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598
68화
얼굴에 따스함이 느껴진다. 햇살이 내리쬐는 건가?
꽤 양지바른 곳에 있는 모양이다.
감은 눈꺼풀 안으로 뜨겁게 쏟아진 볕에 진무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 어?
어째서 이런 걸 생생하게 느끼고 있는 거지? 그때 분명, 축융의 폭주를 막지 못해서…… 설마, 소멸하지 않은 건가?
“……!”
살아 있음을 인지하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고개를 휘휘 돌려 보니 상처 하나 없는 몸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 옷은…….
흑암갑도 아니고, 검은 무복도 아니었다. 소경이 타는 선금의 깃털처럼 하얀, 백의(白衣).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째서…….
[일어났어?]“……?”
누군가 말을 걸어 왔다.
그러나 고개를 휘휘 돌린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뭘 찾아?]“……?”
말을 건 누군가, 아니 무언가.
귓가에 선명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였는데……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가까운 것 같기도, 한없이 멀기도 한 느낌이었다.
[혹시 용의 아들을 찾는 거라면 걱정 마. 지금 자고 있으니까. 푹 쉬다 일어나면 괜찮아질 거야.]용의 아들? 설마 여의를 말하는 건가?
[쇳덩이는 소멸해 버렸어. 불이 다 녹여 놔서.]말하는 것이 누구인지 알 순 없었지만, 뜻하는 바는 이해가 되었다.
다만 희한했다. 그저 목소리일 뿐인데 웃고 있는 표정이 연상되었다. 눈으로 본 것도 아닌데…….
“당신은 누구죠?”
진무는 허공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쾌활하고 가벼운 목소리였지만 왠지 모를 경외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예의가 바른데? 의외네. 그런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저를 알고 있는 건가요?”
[처음부터는 아니고. 네가 조화를 담았을 때부터?]조화를 담았다고?
내가? 언제?
[설마하니 신력과 마력을 합치는 미친 짓이 성공할 줄은 몰랐어.]아…….
한데 어찌 그때를 말하는 거지?
신마합일을 이룬 것은 교마와의 싸움이 한창이었을 때다. 옥황조차 지계의 일은 알 수 없다고 했는데…….
“그럼 이곳은 지계인가요?”
[지계? 아닌데?]“그럼?”
[부도(符都).]“부도……요?”
[그래.]진무의 눈이 의아하다는 듯 살짝 커졌다.
처음 들어 본 곳이다. 하늘의 뜻(天符)을 받드는 도읍이라니…….
“예? 그럼?”
[말하자면 별개인 셈이지.]“별개요?”
[그래. 음, 쉽게 설명하면…… 너희가 말하는 틈 속에 존재하는 곳이라고 해야 하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해하지 마. 어차피 내 설명을 들어도 이해할 수 없어.]목소리가 피식 웃는 것 같았다.
무시하는 것이 역력했지만, 조금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마치 해는 동쪽에서 떠.’라고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듯, 당연하단 생각만 들었다.
“한데 제가 어찌 이곳에 있는 겁니까? 저는 그때 분명…….”
축융의 폭주로 인한 소멸, 즉 영원한 안식을 맞이했다고 생각했는데.
[죽을 뻔했지. 용의 새끼가 아니었으면 정말 소멸했을 거야. 축융의 불꽃은 무엇보다 뜨겁거든……. 무슨 마음에선지 모르겠지만, 용의 새끼가 널 이곳으로 데려왔어. 축융에겐 내가 안식을 허락했고.]“……여의가요?”
[아, 지금은 그런 이름이지? 맞아, 그 녀석이 제 목숨을 걸고 널 여기로 데려온 거야. 아마 지금은 그 녀석밖에 할 수 없는 일일걸? 신수의 힘이 이어진 건 이제 그놈뿐이니까.]“…….”
대화를 나눌수록 이해는커녕 의아함만 더 커졌다.
다만, 태초부터 존재해 왔다던 용의 아들을 우습게 여기는 것을 보면 그보다 높은 신분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한데 어째서 여의가 이 부도라는 곳을 알고 있었을까?
[그 아비의 고향이야.]“예?”
목소리가 진무의 마음을 읽고 있는 것처럼 묻지도 않았는데 답해 왔다.
[모든 신수가 이곳에서 태어났거든.]“아!”
[다만, 자식에겐 허락되지 않은 곳이야.]“허락되지 않았다고요?”
[그래.]이상했다.
여의가 데려온 것은 맞는데 허락되지 않았다니?
[조화를 품었으니까.]“그게 무슨 말이죠?”
진무의 질문에 목소리가 잠시 침묵하더니, 짧게 혀를 찼다.
[쯧, 궁금한 게 많구나? 어차피 이해 못 한다니까.]“죄, 죄송합니다.”
[됐어, 어느 순간 갑자기 깨닫게 될 테니까. 어쨌든 설명은 해 줄게.]“…….”
