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607
77화
규사의 죽음 이후 무당산에 대한 마귀들의 공격이 멈췄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진무가 해검지에 심은 신목의 가지가 비로소 그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생명의 기운.
조화의 힘이 그 영향력을 사방으로 퍼트리자 잿빛 땅에 새싹이 움튼다.
대지에 초록빛이 번지고 앙상했던 나뭇가지에는 잎사귀들이 아우성치듯 돋아나 이내 숲을 이루니, 산이 싱그러운 색으로 물들었다.
백 년 만에 찾아온 그리운 푸르름이었다.
* * *
“저곳인가?”
“그렇습니다.”
“음…….”
잿빛 대지와 푸른 무당산과의 경계.
규사의 죽음에 대한 이유를 알아 오라는 귀모의 명을 따라 막 인계에 도착한 협비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눈앞의 녹음을 응시했다.
무당산.
규사의 마지막 흔적은 그곳에서 끊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마가 인계를 점령한 지 백 년이나 흘렀음에도 아직까지 녹음을 드리운 산이라니? 그리고 산을 아우르는 저 생소한 기운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자신보다 앞서 세상에 나와 있던 귀들의 말로는 무당산이 신령지(神靈地) 중 하나라고 했다.
하면 응당 신력이 느껴져야 했다. 산이 가진 힘이 온몸의 신경을 긁었어야 했다. 당장에 잿더미로 만들고픈 충동이 느껴졌어야 했다.
한데…… 포근했다.
치열함 속에서 살아온 자신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듯한 푸르름이라니, 몸서리칠 정도로 이상한 기분이었다.
마음마저 평안케 하는 포근함을 마주하니 본능이 요동친다.
다가서지 말라고, 그리 말하고 있다.
문득 저 포근함은 이리 와 쉬라며 벌레를 유혹하는 식충초(食蟲草)의 손짓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들겨 보고 나서 나아가도 나쁠 것은 없으니…….
협비는 의심 어린 눈초리로 산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
스으으.
검은 연기의 형상으로 뿜어진 마력이 바람에 실려 산을 향해 흘러갔다.
“……이, 이건!?”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력이 산에 닿는 순간 쑥 빨려든 것처럼 스미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말이 안 된다. 신령지라면 자신의 마력을 밀어 냈어야 마땅한데?
“역시…… 귀모님의 말씀대로 무언가 있구나. 무언가가 규사를 소멸시킨 것이야.”
의심이 깊어진다.
하나 직접 경험했음에도 막상 머리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체 저 산이 무엇이길래?
막 마왕이 된 규사라지만, 천계의 상제가 온다 해도 쉽게 소멸시킬 수 없을 만큼 강하다.
그럼 저 산의 무언가는 상제보다 강한 존재라는 것인가?
쉽사리 발을 들이지 못한 채, 협비는 깊어만 가는 고민에 갈증을 느끼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
순간 협비는 놀람에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설마 내가 긴장하고 있단 말인가? 저 빌어먹을 산속에 살고 있을지 모를 미지(未知)의 존재에 대한 불안감으로?
“제기랄……. 마음에 들지 않는군. 산 따위가…….”
무심코 느껴 버린 감정을 애써 부정하듯 낮게 투덜거린 협비가 무당산을 매섭게 노려봤다.
하나 무턱대고 다가설 순 없었다. 지금 그가 가장 우선해야 할 임무는 저 거슬리는 산을 허무는 것이 아니라 규사가 소멸한 원인을 찾아내는 것이기에.
만약 산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숨어 있다면…… 놈부터 불러내는 것이 먼저다.
“설도.”
“예, 옥주님.”
협비의 부름에 휘하의 귀장 설도가 공손히 대답했다.
“좌익을 이끌고 산을 공격한다.”
“예!”
나지막한 명에 설도가 살기 어린 눈빛을 발하며 끝이 꼬챙이처럼 휘어진 칼 모양을 한 자신의 법구를 소환했다.
“가자!”
“크아아아!”
설도의 명령과 함께 포위망의 좌익이 해일처럼 산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내달리는 발소리가 지축을 뒤흔든다. 수천에 달하는 마귀들이 잿빛 대지를 검게 물들이며 달리는 모습은 소름 끼칠 정도의 장관이었다.
터어엉!
“……?”
협비는 산 인근에서 벌어진 상황에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어이가 없었다.
좀 전엔 내 마력을 흡수하더니, 이번엔 튕겨 내?
전력으로 달렸던 마귀들이 생각지도 못한 벽에 부딪혀 나동그라지고, 이내 좌익의 선두 대열이 볼썽사납게 흐트러졌다.
잿빛과 녹음의 경계점.
마치 그곳에 산을 감싸고 있는 보이지 않는 막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텅! 터어엉!
후열이 넘어진 이들을 뛰어넘으며 달려들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무언가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마왕인 협비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그 무언가의 벽이.
“이런 머저리 같은 것들! 비켜라! 내가 직접 길을 열 것이다!”
