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594
64화
진무가 귀모와 여의를 번갈아 가며 빤히 쳐다봤다.
별안간 찾아온 기회.
구명줄.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다고 한다.
여의에 담긴 신수를 이용해 태고에서 이어져 온 기록을 살피는 일.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라고, 청염이 축융으로 각성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도 없을뿐더러 확인만 끝나면 천계로 가져가도 좋다고.
약속까지 했다. 무려 귀모의 이름까지 걸고서.
자자, 생각해 보자.
큰 화를 초래하지 않는다면, 승낙해야 한다.
다른 것도 아니고, 무사 귀환이 달려 있으니까.
그런데…… 어차피 들어줘야 한다면, 조금 더 이문을 남겨도 되지 않을까?
꼭 해 달라 떼쓰지는 못해도, 은근슬쩍 요구 조건을 더해 보는 것 정도는…….
“저기, 귀모님?”
“말하거라.”
“그, 이름까지 거셨으니 번복하지는 않으시겠지요?”
“나를 누구라 여기는 게냐?”
“…….”
“신이 실수는 하지만, 거짓을 말하진 않는다.”
“음, 그럼 제가 돕는 대신에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부탁?”
“예. 아주 사소한 부탁이랄까요?”
“…….”
귀모가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이 마당에도 조건을 달아?
당장에 목이 날아갈지도 모르는데?
언짢은 기색이 느껴지자 진무가 노련한 협상가라도 되는 양 재빨리 발을 뺐다.
“내키지 않으시면 말고요.”
“……일단 들어 보마.”
“그래 주시겠습니까?”
“말해 보라.”
“그, 대단한 것은 아니고…… 거창한 것도 아니고……. 제가 개인적으로 사타라는 마왕을 좀 봤으면 싶은데…….”
“사타를?”
“예.”
“어째서?”
“그가 가지고 있다는 업경에서 뭘 좀 지워도 되나 해서요.”
“…….”
조심스러운 물음에 귀모가 진무를 지그시 내려다봤다.
죽은 이의 삶을 기록하는 물건은 천계와 지계에 모두 존재한다.
다만 공적은 천계에, 과적은 지계에 적힌다.
사타의 업경은 죽은 이의 삶의 기록과 함께 그 여정 속에서 범한 과를 기록한 책이다.
진무가 그것을 모르지 않을 터이니, 목적은 누군가의 과를 지우고자 하는 것.
“혹, 처음부터 그것이 목적이었더냐?”
“예?”
“지계로 가라는 옥황의 명을 받은 것도, 협비를 쓰러뜨리고 난 뒤 도산옥을 차지하지 않고 곧바로 박피옥으로 간 것도.”
“……그것이.”
진무가 속마음을 들켰다는 듯 계면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벅벅 긁어 댔다.
하나, 귀모는 진작에 어렴풋이 그의 성격을 이해하고 있었다.
박피옥을 때려 부수는 짓을 잠시라도 멈추려 그와 연관되었던 지계 생명들의 삶을 살폈다.
그들의 삶을 연결해 하나로 모으고 진무를 엿보고 난 후, 그녀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사람을 귀히 여긴다는 것.
그가 품은 이해가 항시 옳은 것이 아니기에 갖은 충돌이 있었으나, 그 어느 순간에도 사람을 절대 허투루 취하고 버리지 않았다.
언행의 불일치 속 담긴 진심을, 똑똑하게 본 것이다.
“사타에게까지 가려 한 것이냐?”
“예, 뭐…… 제가 신력을 쓰지만 않았어도 그랬겠죠.”
“옥황의 명은 어쩌고?”
“겸사겸사……. 하다 보면…….”
“맹랑한 놈.”
“…….”
옥황의 명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아니, 정확히는 경중이 달랐을 것이다.
제 목적은 반드시 이루었을 것이고, 옥황의 명은 할 수 있다면 노력은 해 보는 정도로?
“좋다. 선심을 쓰는 김에 조금 더 써 주도록 하마.”
“예?”
놀라 되묻자 귀모가 진무의 발 앞에 무언가를 툭 던졌다.
작은 서책이었다.
“사타의 업경이다.”
“예? 이, 이것이……?”
진무가 얼떨떨한 눈으로 서책을 바라봤다.
이 작은 책자에…… 그 수많은 이들의 공과가 기록되어 있다고?
“책을 쥐고 네가 찾고자 하는 이의 기억을 떠올리거라. 하면 업경이 알아서 펼칠 것이니.”
“아!”
“필요하면, 바꾸고자 하는 내용을 찢어라. 하면 업경을 떠난 기록이 스스로 불타고, 과는 사라질 것이다.”
“그, 그래도 되는 겁니까?”
진무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하루에도 수천만 이상이 죽었다 되살아나는 지계다. 또 그중 얼마간은 아예 소멸하기도 한다. 몇몇 놈의 죽은 뒤 삶이 달라진들, 그게 뭐 그리 큰 문제겠느냐?”
“…….”
