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584
54화
박피옥의 하늘이 검은 마력과 금빛 신력이 뒤섞여 혼탁한 빛을 띠었다.
교마의 행태에 분노한 진무는 여의를 휘두를 때마다 신력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크윽!”
교마는 짧게 신음하며 고통을 삼켰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신력을 갈라 내고, 튕겨 내고, 간간이 역으로 공격까지 해냈으나, 신력과 닿으며 생기는 저릿한 충격만큼은 피할 수가 없었다.
맞부딪치는 것만으로도 속이 메스꺼울 지경이었다.
빌어먹을!
지계의 존재면, 지계의 존재답게 마력이 훨씬 더 윗줄이어야지! 어째서 신력이 더 세냐고!
물론, 자신의 모든 힘을 드러내면 상대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다. 이긴다는 보장이 없다.
하물며 놈이 감추고 있는 것이 더 있으면? 이미 예상치 못했던 신력 때문에 화들짝 놀라지 않았던가?
절대로 패를 다 보여 줘서는 안 된다.
자신이 가진 최후의 수단은 귀모와의 맹약을 어기는 일이기에 마지막의 마지막이어야만 했다.
일단 놈의 모든 것을 알고 난 뒤에…….
하지만 어찌?
지금으로서는 남의 거죽으로 위장해 숨을 수도 없다.
진신을 드러내고 본격적으로 싸운 이후, 무지막지한 진무 놈에 의해 근처에 있던 모든 존재가 싸그리 소멸당한 탓이었다.
또한 놈에게 상처를 입히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지금의 놈으로 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아무리 타인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 권능을 가졌다고 해도 신력을 머금을 수는 없으니까.
괜히 상극이겠는가?
온전히 지계의 존재인 그는 신력을 머금는 순간 막대한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결국, 지금 상황에서는 무엇으로 변해도 소용없는 것이다.
빌어먹을! 염병할!
대체 이 미친놈을 어떻게 떼어 내야 하지?
부지불식간에 몰아붙여진 터라 당장에는 막아 내기 급급하다.
일단 거리를 벌려야 한다. 잠시 몸을 숨겨 놈에 대해 완벽하게 분석하고 차분히 대응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박피옥의 존재들은 안 된다.
이미 효과가 없었다는 것을 온몸으로 겪었다. 이 미친 음양귀 놈이 사정없이 때려 부술 게 틀림없다.
하면 숨을 곳은?
힐끗.
진무의 공격을 막아 내던 교마의 눈알이 데루룩 굴러 전장에서 한참 도망쳐 몸을 피한 진무의 일행을 향했다.
청상, 백표, 이생…….
오, 그래! 저 황신이라는 놈!
저놈이 적당하다.
혹여 저놈이 상할까 진무 놈이 신력마저 줄였으니 절대로 함부로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
어디, 일단 기회를 잡아야…….
교마는 진무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세류에 담긴 마력을 줄여 나갔다.
쩌어엉!
“크윽!”
둔중한 충돌음과 함께 터진 신력 조각이 몸에 닿아 상처가 늘었고, 메스꺼운 느낌이 한층 심해져 토악질이 올라왔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놈이 승리를 직감해 방심할 수 있도록.
쩌저정!
무겁디무거운 진무의 공격에 교마는 밀리고 또 밀려 나며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러다 일순 진무의 눈동자에 묘한 빛이 어렸다.
“……!”
교마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사방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며 삽시간에 증폭되는 진무의 신력.
세심하게 살피던 터라 봉을 잡은 양손에 힘이 잔뜩 스미는 것까지 또렷이 보였다.
지금이다.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고 누가 말했던가?
잔 공격을 참아 내고 또 참아 낸 덕택에 드디어 진무 놈이 최후의 일격을 날리려 하는 것이다.
필시 무지막지하게 큰 놈이 날아올 것이다.
“하아아압!”
“……!”
기합과 동시에 진한 금빛 꼬리가 휘어질 듯 젖힌 여의의 봉신을 타고 쭉 흐르며 거대한 호선을 그렸다. 교마는 눈을 부릅뜨고 그 모든 과정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지금!
모든 힘을 쏟아 내고 난 다음에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공백기, 그 찰나의 틈을 노린다.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된다.
후우우우웅!
거대한 금빛 궤적이 거친 풍압을 일으키며 세상을 가를 기세로 날아드는 순간, 교마가 세류에 마력을 더하며 몸을 띄웠다.
때려 맞음과 동시에 생겨나는 반탄력에 몸을 실어야 한다.
튕겨 나가는 방향은 놈의 일행이 있는 곳!
까아아앙!
“……!”
뭐지?
일순 머리가 멍해진다. 교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부딪힌 충격이 작진 않았다. 하지만 예상보다 약하다.
또한 신력과 마력이 부딪히면 당연히 이전처럼 쩡! 하고 지축을 뒤흔드는 둔한 굉음이 나야 하는데, 어째서…… 이리 소박하고 가볍게…… 깡 소리가 나는 걸까?
