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555
25화
“어찌 그러십니까?”
“…….”
귀모의 놀람에 늘 곁에서 그녀를 지켜 온 호법귀장 순조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당연한 일이다. 순조는 자신이 부여받은 생의 시간 동안 그녀가 놀라는 모습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계의 지배자로 군림하며 모든 것을 마음먹은 대로 행해 온 그녀가 아니던가?
그런 그녀가 놀랐다. 하물며 팔걸이를 움켜쥔 손은 물론 눈동자까지 잘게 떨리고 있으니 보통 일은 아님이 분명했다.
“귀모님?”
“끄으음, 아니다. 신경 쓰지 말거라.”
“……예.”
그녀가 그렇다고 하니 더 의문을 품을 필요는 없었다. 순조는 공손히 답하며 조용히 물러났다.
그의 모습이 사라진 뒤, 귀모는 놀람을 지워 내고 차분해진 표정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신수. 자신과 옥황처럼 선대로부터 태고의 힘을 계승해 온 것이 아닌, 혈통을 타고 이어진 존재.
하나 지금의 세상에 그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미 오래전 소멸했으니까.
천지간에 가장 오랜 시간을 존재해 온 옥황과 귀모조차도 윗대의 윗대로부터 들은 것이 전부였다.
물론 그들을 흉내 낸 영물들이야 차고 넘친다. 용이니 호랑이니 그 모양도 각양각색이다. 하나 그들 중 진짜는 하나도 없다.
단순히 생김새 때문은 아니다. 신수가 신수라 불리는 이유는 그들이 가진 힘이 태고에 존재했던 근원에서 나누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무의 쇠봉에서 뛰어나온 그것은 신수가 분명했다.
그 힘이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자연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의 힘.
그 무엇보다 파괴적이고 순수한…….
귀모의 미간에 얕은 골이 팼다.
자신이 잘못 봤을 리는 없다. 분명 진무가 가진 힘은 고작 귀에 불과했다. 천계로 따지면 상선의 경지이다. 그런 놈이 협비를 쓰러뜨리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전투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한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계란이 어찌 바위를 깰 수 있겠는가? 제 생을 다해 덤벼도 바위의 표면에 남는 것은 그저 흔적일 뿐인 것과 같은 이치이다.
즉, 진무는 애초에 협비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녀가 협비에게 넌지시 알려 주며 충동질한 것은 그저 호기심과 재미 때문이었다. 음양의 힘을 동시에 가진 선인 놈이 어찌 나올지 궁금하기도 했고.
만약 진무가 패배한다면, 불러다 회유해서 자신이 꾸미고 있는 계획의 일부로 사용할 생각이었다. 옛 인연들과의 만남도 주선해 주고…….
그런데 놈이 가진 무지막지한 전투 능력에 신수의 힘이 더해지는 바람에 말도 안 되는 결과가 생기고 말았다.
협비의 패배.
긴 세월 지계를 다스려 온 귀모는 처음으로 빗나가 버린 예측에 허탈하게 웃었다.
“빌어먹을 옥황 놈이 괜히 보낸 것이 아니구나.”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어찌 보면 오히려 잘된 것이다.
무슨 이유로 옥황이 신수가 담긴 법구를 들려 보낸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계에 와 있는 이상 놈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옥황은 모를 것이다.
즉, 잘하면 신수까지 자신의 손에 들어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귀모의 얇은 입술 끝자락이 살며시 위로 솟았다. 그녀는 즐거운 듯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톡톡 치며 옆의 화로를 바라봤다.
화르륵.
축융의 잔재, 청화.
“크크크, 공교롭구나. 안 그래도 끊어져 버린 태초의 기록을 온전히 되살릴 방법이 없어서 고민이었거늘…….”
확신할 순 없었으나 가능성이 보였다. 태고의 힘이 이어진 신수의 도움이 있다면…….
놈은 절대로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이젠 굳이 몰래 엿보지 않아도 될 것이다. 협비를 쓰러트렸으니 도산옥주의 자리를 이어받아야 할 테고, 자신의 권능이 계승될 테니까.
“진무, 일단은 지켜보마. 네놈이 무슨 짓을 벌일지 몹시도 궁금하니까.”
귀모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힘없이 타오르는 청화를 손으로 쓸었다.
화륵, 화르르륵.
* * *
술판이 벌어진 도산옥주 협비의 거처.
“음, 안 해.”
“예?”
“그딴 거 필요 없어.”
“그, 그게 무슨?”
딱 잘라 거절해 버리는 진무의 태도에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협비는 물론, 진무의 뒤에 서 있던 청상과 황신, 이생까지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회천에서 되살아난 협비는 곧장 진무를 찾아왔다. 패배한 이상 귀모의 권능과 함께 도산옥주의 자리를 넘기는 것이 지계의 규칙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 한단다.
필요 없단다.
사실 진무도 하려고 했다. 도산옥을 시작으로 각 계를 하나씩 무너뜨리고, 종내 귀모를 쓰러뜨려서 지계를 차지하려고…….