성격 참 시원시원하시다.
신이 되어서 하늘의 이치가 어쩌고, 형평성이 어쩌고 하면서 명진의 운명을 마음대로 못 한다고 발뺌하던 누구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시네.
확 그냥 이참에 진짜로 전향해 버려?
뭐, 그건 나중의 문제고.
일단!
명진, 명진, 명진…….
진무가 서책을 잡은 채 눈을 감고 스승, 명진을 떠올린다.
촤라락.
그러자 책장이 저절로 넘어가더니, 이내 명진의 모든 삶에 대한 기록이 펼쳐졌다.
아, 이리 살아오셨구나.
이리도 따스하게.
그러니 날 자식처럼 아끼고, 나아가 원수나 다름없는 혁련무강이라는 것을 알고도 용서하셨지.
마음 같아서는 찬찬히, 몇 번이고 그 삶을 정독하고 싶었다.
하지만, 찾아야 할 것이 명진뿐만은 아니지 않은가?
청우도 찾아야 하고…… 백표는 이미 천계 갈 날만 받았다고 했으니 이왕 만난 김에 황신과 이생도…….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잠깐만, 귀모가 몇 명 찢을 거냐고는 안 물어봤잖아?
갑자기 마음이 급해진 진무가 명진의 죄과가 적힌 부분을 쭉 찢어 냈다.
찌이이익, 화륵!
업경에서 떨어진 기록이 한순간에 불탔다.
다음은, 청우!
찌익, 화륵!
다음은 황신, 이생…….
찍, 화륵. 찍, 화륵.
진무의 손이 갑자기 빨라지기 시작했다.
눈감고 골똘히 생각하다가 찢고, 눈감고…… 찢고, 또 찢고.
“…….”
처음 몇 명까지는 셌다.
하지만 열 손가락이 훌쩍 넘어가도록 진무의 손이 멈출 생각을 하지 않자, 귀모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허허, 이놈아. 그리 많이 찢으면…….”
찍, 화륵, 찌이익, 화륵.
“…….”
지금 이 순간, 진무는 귀머거리였다.
바빠, 말 걸지 마. 한 개도 안 들려.
살면서 만난 인연들이 어디 한둘이냐고. 숨도 안 쉬고 찢어도 모자란다, 이 말이야.
기다려라, 이놈들아!
내 다 찢어 너희를 해방시켜 줄 것이다!
“그만!”
……찍, 화륵!
“이, 이놈이!”
대략 서른 명을 넘어가는 순간, 입을 딱 벌리고 부들부들 떨던 귀모가 황급히 손을 내저어 업경을 회수했다.
“이런 미친놈이 이게 어떤 물건인 줄 알고! 누가 그렇게 마구잡이로 찢어 대래?!”
“……헉, 헉헉.”
귀모의 호통이 들리지도 않는지, 진무의 시선은 오로지 업경에 박혀 있었다.
“제발, 몇 놈만, 몇 놈만 더…….”
시뻘게진 눈으로 중얼거리며 손을 버둥거리는 진무의 모습에 귀모가 업경을 소중하게 품에 안고 진무를 째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무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입맛을 쩍쩍 다실 뿐이었다.
망할 놈이 업경이 어떤 물건인 줄 알고…….
제때 멈췄기 망정이지, 고양이 같은 놈에게 어물전을 전부 털릴 뻔했잖아?
이를 갈며 진무를 째려보던 귀모의 입에서 문득 한숨이 흘러나왔다.
내버려 두었다면 제 기억에 있는 이들의 운명을 모조리 바꾸고도 남았을 놈이다.
말도 안 되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어쩌겠는가?
몇 명이라고 확정을 두지 않은 것이 자신의 실수인지라 야단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 이제 네 청을 들어주었으니. 이제 네가 나의 부탁을 들어줄 차례다.”
“몇 명만…… 어떻게 더 안 될까요?”
“……그냥 죽여 줄까?”
혹시나 하고 해 본 말에 섬뜩한 답이 돌아왔다. 진무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정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적극적으로 사양하겠습니다.”
그래, 뭐 그쯤 하면 되었다.
너무 욕심을 내면 화를 면하지 못하는 법.
그래도 제일 마지막에 찢은 것이 적생의 기록이었나?
그놈도 귀천령이 되었을 줄이야. 어쨌든 기록을 찢었으니 이제 천계로 돌아가면 만날 수 있겠지.
나머지들도…….
“제가 무엇을 하면 됩니까?”
“신수를 꺼내 보거라.”
“예.”
자신의 목적을 어느 정도 달성한 진무가 여의를 잡고 기운을 불어넣었다.
[여의, 현신하여 모습을 드러내라.]우우웅!
심중으로 외친 언령에 여의가 잘게 떨고, 이내 희뿌연 빛과 함께 빠져나온 기운이 거대한 형체로 화했다.
-쿠아아아아!
한차례 거친 포효를 통해 제 존재감을 드러낸 용이 넘실넘실 움직였다.
