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551
21화
귀모의 포궁에서 도산옥까지는 인간의 걸음으로는 죽을 때까지 걷는다 해도 끝자락을 보지 못할 만큼 멀었다.
다만 권능을 가진 이들에겐 달랐다.
공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그들의 걸음에 멀고 가까움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귀모의 궁을 벗어난 도산옥주 협비가 걸음을 내딛자, 잠깐 어두워지는가 싶더니 이내 밝아지며 풍경이 바뀌었다.
스윽.
그가 도착한 곳은 도산옥을 둘러싼 검수림의 외곽이었다.
손을 내밀자 검수들이 흉흉한 예기를 거두고 가지를 내밀어 그의 손을 감았다.
차르륵, 차르륵.
“…….”
애교 피우는 고양이처럼 제 몸을 비비며 반가워하는 검수들을 어루만지던 협비가 문득 얼굴을 찡그렸다.
귀모로부터 도산옥을 관장하는 권능을 부여받은 그였기에 알 수 있었다. 머릿속에 투영되어 스치는 검수의 기억을 하나하나 훑던 그의 입에서 의문이 흘러나왔다.
“……하나가 아니었나?”
귀모의 말을 들었을 때는 한 놈이라 여겼는데…….
하지만 그렇다 한들, 어찌 종복이 되어 주인에게 불만을 품겠는가? 다만 자신의 허락도 없이 도산옥을 침해한 귀의 행동에 언짢아질 뿐이었다.
그의 손길에 담긴 분노의 감정을 느낀 것일까? 검수들이 소스라치게 놀라 물러나려 했다.
꽈드드득.
하지만 협비의 손은 인정사정없이 검수를 휘어잡았다.
칼날을 잡았으니 베여야 마땅하겠지만, 검수는 되레 그 손아귀에서 힘없이 우그러들었다. 그 역시 주인 된 자의 권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도산옥에 속한 모든 것에 침해받지 않는 권능.
“보여라.”
나지막한 명에 손에 잡혀 있던 검수가 밝은 빛을 뿜어내며 허공에 지난 기억을 그렸다. 두 명, 아니 정확히는 뒤에 멀뚱멀뚱 기다리는 놈까지 셋…….
소리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협비는 검수가 만들어 낸 기억의 잔재들을 싸늘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봉을 든 놈이 앞섰고, 검을 든 놈이 뒤따른다.
그런데 밖에서 왔다? 어째서?
다소 의문이 들었지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귀모가 귀라 했으니 귀다.
협비는 검수들이 만들어 내는 환상에 다시금 시선을 집중했다.
“……!”
그런데 봉을 든 놈이 검수를 후려치는 순간, 우그러들었다.
“허!”
저게 가능한 일이라고? 대체 놈이 가진 저 거무튀튀한 쇠몽둥이가 뭐길래 검수를 구겨 놓을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더 황당한 것은 다음의 상황이었다. 뒤따르는 놈의 손에서 튀어나온 검이 그 모양을 자유자재로 바꾸며 검수를 잘라 내 버린 것이다.
협비는 너무 놀라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이게 무슨 개 같은 경우란 말인가? 이제 막 귀가 된 놈이 검수를 잘랐다고? 그건 도산옥에서 귀모의 권능을 부여받은 자신만이 가능한 일이 아니었던가?
괴든 요든, 설사 귀라 할지라도 검수림을 만나면 당연히 세 번째로 뒤따른 놈의 꼴이 되어야 했다. 베이고, 잘리며 고통스러워하다가 죽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황당함이 찾아왔다.
“허!”
검을 든 놈이 일격에 검수림에 거대한 원형의 공터를 만들어 버렸다. 한순간에 숲이 증발해 버린 듯했다.
이제는 분노가 감탄으로 화할 지경이었다.
스으으…….
검수의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그 뒤부터는 놈들이 도산옥 안으로 들어가 버렸으니까.
“이놈이구나.”
협비는 검을 든 자가 귀모가 말한 자일 것이라 단정 지었다. 그리고 그가 지금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도…….
까드득.
검수를 구겨 휘어 버린 협비가 차가워진 표정으로 나지막이 말했다.
“길을 열어라.”
차르르륵.
그의 명에 검수들이 뒷걸음질 치듯 비켜나 중앙을 비우고, 이내 멀리 도산옥이 한눈에 보일 정도로 넓고 곧게 뻗은 길이 생겼다.
“가자!”
도산옥을 지배하는 자, 협비.
이제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그러할 그가 걸음을 내딛자 그와 함께 도산옥을 떠나 있었던 판관이라 불리는 대괴, 그리고 그 윗자리를 차지한 귀와 요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이 도착하자 입구를 지키던 괴들이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문을 열었다.
끼이이익.
