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612
82화
“이런, 마왕이 벌써!”
“…….”
청상의 말에 진무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팔에 돋아 오른 소름을 보고 마왕이 오고 있다고 확신한 모양이다.
……오기야 오겠지.
우리가 제 놈들의 터를 공격한 이상, 전면전으로 돌입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하지만 도통 불안함의 정체를 알 수가 없으니, 뭐라 설명해 줄 말이 없었다.
그런 머뭇거림 때문이었을까?
“큰일이군요. 일단 응전할 준비부터 갖추겠습니다.”
“음, 그래. 혹시 모르니까 그렇게 해.”
“예! 사숙.”
잠시 고민하던 진무가 고개를 끄덕여 허락하자, 청상이 결연히 답했다.
자고로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 했으니, 미리 대비해서 나쁠 것이 무엇일까?
“마왕입니다, 마왕이 오고 있습니다! 조속히 봉인을 방어할 준비를 갖춥시다!”
“예!”
지시하는 청상이나 답하는 적생이나 승전으로 인해 기세가 잔뜩 올라 있었다.
내내 무당산을 방어하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모처럼 승전을 했으니 기가 살 만도 했다.
그래서인지 대응도 매우 빨랐다.
적생은 주변 환경을 슥 살피곤, 즉각 적절한 방어진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계속해서 진무에게 기댈 수는 없다.
무당산을 침범한 규사를 소멸시키고 신목의 가지를 통해 부족했던 전력을 끌어올렸으며, 이어 찾아온 협비와 그 많은 마귀를 종속시켜 이이제이의 책략을 성공시킨 것까지.
지금껏 모두가 진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 아니던가?
덕에 마귀들이 오가는 통로 하나를 완벽하게 봉인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봉인석 주위에 신력을 머물게 하여 음악한 대지를 정화해야 한다. 그때까진 반드시 이곳을 지켜 내야 하는 것이다.
아직은 여전히 진무의 강함에 기댈 수밖에 없는 일이나, 어찌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길 수가 있겠는가?
진무라 할지라도 필경 힘에 한계가 있을 터였다. 마왕은 그에게 맡길지언정, 나머지는 자신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야 했다.
“모두 들으라!”
“…….”
승전의 기쁨에 빠져 있던 신령들을 향해 적생이 우렁차게 외쳤다.
“사패오……. 아니 네 분께선 봉인의 동서남북을, 청우, 황신, 각출, 소동보는 사방의 사이를 맡아 팔괘(八卦)를 완성하라! 나머지 신령들은 팔괘의 외곽에 육십사방진을 펼쳐 막는다. 서둘러 움직이라!”
“예!”
적생의 명은 추상같았고, 모두 군말 없이 진을 이뤘다.
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진무의 찌푸린 눈살은 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진이 어설퍼서? 아니다.
적생이 팔괘진을 펼친 것은 더없이 좋은 판단이다.
마왕들이 온다고 해도 모두가 한곳을 통해 강림하지는 못할 것이다. 아니, 안 할 것이다. 그놈들 자존심이 얼마나 센데…….
필시 각기 다른 통로를 통해 올 것이 분명하고, 자신의 존재나 실력을 알지 못하니 함께 공격해 오지 않을 것이다.
각기 다른 통로. 아마 가까운 놈들부터 순차적으로 올 테지.
신령들로 팔괘진을 구성했고, 그 외곽에 세류로 종속시킨 협비와 마귀들을 깔아 뒀으니 제법 단단할 것이다. 저쪽에서 떼로 공격한다고 해도 쉽게 뚫릴 일은 없다.
그 사이에 청상과 백표가 좌우를 휘저어 주고, 자신이 깊숙이 파고들어서 마왕의 모가지를 따 버리면 그만이다.
두 놈 이상이면 모를까, 하나 정도는 아침밥 찬거리 정도도 못 된다는 사실을 이미 규사, 협비와 싸우며 확인하지 않았던가? 와중에 명진이 천계에 도움을 청해 지원을 받아 냈다고 하니 싸움은 앞으로 더욱 수월해질 참이다.
마음 같아서는 세류로 마왕 놈들을 전부 종속시켜 귀모의 뒤통수를 후려쳐 주고 싶었지만, 싸구려라 그런지 가진 힘의 한계가 있었다. 권능도 겨우 하나만 쓸 수 있고, 협비 한 놈도 가끔 서너 번은 찔러 줘야 종속을 유지하니…….
하지만 협비에게 알아낸 바에 의하면, 소멸한 마왕의 권능을 이어받는 새로운 마왕은 처음부터 강한 놈이 아니고선 완전한 각성을 이루는 데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즉, 마왕들이 나타나는 족족 소멸시켜 버리면 그만큼 많은 시간을 벌 수 있다는 뜻이다.
