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592
62화
귀모의 눈에 비친 진무는 참으로 요상한 놈이었다.
웃기지 않는가?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순조의 존재감에 휘둘려 잔뜩 위축되어있더니, 이젠 제 놈이 천계를 대표하기라도 하는 양 머리를 빳빳하게 들고 있다.
“절 부르신 이유가 뭡니까?”
“…….”
팔짱까지 옹골차게 척 끼며 묻는 진무를 보며 귀모가 석좌의 팔걸이를 손톱으로 두들겼다.
대뜸 던진 질문에 답하기가 난감해서가 아니었다.
어이가 없었다.
주객전도도 어느 정도여야 대꾸를 할 터인데, 마치 바쁜 사람 왜 오라 가라 하냐는 투 아닌가.
발칙하기 짝이 없는 놈…….
하지만 그 점이 더욱 재미있었다. 잠시 여흥을 즐겨 볼 마음이 생길 정도로.
“몰라서 묻는 게냐?”
“알면 묻겠습니까?”
“모른다?”
“예.”
“호오? 그으래?”
“…….”
뼛속까지 당당해 보이는 진무의 태도에 귀모가 피식 웃으며 흘러가듯 말했다.
“천계에 적을 둔 놈이 지계에 몰래 잠입해 놓고는 모른다?”
“……그건, 그게……. 제가 오고 싶어서 왔겠습니까? 옥황께서 시키니까 온 거지.”
뭐 이런 놈이 다 있단 말인가?
어디서 왔는지 빤히 알고 있다고 하는데도 지 잘못이 아니란다.
와중에 대뜸 책임을 옥황에게 돌려 버려?
“그래, 네놈의 힘으로는 불가능했겠지. 인정하마, 옥황이 보낸 거. 그런데 왔으면 조용히나 있다 갈 것이지, 어찌 그런 사고를 친 게냐?”
“사고라니요? 천부당만부당하시네요. 지계에 숨어든 천계인으로서 지극히 정당한 세작 활동이었을 뿐입니다.”
“오! 세작 활동? 맡은 직분에 충실했다?”
“예, 최선을 다했지요.”
“스스로 세작이라고 하는 주제에 잘도 당당하구나.”
“사실이니까요.”
“그래, 그것도 이해하마. 협비를 쓰러뜨린 것도 이해하지. 그런데 세작이라는 놈이 당당하게 신력까지 드러내고 해형장을 때려 부숴?”
“아, 그건…….”
“그래, 그것도 뭐 그럴 수 있다 치자. 일하다 보면 으레 자잘한 사고쯤은 일어날 수 있지. 그땐 저기 있는 네 사질 녀석이 뒈질 뻔했으니 아끼는 마음에 눈이 돌았다고 하자.”
“그…….”
“교마를 소멸 직전까지 몰고 간 것은 어찌할까? 네놈으로 인해 하마터면 박피옥이 붕괴될 뻔한 것은 또 어쩌구?”
“…….”
조곤조곤히 화도 안 내고 읊어 주는 죄목에 한껏 쳐들렸던 진무의 턱이 조금씩 내려갔다.
그럼 다 알면서 왜 물은 건데?
“뭐, 좋다, 좋아. 내 다 알면서 지켜보았으니……. 음양귀 어쩌고 하면서 일을 키워 놓기도 했고.”
“…….”
읊은 죄목을 무로 돌려 버리는 말에 진무가 의아한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뭐지, 이 호의적인 태도는?
아직 항변할 기회가 있다?
“……예상치 못한 아량이신데요?”
“그리 생각해 주니 고맙구나. 그 아량을 베푸느라 포궁의 식솔들이 고생이 많았다. 내가 네놈으로 인한 화를 참아 낼 때마다 대략 세 번 정도 파멸을 맞았었지.”
“파, 파멸이요? 얼마나 무슨 일로 화가 나셨기에?”
“처음엔 니놈이 얌생이처럼 감시하다가 걸리면 내 뼈를 갈아 마실 거라 엄포 놓는 말을 들어서?”
“…….”
나이도 자실 만큼 자셨으면서 그걸 또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기억하다니.
“그, 그건……. 죄송합니다. 제가 아직 어린놈이라 철이 없어서…….”