그런데 협비에게 듣다 보니 크나큰 제약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규칙입니다.”
“…….”
패배한 협비의 말투는 이전과 달리 무릎 꿇은 자세만큼이나 공손했다.
“그걸 내가 왜 지켜야 하는데?”
“예? 그야…….”
답하려던 협비의 입이 순간 꾹 다물렸다. 답할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까.
지계의 인물들은 그들이 가진 본능으로 인해 당연히 지키고 살기 때문에 규칙을 위배한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그것은 마왕 정도 되는 존재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거 귀모와 계약하는 거라며? 그녀의 권능을 부여받는 대가로 충성을 맹세하는 게…….”
“그렇습니다. 매우 영광스러운!”
“……그러니까 안 해.”
“예?”
“내가 뭐 하러? 귀모는 얼굴도 본 적이 없는데? 쯧, 당사자가 와서 사정해도 해 줄까 말까구만.”
“…….”
그 역시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귀모가 원하면 계약하는 것이 당연했기에…….
“그냥 니가 해.”
“하지만! 진무 님께서 저를 쓰러뜨리신 이상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규칙…….”
“…….”
협비가 열 내며 말하다 자신도 모르게 말을 멈추고 말았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자신이 왜 설득 따윌 하고 지랄인 건가? 남들은 귀모와 계약하고 싶어서 안달인데…… 대체 이놈은?
“야, 협비.”
“예?”
“내가 첨에는 도산옥주 자리가 탐났거든? 그런데 듣다 보니 순 빛 좋은 개살구잖아?”
“개살구요?”
“그래, 계약이니 뭐니, 그게 개 목줄이랑 뭐가 다르냐고?”
“모, 목줄이라니요!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그럼 아냐?”
“당연히!”
“아니라고?”
“…….”
“웃기는 소리.”
“…….”
“그래서 계약하면? 귀모의 말에 거역할 수 있어?”
“……없지요.”
“거봐. 그게 개 목줄이지 뭐야? 내가 이승에서도 빌어먹을 긴고아(緊箍兒) 같은 선휘 놈 때문에 개고생을 했거든. 그래서 목줄 같은 건 딱 질색이야. 그러니까 이제까지 해 왔던 대로 니가 해, 쭈욱~!”
해석하면 ‘개는 너나 해라.’ 였지만, 기분이 나쁜 것보다 진무에 대해 이해되지 않는 마음이 더욱 컸다. 협비는 고개를 기우뚱하며 다시금 청했다.
“귀모님의 권능을 얻을 수 있습니다.”
“권능이고 나발이고, 막상 별거 아니었잖아?”
“예? 별거 아니라니요! 어찌 그런 말씀을!”
“그래서, 이겼어?”
“…….”
협비는 그만 말문이 막혀 고개를 떨궜다.
졌다. 그것도 정말 대차게 졌다.
도산옥주가 된 이후로 그렇게 맞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귀모도 그렇게 때리진 않는다.
“봐, 그 권능 별거 아니지?”
“…….”
“애초에 그 권능이 그리 대단한 거였으면 옥주의 자리는 항상 한 놈만 했었겠지. 그런데 아니잖아? 너도 전대 옥주와 싸워서 쟁취한 걸 거 아냐?”
“그렇긴 합니다만…….”
“그땐 어떻게 이겼어? 전대 옥주도 귀모의 권능을 가지고 있었을 텐데?”
“…….”
또 말문이 막혔다.
생각해 보니 전대 옥주를 쓰러뜨렸을 때, 그는 귀모의 권능을 뛰어넘었었다. 죽을 고비를 셀 수 없을 만큼 넘기긴 했었지만…….
“어쨌든 그딴 개 목줄 같은 권능도, 도산옥주라는 자리도 필요 없으니까 그냥 니 가져.”
“…….”
“중요한 건 내가 이겼다는 거니까.”
진무의 거절에 협비는 떨떠름함을 금할 수 없었다.
다행이긴 했다. 패배했음에도 도산옥주의 자리를 지켰고, 권능도 그대로였으니까.
하지만 진무의 말을 듣고 보니 왠지 개가 된 듯한…… 이제까지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는데…….
“아! 맞다. 그래도 내가 너보다 윗자리인 건 맞지?”
“……예. 저를 쓰러뜨리셨으니, 응당 상좌가 되는 것이 규칙입니다.”
“그럼 혹시, 너한테 명령 같은 것도 할 수 있어?”
“귀모님의 명령에 위배되지만 않는다면 가능합니다.”
“좋아, 그렇단 말이지?”
진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황신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쟤가 가지고 있던 힘, 돌려줘라.”
“……?”
“니가 뺏었다며? 가능하지?”
“…….”
진무의 부탁에 협비가 황신을 쳐다보곤, 한숨과 함께 손을 휙 저었다.
쓰으으으으.
“……!”
순간적으로 힘이 차올라 몸이 뻣뻣해지며 시커먼 안개에 휩싸이자 황신이 흠칫 놀랐다.