그사이 인계에 자리 잡은 마왕들의 터를 부수고 통로를 봉인하며 마귀 놈들을 몰아내면 이 전쟁의 승기를 가져올 수 있겠지.
하지만…… 이 소름은 진짜 마왕 때문일까?
협비를 만났을 때도, 교마 때도, 혼천과 우융…… 아니 귀모를 만났을 때도 이런 느낌은 아니었는데.
“사, 사숙!”
“……?”
잔뜩 긴장한 청상이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며 외치자 진무가 고개를 돌렸다.
하늘이 붉다.
석양이 지는 것이 아니라, 지상의 화광이 하늘을 물들인 것이다.
불꽃과 함께 대지를 메우며 다가오는 마귀 떼.
그들의 걸음에 가로막은 산악이 불길에 말라 모래알처럼 부서지자 사방이 평야처럼 변한다. 내딛는 발소리가 지축을 뒤흔들어 예까지 진동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앞.
……마왕이 오긴 왔다.
일렁이는 불길에 휩싸여 달리는 여덟 필의 귀마(鬼魔)가 이끄는 사륜차 위에, 본 적 없는 마왕이 올라 느긋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다.
다른 놈들은 이미 지계에서 만났고, 얼굴을 알지 못하는 것은 둘뿐이다. 화갱옥의 사타와 발설옥의 악구.
그중 지독한 화기를 머금고 있다면, 필시 불지옥 화갱(火坑)의 주인이자, 업경을 소유한 사타일 것이다.
아마 제 놈 터를 공격받았으니 가장 먼저 온 것이겠지. 화가 잔뜩 나 보이는 저 불타는 얼굴도 그런 이유 때문일 테다.
협비는 그가 화령(火靈)의 권능을 부여받았다고 했다.
손길에 닿은 모든 것이 재로 변하고, 내쉬는 숨에 대기가 들끓는다는…… 지옥겁화(地獄劫火)의 힘.
명성이 자자한 대로 화차(火車)의 접근에 땅이 지글지글 끓고, 곳곳에서 솟구친 수증기가 안개처럼 자욱하게 깔렸다.
“후욱, 후욱…….”
“…….”
화차가 도착하려면 한참 남았음에도 신령들이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거친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열기 때문에 호흡이 버거워진 것이다.
자신에게 종속되어 가장 바깥쪽을 지키고 있는 마귀들이 싸움도 하기 전에 고통스럽게 울부짖으며 녹아내리는 것을 보면, 화기의 농도가 어마어마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래 봐야 마왕 나부랭이인 것을.
축융이 산화하며 내뿜은 불꽃에 몸이 불타 버릴 뻔한 경험을 가진 진무에게 있어 사타의 열기는 고작 봄날 따스한 볕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봉신을 해한다고 해도 딱히 상대는 안 될 터였다.
문제는 이 소름인데……. 아까 솟은 게 아직도 가라앉지 않고 있다.
대체 왜지?
“멈춰라!”
사타의 고함과 함께 마왕군이 팔괘진과 거리를 두고 멈췄다.
“……?”
그리고 어째서인지 화차에서 벌떡 일어난 사타가 진무와 함께 선 인물을 유심히 바라봤다.
“혀, 협비?”
이내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황당할 따름이었다.
자신의 터를 공격한 것이 협비라는 이야기는 이미 들어 알고 있었지만, 저 몽롱한 눈빛…….
“종속……당했다고?”
잘못 봤을 리가 없다. 회백색으로 빛나는 저 눈동자는 박피옥주의 법구인 세류의 권능에 잠식된 자들이 보이는 증상이니까.
하지만 어찌?
누가 귀모의 권능이 스며 있는 세류의 힘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누가…….”
“나다, 이 새끼야.”
“……!”
머릿속에 의문이 겹겹이 쌓이는 와중, 곁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사타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화차에 앉아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사내는 분명 협비 옆에 서 있던 이였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움직이는 것을 보지도, 아니 움직인다는 것을 느끼지도 못했는데? 더군다나…….
사타는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진무를 살폈다.
왜 이렇게 멀쩡한 거지?
자신의 권능으로 만들어진, 무엇이든 불태워 버리는 화차의 불길이 진무의 근처로 조금도 닿지 못하고 있었다.
“흐흠, 이상하네…… 소름이 너 때문이 아닌가 본데?”
“……뭐?”
사타가 놀라 물었지만, 진무는 답할 생각 따윈 없는지 자기 팔뚝만 주시했다.
“그럼 대체 어떤 놈인 거지?”
너무 궁금해서 왔는데…… 확실히 이놈은 아니다.
뭔가 좀 더 본질적인 것에 근접한 느낌이었는데.
“이런 젠장, 그럼 진짜 귀모가 오기라도 하는 건가? 그런 거야?”
“…….”
“묻잖아, 귀모가 오는 거냐고.”
“……아니, 그런 일은.”
