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568
38화
콰아앙!
휘어졌던 여의에 얻어맞은 청상이 수도 없이 바닥에 처박혔다.
“크으…….”
하나 충격이 이전과는 달랐다. 꼿꼿이 일어나던 몸을 바로 세우지도 못하고 휘청이다 바닥에 허물어졌다.
회복되지 못한 것이다. 여의에 머금어진 금빛 서기가 자충의 마력을 억눌러 버려서.
뿐인가? 온통 검었던 세상이 이제는 환히 밝아져, 어둠이 서린 곳은 청상의 주변뿐이었다.
마치 햇볕에 숨은 그늘처럼.
“치이…….”
흑요석처럼 반들거리는 눈으로 주위를 바라보던 청상의 입에서 짜증 섞인 신음이 흘러나왔다.
“왜, 계속 짐승 소리 내 보지 그러냐? 잘도 크륵대더만.”
“…….”
공격을 멈추고 지면에 내려선 진무가 청상을 흉내 내며 다가왔다.
그 걸음을 따라 범위를 넓힌 서기가 마기에 닿자 청상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왜, 겁나냐?”
“…….”
“좋게 말할 때 청상을 내놔라. 귀모의 검이고 나발이고 확 소멸시켜 버리기 전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멈춘 진무가 청상을 노려보며 말했다.
청상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여의를 어깨에 걸치고 짝다리를 짚은 모습이 여간 불량한 게 아니었으나, 막상 두려운 것은 그가 가진 서기의 무게감이었다.
사방에서 짓눌러 오는 압박감에 이길 수 있다는 자신이 들지 않았다.
자칫 놈의 말 그대로 소멸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 놈은…… 내, 내 것이다. 누, 누구도 빼앗을 수 없어.”
“……?”
진무는 청상의 입을 빌린 자충의 말에 어이없다는 듯 눈을 치켜떴다.
목소리가 다르다.
뜻이야 온전히 전해졌지만, 더듬는 것은 물론 심하게 떨고 있었다.
“어쭈? 이젠 말도 하네?”
“노, 놓아다오. 이, 이놈은 추, 충분히 자질이 이, 있다.”
“…….”
“나, 나를 통해, 되, 될 것이다. 지, 지계에서 가, 가장 강한…….”
“지랄하네.”
“……?!”
“고작 귀모의 권능이 스민 검 따위가 뭘 어째?”
진무가 콧등을 잔뜩 찡그리며 걸음을 내딛자 청상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같은 거리만큼 물러났다.
“청상은 너 같은 놈이 차지해도 될 녀석이 아니야. 능히 천지간에 그늘을 드리울 거목으로 자랄 놈이다. 니놈이 무슨 말로 청상을 휘감았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이라도 놔줘라.”
“시, 싫다. 내 것이다! 이놈은!”
쿠르르릉!
발악하며 외친 말에 마기가 요동치며 진무의 서기에 거칠게 부딪쳤다. 놓을 생각이 없는 것이다.
청상의 몸 상태가 걱정돼서 굳이 좋은 주먹 놔두고 말로 설득하려 했더니…… 정말 말귀 못 알아먹는 검 새끼네, 이거.
“두 번째 경고다. 놔줘라.”
“내 것이다! 내 것이라고!”
자박.
이번에도 다가선 만큼 물러난다. 진무는 필사적으로 거리를 유지하는 청상, 아니 자충을 향해 차분히 말했다.
“세 번까지야. 그 뒤는 없다.”
“닥쳐! 이놈은 내 거야! 네놈이 나를 떼어 놓으려 하면! 절대로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
자충이 눈까지 부릅뜨고 악을 써 댔다. 진무는 걸음을 멈추고 인상을 구겼다.
그런데 이 검 새끼가 듣자 듣자 하니까…… 청상이 물건이냐? 어디서 소유권을 주장하고 지랄 염병이야?
속으로 짜증을 내는 것도 잠시, 그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 정말 어쩔 수가 없네.”
스아악.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진무가 여의를 역소환하자, 비로소 맨손이 된 모습에 자충이 조금은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위협이 먹혔다 여긴 것이다.
청상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이상 놈은 절대로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자충으로서는 청상을 절대로 놓칠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저 귀모의 권능이 스민 검에 불과했던 자신이지만, 이젠 다르다. 청상으로 인해 깨어났다.
육장의 공격으로 약해진 순간, 청상의 내면에서 깨어난 사악함으로 자아(自我)를 가지게 되었다.
“……내가 원래 이러지 않거든? 하지만 이번 한 번만 기회를 더 줄게.”
“…….”
“너 지금 쓸데없이 집착하는 거야. 그거 병이라고. 니가 하는 것이 강제로 취하는 것이랑 뭐가 달라? 통해야 하는 거야. 마음을 열고 바라볼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알겠어?”