훤히 드러나는 도산옥의 그 중심에 서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셋이 아닌 넷이었다.
자신을 알아보고 흠칫 놀라 벌벌 떨어 대는 등록소의 괴 놈은 둘째 치고…….
“총아?”
“…….”
그였다. 망자로 형벌을 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괴, 요를 거쳐 귀가 되었던 놈.
예쁘다 예쁘다 해 줬더니 천계로 보내 달라고 떼쓰길래 두들겨 팬 뒤 힘을 빼앗아 회천의 이동꾼으로 보냈었는데, 새로운 귀들과 함께 있는 것을 보면 그쪽에 들러붙기로 한 모양이었다.
“총아? 이런 씨부럴 마왕 놈이 누구보고 총아래? 나 이름 찾았거든? 그러니까 혓바닥 뽑아서 토막 쳐 버리기 전에 제대로 불러. 이젠 황신이다.”
“…….”
괴로 좌천되었음에도 기분을 언짢게 만드는 찰진 욕설은 여전했다.
그런데 황신?
원래 돈 놈이긴 하지만, 조금 더 또라이가 된 모양이다. 괴가 되면서 자신에게 부여받은 이름을 부정하고 이승의 이름을 쓰다니,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오냐, 내 네놈을 이번엔 괴가 아니라 망자로 다시 되돌려 형벌장의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게 해 주마.
하지만 그건 차후의 문제였다. 지금은 제 놈 이름을 황신이라 멋대로 바꿔 버린 놈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놈들을 신경 써야 했다.
“어, 왔니?”
“와, 왔니이?”
“왔으면 차, 아니 술이라도 한잔하자. 내가 주인이 아니라서 못 찾겠더라고. 도산옥에서 젤 높은 놈이니까 가지고 있는 술도 꽤 그럴싸하겠지? 그치?”
“…….”
짜증을 간신히 참고 있는데, 쇠몽둥이를 들고 휘두르던 부하 놈이 손을 흔들며 해맑게 인사한다. 협비의 이마에 힘줄이 살짝 튀어나왔다.
이런 싸가지 없는 부하 놈! 이 마당에 술이나 처먹자고 해?
뒈진 주제에 별걸 다 바란다고 속으로 냉소한 그의 시선이 금세 옆으로 옮겨 갔다.
부하 놈이 조금 특이한 녀석이기는 했지만, 협비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였다. 검수를 잘라 버린 검을 가진 수좌 놈.
가까이서 보니 더욱 대단하다. 그냥 강한 정도가 아니었다. 그에게서 언뜻 귀모와 비슷한 힘의 향기마저 느껴지지 않는가?
“네놈은 누구냐?”
딱히 누구라고 가리키지는 않고서 한 질문이었긴 해도, 답할 이는 정해져 있었다.
“나? 진무.”
“…….”
한데 자신의 물음에 부하 놈이 냉큼 답했다. 협비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런 빌어먹을 놈이!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나선단 말인가?
“……부하는 꺼져라.”
혹 하계 놈들처럼 수좌에게 가기 전 관문을 자처하는 것인가 싶었지만, 자신이 고려할 사안은 아니었다.
“응?”
무시가 가득 담긴 협비의 말에 진무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끔벅였다.
부하……. 설마 나?
“이름을 답하라!”
협비가 뻗은 손가락이 정확히 청상을 지목했다.
“…….”
당황스럽긴 청상도 마찬가지였다.
왜 나한테 묻지? 여의를 어깨에 비스듬히 걸친 채 짝다리를 짚은 것이, 누가 봐도 지계에 어울리는 불량스러움을 지닌 진무가 당연히 수좌인데…….
청상이 난감한 표정으로 힐끗 쳐다보자 진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앞으로 나섰다.
“이봐, 지금 뭔가 오해를 하는 모양인데…….”
“부하 놈은 닥치라 했다!”
“…….”
상황을 설명해 주려다 버럭 하는 협비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만 진무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이 새끼,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나 보네, 지금.
하지만 막상 오해에 따른 당황 때문에 멈춘 것은 아니었다. 그의 목소리에 실린 음파에 몸이 떠밀려 걸음이 강제로 멈춘 것이다. 만약 버티지 않았다면 뒷걸음을 치고도 남았을 힘이었다.
쿠르르…….
뿐만 아니라 그가 발산하고 있는 기세에 도산옥 전체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내심 감탄사를 연발하며, 진무는 가만히 협비를 살폈다.
과연 강하다.
귀모 아래 존재하는 단 여섯 명의 강자. 옥황이 무당의 조사이자 천계 등록소의 수장인 보화와는 비교도 안 될 것이라 하더니……. 하긴, 육계의 주인이면 옥황의 아래에 있는 상제들과 비슷한 지위이니 그만한 힘을 가진 것이겠지.