후욱!
그리고 몸 주위에 자욱하게 퍼졌던 안개가 세차게 흘러 황신의 코와 입, 귀를 통해 흡수되었다.
짧은 순간 진행된 일련의 과정을 통해 힘을 되찾은 황신이 순간적으로 넘쳐흐르는 마력에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꿇어 엎드렸다.
“허억, 허억…….”
숨을 헐떡이는 황신의 모습에 진무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이 고개를 삐딱하게 꺾었다.
“저기, 무슨 문제라도?”
“음, 저 모습 말이야.”
“모습이요?”
“그래. 나쁘진 않은데 적응이 안 되네. 혹시 이승에서의 모습으로 되돌려 줄 수 있을까? 대략 약관 정도의 나이로?”
“음, 가능합니다.”
“부탁하지.”
“예.”
엎드린 위로 협비의 손이 스치듯 지나자 희뿌연 빛과 함께 황신의 모습이 변했다. 예전의 익숙했던 그 모습으로.
“역시 황신은 저래야지.”
그제야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진무가 주섬주섬 짐을 챙겨 일어났다.
“자, 그럼 됐네. 이걸로 도산옥에서 볼일은 끝난 건가?”
“끝나다니요?”
“뭐, 더 있어 좋을 사이도 아니잖아?”
“…….”
진무가 눈을 찡긋거리며 장난스럽게 던진 말에 협비는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이 다 읽혔다.
새끼, 너무 티 내면서 좋아하는 거 아니냐?
“하면 이제 어디로 가실 생각입니까?”
“나? 글쎄…….”
“혹 다른 옥주에게도 도전하실 생각이라면, 마음을 단단히 먹는 것이 좋을 겁니다.”
“……?”
“아시는진 모르겠으나, 도산옥은 지계에서 제일 상층에 있는 곳입니다.”
“제일 상층?”
“예. 그리고 지계의 특성상 아래로 갈수록 그 주인 된 자들의 힘이 강하지요.”
“호오?”
협비의 담담한 말에 진무가 호기심을 내비쳤다.
“너 생각보다 친절하구나? 그런 걸 다 설명해 주고…….”
“귀모님과 계약을 맺어 권능을 얻으셨다면 전부 알게 되셨을 일입니다. 권능을 부여받음과 동시에 귀모님의 정신과 어느 정도 연결되는지라…….”
“응? 그런 것도 가능해?”
“예.”
“……그렇다는 말은 귀모가 너를 통해 나를 인지할 수 있다는 거냐?”
“당연한 말씀을. 제가 보고 듣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실 겁니다.”
“뭐?”
협비의 말에 진무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런 염병. 그럼 자신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는 거잖아? 지금의 이 대화까지?
옥황에 버금간다는 귀모이다. 잘못하다간 정체를 들킬 수…… 아니, 이미 들켰으면 어쩌지?
불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적이 안심이었다. 만약 자신의 정체를 알았다면 귀모가 가만히 있었겠는가? 당장에 잡아들이라고 했겠지.
진무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넌지시 물었다.
“……혹시, 보고 듣는 걸 못 하게 할 수도 있어?”
“있습니다.”
“그럼 해.”
“음, 그건 어렵습니다. 귀모님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사항이라…….”
“…….”
빌어먹을 개 목줄…….
이러다가 자신의 행적이 고스란히 드러나게 생겼다. 어떤 마왕을 만나든 다 알 테니까.
“한데 의미가 있을까요?”
“뭐?”
“진무 님을 제게 알려 주신 것이 귀모님입니다.”
“……응? 그게 무슨 소리냐?”
“도산옥에 새로운 귀가 존재감을 드러냈다고요. 그리만 말씀하셨습니다. 제 생각엔 진무 님을 처음부터 주시하고 계셨던 것 같았습니다.”
“……!”
협비의 말에 진무가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뭐야? 그럼 권능을 부여하지 않은 놈과도 정신이 이어져 있는 거야?”
“그건 아닙니다. 지계의 모든 것을 느끼긴 하시지만 정확한 인지는 못 하실 겁니다. 하지만 도산옥으로 오셨다는 것을 아셨던 것을 보면…….”
“……그렇다는 건?”
진무가 고개를 휙휙 돌렸다. 어딘가에 끄나풀이…….
매의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진무의 시선이 한 곳에 멈췄다.
지계에 와서 처음 만난 쉐끼. 이것저것 아는 것 많아서 설명해 준 쉐끼. 지금까지 함께해 왔기에 자신의 모은 행적을 알고 있는 쉐끼…… 이생.
“너!”
“예?”
“……이리 와 봐.”
“설마 절 의심하는 것입니까? 전 아닙니다. 맹세코! 아닙니다!”
“…….”
그건 이 쉐끼야! 이제부터 확인해 보면 될 거 아냐!
그러니까 일루 와, 이 끄나풀 찌끄레기일지도! 모르는 쉐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