무가 제어력을 풀어 버리자 여의가 검고 칙칙한 광채를 뿜어내며 단숨에 한계를 돌파했다.
슈아아악!
이어 그 검은빛이 섬광으로 화해 곧게 솟구쳤다.
쑤우욱! 쿠르르릉! 쿠쿵!
창처럼 꿰뚫어 천지를 연결한 여의로 인해 지계의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던 구름이 흠칫 놀란 듯 뒤흔들리고…….
쿠르릉! 쿠르르릉!
이내 성난 듯 묵빛으로 변하며 우렛소리를 토했다.
쿠우우우우.
그리고 휘돌았다.
여의가 만들어 낸 묵빛 기둥을 중심으로 먹구름이 천천히 원을 그리듯 돌며 회오리를 일으키는 모습을 지켜보던 청상의 입이 떡 벌어졌다.
“하, 하늘이 열렸다고?”
콰우우우우!
회전력을 더해 가던 구름이 일순간 여의를 중심으로 열리며 환한 빛을 토했다.
빠직, 빠지지지직!
그러더니 회전하는 구름 사이를 넘실거리던 뇌우가 사방에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콰르르릉! 꽈광!
뇌성은 세상을 뒤흔들고, 벽력은 번쩍이며 대지를 직격해 부순다.
갑자기 변해 버린 상황에 모든 것이 멈췄다.
진무와 청상을 향해 벌떼처럼 달려들던 괴들도 두려움 어린 눈빛으로 하늘을 쳐다보며 주춤거렸다. 가히 뇌신이라 해도 될 만큼 강대한 힘이었다.
이, 이 정도였던가? 사숙의 힘은…….
청상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시선을 옮겼다. 천지간을 연결한 여의를 손에 쥐고 홀로 고고하게 선 진무가 거기에 있었다.
한데 어찌 된 일일까? 여의가 뿜어내는 검은빛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몸에서 뿜어지는 마력 때문인지 지금의 진무는 선인이 아니라 악신 같았다. 턱을 살짝 치켜든 채 주변을 쓸어 보는 눈동자는 검게 물들어 번들거렸고, 입술 새로 삐져나온 송곳니는 그 어느 때보다 차가워 보였다.
“큭큭큭, 이 정도란 말이지? 좋다, 지켜보마.”
누구에게 하는 말일까?
청상이 의문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는데, 진무가 별안간 여의를 놓고 팔짱을 끼었다.
우우웅!
힘차게 답하듯 떤 여의가 빛과 함께 하늘을 향해 솟구치더니, 이내 활짝 열렸던 공간으로 쑥 빨려 들어갔다.
쿠우우…….
칙칙하게 하늘을 메운 먹구름이 여전한 가운데 하늘이 닫히니 구름 사이를 번뜩이던 뇌우가 사라지고 뇌성마저 그쳤다. 한동안 천지간에 벌어진 조화가 마치 없었던 일이었던 양 고요해졌다.
“크르르르.”
번쩍 정신을 차린 도산옥의 괴들이 다시금 진무와 청상을 향해 손톱과 무기를 들고 낮게 으르렁거렸다.
이전에 감돌던 두려움마저 사라진 눈빛에 청상이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 사숙?”
하지만 진무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팔짱을 낀 채 양발을 여유롭게 벌리고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크아아아!”
괴들이 다시금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괴가 입을 떡 벌리며 진무를 집어삼키려 하자 청상이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자충을 꺼냈다.
“이런 염병할! 사숙!”
하지만 진무의 손이 더 빨랐다. 어느새 팔짱을 푼 진무가 손을 뻗어 청상을 막으며 낮게 말했다.
“낙뢰(落雷).”
꽈르릉! 콰아앙!
검은 뇌우가 내리꽂혔다. 진무를 집어삼키려던 괴는 뇌우를 직격으로 맞고 움직임을 멈췄다.
“이, 이건?”
청상, 그리고 지켜보던 모든 괴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사아아아…….
바람에 흩날리는 재처럼 허공에 흩어지는 괴에게는 시선 한번 주지 않고 하늘을 응시하던 진무가 입가에 진한 미소를 머금었다.
“녀석, 그게 감췄던 네 진신(眞身)이었더냐?”
“……?”
진무의 말에 의아함을 느낀 청상이 급히 고개를 쳐들었다. 하늘을 가득 메운 구름, 그리고…….
“그림자?”
청상이 언뜻 스친 무언가에 시선을 집중했다.
움직이고 있다. 길고 거대한 무언가가 구름 속에서 너울너울 움직이고 있었다.
