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590
60화
눈이 번쩍 뜨인다.
더 뜨이면 찢어지겠다 싶을 만큼 커다래졌다.
“……북리도천.”
진무는 입을 떡 벌린 채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있다는 말은 들었다. 피나는 노력 끝에 마왕이 되었다는 말도 들었다.
하지만 이리 빨리 대면하게 될 줄은 몰랐다.
“녀석, 놀라기는. 반갑다는 표정으로 알겠다.”
“어? 어어…….”
“그나저나 많이 상했군.”
“…….”
우융, 아니 북리도천의 반개한 눈동자가 무심한 말과 함께 진무를 응시했다.
많이 상했다.
그 말의 이면에 담긴 의미를 읽은 진무가 어금니를 살짝 깨물었다.
걱정?
아니다.
가치다. 투쟁심 넘치는 놈이 본 자신의 가치.
지금의 진무가 자신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단정하는 것을 넘어, 싸울 가치조차 없다고 평가한 것이다.
“이 새끼가…….”
한때 숙적이었기에 알 수 있었다.
진무는 꽉 깨문 어금니에 힘을 더하며 여의를 움켜쥐었다가, 이내 힘을 풀었다.
확실히, 지금의 자신은 많이 상했다. 몸도, 자존심도.
분이 치밀지만…… 어쩌겠는가? 사실인 것을.
그가 한발 앞서 있다는 사실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아직 다 회복하지 못했고, 회복한다 한들 봉신을 해한 북리도천과 싸워 이길 수 있다는 확신도 들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틈을 보았다면 달랐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니라 살필 때라는 사실이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냉철함을 되찾은 이성이 그와의 격차를 인지하자마자 본능이 옳다구나 하고 만류하고 나선 꼴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북리도천의 저 재수 없는 눈빛 안에 호의가 담겨 있다는 것 정도?
“후우, 그래. 니 말대로 많이 상했다. 교마가 생각보다 강하더라고.”
“…….”
선선히 인정해 버리는 진무를 다소 의외라는 듯 바라보던 북리도천이 픽 웃었다.
“네놈의 지랄 맞은 성격이 많이 누그러진 모양이군. 줘 패서 폐인 만든 놈을 높이 평할 줄도 알고.”
“천계에서 만 년이다. 혁련무강에서 진무가 되었을 때도 변했는데, 안 변하면 이상하지.”
“뭐? 크핫핫핫!”
“…….”
인상을 잔뜩 구긴 채 툴툴거리는 진무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리던 북리도천이 별안간 웃음을 터트렸다.
“니가? 변해? 퍽이나.”
“…….”
이 쉐끼가…….
웃음이며 표정에 가득한 조롱기에 진무의 눈매가 샐쭉해졌다.
“사실이거든?”
“이놈아, 지금 니가 만든 난장판은 뵈지도 않는 게냐?”
“그, 뭐…….”
그 말에 주위를 힐끗 쳐다보던 진무가 입맛을 쩝 다셨다.
개판을 쳐 놓긴 했으니 할 말이 없다.
“천계 놈이 지계에 와서 이런 깽판을 쳐 놓고는……. 근묵자흑(近墨者黑)이면 몰라도 마중지봉(麻中之蓬)이 네놈에게 가당키나 하단 말이냐?”
“…….”
진무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하긴, 그렇다.
마중지봉이란 삼밭의 쑥을 빗대 하는 말로, 선한 영향력 속에서 자라면 악당도 개과천선한다는 뭐 그런 뜻인데…….
아마 자신을 아는 이들이 들으면 가당치도 않다고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을 게 뻔하다. 오히려 천계가 악당의 소굴이 되었다면 모를까.
하지만 사실인 걸 어쩌란 말인가?
한때 무당을 타락시키고자 했으나, 좋은 스승 만나 좋은 환경에서 자라다 보니 어느새 정파의 영웅이 되어 있었다.
더욱이 천계에서는…….
“센 놈이 많아도 너무 많더라. 만 년 수련했는데 아직 모자라더라고. 옥황은커녕 상제들 발끝도 못 쫓아갔다.”
“마왕을 둘이나 때려잡은 놈이 약한 소리는.”
“그야, 교마 놈과 싸우다가 뭘 하나 깨달은 덕분에.”
“쳇, 운도 좋은 놈. 인계에서 나와 싸웠을 때도 그러더니…….”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떠오른 기억에 진무가 실소했다.
생각해 보니 그때도 그랬지.
북리도천을 차지한 잡불 놈에게 처맞다가 진정한 태극을 이루어 등선할 뻔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옥황의 계략(?) 때문에 입구만 보고 돌아왔더랬지.
“그나저나 진짜로 운 좋은 놈은 너 아니냐?”
“나?”
“그래, 인계에서도 마교의 교주였던 놈이 여기서도 마왕씩이나 해 먹고 있고. 나는 아직도 두장군을 못 벗어났는데.”
