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599
69화
경계가 무너지고 지계의 틈이 열린 뒤, 수만 종의 마귀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닥치는 대로 사람을 잡아먹은 그들은 인두겁을 뒤집어쓴 채 사람들 속에 스몄다. 선악을 고루 가진 그들의 마음에 욕망의 씨앗을 심고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여 타락시켰다.
악은 선보다 욕망에 더 충실하기에 빠르게 전염되어 갔다. 가진 자는 더 가지고자 하는 탐욕에 취해 약자를 병탄(倂呑)하고, 빼앗긴 자는 원한과 복수심에 물들어 독기를 품었다.
선마저 버티지 못하고 악으로 변하니 세상은 갈수록 흉흉해져 갔다.
도처에 살육이 자행된다.
자식이 아비를 찌르고 아비가 자식의 목을 조르며, 길 가는 사람들끼리 서로 물어뜯고 벤다.
불타고 무너진다.
선한 자가 설 곳은 없다.
마귀는 인두겁을 쓴 사람이 되었고, 사람은 악귀와 다를 바가 없었다.
물론 그 같은 세상에 통탄한 뜻있는 자들이 나섰으나, 사람이 어찌 마귀의 힘에 비할까?
그들의 목이 들판을 뒹굴고, 시신은 짐승들의 먹이로 뿌려지니 현세는 지옥과 다를 바가 없었다.
천계의 선인들이 강림하여 인계를 돕자, 인두겁을 쓰고 있던 지계의 요귀들이 비로소 본모습을 드러냈다.
이른바 신마 전쟁의 시작이었다.
청명하던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졌다. 산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며 초목이 불타오르니, 매일 세상은 해가 아닌 화광으로 밝았다.
폭우에 강이 범람해 홍수가 되었고, 거대한 도시가 물길에 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해일이 일어나 연안을 덮치고 지형이 뒤바뀌었다. 이어진 불볕더위에 땅이 메마르고 대기근에 전염병마저 창궐했다.
인간들의 눈에 그들의 싸움은 분노한 자연이 내리는 재앙 같았다.
수십 년간 이어진 싸움의 끝은 극명했다. 지계의 마귀들은 끝도 없이 밀려들었고, 숫자가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던 천계의 힘은 내내 약화되었다.
또한 악에 물들어 마귀의 힘을 깨우친 인간들마저 지계의 편에 서게 되었다.
결국 천계는 인계와 통하는 틈새를 모두 막았다.
대부분이 악에 물들어 버린 인계를 구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천계를 지키기 위해 수성(守城)을 시작한 것이다.
……버린 것이다.
다만 그런데도 여전히 남은 이들이 있었다.
하늘의 기운을 머금은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인계를 보듬어 온 신령(神靈)들이었다.
보다 인간에게 친화적이었던 그들은 퇴각을 결정한 옥황의 뜻을 따르지 않고 결사 항전을 택했다.
아직 악에 물들지 않은 인간들을 안타까워했기 때문이다. 그들만이라도 지켜야 한다 여겼기 때문이다.
하나 이미 지원이 끊긴 뒤였다. 그들은 점차 무력해졌다.
마귀들의 공격에 하나둘 무너져 갔다. 가차 없이 유린당하고, 안식조차 할 수 없이 소멸당해 사라졌다.
남은 곳은 몇몇. 그마저도 이젠 배부른 고양이에게 포위된 쥐새끼처럼 조롱거리밖에 되지 못했다.
* * *
중원 동북쪽의 어느 산자락.
쉬이익! 쾅!
“끄아악!”
비명과 함께 세차게 날아간 사내가 아름드리나무에 부딪혀 쓰러진다.
“허억, 허억…… 승냥이 같은 놈들.”
희끗희끗했던 수염을 붉은 피로 물들인 노인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제 앞을 가득 채운 적들을 노려봤다.
짐승 털로 만든 옷에 투박한 박도를 든 자들. 영락없는 산적 떼였다.
하지만 무언가에 홀린 듯 붉은빛이 스민 그 눈동자.
그들은 더는 인간이 아니다. 마귀에 현혹되어 인성을 잃어버린 꼭두각시들에 지나지 않는다.
필시 산적들을 현혹한 마귀가 인두겁을 쓰고 함께 있을 것이다. 이 싸움을 끝내자면 그놈을 찾아야 한다.
노인의 눈매가 날카롭게 산적 떼를 훑을 때였다.
“아니, 이게 누구신가?”
“……?”
산적들의 뒤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노인이 흠칫 놀라 시선을 옮겼다.
“노방노인(路傍老人)께서 어찌 거처를 떠나 예까지 행차이신가?”
“…….”