[널 살리기 위해 희생하기로 마음먹은 순간, 돌아오는 것을 허락해 줬어.]“저를요? 어째서……?”
[넌 마고(麻姑)의 아들이니까.]마고? 그건 또 누구란 말인가?
좀처럼 알아듣기 힘든 말들뿐이었다.
[마고는 마고야.]“…….”
[태초의 조화. 하늘의 아버지이고 대지의 어머니이자, 이 세계의 주인.]“…….”
[코 고는 소리로 하늘과 땅을 뒤섞고, 기지개로 하늘을 밀어 올리지. 눈을 뜨면 밝고 감으면 어두워져 낮과 밤을 만들고, 등을 긁으면 그 고랑을 따라 산과 강이 생기기도 해.]역시나 모르겠다, 모르겠어.
[그냥 그런 거야. 이해하지 말고 받아들여.]“혹시 그, 그럼 창조신?”
[창조신? 그건 또 뭐야? 마고는 그냥 마고라니까?]“…….”
괜한 나무람만 듣게 된 진무가 아이처럼 입을 내밀며 삐죽거렸다.
대충 들어 보면 하늘과 땅, 낮과 밤, 산과 강…… 창조신 맞구만.
어쨌든 절대신이라 불리는 옥황이나 귀모보다 훨씬 더 뛰어난 존재라는 거 아닌가?
그들도 결국은 대를 이어 가며 존재해 왔을 뿐, 영원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건 그렇고, 목소리는 분명 자신을 마고의 아들이라 했다.
왜?
혁련무강일 때의 부모는 갓난쟁이를 버린 비정한 인간들이었고, 진무일 때의 부모는 비명횡사한 화전민이었는데?
[조화를 가진 뒤 운명이 바뀐 거야.]“예?”
[이곳은 태초의 세계이자 마고가 잠든 곳이거든. 조화의 세계랄까?]“…….”
[사실 원래의 넌 그냥 자손이었지. 하지만 조화를 깨달은 순간 운명이 바뀐 거야.]“…….”
[이어진 거지. 오래전엔 이곳에도 그들이 많았어. 마고가 세상에 스며 조화 속으로 돌아간 뒤에 태어난 녀석들.]“…….”
[나의 일부를 떼어 밖으로 나가 뿌렸어. 아들들은 죽고, 그 아들에 아들, 또 그 아들이 태어났지. 그렇게 기억은 옅어지고, 힘을 잃은 채 평범해졌어. 그게 자손이야.]“아…….”
이제야 겨우 조금씩 이해가 되었다.
“그들이…… 인간인가요?”
[맞아, 그리 불리게 되었지.]“그럼 천계와 지계는?”
[수많은 자손 중에 조화의 일부를 깨달은 녀석들.]“깨달아요?”
[그래, 조화에서 밝은 것을 깨달은 녀석들은 밝은 곳에, 어두운 것을 깨달은 녀석들은 어두운 곳에……. 그렇게 나누어진 거야, 너희의 세계는.]“……그렇군요. 삼계가 그렇게 만들어진 거군요.”
[맞아. 그런데 서로 반대되는 힘을 가진 놈들인지라 연일 싸움질만 해 대더라고. 뭐 나완 상관없지만, 마고는 아니었던 모양이야.]“예?”
[어느 날 생겨났어, 너희가 신수라고 부르는 녀석들이.]“…….”
[그러곤 세상으로 나가 관여하기 시작했지. 중립자로서, 균형을 유지하는 역할로서. 그리고 그 역할을 다하고 나서 세상에 스몄어. 원래 그런 운명으로 태어난 녀석들이거든. 그들 덕에 세상이 셋으로 나뉜 채 평안해졌지.]진무는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옥황의 말을 떠올렸다.
“혹시 현무라는 신수도 있나요?”
[현무?]“예, 천계의 옥황께서 제 운명이 그곳에 이어져 있다고…….”
[풉! 멍청한 옥황 녀석이 뭘 알아? 선이니 밝음이 최고인 줄 아는 편협한 녀석인걸?]“그, 그런가요?”
목소리의 신랄한 평가에 진무가 머쓱하게 웃고 말았다.
옥황을 그리 평가할 줄이야.
[니들이 말하는 옥황도 귀모도, 결국은 한쪽만 깨달은 반쪽짜리에 불과해. 불완전하지.]불완전하다라…… 하긴 본인도 실수가 있다고 인정하긴 했었으니까.
[그 녀석들은 아무것도 몰라. 지들이 원래부터 존재해 온 줄 알고 있을걸? 그러니 너를 고작 현무 정도의 운명으로 판단한 거지.]“그럼, 그 모두의 기원이 인간이라는 건가요?”
[맞아. 힘을 잃긴 했지만, 고루 가진 것은 그들뿐이지. 선택권이 있거든. 밝은 곳으로 갈지, 어두운 곳으로 갈지. 인간으로 살아 봐서 잘 알잖아?]“…….”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았다.