적잖이 찔린 진무가 최대한 예쁘고 귀염성 있게 웃으며 구차하게 변명했다.
따지고 보면 자신도 만 년하고도 팔십에, 십몇 년 더해진 삶을 살아온 노인이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 정도 짬으로는 상대도 안 되는 귀몬데.
그녀 앞에서는 몇 살을 처먹든 아이, 아니 막 태동하기 시작한 생명이나 다름없다.
“뭐, 괜찮다. 애가 헛소리 좀 했기로서니 어른이 되어서 멱살잡이를 할 수는 없지. 나는 욕 좀 처먹었다고 무당산 불태우던 어떤 놈이랑은 다르거든?”
“……하, 하하. 저에 대해 많이 아시는 편이네요?”
“그럼, 당연하지. 내가 원래 남 뒤 캐는 걸 좋아하거든.”
“그러시군요.”
그 어떤 놈이 된 채로도, 진무는 난감해하면서도 열심히 웃었다.
설마하니 세상의 지배자씩이나 되는 분이 체면이 있지, 웃는 얼굴에 침을 뱉으려고.
“뭐, 사실 나는 괜찮다. 대신에 순조가 고생이 많았지. 뒤치다꺼리는 항상 저놈이 하니까.”
“……어쩐지. 저를 대하는 마음이 남다르더군요.”
“호오? 늘 웃는 놈이라 가늠키 쉽지 않았을 것인데?”
“느껴지던데요? 웃음 속에 살기가, 살기가…… 어휴, 하마터면 눈웃음에 베일 뻔했지 뭡니까?”
“이해하거라. 오죽이면 그랬을까? 지금이라도 당장 너와 네 일행을 찢어 죽이고 싶은 걸 날 봐서 참고 있을 터.”
“…….”
그 살벌한 답에 대한 반응은 진무가 아니라 일행에게서 나왔다.
둘의 대화를 잠자코 듣던 청상 등이 황급히 물러나 거리를 벌렸으니까.
저 정도의 괴물에게 거리가 다 무슨 소용이라고……. 맘만 먹으면 그냥 썰려 나갈 텐데.
“어쨌든 그리 모든 것을 이해하시고, 용서까지 너그럽게 해 주신 것을 보면…… 제게 따로 원하는 게 있으신 거죠?”
“호오? 이해력이 제법 남다르구나?”
“이런 걸 눈치라고 하더군요.”
“마음에 든다.”
“감사합니다. 아, 딱히 칭찬을 목적으로 한 말은 아니었구요.”
“괜찮다. 칭찬할 때는 과하게 하는 편이라. 어쨌든 네 눈치가 그러했다 하니 나도 둘러 말하지 않으마.”
“…….”
본심을 드러내려는 듯한 귀모의 말에 진무가 꿀꺽 침을 삼켰다.
뭐라고 할까? 나에게 원하는 것이 뭐가 있을까?
혹, 지금까지 내가 벌인 일들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 따위나 받자고 부른 건 아닐 테고. 옥황이 날 지계로 보낸 의도?
별별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그게 뭐든, 고래 두 마리에 끼인 형국이 아닌가?
새우가 되어야 한다.
등 터지라고 내주는 새우가 아니라, 두 마리 고래가 싸우다가 뒈지면 그 사체를 이용하는 약삭빠른 새우.
잔뜩 긴장한 진무가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데, 귀모가 툭 입을 열었다.
“너!”
“…….”
꿀꺽.
“이참에 전향해라.”
“……전, 예?”
“전향.”
“…….”
순간 복잡했던 머릿속이 하얗게 지워졌다.
뭐 어째? 전햐앙?
“말이야 바른말이지, 니가 천계 성향은 아니지 않냐?”
“그야…… 그렇긴 한데……. 갑자기 그렇게 훅 들어오시면.”
“깊이 고민했다. 그러니 답하거라. ‘네’ 한 마디면 된다. 그럼 모든 것을 눈감아 주마.”
“아니 그…….”
“박피옥은 어떠냐? 천계를 배신한 마왕, 오, 말해 놓고 보니 꽤 괜찮구나.”
“예? 하지만 교마가…….”
“교마?”