화가 잔뜩 난 귀장 설도가 높이 솟구쳐 오르며 휘어진 칼을 세차게 휘둘렀다.
슈아아악! 쩌어어엉!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마력이 가득 스몄던 칼날이 보기 좋게 튕겨 나왔다.
“이, 이런 망할! 하압!”
쩡! 쩌정! 쩡!
화가 치민 설도가 쉼 없이 칼을 휘둘러 댔지만, 막은 철옹성이라도 되는 양 좀처럼 길을 내주지 않았다.
“헉, 헉…….”
수백 차례를 넘게 칼을 휘두른 설도가 지친 듯 거친 숨을 토했다.
도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소로며 나무 하나, 잎사귀 하나마저 선명하게 보이는 판에 정작 그들을 막고 있는 무언가는 보이지 않으니 달리 수가 없었다.
“이런 쌍!”
급기야 설도가 법구를 양손으로 움켜쥐곤 자신의 마력을 모조리 쏟아부었다.
“흐아압!”
까드드득!
“……!”
순간 협비의 눈이 커졌다.
효과가 있었다.
설도의 법구가 막에 부딪히는 순간, 허공에 생겨난 투명한 균열을 똑똑히 봤다.
균열이 생겼다는 것은…… 부술 수도 있다는 뜻!
“할단!”
“예!”
협비의 생각을 읽었는지, 힘차게 답한 할단이 곧바로 휘하에 명을 내렸다.
“귀장들은 나를 따르라! 막을 부순다!”
할단과 함께 도산옥의 귀장들이 설도를 돕기 위해 몸을 날렸다.
그런데 그 순간.
“머, 멈춰라!”
“……?”
협비가 별안간 내달리는 귀장들을 다급히 멈춰 세웠다.
귀장들도, 앞서 공격한 설도와 좌익의 마귀들도 고개를 돌려 의아한 듯 협비를 바라봤다.
하지만 협비의 시선은 경계점의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투명한 막이 일으킨 변화.
……꿀렁거렸다.
그리고.
쑤욱.
일단의 무리가 막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대략 서른 정도의 숫자.
그들을 보는 순간 짜증이 확 치미는 것을 보면 천계 놈들이 분명했다. 아마도 무당산에 남았다는 신령들이겠지.
그런데.
“망할 새끼들이 용무가 있으면 부르면 될 것이지, 왜 자꾸 두들기고 지랄이야! 까딱하면 부서질 뻔했네!”
맨 앞에 서 있던 백의 차림의 신령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
꽤 멀리 떨어져 있었음에도 똑똑히 들릴 정도로 쩌렁쩌렁하게 짜증을 부린 그가 벅벅 긁어 댄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묶어 정리했다.
묘한 느낌이 드는 기운이다. 이걸 무슨 기운이라고 해야 하지?
신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도 아닌…….
그래, 산! 산이다.
놈의 기운은 눈앞에 있는 녹음 진 산과 닮아 있었다. 무척이나 포근하지만, 절대로 다가서서는 안 될 듯한…….
순간 협비는 제 손을 내려다봤다.
떠, 떨고 있다고? 내가?
이게 대체?
고개를 번쩍 쳐든 그가 커다래진 눈으로 백의 사내를 세심하게 살폈다.
무언가 익숙하다. 분명 본 적이 있는 듯한데, 어디서 봤을까?
마왕인 자신이 인계에 머무는 신령 따위를 봤던 적은 없을 터다. 인간은 더더욱 본 적이 없을 것이고…… 그런데 왜 익숙한 거지?
고민을 거듭하던 그때, 머리를 꽉 묶고 비로소 얼굴을 완전히 드러낸 백의 신령과 눈이 딱 마주쳤다.
꽤 먼 거리.
하지만 놈은 분명 자신을 보고 있었다.
“얼라리여? 이게 누구야? 협비 아니야?”
백의 신령, 진무가 무척이나 반가운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안 그래도 하나씩 찾아가려 했는데, 직접 왕림까지 해 주셨으니 어찌 반갑지 않을까?
막 신목에게 지게를 꽉 채울 정도로 많은 가지를 얻어 와서 열심히 깎고 있던 참이었다.
체면이 있지 막대기를 들고 싸울 수는 없지 않은가? 최소한 목검은 돼야지. 무당답게 태극 문양까지 섬세하게 새겨 주고 말이야.
“버릇없는 신령 나부랭이가! 마왕님의 존함을 함부로 입에 담다니!”
“……?”
근처에 있던 귀장 설도가 분기탱천해 거친 마력을 뿜어냈다. 진무는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로 씩씩거리는 그를 보며 뚱하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새끼 참…… 몸에 화가 많은가? 뭘 그딴 걸로 소리를 지르는 거지?
칼처럼 생긴 법구에 마력을 가득 담아 넣고 있지만, 너무 하찮게 느껴져서…… 상대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아, 저런 것까지 내가 일일이 상대해야 하나?”