정사마의 구분, 혹은 선악의 구분 같은 것들. 결국은 그 시작점의 선택을 어찌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또한 천계와 지계는 결국 인계의 자원들로 유지된다.
육신의 틀을 벗고 영(靈)으로 돌아간 이들이 선악의 구분에 따라 채워지고, 그중 보다 많이 깨달은 놈들이 신이 되는 거고……. 그러나 결국은 모두가 인간에서 출발한 것이다.
“저기, 그런데 옥황과 귀모는 원래부터 존재한 자들이 맞지 않습니까?”
[맞아.]“그럼…….”
[이치를 변화시킨 거지.]“예?”
[스스로를 신이라고 믿으니까.]“…….”
[자기 복제를 하는 거지. 식물처럼 씨앗을 만들고, 소멸과 동시에 그 씨앗이 태어나는 식으로. 하지만 같은 건 없어, 조금씩 변하니까. 그들은 그렇게 만들어진 존재야. 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거지, 기원이 어떠했는지.]“음, 그럼 이제 귀모도 알게 된 건가요? 그 기원에 대해?”
[귀모가? 큭큭, 알 리가 없지.]“예? 하지만 그녀는 분명 청염, 아니 축융의 잔재에서 태초의 기록을…….”
“거짓이라고요?”
[당연하지. 고작 축융 따위가 어찌 태초를 알겠어? 나도 정확하게는 알지 못하는걸.]“…….”
[녀석도 결국은 자손에 불과했어, 그저 달리 깨달았던 녀석이지. 옥황이나 귀모와는 다르게 좀 더 태초에 근접하고자 했기에 연구를 좀 했겠지. 멍청한 녀석, 고작 엿본 걸로 조화를 혼돈으로 여기다니.]하염없이 비웃는 목소리와의 문답을 통해, 진무의 의문은 조금씩 해소되어 갔다.
진실은 여전히 모호하지만, 그 역시 축융처럼 엿본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아니, 보다 많은 것들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그것을 깨닫는 순간, 마치 또 다른 눈이 뜨인 것처럼 주변이 훤하게 비쳤다.
밝음이라 여겼던 것은 밝음도 어둠도 아니었다. 마고가 그러했다는 것처럼 눈을 뜨면 낮이 된 듯하고, 감으면 밤이 된 듯했다.
결국은 인지의 문제일 뿐이다.
또한 줄지어 늘어진 산과 드넓은 들, 강…… 장엄해 보이는 자연 위로 거대한 형체가 어렴풋이 겹쳐 보였다.
사람인지 짐승인지 분별해 낼 수는 없지만, 어미의 품처럼 포근했다.
세계는 곧 마고 자체였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말해 오는 목소리의 정체는, 어디까지 가지를 뻗고 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거목(巨木)이었다.
[내가 보이나 보네?]“그러네요.”
보인다.
마음이 차분해지고 목소리는 담담해진다. 기분이 그 어느 때보다 편안했다.
그리고 해야 할 일이 생각났다.
그냥 그랬다. 저절로 깨달아졌다고 해야 하나?
[……갈 생각이지?]“아마도…….”
[그냥 쉬지? 이젠 상관없잖아?]“결국은 저로 인해 생긴 문제니까요.”
[말도 안 돼. 그건 귀모 때문이지 너 때문이 아니야.]토라진 듯한 거목의 목소리에 진무는 그저 빙그레 웃었다.
[돌아올 수 없을 거야.]“그런 것 같네요.”
[쉽지도 않을걸? 지금 막 조화에 대해 느낀 모양이지만, 그 정도론 부족해. 그들은 생각보다 강하다고.]“하지만 되돌려 놔야죠.”
[그걸 왜 니가 해? 마고가 두고 보겠어? 곧 신수들이 태어날 거야.]“압니다.”
[근데 왜 가?]“오래 걸릴 테니까요.”
[고작 대화를 나누는 한순간인데?]“그 한순간에 인계는 백 년의 고통을 경험하고 있고, 천계는 천 년이 흘렀죠.”
[뭔 상관이야?]“그대의 말처럼 마고의 아들이라서일지도 모르겠네요.”
살짝 벌어진 진무의 입술 새로 송곳니가 반짝였다.
[맘대로 해라. 그리고 이건 선물이야.]“……?”
툭 떨어진 것은 나뭇가지였다. 거목의 가지.
[원체 편협한 놈들이라 말을 안 들을 거야. 줘 패려면 몽둥이가 있어야지. 완전한 조화를 깨닫기 전까진 도움이 될 거야. 널 살린 용 새끼도 거기 넣어 뒀어.]“감사합니다.”
[젠장, 모처럼 말벗이 생겨서 좋았는데……. 그만 가.]“예.”
진무가 허리를 숙여 나뭇가지를 움켜쥐었다.
새로운 여의.
그러곤 거목에 손을 얹었다.
스으으으.
어디선가 불어온 한 줄기 바람에, 진무의 몸이 쓸리듯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