“하지만…… 봐 주지 않으면? 그땐 어찌하지?”
“그럼 인연이 아닌 거지.”
“…….”
“하지만 내가 도와주마. 청상은 아직 모자라. 너를 완전히 보지 못해. 내가 알아, 나도 그랬으니까. 검예(劍藝)는 익혔으나, 검의(劍意)를 깨닫지 못한 거지.”
진무는 화산에서 검의를 깨달았던 그때를 떠올리며 진심을 다해 설득했다.
오로지 청상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자충이 청상의 몸을 강제로 취했듯, 자신이 자충을 강제로 떼어 놓으려 한다면 육체적인 것뿐 아니라 정신적인 부분에서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 무엇이든 강제적인 것은 악영향을 미치는 법이니까.
“……너를 믿으라고?”
“그래, 믿어라. 그럼 돼.”
“…….”
최대한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설득하는 진무의 모습에 자충의 검은 눈동자에 복잡한 심경이 어렸다.
그리고…….
“미친놈.”
“……?”
“빌어먹을 서기를 지닌 놈을 믿느니! 같이 죽어 버릴 테다!”
“……!”
콰르르릉!
갑자기 자충에게서 거친 마력이 줄기줄기 뻗어 나오자 진무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런 빌어먹을 놈이 자폭을 하려고 해?
열받는 걸 참아 가며 열심히 설득했거늘!
하지만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자충이 점령한 청상의 몸에 실금이 거미줄처럼 퍼져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자충의 마력이 그 몸 깊숙한 곳에서 폭주하는 것이 분명했다.
이대로 두면?
소멸.
만약 지계의 인물이었다면 죽는다 해도 다시 살아나겠지만, 청상은 선인이다. 자충이 가진 마력으로 폭발해 버리면 소멸하고 만다.
“이런 썩을!”
진무는 곧장 일보를 내디뎠다.
쿠우웅!
힘껏 구른 발이 땅바닥을 깊숙하게 짓누르고, 금빛 서기와 함께 모든 것이 멈췄다.
청상의 몸에 퍼지고 있던 균열, 허공에 떠다니던 먼지, 그리고 공기의 흐름까지 정지한 그 찰나, 진무의 몸에서 생겨난 희뿌연 기운이 청상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턱.
그리고 닿았다.
진무의 몸에서 빠져나간 그림자의 일부가 청상의 이마에 닿는 순간…….
파파파팍!
진무의 몸이 그림자를 향해 중첩되듯 겹쳐 하나가 되는 모습에 자충이 놀라 눈을 부릅떴다.
한순간 다가서는 진무의 움직임이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끄으…… 이 빌어먹을 새끼가!”
“……?!”
짜증이 가득 스민 진무의 말에 기겁한 자충이 청상의 몸 안에 담긴 마력의 폭주를 가속화시켰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에 꽉 잡혀 있는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청상의 육체도, 마력도…….
“왜? 맘대로 안 되냐?”
“……네……놈.”
“으, 삭신이야. 젠장, 아직 완성도 안 된 기술을 썼더니…….”
진무의 찡그림은 비단 자충이 자폭하려 해서만이 아니었다.
조금 전, 그가 거리를 좁힐 때 사용했던 일보는 초극(超極)이라 불리는 것이었다.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한순간의 움직임.
하나 아직은 불완전하다. 신력을 일시적으로 크게 증폭시켜야 했기에 몸에 이만저만 무리가 가는 게 아니었다.
“너 때문에…….”
“이익!”
자충이 어떻게든 몸을 빼내 보려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어느새 스며든 신력이 그의 마력을 점점 더 옥죄고 있었다.
“너 같은 건, 청상의 법구가 될 자격이 없어.”
“……!”
그의 이마에 손을 대고 있던 진무의 팔이 살짝 굽혀졌다가 활짝 펼쳐졌다.
슈우- 텅!
무척이나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그 안으로 대해와 같은 신력이 한꺼번에 밀려 들어와 자충의 마력을 짓눌렀다.
콰아아아아!
이어 신력이 세찬 급류가 되어 청상의 몸 안에 스민 자충의 마력을 힘차게 밀어 내기 시작했다.
“끄으, 끄아아아아!”
진무의 손에 이마가 짚인 청상의 입에서 소름 끼치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꾸드득, 턱, 터턱!
그리고 힘줄처럼 돋아나 청상의 손과 연결됐던 자충이 하나씩 하나씩 끊어지며 분리됐다.
쑤우욱!
검날을 움켜쥔 진무의 손길에 자충이 떨어져 나오자, 청상이 힘없이 허물어졌다.
“망할 검 새끼, 아예 소멸시켜 주마!”
콰아악!
진무는 끝을 볼 요량으로 청상에게로 향하던 신력을 끊어 떨어져 나온 자충에게 밀어 넣었다.
쑤우우우…… 텅!