들으란 듯 내뱉는 혼잣말에 곁에 있던 청상이 피식 웃으며 목검을 꺼내 들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아, 그럴래?”
“맡겨 두십시오. 안 그래도 사숙께서 내리신 새로운 검을 사용해보고 싶던 참입니다.”
“응, 그래, 그럼.”
진무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청상이 무표정하게 설도를 향해 목검을 겨눴다.
“무당 신령, 청상이다.”
“……뭐?”
“죄 없는 인계를 공격한 그대들은 화적 패와 다를 바가 없는 바, 검에 사정을 두지 않겠다.”
청상의 몸에서 피어오른 싸늘한 살기가 검을 타고 사방으로 퍼졌다.
선인이란 놈이 저런 살기라니…….
아, 아니지. 저놈은 과거에도 화적 떼 비스무리한 놈들만 보면 눈이 돌아갔었던 것 같다.
하긴 뭐, 다를 것도 없네. 아무 죄도 없는 이들을 괴롭히는 것은.
“이런 미친 신령 놈이 주제도 모르고!”
청상의 당당함을 오만함으로 느낀 설도가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달려들었다.
마력을 잔뜩 머금은 검이 청상을 단숨에 쪼갤 듯 허공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쯧쯧, 귀장 나부랭이시라 그런지 보는 눈이 없네.”
강맹한 기세로 쇄도하는 검을 심드렁히 보던 진무가 가볍게 혀를 찼다.
주제를 모르는 건 니놈이지.
신령 행세나 하고 있지만, 우리 청상이는 이미 천계 두장군에 필적하는 전투 능력과 신력을 지녔거든?
전투 능력만 해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데, 심지어 손에 들린 건 무려 조화의 힘을 머금은 신목의 가지라 이거야.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태극 조화검?
“……호오!”
이름이 나쁘지 않다.
진무가 자신의 작명 실력에 감탄하며 손뼉을 칠 때였다.
짝!
동시에 청상의 태극 조화검이 부드럽게 휘었다.
터어억!
“……!”
간결한 일 합.
목검이 설도의 법구를 스치듯 지나 그의 몸을 베고 지나갔다.
필경 목검인데…….
스르르.
설도의 허리가 정확히 반으로 베이고, 이어 베인 자리가 버썩 마른 흙더미처럼 부서져 나갔다.
“이, 이게 무슨…….”
마지막까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하지 못한 채 한 줌 재가 되어 사라진 설도의 최후에 화들짝 놀란 마귀들이 훌쩍 거리를 벌렸다.
그 모습을 보며, 진무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음, 역시 내 새끼.”
조화의 힘을 품어 신마를 아우르는 신목의 가지로 만든 검이라곤 해도, 일격에 귀장을 날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데 그걸 해내네.
“보자, 이만하면 효과도 충분히 입증이 됐고.”
신목을 위협해 뜯어…… 아니 얻어 온 보람이 있었다.
무당에 머무는 모든 이에게 신목의 가지로 만든 무구를 채워 줬으니, 이제…… 해볼 만했다.
“적생. 꽤 많긴 하다만, 맡겨도 되겠지?”
“예?”
진무가 자신의 뒤에선 적생을 쳐다보며 히죽 웃었다.
“돌파조와 진압조의 힘을 가늠해 보기 좋잖아. 앞으로의 싸움을 위해서 연습한다고 생각해.”
“음, 알겠습니다.”
“대신 경계선 근처에서만 싸워. 괜히 무리하지 말고 위험해지면 무당산 안으로 곧바로 도망치고. 알겠어?”
“예.”
적생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천주님께선?”
자칭 든든한 개인 호위 황신이 묻자 진무가 턱짓으로 협비를 가리켰다.
“모처럼 손님이 오셨는데 주인이 돼서 문전박대를 해서야 쓰나? 만나는 봐야지.”
“혼자서요?”
“그럼, 혼자지. 니들처럼 약한 것들을 끌고 가서 뭐에 써먹는다고. 호위 어쩌고 하면서 따라올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라. 괜히 짐만 되니까.”
“…….”
노골적인 무시에 황신과 아이들이 동시에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지만, 반박하지는 못했다.
……사실이니까.
“그럼 적생, 부탁하마.”
“예.”
적생의 답을 들은 진무가 협비를 향해 몸을 돌리며 한 걸음 내디뎠다.
“여, 오랜만.”
“……!”
자신의 앞으로 다가와 손을 들며 히죽 웃는 모습에 협비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단 한 걸음이었다. 손가락만큼 작아 보이던 그가 자신의 앞에 나타나기까지.
그리고 협비는 비로소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지, 진무?!”
“꽤 놀란 표정이군. 하긴, 죽은 줄 알았던 이가 멀쩡히 살아서 돌아다니니.”
“……다, 당신이 어떻게?”
당황한 협비를 향해 진무가 히죽 웃었다.
어떻게는 뭘 어떻게야?
귀모의 계략에 속아 인계를 망친 주범(?)이 된 게 하도 분해서 지옥에서 돌아왔다, 이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