“그야, 내가 더 노력해서겠지.”
“노력 같은 소리 하네. 니가 만 년 동안 내가 한 노력은 알고?”
“풉. 편하디편한 천계에서의 노력이 지계에서의 그것과 어찌 같겠냐?”
“…….”
역시나 대꾸할 말이 없었다.
맞는 말이긴 하지.
일단 시작점부터가 다르지 않은가?
귀천령이라는 것이 있긴 하지만, 환생 대상자이니 제외하고.
등선과 동시에 천계에서 한자리하기 시작한 진무와 달리 북리도천은 지계의 맨 끝자락 망자에서부터 시작했다. 세상의 가장 밑바닥부터 굴렀단 뜻이었다.
말하자면 이름난 문파의 대공자와 뒷골목에서 시작한 부랑자의 차이랄까?
“처음 지계의 망자가 되었을 때는 정말 어이가 없었지.”
“……?”
“쉼 없이 이어지는 형벌의 고통은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죽으면 또 부활해서 형벌을 받고…….”
“거, 힘들었겠구만.”
“……영혼 좀 담지 그래?”
“피차일반 아니냐?”
“그건 그렇군.”
북리도천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창자도 없는데 배알이 꼴리더군. 별것도 아닌 것들이 나에게, 이 북리도천에게 형벌을 내리고, 나는 고통에 몸부림쳐야 한다는 것이.”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한지, 북리도천의 눈동자에 시퍼런 불길이 스쳤다.
그럴 만도 하다.
마교의 정점에서 하늘 아래 제 적수가 있니 없니 해 가며 떵떵거리던 놈이다.
자존심이라면 어디서도 빠지지 않는 놈이 죄인 취급을 받으며 쳇바퀴 돌듯 형벌을 받았으니…….
게다가 황신이 그러지 않았나. 망자와 아귀는 천계의 귀천령과 달리 인계의 기억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고.
형벌을 받으며 과거에 자신이 진 죄업을 뉘우치게 하기 위함이라지만, 한동안은 열만 뒈지게 받았겠지.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 마교와 지계가 다를 것이 무엇인가? 어차피 밑바닥에서부터 시작이라면, 인계의 무공을 다시 익히면 어찌 될까 하고 말이야. 그렇게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 어느새 각성을 하게 되었다.”
말은 저리 쉽게 하지만 쉬웠을 리 없다.
망자와 인간은 완전히 다른 몸이다. 해서 기맥의 쓰임도, 몸의 쓰임도 달랐을 터였다.
하지만 황신도 백표도 해낸 것을 그가 못 해냈을 리는 없겠지.
다만.
“밑바닥? 그건 좀 아니지 않냐? 마교에서도 니가 밑바닥은 아니었잖아? 마도 육가의 하나인 북리가 출신이면서.”
“기껏 허심탄회하게 썰 좀 풀겠다는데 비꼬지 말고 그냥 닥치고 처들으면 안 되냐?”
“……미안.”
매섭게 째려보는 북리도천의 눈에 살기가 일렁였다. 진무는 머뭇거리지 않고 즉시 사과했다.
더 긁기엔 주먹이 너무 가까웠다.
“근데 정말 대단하긴 하다. 똑같이 각성한 황신이나 백표는 귀를 조금 넘은 게 고작이던데, 넌 잘도 마왕씩이나 해 먹는구나.”
“이미 그놈들과 인계에서부터 가졌던 깨달음이 달랐으니까.”
“아유! 대단도 하셔라.”
“…….”
무성의하기 짝없는 칭찬에 북리도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여간 그 주둥이는……. 어쨌든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곳에 있다면 너도 있지 않을까?”
“내가 왜?”
“몰라서 묻냐?”
“모르겠는데?”
“미친놈. 너보다 지계에 더 잘 어울리는 놈이 어디 있다고.”
“그건 니 생각이지. 난 이래 봬도 세상을 구한 영웅이거든?”
“지랄하네…….”
둘은 온갖 세상 풍파를 헤치고 말년에 이르러 마을 거목의 그늘에서 한가로이 장기 두는 노인들처럼 대화를 이어 갔다.
여전히 싸늘한 긴장으로 가득한 주변의 분위기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어쨌든 니가 이 지계 어딘가에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 순간, 이전보다 더욱 노력했다.”
“나 때문이라고?”
“암!”
“왜?”
“혹여 니놈이 나보다 강해지면 안 되지 않겠냐?”
“그런 이유로 마왕까지 되었다고?”
“당연하지. 인계에서 패했는데 지계에서도 패할 수는 없잖아.”
“너다운 이유네.”
“나다운 이유지.”
만담처럼 주고받곤, 서로 짠 듯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랬을 것이다.
진무라도 그런 생각을 했었을 테니까.
“그런데 마왕이 되고 나서 아무리 찾아도 없길래, 사타라는 마왕 선배에게 찾아가 업경을 보여 달랬지.”
“업경을?”