“아니라고?”
“…….”
진무가 눈을 부라리는 통에 자신도 모르게 대답한 사타가 뒤늦게 제 추태를 깨닫고 입을 꾹 다물었다.
“젠장할, 귀모도 아니면 대체 뭐지?”
“…….”
마왕인 자신을 눈앞에 두고도 다른 데 정신이 팔린 진무의 여유로운 모습에 사타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규사를 죽인 놈도, 협비를 종속시킨 놈도…… 이놈이라는 것을.
“너, 너는 누구지?”
“나?”
“…….”
“진무.”
“진…… 뭐라고?”
사타의 눈동자가 놀람을 넘어 경악으로 변했다.
진무라니?
본 적은 없었지만, 그는 분명 죽었다고 했는데?
“묻기에 대답한 것인데, 이놈이나 저놈이나 반응이 참 한결같네.”
“…….”
“그런데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겠지? 니가 모르고 있는 걸 보면 귀모도 아직 모른다는 이야기일 테니까.”
소름이 돋은 이유가 귀모의 강림 때문이 아니라면 뭐든 상관없다. 마음 놓고 급한 손님부터 처리해야지.
상황을 보아하니 내버려 뒀다가는 애써 종속시킨 애들이 전부 불타 버릴 것 같기도 했고.
진무가 사타를 향해 송곳니를 드러내며 씩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혼자 왔어?”
“……?”
“저런, 표정을 보니 맞나 보네. 둘이 왔으면 뒈지는 게 외롭진 않았을 텐데.”
짐짓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신목의 가지를 턱 어깨에 걸치는 모습에 사타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일단, 혹시나 해서 물어볼게. 나도 절차라는 게 있어서.”
“절차라고?”
“어. 니가 뒈질지 말지를 결정짓는 아주 중요한 절차지. 그러니까 생각 잘하고 결정해라.”
“…….”
“지금이라도 지계로 돌아가면, 열은 좀 받겠지만 얌전히 보내 줄게.”
이 무슨…… 지금 자신에게 물러날 기회를 준다는 건가? 강자가 약자를 배려하듯?
“미쳤군.”
“호오? 그거 거절이지?”
“…….”
“그럼 됐어. 실은 그래 주길 바랐으니까.”
진무가 히죽 웃으며 어깨에 걸치고 있던 나뭇가지를 세워 사타를 겨눴다.
“……나뭇가지?”
자신이 가진 화령의 권능 앞에서? 고작…….
“이런 미친놈이!”
화르륵!
희롱당한 기분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사타의 일갈에 불길이 화차를 휘감듯 솟구쳐 하늘에 닿을 듯이 넘실거렸다.
“제법 뜨끈하네. 그런데 이게 다면 너무 실망스러운데?”
“…….”
사타가 뿜어낸 지옥겁화 속에서도 진무는 시종일관 여유를 잃지 않고 불길을 헤집었다.
나뭇가지로…….
물론, 그 불길 속에서도 나뭇가지는 멀쩡했다.
“사타.”
“……?”
“차라리 미리 봉신을 해제하는 건 어때? 어차피 싸울 거 뜸 들이지 말자고.”
“…….”
“그런 눈으로 볼 필요 없어. 내가 좋은 스승님 밑에서 배려라는 것을 심도 있게 배운 터라.”
계속해서 나뭇가지를 휘휘 저으며, 진무는 본격적인 도발에 들어갔다. 이후의 싸움을 대비해 힘을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한참 전에 제 손에 죽었던 교마의 말에 따르면, 마왕 중 협비가 가장 약하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약했다.
잠시 만났던 혼천과 우융은 힘을 가늠하지 못했었고, 수호령인가 하는 새끼는 비벼 볼 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강했다.
하여 사타를 통해 확인하려는 것이다. 앞으로 나타날 혼천과 우융의 힘은 어느 정도나 되는지, 자신의 힘은 어느 정도나 되는지.
“나를…… 도발한 것을 후회하게 해 주마.”
“……그건 내가 알아서 잘 판단할 테니까, 넌 걱정하지 말고.”
진무의 조롱에 사타가 이를 갈며 봉신을 해제하자 불길의 색이 바뀌기 시작했다.
붉은색이 옅어지고, 어느새 하얗게…….
종내 진무가 훌쩍 물러나야 할 정도로 맹렬한 열기와 함께, 그의 몸이 짙은 푸른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화마(火魔)들이여, 가거라, 모조리 불태워라!]봉신을 해하고 진신을 드러낸 사타의 언령에 불길로 무장한 마귀들이 봉인을 지키는 팔괘진을 향해 번져 갔다.
“뜨겁네, 많이.”
진무의 감상은 딱 그 정도였다.
어쨌든, 최대한 빨리 끝내 주마.
화마의 불길에 내 새끼들이 화상이라도 입으면 곤란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