설마 놈이 봉에 쇠붙이끼리 부딪쳐 나는 소리가 울릴 만큼 최소한의 신력을 담았다고?
그리 큰 자세를 취해 놓고?
반탄력에 몸을 싣고 쾌속하게 날아가려 했던 의도와는 달리 고작 십여 장밖에 물러나지 못한 교마가 진무를 멀뚱하게 쳐다보며 눈을 끔벅였다.
“큭, 왜? 뭐?”
진무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히죽거렸다.
“이놈아, 눈깔을 그리 티가 나게 굴리면 어쩌냐? 안 보려야 안 볼 수가 없었다.”
“…….”
“내가 말했지? 너하고는 비열함의 순도부터가 다르다고.”
“……!?”
진무의 조롱 섞인 웃음에 교마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화가 치밀면서도, 한편으론 의아했다.
지금의 공격은 너무 가벼웠다.
하면 좀 전에 증폭되었던 신력은 대체 무엇이었던 거지? 분명 넘실거리는 금빛 물결을 봤는데?
“궁금하지? 이놈에게 어렸던 막대한 양의 신력이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건지?”
“…….”
미소 띤 얼굴로 뱉어 낸 진무의 말에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던 교마가 별안간 고개를 휙 들어 올렸다.
“이, 이게 대체?”
아연실색한 교마의 머리 위에서 하늘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빠지지직!
금빛 전격이 나선의 틈새마다 튀어 올랐고.
쿠르르르르.
그 중심에 뚫린 거대한 구름의 동혈 안에서 대기가 그악스레 아우성을 쳤다.
“크으윽!”
이어 찾아온 압력에 대지가 통으로 푹 꺼지듯 내리눌렸다.
푹, 푸푹.
거암이 어깨에 올려진 듯한 묵직함과 함께 교마의 발이 대지에 뿌리처럼 박혀 들어갔다.
“끄으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압력에 오도 가도 못하게 생긴 교마가 얼굴을 찡그린 채 검디검은 운와(雲渦: 구름의 소용돌이)의 중심을 노려봤다.
“어디 한번 받아 봐라.”
“……!”
진하게 피어오르는 진무의 스산한 미소와 함께, 온통 금빛으로 빛나는 뇌룡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동혈을 찢어발기며 모습을 드러냈다.
-콰아아아아아!
거대한 아가리를 쩍 벌리며 토해 낸 포효로 존재감을 드러낸 뇌룡이 금안(金眼)을 희번덕이며 목표를 응시했다.
“하늘을 찢어 내는 용의 날카로운 이빨, 천교열.”
콰우우우!
담담한 한마디와 함께 뇌룡이 교마를 향해 낙하했다.
“빌어먹을!”
더 숨기는 것은 무의미하다.
교마는 이를 짓씹으며 최후의 최후를 위해 남겨 둔 수를 꺼냈다.
법구 세류.
그것은 그저 마력을 증폭시키는 권능의 상징만이 아니었다. 힘을 가둔 봉인구이기도 했다.
귀모와의 맹약으로 허락받지 않고 해(解)하여서는 안 되는 것이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설사 그로 인해 소멸당하는 벌을 받는다 해도.
빠가각!
손에 든 세류가 산산이 부서지고, 그 안에서 피어오른 마기가 촉수처럼 변해 세상을 잠식하듯 퍼져 나갔다.
콰드드드득!
이어 뇌룡이 그 위를 덮으며 대지를 물어뜯었다.
드드드, 콰아앙! 꽈광!
교마가 서 있던 곳을 중심으로 대지가 원형으로 폭발하며 범위를 넓히고, 이내 박피옥의 모든 것이 터트려졌다가 움푹 팬 대지와 함께 주저앉았다.
그리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폭발의 중심을 응시하던 진무가 봉을 가볍게 뻗었다.
[돌아와라, 여의.]무심한 어조의 언령과 함께 세찬 바람이 불자, 그의 손에 있던 여의가 예의 금빛으로 빛났다.
자신의 신력을 증폭시켜 뇌룡으로 화했던 여의가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쩍, 쩌저적.
하지만 폭발의 여파는 여전했다. 대지가 끊임없이 흔들리고, 사방에서 갈라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새끼……. 확실히 협비보다는 세네.”
시선을 고정한 채 한참을 응시하던 진무가 싸늘한 말과 함께 천천히 바닥에 내려섰다.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깊고 시커먼 구멍이 생겨난 폭발의 중심점. 진무가 그 앞에 멈춰 서자 무언가 구멍의 어둠 속에서 솟구쳐 올랐다.
이마에 돋은 뿔, 검붉은색 광택이 번들거리는 다부진 육체.
그리고 서늘함을 머금은 붉은 눈으로 진무를 바라보는 괴인.
“……그게 본모습이냐?”
“…….”
여의를 어깨에 걸치고 짝다리를 짚은 진무가 턱을 살짝 쳐들며 물었다.
겉으로는 여유로운 척하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자제하기 어려운 흥분에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마치 부푼 공처럼 투실투실하던 교마, 그리고 보다 상상 속에 존재하는 마에 가까운 모습으로 변해 버린 교마.
