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567
37화
온통 검었다.
칙칙한 먹구름에 청상의 몸에서 뿜어진 마기가 더해지자 세상이 먹을 가득 먹인 화선지처럼 시커멓게 변했다.
그 안에 진무의 신력을 머금은 여의가 금빛으로 발광해 솟구쳐 어둠을 밀어 내기 시작했다.
슈아악! 쾅!
세차게 휘두를 때는 금색 물을 찍은 붓이 어둠에 궤적을 수놓는 듯하였고, 힘주어 내리치면 붓 끝을 떠난 물방울 하나가 뚝 떨어진 듯 금색 빛 뭉치가 세상을 환히 밝혔다.
쾅! 콰쾅!
자충이 내뿜는 검은 마기와 여의가 토하는 금빛 서기가 교차할 때마다 뇌성벽력이 일어난 듯 세상이 번쩍였다.
“저, 저래도 되는 거냐?”
“…….”
충격파가 미치는 범위에서 한참이나 벗어난 뒤에야 여유를 되찾은 황신이 금빛과 흑빛이 뒤섞여 번쩍이는 세상을 쳐다보며 인상을 구겼다.
금빛은 누가 봐도 진무가 뿜어내는 신력이다.
지계에서 신력을 드러낸 것만으로도 문제인데, 그 힘의 여파에 해형장의 요와 귀, 괴들이 휩쓸려 소멸하고 있었다.
“저러면 안 될걸?”
“그치?”
“어어…… 신력을 드러내신 것도 문제지만, 저 정도 숫자가 소멸해 버리면 대번에 표가 날 테니…….”
백표 역시 황신과 같은 생각인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사달이 나도 크게 났다.
마력과 마력이 부딪힌 것이라면 조금은 소명할 기회가 생기겠지만, 신력이라면 다르다.
“어쩌냐? 박피옥주가 오면 정말 큰일 날 텐데.”
백표가 일그러진 얼굴로 묻자 고민하던 황신이 결심을 굳힌 듯 양손에 비수를 꺼내 들었다.
“막자.”
“……응?”
“박피옥주가 못 오게 막는 거야, 우리가.”
“…….”
백표는 결연하게 말하는 황신을 황당하단 듯 쳐다봤다.
뭘 어쩌자고, 이 자식아? 누굴 막아? 귀모의 권능을 받은 육계의 주인 중 하나를, 너와 나 따위가?
“뭐해? 식칼 들어!”
“……황신.”
“왜!”
“니가 뭘 착각하나 본데, 상대는 박피옥주야.”
“알아!”
“당장에 껍데기부터 벗겨질걸?”
“그럼 저대로 둘 거야?”
“…….”
“우린 괜찮지만, 천주님은 다르다고! 선인인 걸 들키면 난리가 나도 크게 날 거야. 자칫 귀모가 올 수도 있다고!”
“…….”
그 말을 들은 백표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충성이 과해도 적당히 과해야지.
이미 늦었다. 박피옥주가 장님도 아니고, 저 정도 금빛이면 멀리서도 보고도 남았다.
“황신, 막아도 소용없지 않을까? 아니 다른 건 둘째 치고, 우리 힘으로 어떻게 박피옥주를 막는단 말이냐?”
“그래서? 힘이 모자란다고 그냥 두자고?”
“…….”
“이미 벌어진 일이야 어쩔 수 없지만……. 씨발, 그래도 노력은 해 봐야지.”
황신이 박피옥이 있는 방향을 쳐다보며 입술을 깨물자 백표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알았다, 뭐든 해 봐야지. 뭐든 죽기밖에 더 하겠냐? 이놈의 귀생, 이젠 미련도 없다!”
“좋아.”
백표의 승낙에 황신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또 한 명의 지원자를 찾았다.
큰 도움은 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손 하나라도 더 필요한 시점이니…… 어?
고개를 돌려 목표한 대상을 찾던 황신의 눈매가 게슴츠레하게 변했다.
“너…… 뭐 하냐?”
“예? 하하, 저는…… 하하…….”
황신의 눈초리를 받은 이생이 엉거주춤하게 서서 머쓱한 표정으로 변명했다.
“도리깨 들어.”
“예? 그건 어렵지 않지만 제가 가서 무슨 도움이…….”
