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613
83화
푸른 불길이 스친 자리가 시커멓게 그을리고, 금세 속까지 불타 버린 땅이 힘없이 주저앉았다.
쉬이익!
“……허!?”
불길을 피해 푸른빛으로 일렁이는 사타를 공격한 진무는 황당해서 말이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처음이었다, 신목의 가지가 허공을 때린 것은.
“멍청한 놈.”
“…….”
“물리적인 공격이 나에게 통할 것 같으냐? 봉신을 해한 나의 진체는 염화(炎火) 그 자체다.”
휘저어 대는 사타의 손짓을 따라 불길이 휘몰아쳤다. 불길을 피해 훌쩍 뒤로 물러선 진무의 얼굴이 절로 찡그려졌다.
“앗, 뜨거!”
젠장할, 피한다고 피했는데…… 상의에 불길이 옮겨붙었다.
손바닥으로 다급히 꺼 봤지만 소용없었다. 점점 더 번지는 불길에 진무가 냉큼 웃옷을 벗어 바닥에 던졌다.
“큭큭, 놈…… 겁화가 꺼질 것 같으냐?”
“…….”
“한번 붙은 불은 나의 명 없이 절대로 꺼지지 않는다. 모든 것을 재로 만들 때까지.”
비웃는 사타를 빤히 쳐다보던 진무가 픽 웃었다.
“옷 하나 태우고 더럽게 자랑스러워하네.”
“…….”
“그렇게 대단한 불길이 이건 왜 못 태우냐? 어?”
진무가 손에 든 신목의 가지를 휘둘러 불길을 헤집자 사타의 얼굴에 어린 웃음기가 싹 지워졌다.
안 그래도 신경이 쓰였다. 자신의 겁화가 통하지 않는 나무라니…… 대체 정체가 무엇이기에?
하지만 짜증이 나는 것은 사타만이 아니었다. 진무도 그 못지않게 짜증이 나 있었다.
불꽃의 영(靈), 거 더럽게 귀찮은 권능이네.
사랑을 가득 담아서 후려쳤건만, 매가 통하지 않는다니.
불만 빼면 딱히 볼 것 없는 놈을 상대로 이리 시간을 끌고 있다는 사실도 언짢았지만…….
“끄아아아!”
“끄어억!”
불꽃으로 변해 버린 사타 놈을 때릴 방법을 찾는 사이에도 세류의 힘으로 종속시킨 마귀들의 피해가 늘어 간다. 사타처럼 육신 자체가 불이 아닌지라 근근이 버티고는 있지만, 화염에 녹아내리고 열기에 헐떡이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젠장, 망할 불 새끼들.
청염도 그렇고, 축융도 그렇고…… 불이랑 엮일 때마다 이리 고생하는 것을 보면 상성이 안 좋은가?
이러다가 협비와 마귀들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다음 방어선은 신령들인데, 어찌한다?
서둘러 놈의 몸에 충격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하면 피해가 극심해질 것인데.
“응?”
사타를 쓰러뜨릴 방법을 고심하며 공격을 피해 다니던 그때, 금빛 섬광 하나가 하늘을 가르는 모습이 보였다.
파르라니 머리를 깎은 앳된 중놈과 산발한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녹의 여…… 어?
소름이 등줄기를 시작으로 쫙 돋아 올랐다.
“저, 저거…… 혹시?”
안 본 지 만 년도 넘었는데 그 외양이 너무도 익숙해 단번에 알아보긴 했지만, 어떻게든 부정하고 싶었다.
에이, 아니지? 아닌 거지?
아미파에 귀의했다가 불법을 깨닫고 극락정토에 갔다는 애가 여기 왜 있어?
당세령일 리가 없다. 아니 없었으면 좋겠다.
환상일 거라 마음을 다잡아 봤지만, 눈이 마주치자마자 히죽 웃은 여인의 목소리가 단번에 현실을 일깨웠다.
“드디어, 찾았다.”
“…….”
씨바, 맞네. 찰거머리 당세령.
“진무야! 나 왔다!”
“…….”
봤다. 굳이 소리치지 마라.
그리고 왜 반말이냐? 내가 너보다 나이가 한참이나 많은데.
하여간 여전히 버르장머리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놈이다.
“어딜 쳐다보는 거냐! 이놈!”
화르륵!
