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593
63화
난감함을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들라고 하지, 이건 좀 너무한 것 아닌가?
제 혼백 찢어 연단한 귀천옥에, 귀모의 신체 일부로 만든 자충, 신수가 스민 신진철봉까지……. 숫제 뒈지라고 보낸 것과 뭐가 달라, 이게.
옥황, 이 염병할 절대신.
신도 실수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알아챘어야 했는데…….
하필 그 실수가 이런 상황에서 터질 게 뭐란 말이냐? 아니, 생각해 보니 한두 개도 아니잖아, 지금.
더 이상 말할 기력도 없었다. 진무는 푸스스 가라앉듯 고개를 떨궜다.
그런데 그 모습에 귀모가 빙긋이 웃는다.
“다만.”
“……?”
다만? 다만이라면…….
앞에 풀어 놓은 썰(說)에 이어 예외적으로 작용하는 사항이나 조건을 덧붙이기 위해 서두로 떼는 말인데.
앞의 말이 지옥 아가리처럼 자신의 마음을 허망하게 만들었으니…… 뒤는?
한 가닥 기대를 품고, 진무는 고개를 번쩍 들어 귀모를 쳐다봤다.
웃고 있다.
눈은 호의 넘치게 휘어 있고, 새빨간 빛이 도는 매력적인 입술에는 관음보살 같은 미소를 머금고 계시는구나.
……왜 이래? 사람 희망차게?
“다만, 이 자충은 말이다.”
귀모가 자신의 손 위에 둥실 떠 있는 자충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니까 그 자충이 왜?
“약속의 증표니라.”
“…….”
“혼례를 위한 증표이기도 하나, 또 하나의 의미가 있지.”
“또, 또 하나의 의미요?”
절로 침이 꿀떡 넘어갔다.
무너지는 하늘 가운데 선명한 생명의 빛줄기가 쏟아지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망할 옥황 놈.”
“…….”
“거기까지 생각하고 들려 보낸 것이겠지. 혹여 네놈이 내 시선에 걸려 일이 잘못될 것일 예견하고 말이야.”
“그, 그게 무슨?”
“내 목숨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가하지 않는 한, 자충을 가진 자는 해하지 않는다.”
“……예?”
“신들의 약속이다.”
“…….”
순간 진무의 눈동자가 찢어질 듯 커졌다.
해가 동쪽에서 떠오르는 불변의 진리와 동급인 신들의 약속.
결국…….
“그럼 살려 주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진무가 자신도 모르게 다급히 묻자, 귀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한 번의 고갯짓을 얼마나 기다려 왔던지.
춤이라도 추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누르는데, 온화한 미소를 한가득 머금은 귀모가 검지를 곧게 뻗어 청상을 가리켰다.
“저 아이는 살겠구나.”
“……!”
“몸 안에 흐르는 마력을 보아, 자충과 교감을 이룬 것이 분명하니…… 녀석이 주인이구나. 하니 약속대로 살려 줄 밖에.”
귀모의 시선을 따라 진무가 청상을 멀거니 바라봤다.
……청상만?
그럼 나는? 황신은? 백표는? 이생은?
“약속은 징표를 가진 대상에 대한 것이지, 나머지 녀석들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아…….”
하늘 높이 솟구치던 희망이 난데없이 날아든 화살에 꿰여 절망의 나락으로 급급하게 추락하기 시작했다.
아니, 아니지. 그래, 청상만이라도…….
“아닙니다! 그것은 제 물건이 아닙니다!”
“……?”
별안간 잔뜩 움츠려 있던 청상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발악하듯 소리를 질렀다.
순조가 얼굴을 찡그리며 그를 제지하려 했으나, 귀모의 작은 손짓에 가로막혀 물러났다.
“무엇이 아니냐?”
귀모가 청상에게 물었다.
“자, 자충은…… 원래 옥황께서 사숙께 내리신 물건이었습니다.”
“…….”