“들어, 뒈지게 처맞고 싶지 않으면.”
“하하…… 아하하하.”
“들라고, 이 괴 쉐끼야.”
“…….”
머리칼을 힘껏 움켜쥐며 으르렁거리는 황신의 위협에 이생이 진땀을 흘리며 도리깨를 움켜쥐었다.
“들어요, 아니 들었습니다. 봤죠? 그쵸?”
“……니가 앞장서.”
“제가요?”
“어. 못 믿겠어.”
“……그런데 굳이 왜 저희가?”
자꾸만 되묻는 이생을 향해 황신이 눈깔을 흉포하게 희번덕거렸다.
“호위니까.”
“예?”
“천주님의 영원한 개인 호위이자 개인 전령. 인계에 있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
“천주님을 지키기 위한 일이면 뭐든 한다. 설사 내가 죽더라도.”
“…….”
결의의 찬 눈동자를 빛내며 멋진 표정을 짓는 황신을 보며 이생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병신……. 뭘 그런 걸 멋진 척까지 하면서 말하고 지랄이냐?
그리고 하려면 니나 하지, 왜 나까지 이 미친 짓에 끌어들여? 니가 개인 호위지, 내가 개인 호위냐고!
하지만 무슨 말을 해도 들어 처먹을 놈이 아니다. 귀가 아무리 밝으면 뭘 하나, 닫으면 끝인데.
이래서 어른들이 사람을 가려 사귀어야 한다고 했는데.
“이생아, 시간 없다. 가자.”
“…….”
황신의 재촉에 이생이 몇 번이고 뒤를 돌아봤다.
아, 엿 같은 괴 인생.
금빛 서기가 눈앞에 있는데. 저기 휩쓸리면 행복한 소멸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인데…….
애초에는 진무를 도와주고 천계로 가서 소멸당할 생각이었다. 소멸당한 뒤, 환생하려고.
하지만 이젠 그마저도 싫어진 참이었다. 환생이고 나발이고, 이 망할 놈들과 함께 다니고 싶지 않았다.
미끼에, 폭력에……. 지계의 형벌장보다 무서운 놈들이 아닌가?
그냥 소멸이나 당했으면 하던 차에 절호의 서기가 찾아왔거늘…….
“가자고, 이 괴 놈아!”
“……눼.”
결국, 이생은 예상되는 눈앞의 고통에 굴복했고, 박피옥 쪽으로 몸을 돌려 걸음을 내디뎠다.
그래, 이도 저도 안 된다면 그냥 죽자.
황신 놈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 하다가 비참하게 처맞을 거, 차라리 박피옥주에게 대항하다 죽어서 도산옥 회천에서 부활하는 것이 훨씬 더 좋은 길이리라.
이만하면 할 만큼 했다.
많고 많은 도산옥의 괴 중에 저 황량한 사막을 넘어 박피옥까지 와 본 것이 누가 있을까?
와중에 그 무시무시한 대사충의 대가리에 올라타 본 것은 자신이 유일할 것이다.
더는 욕심내지 않을 것이다.
대사충 머리에 타 본 것을 자랑으로 삼은 채, 도산옥 나찰귀로서의 소명을 다하며 열심히 사는 거다.
“으아아아아!”
이생이 죽음을 각오(?)하며 내달리자 황신과 백표가 서둘러 그 뒤를 쫓았다.
박피옥주를 막기 위해, 그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진무를 지키기 위해.
* * *
박피옥의 중심에 위치한 넓디넓은 대전은 오직 한 존재를 위한 장소였다.
바로 박피옥주 교마였다.
사각, 사각.
목이 어디인지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육중한 체구를 지닌 그의 손에서 세심히 움직이던 조각도가 수하의 보고에 멈칫했다.
“서기(瑞氣)?”
“예! 제 눈에는 분명 그리 보였습니다.”
“……그것참 이상하군. 지계에서 서기라니?”
휘하 귀인 규사의 보고에 교마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서기라면 신력의 발현으로 드러나는 현상이 아닌가?
말도 안 된다. 지계에서 천계인들의 전유물인 서기가 나타나는 일은 불가능하다.
상극의 기운.
지계에 존재하는 약한 것들은 머금는 것만으로 소멸할 수 있는 위험한 기운이다.