“……어?!”
그런데 도리어 튕겨 나왔다.
다시, 또다시 신력을 불어넣었지만, 결과는 매한가지였다.
“이런 씨발, 뭐 이딴 게 다 있어?”
자신의 힘으로 청상의 몸에서 밀어 낼 수는 있었지만, 소멸시킬 수는 없었다. 과연 귀모의 물건이 맞긴 한 모양이었다.
“한낱 검 따위가!”
열이 잔뜩 받은 진무가 계속해서 노력했지만…….
“염병, 안 되네.”
소용없었다.
진무는 신경질적으로 투덜거렸다.
하지만 더 노력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안 되는 걸 뭐 하러 계속한단 말인가? 귀찮게시리.
원래부터가 인내, 끈질김, 그딴 말들과는 거리가 멀다. 포기할 건 재빨리 포기하는 것이 맘 편한 법이다.
하지만!
“그래도 봉인은 해 둬야지. 언제 또 이놈이 청상을 노릴지 모르니까.”
몰아낼 수 없으니 가둔다.
우우웅!
서기를 머금은 진무의 신력이 환한 빛을 내뿜었다가 자충에 스며 사라졌다.
슈우우우…….
환했던 세상이 원래의 어둠으로 돌아갔을 때, 자충에게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후우…… 겨우 끝났네.”
진무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마른 이마를 훔쳤다.
“으음…….”
“……?”
뒤이어 들려오는 신음에 고개를 돌린 진무의 눈에 힘겹게 눈을 뜨는 청상이 보였다.
“사, 사숙…….”
“오! 정신이 든 게냐?”
깨어나자마자 사숙부터 찾는 목소리가 새삼 반가웠다. 진무는 반색하며 달려가 그를 부축하곤, 몸 여기저기를 살폈다.
“괜찮으냐?”
“……아픕니다.”
“그럴 테지.”
“유, 육장은…… 어찌 되었습니까?”
“육장?”
“죄송합니다. 전 아직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일개 귀에게 이리 처참하게 당할 줄이야.”
“…….”
그건 내가 그런 건데.
진무는 고통스러워하는 청상에게 사실대로 말해 줄까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괜히 긁어 부스럼이다. 기억도 못 하는 놈한테 뭘 굳이.
“죄송합니다. 더욱 수련하겠습니다, 사숙…….”
“그래. 그래야 하고말고.”
힘겹게 말을 맺은 청상은 마음이 편안해진 듯 정신을 잃었다.
잠들어 버린 듯한 그 모습에 진무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결의를 다졌다.
그래, 수련해야지.
더 강해져야지. 몸뿐 아니라 마음도.
검 따위에 휘둘려서 사숙에게 덤비는 일은 이제 없어야지.
걱정 마라, 청상아. 이 사숙께서 너의 정신이 항시 올곧을 수 있도록 도와주마.
물론, 그 길이 꽃길은 아닐 게다. 힘겹고 또 힘겹겠지. 하지만 견뎌 내야 한다.
너를 키운 건 팔 할이 이 사숙의 가르침 아니더냐?
그 순간, 정신을 잃은 청상의 몸이 흠칫 떨렸다.
정신을 잃은 중에도, 열심히 수련시켜 주려 하는 사숙의 마음이 전해진 것처럼…….
* * *
“…….”
“…….”
결의에 차 있었다.
배수진을 둔 것처럼 적을 맞이할 준비가 차고 넘쳤고, 언제든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왜 안 오지?”
일행이 조금씩 지쳐 가던 와중, 황신이 물었다.
“그, 글쎄? 해형장으로 온다면 이 길로 올 게 분명한데?”
“음……. 그런데 왜 안 오지?”
심각하게 고민하는 둘의 모습에 이생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저기…… 혹시 박피옥주는 굳이 길이 아니라도 해형장으로 갈 수 있는 거 아닐까요?”
“응?”
“뭐?”
“그 왜, 순간 이동 같은 거…….”
“……!”
이생의 말에 황신과 백표가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이런 염병, 그걸 생각 못 했네……?
얼굴을 와락 찡그린 황신이 냅다 몸을 돌려 해형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천주우우우-니이임! 이 황신이가 도우러 갑니다아아!”
“은고오오옹!”
“…….”
순식간에 점이 된 둘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이생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망할 새끼들.
올 때는 앞서라더니, 갈 때는 니들끼리 가냐?
“하아, 그냥 이대로 도산옥으로 돌아갈…… 수도 없겠네.”
그랬다. 도망칠 엄두조차 낼 수가 없었다.
백표의 배 없이는 염수호도 건널 수 없거니와, 건넌다 쳐도 그다음엔 대사충이 지키는 사막을 넘어야 한다. 그가 몸 성히 돌아갈 가능성은 전무했다.
“나락이다, 나락…… 이놈의 괴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