모습을 드러낸 목소리의 주인은 거대한 월도를 어깨에 둘러멘 장대한 체구의 사내였다.
누가 봐도 산적 두령쯤으로 보였지만, 노인은 그가 자신이 찾던 마귀임을 단번에 깨달았다. 그에게서 짙게 풍기는 독한 마력의 향 때문이었다.
한데 놈이 어찌 자신의 정체를 알아보는 걸까?
“얌전히 거처나 지키고 있으면 내 곧 찾아갈 것인데, 뭐 하러 이 먼 곳까지 나들이를 왔나 그래? 혹시 그것들을 지켜 주려고 그러는 건가?”
“…….”
오랫동안 일대의 산맥을 다스려 온 신령, 노방노인 구조(救助)는 마귀의 말에 제 뒤를 힐끗거렸다.
산적들에게 쫓기다 자신이 끼어들어 겨우 목숨을 부지한 이들…… 아마 근방의 산자락을 일구는 화전민들일 것이다.
산적들에게 당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원한이 골수까지 뻗쳐 사람도 귀신도 아닌 존재가 될 것이 뻔했다.
“괜한 참견 말고, 그들을 내주고 그만 돌아가게. 그럼 얼마간이라도 목숨은 부지할 것 아닌가?”
“닥치거라, 마귀 놈!”
능글거리며 조롱하는 마귀에게 분노한 구조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호통치자 음파가 그 전방으로 거칠게 뻗어 나갔다.
쩌정!
“크윽!”
“끄아악!”
형체 없는 음파가 매섭게 스치자 나무가 세차게 흔들리고, 산적들이 귀를 감싸 쥐며 고통스러워했다. 몇몇 산적의 눈동자에는 붉은빛이 사라지고 맑은 빛이 감돌았다.
“으으…….”
아직 정신이 온전히 돌아오지 않은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들의 모습에 마귀가 빙긋 웃었다.
“호오? 제법이군, 고작 목소리에 담긴 힘으로 내 권속들에게 이어진 힘을 무력화하다니. 하나 어림도 없다!”
스아아아!
싸늘한 웃음과 함께 마귀의 몸이 변했다.
오래지 않아 인두겁을 찢고 나온 그것은 시커먼 털에 회색 줄무늬, 불타는 듯한 시뻘건 눈알을 가진 거대한 범이었다.
“……네, 네놈은?”
구조는 대번에 그를 알아보고 대경했다.
산군(山君) 금혼이었다. 인근 산을 지키던 신령의…….
“네놈 설마! 신령을 잡아먹은 것이냐!”
-큭! 큭큭큭.
제 모습을 완전히 드러낸 금혼이 꼬리를 흔들며 웃었다.
“크아악!”
퍼져 나간 호독(虎毒)에 스친 산적들의 눈이 다시금 선명한 붉은 안광을 머금었다.
-먹었지. 하나 먹은 것이 어디 신령 하나뿐일까? 사람도 먹고, 짐승도 먹었다. 숱하게 잡아먹어 나는 드디어 이올(彛兀)을 이루었다.
“아아…….”
구조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올……이라니.
범은 신령이 될 재목이다. 신령의 아래에서 영성을 쌓다 보면 그 도가 하늘에 닿아 등선에 이른다.
하나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육식을 하면 짐승의 거죽을 벗어나지 못한다.
또한 사람을 먹으면 굴각(屈閣)이 되어 귀기에 침식당한다. 흔히 말하는 창귀가 몸에 들러붙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굴각보다 더한 이올이라니……. 제가 모시던 신령을 포함하여 수백은 족히 잡아먹었다는 말이 아닌가?
-큭, 차라리 잘되었다. 듣자니 곧 지계의 왕들이 인계로 온다 하던데. 내 이올만으로는 부족하다 여겼지. 이참에 네놈을 잡아먹고 그분들을 기다릴 것이다.
“…….”
침까지 질질 흘려 대며 혀를 날름거리던 금혼의 눈이 혈광을 토하자 구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설마하니 산군마저 마에 침식당할 줄이야.
하나 어쩌겠는가? 이미 세상이 그들의 것이나 다름없는 것을…….
스윽.
통탄을 금치 못한 구조가 소매를 떨쳐 손을 드러내자 영롱한 선기가 그의 몸 전체에 휘감기듯 피어올랐다.
“오냐. 네놈의 뜻이 그러하니 내 어찌 버려둘까? 내 반드시 네 악행을 끊어 죽어 간 이들의 넋을 위로할 것이다!”
비장하게 외친 구조가 섬광처럼 쏘아져 나가자, 금혼이 거대한 몸을 벌떡 세우며 앞발을 휘둘렀다.