픽 웃은 귀모가 귀찮다는 듯 휙 손짓했다.
“어?”
그리고 그 순간 진무의 눈앞에 교마가 나타났다. 귀모의 손아귀에 목이 잡혀 달랑거리는 채…….
뿌득.
꺾였다.
가볍게 손목만 비틀었을 뿐인데 교마의 고개가 직각으로 꺾이고, 이내 힘없이 축 늘어졌다.
“이제 빈집이다.”
“……!”
감정 한 올 느껴지지 않는 한마디와 함께, 교마의 몸이 푸스스 흩어졌다. 바람에 날리는 모래처럼.
“해라.”
“…….”
답할 수 없었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가벼운 손짓에 오랫동안 박피옥에 군림했던 마왕의 목숨이 날아갔음에도 그 누구도 동요치 않는다.
북리도천도, 혼천도, 순조도……. 모두가 별일이 아닌 것처럼 받아들였다.
마치 그게 그들의 운명이라는 듯.
동요하는 것은 순조에게서 조금 떨어져 있던 자신의 일행이었다.
“답을 해야지?”
“…….”
귀모의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귓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날벼락에 직격당한 듯 온몸이 저릿해지는 것을 느끼며, 진무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귀모의 손아귀에 제 목이 잡히지 말라는 법 없었고, 나뭇가지 꺾듯 툭 꺾어 버리는 그 잔인한 손짓을 버텨 낼 자신도 없었다.
“자, 잠시만요. 일단 제 말을 좀…….”
“답하라.”
“…….”
아씨! 잠깐만이라고!
지배자씩이나 되시면서 왜 이렇게 성격이 급해!
지금 내가! 한마디에 인생이 달라지게 생겼잖아!
정신 차리자, 진무야.
세상에 가장 무서운 괴물이 지금 거대한 아가리를 벌리고 노려보고 있지 않으냐?
말 한마디, 손가락질 한 번에 목이 달아난다.
천계를 선택하기엔 귀모의 손에 변사체가 될 테고, 지계로 전향했다가는 배신자가 되어서 옥황의 진노를 받게 된다.
진무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맹렬하게 머리를 굴렸다.
“귀모님.”
“말하라.”
“저는 천계의 무장입니다.”
“그래서?”
“잘 아시겠지만, 무장의 가장 큰 덕목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충성심입니다.”
“흐흠.”
귀모의 고개가 삐딱하게 꺾였다.
여기서부터가 중요하다.
일단 충성심을 깔고 나서, 만년 거북 대신을 속였던 영민한 토생원처럼 설득해야 한다.
비록 견원지간이나 옥황과 귀모의 관계를 이용해서.
“하지만!”
“…….”
“제가 고작 충성심만으로 이런 말씀을 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
“잘 아시겠지만, 옥황이 어떤 분입니까? 말로는 신이네 뭐네 하지만 의심병이 보통이 아닙니다.”
“그건 그렇지.”
됐다.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말이 괜히 있겠는가?
옥황을 나쁜 놈으로 포장해서 귀모의 동의를 이끌어 냈다.
자, 이제…….
“역시나 잘 아시다시피, 세작이라는 게 어떤 위치입니까? 들키면 모른 체할 수밖에 없지요.”
“옳은 말이다.”
“옥황이 그러더군요. 정체를 들키면 저와 저기 있는 청상의 모든 기록을 삭제할 것이라고.”
“빌어먹을 놈이지.”
“맞습니다. 어찌 일을 시켜 놓고 모른 척할 수 있단 말입니까? 또 아시다시피, 저는 신력과 마력을 동시에 쓸 수 있습니다.”
“그렇지.”
“옥황이 어땠겠습니까? 그 망할 의심병으로 제가 혹여 지계에 눌러앉을까 봐 모종의 조치를 하지 않았겠습니까?”
“모종의 조치?”
“예에! 제 혼백의 일부를 떼 갔다니까요?”
“…….”
“만약 배신하면, 그 혼백을 이용해서 죽이려구요.”
“흐흠.”
“해서 쉬이 답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영명하신 귀모님께서 제게 은혜와 용서를 베푸셨지마는, 잘못하면 저도 죽을 상황인지라……. 일단 긍정적으로 고민하겠습니다.”