구름에 몸을 감추었으나 드러난 부분만으로도 포궁의 대지 곳곳에 그늘이 드리워질 정도로 거대했다.
“호오? 잿빛이라……. 진무 녀석의 기운이 영향을 미치는 것인가?”
귀모가 여의를 바라보며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처음엔 묵룡이었다가, 신력에는 금빛 서기를 머금더니만, 이제는 잿빛이라.
다만, 눈앞에 두고 보니 제 생각에 확신이 들었다.
자신보다 훨씬 더 기원에 가까운 힘이 아닌가?
“용이여, 이리 보니 반갑군. 나는 당대에 지계를 다스리는 귀모라네.”
격식을 갖춰 대우하는 귀모의 인사가 마음에 들었는지, 여의가 우렛소리를 내며 몸을 뒤틀어 귀모를 바라봤다.
-반갑소. 나는 용생칠자(龍生七子)의 맏이였으나 뱀의 길을 걸어 나락으로 떨어진 보잘것없는 존재라오.
여의의 목소리는 이전과 달리 근엄하였으나, 공손함 또한 가득했다.
당연하다. 아무리 태고에서 이어진 신수라고는 하나, 옥황과 귀모의 신분에 비할 바가 있겠는가?
“마성에 빠졌을 뿐, 용이 어찌 이무기 따위에 비하겠는가?”
-높은 평가에 감사하나, 이제는 그저 주인에게 이름을 부여받은 그대의 수호령 순조와 다를 바 없는 몸이오. 이제는 새로이 이름을 얻었으니 여의라 부르시오.
“뜻대로 이룬다(如意)라…… 제법 좋은 이름을 얻었군.”
-…….
대답하지 않는 여의를 올려다보던 귀모가 나지막이 부탁했다.
“이보게, 여의. 태고의 힘이 이어졌으며 새로운 이의 종속이 되어 나의 명이 닿지 않을 것이나, 혹 모습을 바꾸어 줄 순 없겠는가? 계속 올려다보려니 목이 아프다네.”
-…….
이번에도 답하지 않은 채, 여의가 커다랗고 흉포한 눈을 굴려 진무를 슬쩍 쳐다봤다.
허락을 요구하는 듯한 눈짓에 진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리다.
이윽고 답한 여의의 몸이 희뿌연 빛에 휩싸이자 세상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러곤 이내 번졌던 빛이 쑥 하니 한곳으로 빨려들어 진무의 옆에 내려섰다.
다부진 체격의 소년.
금빛으로 빛나는 머리칼은 어깨까지 내려 휘날리고, 눈썹 아래 가늘게 뜬 눈에는 회백색 눈동자가 구슬처럼 박혀 있었다.
열댓 살 먹은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변한 여의를 보며 귀모가 빙그레 웃었다.
역시, 용은 용인가?
아이의 모습이나 위축된 기색 없이 당당하다.
자신의 존재감이 그에게는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옥황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신수란 그러한 것이니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저 힘을 진무가 흡수하게 된다면?
……하지만 금세 너무 과한 생각이라 여기며 실소하고 말았다.
태고의 힘이다. 빌려 쓸 순 있어도 몸에 담을 수는 없다.
또한 한계가 있을 것이다. 어찌 한낱 선인이 신수의 힘을 오롯이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과하게 담는 순간 육체와 정신이 붕괴하고 말 것이다.
진무가 더없이 강해져 상제의 반열에 오른다고 해도, 그 힘의 한계는 명확하다.
여의가 신진철로 만든 봉에 귀속된 이상, 법구 이상의 역할은 하지 못할 것이다.
“부탁할 것이 있네.”
“…….”
귀모의 부드러운 어조에 여의가 진무를 힐끔거리곤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신이 이어진 터라 이미 알고 있소.”
“그러한가?”
“한데, 하나 물어도 되겠소?”
“말하게.”
“축융의 기억만 남은 불꽃에서 무엇을 읽어 내고저 함이오? 기억만으로는 그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할 것인데?”
“글쎄, 그저 호기심이라 여기시게.”
“음…….”
잠시 고민하던 여의가 이내 결정을 내리고, 청염이 담긴 화로를 향해 다가갔다.
진무가 허락한 일이니, 종속된 존재로서 그 명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딱히 큰 문제도 없겠지.
이미 대부분의 힘을 잃어버린 축융이 아닌가?
남은 것은 그저 기억일 뿐인 것을…….
스윽.
여의가 청염에 손을 올리자 꺼져 가던 불길이 기름이라도 부은 듯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화르르륵.
그리고 불길이 서서히 하나의 형체로 변했다.
우락부락한 거구.
하나 기억하던 과거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타오르나, 여전히 위태로운 불길.
이리저리 구멍이 뚫린 채 언제 꺼질지 모를 만큼 쇠약해진…… 과거의 힘을 잃고 서서히 죽어 가는 그.
여의의 회백색 눈동자가 아련히 과거와 조우했다.
“축융이여……. 오랜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