진무가 비로소 귀를 쫑긋거렸다. 업경. 자신이 지계에 온 목적 중 하나가 아니던가?
“그거 아무나 볼 수 있는 거냐?”
“아무나 보겠냐?”
“그럼?”
슥.
진무의 물음에 북리도천이 주먹을 슬쩍 들어 올렸다.
아, 이해 완료.
“그래도 되는 거냐? 마왕끼리? 귀모가 내버려 둬?”
“되레 좋아하신다. 쌈질 구경하시는 걸 즐기시는 편이라.”
“음, 지계의 지배자답네.”
“그래. 어쨌든 업경에 네놈의 이름이 없더군.”
“없어?”
“그래. 귀천령이라면 몰라도 등선한 놈들은 기록이 안 남거든.”
“아!”
“설마하니 네놈이 등선을 했을 줄은 예상도 못 했다. 어떻게 너 같은 놈이…….”
“…….”
살짝 언짢았지만, 참았다.
괜히 반박했다가는 좋지 않은 꼴을 당할 것이 뻔하니…….
“하지만 난 그때부터 더 열심히 수련했다.”
“왜?”
“니놈이 천계에 있으니까.”
“그게 왜?”
“생각해 봐라. 나중에 전쟁이라도 벌어지면? 그때 천계에 있는 니놈이 더 강해져 있으면?”
“…….”
“내가 아는 니놈 성격에 옥황이라고 내버려 뒀을까? 어떻게든 더 강해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것이라 여겼지. 그래서 귀모에게 도전했다.”
“으응? 귀모랑 싸웠어?”
“그래. 하지만 아직은 발끝에도 못 미치는 실력이다. 정말로 강하더군. 봉신을 해하고 나서야 겨우 두 손 쓰시더라.”
“……허!”
진무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멍했다.
귀모가 강해서가 아니다.
그녀의 강함이야 옥황만 생각해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문제는 그 두 손을 쓰게 만드는 북리도천의 강함이었다.
자신은 가능한가?
전력을 다하면 옥황이 두 손을 쓰게 만들 수 있는가?
“굉장하네.”
“너한텐 그럴 수 있지. 한낱 천계 두장군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테니까.”
“…….”
북리도천이 어깨를 으쓱이며 한껏 으스댔다.
어찌나 꼴사나운지, 괜스레 어깃장을 놓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럼 나한테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니냐?”
“뭐?”
“들어 보니 너를 키운 팔 할이 바람, 아니 나잖냐? 말하자면 목표 같은 거. 나한테 안 지려고 마왕이 된 거니까 감사해야지.”
“……음, 애들 앞에서 곤죽이 되도록 처맞아 볼래?”
“사과할게. 말이 심했다. 마왕이 된 것은 순전히 너의 노력임을 인정한다.”
진무가 발 빠르게 사과하며 말을 돌렸다.
술이라도 있었으면 두 손으로 잔 채웠을 기세였다.
“그나저나 정말 출세했네.”
“출세했지. 일단은 여섯 마왕 중 최강으로 인정받고 있으니까. 그러니 너한테 한 맺힌 저놈이 아까부터 아무 말 못 하고 쭈그려 있는 거고.”
“……?”
진무가 그제야 고개를 돌려 그와 함께 온 마왕, 혼천을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내내 자신을 향해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고…….
“한무화다.”
“응?”
“네놈의 영웅 놀음에 짓이겨진 그놈이지.”
“……그, 한무화라고? 저게?”
진무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혼천을 응시했다.
그럴 만했네. 보자마자 달려들 만했어.
휴우,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모든 것이 놈의 삐뚤어진 마음에서 비롯된 일이었지만, 어쨌거나 자신과 그는 적이 아니던가? 북리도천이 함께 오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다.
그런데 한 가지 의아함이 들었다.
자신에게 이기는 것이 목표였다면, 지금이야말로 적기 아닌가?
“왜 막아 준 거지?”
“내 먹잇감을 남한테 뺏길 순 없으니까.”
“그럼 너는? 지금의 너라면 충분히 나를 짓밟을 수 있을 텐데?”
“너라면 그랬겠냐?”
“뭐?”
“멀쩡한 상태였다면 이미 네놈의 모가지를 뜯어 놓았겠지.”
“…….”
“하지만 부상을 입은 놈을 상대로 싸워 봐야 뭐 그리 자랑스럽겠나? 네놈이 회복되기 전까진 참아 주마.”
“쳇, 성인군자 나셨네. 지계 마왕 주제에 남의 사정도 봐줄 줄 알고.”
“원래 너보단 내가 더 성인군자에 가까웠다.”
“…….”
“그리고 무엇보다 널 보고자 하는 분이 계신다.”
“날? 누가?”
“마왕 둘을 보내실 분이 누구겠냐?”
“……그야, 당연히 귀모?”
“정답.”
“…….”
북리도천이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뭔가 더…… 엿 된 느낌인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