“그으래?”
“암요! 말씀하셨다시피 제가 어디 천계에 어울리는 놈입니까? 평소 마음 깊이 지계를 흠모해 왔는데, 이번에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
“지계야말로 제가 있을 곳이지요.”
“호오?”
“허락만 해 주신다면 제가 그 혼백을 찾아 반드시 돌아와, 천계를 배신한 업적을 이루고 박피옥주에 당당히 취임하겠습니다.”
정말이지, 진무는 혓바닥에 기름칠한 듯 말을 쏟아 냈다.
도리가 없었다. 오죽이나 급했으면 그랬겠나?
그런데 고개를 비뚜름히 꺾은 채 턱을 괴고 진무를 응시하던 귀모가 피식 웃었다.
“진무야.”
“예!”
“개수작 잘 들었다.”
“……예?”
“아님 토끼 수작이라고 해 줄까? 바위에 간 널고 온 토끼?”
“…….”
이빨도 안 먹혔네.
열렬했던 변은 되레 비웃음만 샀고, 이어 그녀의 눈동자에 어린 싸늘한 기운만 증폭시켰다.
“뭐가 어쨌든, 지금 그 말은 거절이라는 뜻이지?”
“아……그게, 아니라……. 제 말씀은 일단 충분히 심사숙고를 한 뒤에 결정을 하겠다는 그런…….”
“지랄하네.”
“……예에?”
“뭐? 왜? 그럼 내가 니 헛소리를 고상하게 포장이라도 해 줄 줄 알았더냐?”
“그, 그래도 귀모씩이나 되시는 분이…….”
“뭐인 게 뭐 그리 중요할까? 말투에 구분이 있더냐?”
“그건 아니죠.”
“난 니가 모시는 옥황 따위완 달리 속 감춘 소리는 못 한다.”
“그건 저랑 비슷하네요……가 아니라, 제 진심을 알아주십사 당부드립니다. 당장에는 천계의 무장이나, 제가 있어야 할 곳인 지계로 언젠가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는.”
“그럼 저건 뭐냐?”
“……?”
귀모가 갑자기 손을 쭉 뻗자 백표의 몸에서 무언가가 쑥 빠져나와 잡혔다.
영롱하게 빛나는 작고 동그란…….
“구슬이요?”
“귀천옥.”
“아, 그런 이름도 있죠.”
“옥황이 줬지?”
“…….”
“어찌 만들어지는 물건인지는 아느냐?”
“그야…….”
모르지.
받기만 했지, 그 재료가 무엇이고 어떤 노력을 해서 만들어지는지 알게 뭐란 말인가?
“귀하디귀한 옥황의 혼백이다.”
“……예?”
“권능이 아닌, 제 몸을 찢어 내 만든 물건.”
“아…….”
“뿐이냐?”
또 한 번 손을 뻗자, 청상의 허리에 있던 자충이 귀모의 손아귀에 빨려들어 잡힌다.
“이게 뭔지 아느냐?”
“자충…… 검?”
“큭, 아무것도 듣지 못했구나.”
“…….”
“이건 나의 손가락이다. 옥황에게 혼례의 증표로 주었던. 제대로 각성만 시킨다면, 봉신을 해한 마왕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무기지.”
“아……. 그, 그랬군요.”
어쩐지, 자아를 깨친 놈이 몹시도 사악하더라.
옥황도 그렇다.
그런 기능이 있으면 미리 언질이라도 줄 수 있지 않은가?
“귀천옥에 자충까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가 가진 봉.”
“…….”
“그것에 태초의 신수, 용의 아홉 자식 중 하나인 황룡이 봉인되어 있음을 옥황이 모르지 않을 터.”
“…….”
“그 모두를 딸려 보낸 옥황이 너를 의심해?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아는 옥황은 그렇지 않다. 누구보다 너를 아낀다는 소리다.”
빙그레 웃으며 바라보는 귀모의 말에 진무는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런 거였나요?
옥황께서 저를 그리 아끼고 계셨다는 사실을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네요.
감사하기도 해라.
옥황상제님, 그 감사한 마음에 저는 정말 엿…… 아니, X 되게 생겼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