쩌어어엉!
거친 폭음과 함께 일어난 충격파가 사방을 휩쓸었다.
“크아악!”
충격파에 휩쓸린 산적들이 갈가리 찢겨 나갔다.
후우웅!
하지만 금혼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앞발을 재차 매섭게 휘둘렀다.
떠어어엉!
“크윽!”
금혼은 산적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으나, 구조는 사람들을 방치할 수 없었다. 그 차이는 극명했다.
힘 일부를 화전민을 지키기 위해 사용한 구조의 가슴팍에 기다란 발톱 자국이 생겼다.
-멍청한 자식! 니들은 그래서 안 되는 거야!
“……!”
금혼이 거친 포효로 구조를 비웃었다.
가가가각!
마귀가 되어 버린 산군의 힘은 신령을 압도했다.
뾰족한 이빨이 어깨를 물어뜯고, 날카로운 발톱이 몸을 찢었다. 구조의 몸은 점차 피투성이로 변했다.
전력을 다한다면 금혼과 능히 대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을 저버릴 수 없었다. 애초에 어째서 천계로 돌아가지 않고 인계에 남아 지키고자 했던가?
“하아압!”
이 자리에서 소멸하더라도 이들을 구하리라. 구조가 금혼을 밀어 내려 온 힘을 다해 손을 휘저었다.
후우웅!
구조의 신력이 매서운 폭풍이 되어 금혼을 향해 날아갔다.
일단 놈을 밀어 내고, 사람들부터 다른 곳으로 옮겨야…….
“……!?”
그 순간 금혼이 날쌔게 움직여 바람을 피하곤, 구조가 지키던 사람들을 향해 날아갔다.
“아, 안 돼!”
다급해진 구조가 뛰어드는 순간, 금혼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사람들을 덮쳐 가던 금혼이 방향을 바꾸었다. 마치 구조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앞발을 휘둘러 세상을 찢을 기세로 할퀴었다.
세차게 튕겨 나가 바닥에 처박혀 버린 구조가 몸을 세우지도 못한 채 헐떡였다.
-큭큭큭, 하여간 네놈들은 어찌 그리 한결같으냐?
“……?”
-내 주인도 그랬어. 사람들을 지키려다가 네놈과 똑같은 꼴이 되었지.
금혼의 말에 구조가 어금니를 깨물었다.
유인……. 내가 사람들을 지킬 것이라 여기고 일부러 함정을 팠나.
-큭큭, 보아하니 더 움직이지도 못하겠구나.
“…….”
-하나 음식에도 순서가 있지. 맛난 건 원래 천천히 먹어야 제맛이니까.
“……이, 이놈! 안 된다!”
사람들을 먹으려고 달려가는 금혼을 향해 구조가 다급히 손을 뻗으며 외쳤다.
하나 힘이 없었다. 이미 온몸이 금혼의 발톱에 너덜너덜해져 버리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순간.
한순간 눈이 멀어 버릴 빛과 함께 세상이 환하게 밝아졌다.
-이, 이런 빌어먹을 놈이!
구조의 마지막 발악이라 여긴 금혼이 사람들이 있던 방향으로 뛰어들어 마구잡이로 할퀴었다.
하나 걸리는 느낌이 없다. 허공을 할퀸 듯했다.
-크르르르…….
짜증이 가득 섞인 울음이 숲을 진하게 흔들고, 세상을 환하게 밝히던 빛이 허상이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눈처럼 새하얀 옷을 입은 이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사람들과 함께 나타났다.
-……?
묶지 않은 머리카락이 산들바람에 길게 휘날렸다.
금혼은 황당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구조의 힘이 아니다? 하면 또 다른 신령?
아니다.
몽둥이처럼 보이는 나뭇가지를 들고 있기는 하지만, 앳되디앳된 청년의 모습이 아닌가?
신령이라면 응당 멋들어지게 수염을 늘어뜨린 노인의 모습이라야 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듣기로 천계에서 정한 외양이라고 했었다.
와중에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는다. 신마의 어느 곳에도 적을 두지 않았다는 것인데…….
가능한 일인가? 그런 자가 자신의 공격을 피한다는 것이?
경계심을 잔뜩 품은 금혼이 노려보던 그때, 사내가 몽둥이를 어깨에 턱 걸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무심한 눈으로 금혼을 지그시 바라보던 그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뭐야? 이 시커먼 괭이 새끼는?”
“…….”
금혼과 구조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만 끔벅였다.
“아, 미안. 개였냐?”
그 모습에 머리를 벅벅 긁어 대며 씩 웃는 사내는, 막 인계로 돌아온 진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