“또한 제가 잠시 맡았으나, 능력이 되지 못하여 사숙께서 회수하셨던 물건입니다.”
“그래서?”
“자충의 진짜 주인은, 제 사숙인 진무입니다!”
청상을 응시하던 귀모의 고개가 살짝 모로 기울었다.
떨리던 목소리는 단호해졌고, 위축되어 구부정하던 자세가 활짝 펴졌다. 어느새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시선을 맞추는 그 모습이 가당찮게 당당했다.
재미있는 놈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던 건가?
“맞습니다! 그건 천주님의 것입니다! 자충 때문에 청상이 폭주했을 때, 천주님께서 제어하시는 것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옆에 있던 황신이라는 놈마저 동조하고 나선다.
머뭇거리며 고민하고 있으나 백표 또한 다르지 않은 표정이었다.
거참, 딴청 피는 이생을 제외하고…… 재미있는 놈이 둘도 모자라 넷이라니.
“큭, 이거야 원…… 눈물이 앞을 가리는구나. 자충이 금도끼나 은도끼도 아닌데, 저렇듯 나서서 자기 것이 아니라 말하니.”
어이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귀모가 진무와 청상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래서 너희는 죽어도 좋다?”
“……그렇습니다.”
“흠.”
귀모가 묘한 눈빛으로 생각에 잠긴 순간이었다.
“이런 씨팔, 개소리하고 있네, 진짜.”
“……?”
듣고만 있던 진무가 욕설을 내뱉으며 벌떡 일어났다.
“하아, 그냥 듣고 있으려 했더니 정말 성격에 안 맞아서 못 해 먹겠네.”
“……사, 사숙!”
진무의 돌발 행동에 청상을 비롯한 나머지 일행도 당황해 허둥지둥했다.
물론, 순조의 살기 또한 더없이 진해졌음이다.
하지만 귀모가 묵묵히 있기에 나서지는 못하고 참는 모습이 역력했다.
“이봐, 귀모. 아까부터 뭘 야발거리고 있는 거야? 약속이 그러하면 그대로 하면 그만이지, 이랬다가 저랬다가. 귀모씩이나 되어서 우릴 가지고 노는 거야?”
“사, 사숙! 귀모님께 그 무슨?”
“다물어!”
“…….”
진무가 청상을 향해 매섭게 소리쳤다.
“지금, 나한테 니들 목숨 대신 살아남으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냐?”
“…….”
“이것들이 어디서 그딴 되지도 않은 소릴 하고 있어?”
“사숙.”
“천주님.”
“아가리 닥치라 했어.”
“…….”
“쪽팔리게 만들지 마. 난 나 살겠다고 아랫것들을 위험으로 내몰지 않는다. 적어도 내가 함께하고 있는 공간에선 언제든!”
진무는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청상 등을 노려본 뒤, 홱 고개를 돌렸다.
누구나 선이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진무는 지금 자신이 정한 선을 지키려는 것이다.
물론, 그 선은 귀모에게도 있을 것이다.
선악, 혹은 신과 마의 구분과 무관하게 세상을 다스리는 신으로서 가지는 존귀(尊貴).
하나 뒈지게 생긴 마당에 그딴 게 뭐가 중요한가?
이래 뒈지나 저래 뒈지나 똑같이 뒈질 거면, 싸우다 뒈지는 게 훨씬 바람직하지.
진무는 서슴없이 귀모의 선을 넘었다.
“이봐, 귀모.”
“…….”
“구차하게 이 말 저 말 늘어놓지 말고, 그냥 한판 뜹시다.”
“뭐라?”
“지계가 그렇다며? 이기는 놈이 다 가지는 거라고.”
“허, 그래서? 나와 싸워 보겠다? 고작 니까짓 게?”
“내가 원래 싸워 보기 전에 꼬리는 말아도, 모가지를 내놓은 적이 없어서. 대신! 이놈들은 보내 주쇼! 어차피 사나 죽으나 위협도 되지 않는 놈들이니까.”