하나 잘못 본 것은 아닐 것이다. 규사는 박피옥에서 자신 다음으로 강한 마력을 지닌 귀이니까.
“하면? 해형장 쪽의 소란이 서기에 의한 것이란 말이냐?”
“그리 사료됩니다.”
“음…….”
이미 보고받은 사항이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박피옥까지 진동이 전해져 올 정도였으니까.
하여 예하 귀들에게 소란의 연유를 조사해 보라 명까지 내린 참인데, 막 귀들을 이끌고 출발하려던 규사가 의아하다며 알려 온 것이다.
“……천계 놈이겠군. 놈들이 객을 보낸 것이야. 어쩌면 알려지지 않은 틈새를 빠져나온 놈일 수도 있고……. 그런데 다른 곳도 아니고 박피옥에 나타났단 말이지?”
“어찌할까요?”
“글쎄, 어찌할까? 겁도 없이 이 교마의 거처를 찾아와 소란을 피운 놈을 어찌해야 좋을까?”
교마가 조각도를 내려놓고 턱쯤 되어 보이는 곳을 쓸며 웃었다.
“손님이 찾아왔으니 응당 주인이 나가 봐야지. 아니 그런가, 규사?”
교마가 육중한 몸을 일으키자 규사가 그의 뜻을 곧바로 알아듣고 냉큼 소리를 질렀다.
“팔귀교(八鬼轎)를 대령하라! 옥주님께서 해형장으로 직접 왕림하실 것이다!”
“예!”
규사가 내린 명에 밖에서 힘찬 대답이 들려오고, 이내 교마가 걸음을 내디뎠다.
막 한 걸음을 뗀 그 순간.
“응? 자, 잠까아안! 잠깐 멈춰라, 규사!”
교마가 갑자기 얼굴을 찌푸리며 손을 번쩍 쳐들었다.
“예에? 예! 멈추어라!”
재차 밖에 명을 전한 규사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데…….
“예? 예! 아, 예에……. 그렇습니다.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
교마가 무언가에 놀란 것처럼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묻고 답하고…… 와중에 저 공손함이란?
별안간 벌어진, 일견 황당한 행동이었으나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규사가 황급히 바닥에 엎드려 고개를 조아렸다.
혼잣말을 하는 것 같지만, 필경 귀모와 대화를 나누는 것일 터다.
교마를 가까이서 모시는 규사였기에 몇 번이나 비슷한 광경을 본 적이 있었다. 권능을 통해 이어진 귀모가 교마에게 지령을 내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흐음……. 하지만 서기가…… 예? 아,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귀모님의 말씀에 토를 달겠습니까?”
“…….”
와중에 혼이라도 난 듯, 교마가 난색을 하며 다급히 변명하고 있다.
이런 경우 괜히 그의 성질을 건드려 좋을 것이 없었다. 규사는 이전보다 더욱 납작 엎드려 숨을 죽였다.
“알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처리하겠습니다. 예, 암요! 그러믄입쇼. 예! 그럼 살펴 들어가십시오.”
“…….”
“…….”
한참 이어지던 혼잣말은 교마가 허리를 깊이 숙이며 끝이 났다. 규사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눈치를 보다가, 슬쩍 고개를 들고 멍하니 자리에 앉은 교마를 불렀다.
“저기, 옥주님?”
“왜?”
“저어, 어찌해야?”
“……애들 빼라.”
“예?”
“해형장엔 관심 가지지 말라고 하시네.”
“예?”
“못 들었니? 귓구멍 뚫어 줄까?”
“…….”
“귀모님 명령이야, 그러니까 신경 끊어. 의문도 가지지 마라, 다친다.”
“예!”
귀모의 명, 그 말로 끝이었다. 규사가 냉큼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귀모의 명에 이유는 없다.
그녀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이다. 의문을 가져서도 안 된다. 그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사항이니까.
그의 주인인 교마도 이미 해형장에 관심을 꺼 버린 듯하지 않은가?
“규사.”
“예, 옥주님.”
“대신에 지금 니가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게 무엇입니까?”
“해형장 쪽으로는 먼지 한 톨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라. 혹시나 기웃거리는 놈이 생기면 알지?”
“……예?”