한참을 바라보던 진무가 드디어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손을 뻗으며 말했다.
[내려와라, 여의.]“…….”
그 한마디에 윤기 흐르는 거대한 발톱이 하늘을 찢었다.
쩌적, 쩌저적!
그리고 본신을 드러낸 거대 흑룡이 진무를 향해 아가리를 힘껏 벌린 채 떨어져 내렸다.
콰아앙! 드드드드득! 콰쾅!
“…….”
파문(波紋).
흑룡이 진무를 집어삼키며 대지와 충돌했고, 그 여파에 지면이 동심원을 그리며 일렁일렁 퍼져 나갔다.
“크으윽!”
자충의 힘을 빌려 몸을 보호하고 있었음에도, 청상은 그 충격파에 온몸이 찢기는 듯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쿠우우우…….
다시금 세상이 안정을 찾았을 때, 거대한 원형의 대지에는 진무와 청상을 제외한 그 무엇도 남아 있지 않았다.
“흠, 제법 쓸 만하긴 한데…… 과해.”
“…….”
이전의 모습으로 그대로 선 진무.
하지만 청상은 똑똑히 보았다. 빛이 꺼진 쇠몽둥이를 잡고 선 진무의 몸 주변을 휘감고 있는 거대한 흑룡의 모습을. 봉에서 빠져나와 본신을 드러낸 여의였다.
그런데 고작 쓸 만한 정도라니?
정확히 재 보진 않았지만 멀리 폭발에 휩쓸리지 않은 괴들의 모습이 눈곱만큼 작아 보이는 것을 보면 대략 반경 십 리 안의 모든 것이 소멸해 버린 셈이다. 하계로 따지자면 작은 성 하나가 통째로 사라져 버렸다고 해야 하나?
그건 그냥 쓸 만한 정도가 아니다. 굉장한 거지.
“청상.”
“예?”
“길 생겼다, 가자.”
“……예!”
여의를 비스듬히 늘어뜨린 진무가 심드렁한 걸음으로 나아가자 청상이 급히 그 뒤를 따랐다.
앞선 상황을 생각하면 많은 수의 괴들이 빈 곳을 메우며 공격했어야 마땅하지만, 괴들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되레 진무의 걸음이 가까워질 때마다 지금의 간격 이상으로 거리를 물렸다.
이윽고, 진무가 이생의 앞에 도착했다.
“지, 지지지지…….”
“…….”
진무가 보여 준 신위에 이생이 이름조차 제대로 내뱉지 못하고 버벅거렸다.
착시다. 분명 자신이 잘못 본 것이다. 요에 오른 정도라고 여겼는데……. 지금의 모습은 가히 도산옥주 협비가 거느리는 귀(鬼)에 버금가는 수준? 아니, 그 이상이 아닌가?
괴들이 왜 물러났겠는가. 진무가 그만한 힘을 보여 줬기 때문에 물러난 것이다.
“비켜.”
“……예?”
“가로막지 말고 비키라고, 이 새끼야.”
“……!”
얼굴을 찌푸린 진무가 손을 휘휘 젓자 이생이 화들짝 놀라 훌쩍 옆으로 물러났다.
“너…….”
진무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울고 있는 총아였다. 그가 다가가며 입을 열자, 총아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크게 외쳤다.
“천주님! 접니다! 황신입니다!”
“…….”
그러더니 곧바로 바닥에 머리를 처박을 듯 엎드린다. 진무는 잘게 떨리는 그의 등을 지그시 내려다봤다.
모습도, 목소리도 어느 하나 같은 것이 없다. 하지만 굳이 말로써, 행동으로써 증명하지 않아도 어렴풋이 느껴졌다. 황신이다, 유일하게 자신의 가장 가까운 곁을 맡겼던 그.
만 년, 진무의 시간이 그리 지나가고서야 겨우 만난 것이다.
목이 메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 애써 마음을 가다듬은 후, 진무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뭘 처울고 있어? 빨리 안 일어나?”
“…….”
짜증 가득한 목소리에 엎드려 있던 총아, 아니 황신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하여간 빌어먹을 개천주 같으니……. 울고 있으면 토닥여 줄 만도 하건만, 다짜고짜 욕부터 해?
그 긴 세월을 지나 만났건만 변한 게 없다, 변한 게.
그러나 그리움에서 기인한 투덜거림을 어찌 탓할 수 있으랴. 벌떡 일어난 황신이 진무를 바라보며 웃었다.
변한 게 없어서 다행이다.
그는 여전히 강했다. 그리고 전신을 휘감고 있는 흑룡의 모습과 무척이나 잘 어울려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