그 말과 함께 진무가 손을 쭉 뻗자 귀모의 곁에 머물던 여의가 쑥 빨려들어 잡혔다.
턱.
어깨에 여의를 척 걸치고 짝다리를 짚은 진무가 턱을 살짝 치켜들고 웃었다.
“이! 빌어먹을 천계 놈이! 내 분명히 경고했거늘!”
물론…… 선을 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놈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우르릉!
지켜보기만 하던 순조가 눈에 불길을 토해 내며 고함을 지르자, 검붉은 마기가 솟구치며 뇌성벽력과 함께 천지가 요동쳤다.
“귀모님! 명을 내려 주십시오! 지금 즉시 놈의 명줄을 끊고, 이따위 놈을 지계로 보낸 천계에 직접 책임을 묻겠습니다!”
“…….”
그 노기충천한 모습에 힐끗 시선을 돌린 진무가 어깨를 탁탁 두들기던 여의의 끝을 잡고 쭉 뻗어 가리켰다.
“그래서, 첫 상대는 너냐?”
“뭐라? 이노옴!”
“아냐? 그럼 그 옆에 북리도천? 것도 아니면? 혼천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무화 네놈이야?”
“저 자식이!”
누가 봐도 가망 없는 주제에 천둥벌거숭이나 다름없이 나대는 진무의 모습에 북리도천이 픽 웃고, 혼천이 쌍심지를 돋우며 마력을 끌어 올렸다.
“쯧!”
가히 일촉즉발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단번에 잠잠해졌다.
혀 차는 소리 한 번.
뇌성은 오간 데 없고 포궁의 대지를 뒤흔들던 진동은 잠잠해졌으며, 하늘까지 뻗은 순조의 마기가 사그라들었고, 혼천은 더없이 공손해져 물러났다.
사라락.
옷자락 스치는 소리와 함께, 귀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큭, 큭큭큭.”
“…….”
악문 잇새로 흘린 소리 죽인 웃음소리가 절로 얼굴을 찌푸리게 할 만큼 귓가를 울린다.
“위협이라니……. 참으로 재미있는 말이구나.”
“…….”
낮게 읊조리며 일어난 그녀의 몸에서 느껴지는 존재감이 견딜 수 없는 압박감을 선사했다.
뭔가 대단한 변화 따윈 없었다.
그저…… 눌렸다.
지계라는 거대한 공간이 그녀의 존재감에 눌린 작은 통 속의 세상인 양 짜부라들었다.
진무도, 청상을 비롯한 그 일행도, 더해 순조와 두 마왕까지도 그 힘 앞에 제대로 서질 못했다.
“끄으으…….”
당차게 나섰던 진무의 무릎이 덜컥 내려앉았다.
까드드득.
양손으로 잡고 버티던 여의가 활대처럼 휘었다.
“고작 한 걸음도 떼지 못할 녀석이…….”
“…….”
선명한 조소에도 진무는 아무런 답을 하지 못했다.
숨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신마합일을 통해 얻은 힘을 모조리 끌어 올렸지만, 무력했다.
“애초에 내 앞에 어떤 것도 위협이 되지 못함을 알겠느냐?”
“…….”
잘 알겠다.
그녀의 앞에 자신과 청상은 물론, 마왕들조차 아무런 무의미하다는 것.
그녀는 그저 존재감만으로 그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다.
“하나, 내게 대든 그 기개가 마음에 들었다.”
“……?”
“하여, 기회를 주마.”
귀모가 웃자, 압박감이 씻은 듯 사라졌다.
“컥, 헉헉…….”
예외는 없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털썩 무릎을 꿇고 막혔던 숨을 힘겹게 토해 냈다.
모두가 제 발치에 절하듯 엎드린 모습을 만끽한 귀모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진무야.”
“왜!?”
거친 숨을 내쉬며 호흡을 고르던 진무가 바락 외쳤다.