“흠, 이상하네. 또 못 들었어? 아직 육천 살밖에 되지 않은 놈이 청력이 상했나? 아니면 진짜로 귓구멍이 막혔나?”
“……!”
어느새 나른히 변한 표정으로 의자에 몸을 파묻고 조각도를 만지작거리는 교마의 말에 규사가 흠칫 놀라며 답했다.
“며, 명을 받잡습니다!”
“……나가 봐.”
“옙!”
짧은 축객령에 규사가 교마의 거처를 도망치듯 떠났다.
교마의 법구인 세류에 귓구멍이 뚫리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흐음, 흐으음.”
규사가 나간 뒤 홀로 남은 교마는 잔혹한 미소를 머금은 채 손에 쥔 세류를 바라보며 정신을 통해 전해진 귀모의 말을 곱씹었다.
“재미있군. 음양귀(陰陽鬼)라니…….”
분명 그리 말했다. 도산옥에서 각성한 귀가 음양의 힘을 동시에 지녔다고.
그리고 그가 협비를 쓰러뜨렸다고…….
“멍청한 협비 자식. 육계의 주인 중 하나라는 놈이 이제 막 각성한 귀 따위에게 패배해?”
협비를 비웃는 것도 잠시.
그 뒤에 이어진 말을 떠올린 교마가 입맛을 다시듯 혀로 입술을 쓸었다.
음양귀가 박피옥을 찾아와 자신에게 도전할 것이라 했다. 그리고 능력이 된다면 놈을 먹어 치워 그 능력을 가져도 좋다고…….
“크흐흐, 잘됐군. 안 그래도 귀모님께 대드는 아비옥주 놈이 꼴 보기 싫었는데……. 음양의 힘을 동시에 지닌 귀라, 어쩌면 이 기회에 그 면상을 짓밟아 주게 될지도 모르겠어.”
진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자신은 권능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약하디약한 협비 따위와는 다르니까.
“어서 오너라. 벌써부터 만찬이 기대되는구나.”
멀지 않을 일을 떠올린 교마의 울대로 군침이 넘어가고…….
사각, 사각.
망자를 산 채로 조각하는 그의 손길이 흥분을 머금고 빨라졌다.
* * *
“이, 이, 이…….”
귀모가 팔걸이를 움켜쥐고 몸을 바들바들 떨어 댔다.
이런 빌어먹을 진무 놈……!
이생에게 붙여 둔 눈이 역소환되었기에 정확히 뭘 하는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관심을 둔 터라 놈의 목적지인 박피옥주의 눈과 귀를 통해 살피고 있었다.
그런데 하다 하다 대놓고 신력을 드러내 박피옥을 때려 부숴?
박피옥주가 나서려 하는 것을 다급하게 음양귀가 어쩌고 하는 거짓말까지 해서 막아야 했던 그녀의 양 눈썹 끝이 무섭게 치솟았다.
이 빌어먹을 놈!
당장에 가서 대갈통을 터트려 버리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쓰임이 있으니까.
벌어진 상황에 미치게 화가 났지만, 놈을 통해 얻어야 할 것이 많다. 멀리 봐야 했다. 멀리 보…….
“크아아아아!”
화가 난다!!
인내심이 한계에 봉착한 귀모의 분노에 찬 울부짖음에 이제 막 다시 재생되어가던 포궁이 또다시 터져 나갔다.
쾅! 우드득! 콰쾅!
땅이 쩍쩍 갈라지며 건물이 붕괴했고, 소란에 휩쓸린 포궁의 생명체들이 죽어 나갔다.
귀모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순간 잽싸게 안전한 곳으로 피신한 순조는 무너지는 포궁을 안타까운 눈길로 바라봤다.
“하아, 요샌 화내시는 일이 잦네. 도산옥에 이어서 박피옥엔 또 무슨 일이 있어서 저리 화를 내시는지…….”
하지만 궁금해도 마음만 먹을 뿐이다.
자신이 뭘 어쩌겠는가? 괜히 저 분노에 휩쓸렸다간 쓸데없이 고통만 늘 것을……. 이럴 땐 그냥 모른 척하는 것이 편하게 사는 길이다.
“아무래도…… 잠잠해지자면 좀 오래 기다려야겠네.”
순조는 그저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