비단 변한 것은 모습뿐이 아니었다.
좀 전의 그에게서는 강렬한 마력이 느껴졌으나, 지금의 그에게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이 느끼지 못할 정도로 갈무리된 것이다.
그가 발산하는 서늘함에 입이 바짝 말라 올 정도였고, 온몸의 잔털이 전부 곤두섰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강해진 것이다. 승부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음양귀.”
“……?”
“내가 봉신(封身)의 맹약을 어겨야 할 정도로 네놈이 강할 줄은 몰랐구나.”
“봉신? 봉인되어 있었다고?”
진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교마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네놈은 협비와의 싸움에서 봉신까지는 보지 못했던 모양이군.”
“…….”
“하긴, 그럴 순 없었겠지. 협비 놈은 뒤를 책임질 만한 깜냥이 되지 못할 테니.”
“그게 무슨 소리지? 봉신은 뭐고, 책임은 뭔 소리냐?”
진무가 짜증스럽게 묻자 교마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오냐, 기왕 맹약을 어긴 것, 무슨 고민이 필요할까? 죽이기 전에 말해 주마.”
“…….”
“우리 육계마왕은 두 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다.”
“두 가지?”
“그래. 지금까지 네놈이 보았던 모습이 그 첫째, 지금 네놈이 보고 있는 모습이 둘째다. 두 번째 모습은 귀모님의 허락 없이는 절대로 드러낼 수 없기에 봉신이라 부르지.”
“그렇군. 그럼 네놈은 귀모를 배신한 셈이군, 박피옥주답게 말이야. 그런데 그게 가능한 거냐? 니들은 귀모의 명을 어길 수 없는 거 아니었어?”
“물론. 하나 봉신을 해함으로써 그 구속이 풀린다. 처절한 대가를 치러야 하지만 말이지.”
“허, 대단하네. 그걸 알면서도 잘도 그랬어.”
“하면? 네놈에게 호락호락 소멸당할 것이라 생각했더냐? 설사 봉신의 힘을 감당하지 못해 박피옥이 붕괴하고, 내가 죽는다 해도 네놈만은 반드시 죽여 주마.”
살벌하기 짝이 없는 다짐이었다. 동귀어진을 하겠다는 말이 아닌가?
하지만 진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교마를 살폈다.
도통 허점이 보이지 않는다.
어떤 동요도 없이 차분한 표정과 목소리로 답해 오는 교마의 모습은 완전무결한 마의 결정체처럼 느껴졌다.
협비도 그렇고 교마도 그렇고 어쩐지…… 육계의 마왕이라는 놈들이 너무 약하다 싶더니만.
하여간 이놈의 성격이 문제다.
시작부터 전력을 다했어야 했는데, 배부른 고양이처럼 상대를 가지고 놀다가 결국은 물리게 생기지 않았는가?
교마가 목숨까지 건다 했으니 쉽게 끝낼 순 없겠다.
결국…….
“하아, 젠장.”
진무가 고민 끝에 결정을 내린 듯, 품 안을 뒤적거렸다.
“청상!”
“……?”
쐐애액!
그러곤 곧장 청상에게 손안에 든 구슬을 던졌다.
위기의 순간에 사용하라며 옥황이 건넸던 귀천옥이었다.
“사, 사숙, 이건?”
“아무 말 말고, 위험해지면 그걸 써라. 명령이다.”
“…….”
담백하고도 서슬 푸른 명에 청상이 움찔했지만, 진무는 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그 말을 끝으로 교마를 바라봤다.
“내가 진짜, 이러면 안 되거든?”
“…….”
“그런데, 어쩔 수가 없네. 옥황께서도 용서해 주실 거야. 대강 상대해 주기에는 니가 너무 세 보이니까.”
“옥황이라고?”
“그래.”
순간 담담했던 교마의 눈동자에 파문이 일었다.
아니, 대관절 그 이름이 왜 나온단 말인가? 옥황이라니? 그리고 용서?
“봉신이라고 했냐?”
“…….”
“나도 비슷해. 지계로 파견 나온 거라 가진 힘을 전부 쓸 수는 없었거든.”
“그게 무슨 소리지?”
“무슨 소리긴?”
히죽 웃으며 자세를 취하는 진무의 외형이 파도에 쓸려 나가듯 뒤바뀌었다.
검은 광택이 번들거리는 흑암갑과 오색찬란한 공작 깃이 길게 늘어진 투구.
“네, 네놈! 설마!?”
실로 범접하기 어려운 위용에 교마가 눈을 홉떴다.
“맞아, 천계의 북방을 지키는 두장군 진무, 그게 나다.”
“…….”
길게 호선을 그린 진무의 입가 아래 삐죽 튀어나온 이빨이 반짝 빛났다.
“이제부턴 옥주 자리 놓고 치고받는 싸움이 아니라 전쟁이란 소리고, 너도나도 목숨을 걸어야 한단 뜻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