“공손히 말해야지? 그래야 마음을 돌린 나도 체면이 서질 않겠느냐.”
“……요.”
“녀석.”
최소한의 반항이 싫지는 않았던 것인지 귀모가 빙긋 웃었다.
“옥황이 너를 보낸 이유는 이것 때문이겠지?”
“……?”
귀모가 가볍게 손을 내젓자 진무의 앞에 투박한 화로 하나가 생겨났다.
곧 꺼질 듯 위태로운 불꽃…….
“이건?”
“이미 알고 있지 않더냐?”
“……청염입니까?”
“옳다.”
“…….”
“옥황이 보냈으니 너도 그 기원에 대해서는 알고 있을 터.”
“축융의 잔재…….”
“또한 옳다. 과거 북리도천의 몸을 차지했다가 너에게 소멸당할뻔한 녀석이지. 그때 내가 지계로 불러왔느니라.”
“…….”
“그 또한 옥황이 알 터. 아마도 내게 무언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했겠지.”
“그건…….”
“변명도 부정도 필요치 않다. 내가 아는 옥황이라면 그러했을 테니.”
“…….”
달싹이던 진무의 입이 꾹 다물렸다.
“하나, 나는 옥황이 생각하는 그런 일을 벌일 생각은 없다.”
“그걸…….”
어찌 믿냐 묻고 싶었지만, 입술이 떼어지지 않는다.
그 무시무시함을 조금 전에 몸소 겪지 않았던가?
“축융은 나조차도 힘겨운 상대니까. 자칫 지계의 존폐를 걱정해야 할지도 모르거든.”
“그럼, 왜 지계로 몰래 가져오신 겁니까?”
“학구열.”
“……예?”
“난 원래 호기심이 많은 편이다. 무언가를 알고자 하는 욕심이 과해 언제나 공부하지.”
“……신도 공부를 하시나요? 만물의 이치를 모두 아시지 않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럼 불완전함 없이 완전무결하겠지.”
“음, 그건 그러네요.”
“하여 나는 늘 공부에 많은 시간을 들인다, 인계의 선녀탕을 훔쳐보거나 과실나무 열매에 환장하는 누구와는 달리.”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 말씀을 제게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청염 때문이다.”
“예?”
“내가 꼭 알았으면 하는 태초의 기록이 남아 있거든.”
“태초의 기록이요?”
“그래.”
“한데 그걸 제게 왜?”
“네가 가진 신수.”
“……?”
귀모의 손가락질에 진무가 여의를 슥 쳐다본다.
“태초부터 존재했던 신수, 용의 아홉 자식 중 하나인 황룡은 너의 생각보다 많은 힘을 가지고 있다.”
“그, 그랬나요?”
“그래, 나나 옥황처럼 대를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존재해 왔으니까. 이 청염이라는 녀석처럼…….”
“…….”
“나는 그 신수가 청염의 기억을 깨워 태초의 기록을 알려 줄 것이라 믿는다. 물론, 그것은 단지 기록일 뿐 각성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이는 귀모의 이름으로 약속하지.”
“그럼, 여의를…… 달란 말씀이신가요? 굳이 왜 그걸 제게 허락받으시는 건지?”
“네가 이름을 주었지 않았더냐?”
“…….”
“그것은 곧 맹약이다. 그러니 소멸하는 한이 있어도 나에게 힘을 빌려주지 않을 터. 오직 너만이 명을 내릴 수 있다.”
“제가요?”
“그래. 만약 네가 나를 돕는다면, 자충의 주인인 청상이란 놈뿐 아니라 함께 온 모두를 살려 보내 주마. 어떠냐?”
의사 결정을 촉구하는 귀모의 말에, 진무는 여의를 다시금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새삼 다시 보인다. 여의, 정확히는 그 안에 봉인되어 있는 용 뭐시기…….
그런데 잠깐만?
이거 어째, 손에 쥔 게 여의가 아니라 칼자루인 느낌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