이생이 말하길 도산옥에 신분이 등록되었으니, 협비가 돌아오면 인사부터 해야 한다 했다.
하지만 진무는 그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뭐 하러 그런단 말인가? 이승에서도 그래 본 적이 없는데.
싸워 보고 강자라서 도망친 적은 있어도, 주먹을 맞대 보기 전에 고개부터 숙인 적은 없다. 하니 당당히 대한다. 그가 아무리 강하다고 할지라도 들어 아는 것과 부딪혀 아는 것은 다르니까. 해서 대차게 나간 것이다.
이생은 당연히 반대했으나 황신과 청상은 여차하면 싸울 준비를 끝내 놓은 참이었다.
협비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던 이레의 시간 동안, 이미 싸워 봤다는 황신을 통해 협비의 싸움 방식에 대해서 몇 번이나 듣고 되뇌길 반복했다.
취약점을 찾아야 했다.
상대의 약점을 찾는 것은 비열한 게 아니라 당연한 것이다. 애초에 가진 힘에서 차이가 나니까.
진무는 황신의 증언을 토대로 협비를 상상하며 머릿속으로 수도 없이 결전을 벌였다. 들어 아는 것과 직접 부딪히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지만, 아무 준비 없이 맞이하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상상에서 벌어진 일천 번의 대결 끝에, 마지막에서야 겨우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였을까?
직접 마주한 협비의 강함이 자신의 예상을 훨씬 더 뛰어넘고 있었음에도 진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째서? 고작 상선에 불과한 자신인데……. 바뀐 것이라고는 신력이 마력으로 치환되었다는 것과, 여의라는 법구가 생겼고 겨우 그 진신을 각성시켰다는 것뿐이다. 그것도 자신이 아니라 여의가 조바심이 난 양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다.
……설마 그래서?
“…….”
진무는 문득 제 손에 들린 여의를 바라봤다.
우우우웅!
이놈이 아까부터 강하게, 정확히는 미친 듯이 진동하고 있었다.
진신을 드러내며 자신과 완전히 동화되었기 때문인지 그 뜻 또한 고스란히 전해졌다.
뭐? 협비의 대갈통을 후려치고 싶다고? 쓰러뜨려서 자신의 대단함을 보여 주고 싶어? 이거 정말 미친 법구 아냐. 무슨 호승심이 이리도 강해?
하지만 마음에 든다.
암! 내 법구라면 이 정돈 돼야지. 좋다, 여의. 원하는 대로 하게 해 주마.
진다 해도 상관없다. 살 만큼 살았다. 이미 뒈졌는데 뒈지거나 말거나 뭔 상관이란 말인가? 되든 안 되든, 최선을 다해 싸울 수밖에!
짧은 순간에 많은 생각을 거친 진무가 야릇한 미소를 머금은 채, 청상의 앞으로 나서 협비를 마주하고 섰다.
“이 버릇없는 놈이……. 마땅히 수좌가 나서야 할 것을!”
“맞아, 내가 버릇이 좀 없지.”
수틀리면 옥황 멱살도 잡을 정도로.
“그리고 마땅히 수좌가 나섰잖아. 그러니까 덤벼.”
“…….”
자신의 분노에 싱긋 웃어넘기며 한 걸음씩 다가오는 진무의 모습에 협비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지 놈이 수좌라고? 검수조차 베지 못하는 놈이…….
협비는 그들이 자신을 희롱한다 여겨 더욱 분노했다.
습격이나 침입이라면 자신도 수하부터 내세워 공격하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귀모가 지목한 놈이다. 도산옥주의 자리를 놓고 싸워야 하니, 당연히 수좌 간의 대결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부하가 먼저 나섰다. 앞서 생각한 대로 수문장의 역할을 자처하려는 모양이었다. 혹시나 자신의 힘이라도 빼 볼까 봐.
“오냐, 네놈들이 정히 그렇게 나온다면 나 역시 마다하지 않으마.”
“……?”
협비가 갑자기 뒤로 물러나자 그의 뒤에 있었던 요와 귀들이 기다렸다는 듯 흉흉히 마력을 뿜으며 진무를 공격해 왔다.
“크아아아!”
“…….”
쯧, 도산옥주씩이나 되시는 분께서 눈치가 없는 건가? 왜 자꾸만 청상을 수좌라고 여기는 거지?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리 막아 주시면 뚫고 들어가 대가리를 따 주는 수밖에!
휘익! 턱!
진무가 가장 먼저 다가온 요수(妖獸)의 공격을 피하며 대가리를 움켜쥐었다.
휘리릭! 꽈아앙!
그리고 그대로 땅바닥에 메다꽂으며 스산하게 웃곤 명했다.
[여의, 진신을 드러내 적에 맞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