싸우다 말고 딴청을 피우는 진무의 모습에 무시당했다고 여긴 사타가 분기탱천하며 불길을 쏘아 냈다.
“야! 나 왔다고! 인사라도 좀 해라! 어!?”
“…….”
겨우 잡념을 떨치고 싸움에 집중하려는데 당세령이 와락 짜증을 내면서 소리를 지른다.
이것들이 진짜.
한 놈은 싸우자고 난리고, 한 년은 인사하라고 난리고.
하지만, 선후야 뻔한 것 아닌가?
“이런 쌍! 싸우는 거 안 보여?”
“…….”
“왔으면 돕기나 하든가!”
돌아보지도 않고 외친 말에 당세령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사타가 이끄는 화마들이 봉인의 외곽에 자리 잡은, 협비와 함께 진무에게 종속된 마귀들을 열심히 태우고 있었다.
“누굴 도우라는 건데?”
“뭐?”
“마귀가 마귀를 죽이고 있는데 내가 왜 돕냐고?”
“……아.”
생각해 보니 멍청한 말이었다.
당세령은 막 도착해 아직 상황을 모르고 있지 않나.
하지만 이 마당에 미주알고주알 설명하자니 더 짜증 났다.
와중에 사타 놈은 싸움 중에 한눈을 판다고 길길이 날뛰며 사방에 불을 싸질러 대고 있고.
하아…… 이 연놈을 진짜.
“다, 당 소저!”
화마들을 쓰러뜨리던 청상이 당세령을 발견하고 훌쩍 뛰어넘어 왔다.
“어? 청상! 이게 얼마 만이야!”
“예! 소저, 아니…… 선자(仙子)라고 불러야 하나요?”
그 말에 당세령이 볼우물을 만들며 배시시 웃었다.
선자란 선과 불의 극치에 올라 천계에 오른 자들을 통칭하는 말이지만, 달리 아름다운 여인을 지칭할 때도 쓴다.
역시 청상이 놈은 말을 참 예쁘게 한단 말이지. 보자마자 쌍욕이나 갈기는 누구와는 다르게…….
“선자는 무슨? 그냥 예전처럼 사숙모라고 불러.”
“……사, 사숙모요?”
“어.”
“…….”
당세령은 당당하기 그지없었지만, 막상 그 말을 들은 청상으로서는 황당할 따름이었다.
사숙모라니, 그녀는 여전히 진무와의 연을 이어 가려는 것인가?
불문에 귀의해 속세와의 연을 잘라 내고, 불심을 통해 극락정토에 오른 이가 어찌…….
“나 환속했어.”
“환속요……?”
“응, 자의적으로 그냥 그렇게 정했어.”
“…….”
자의(自意)라 말하며 생긋 웃는 당세령을 보며 청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극락정토를 다스리는 아미타의 허락 따윈 받지 않았다는 뜻이다.
정말이지, 뭔가 너무 그녀답다고 해야 하나?
한때 여자 진무, 혹은 진숙이라 뒷말하던 때가 생각나 버린 청상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참, 얜 비사라고 해. 앞으로 극락정토의 사천왕이신 다문천의 자리를 이어받을, 장래가 촉망되는…….”
“인사는 나중에 다시 여쭙겠습니다.”
“응?”
“실은 지금 제가 몹시 바빠서요.”
“바빠? 뭐가?”
“화마들에게서 저들을 구해야 하거든요.”
“…….”
청상의 말에 당세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귀들을?”
“아, 마귀이긴 한데…… 한편입니다.”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그게…… 여튼 그리되었습니다. 사숙께서 하신 일이라.”
“진무가?”
“예.”
“흠……. 좋아, 그럼 구해야겠네.”
이해가 참 빠르다.
예전부터 그랬듯, 진무가 행하는 일이면 옳고 그름은 제쳐 두고 두 손에 두 발까지 합쳐서 돕던 그녀가 아니던가? 뭐, 그 때문에 수많은 문제가 생겨 난장판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긴 했지만.
“한데 쉽지 않습니다.”
“왜? 쎄냐?”
“세다기보단, 겁화의 권능이 스민 불 때문에…….”
“끄면 되지.”
“…….”
그럼 되긴 하지.
쉽게도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청상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말처럼 쉬웠다면 벌써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옥겁화는 일반적인 화염의 기준과는 완전히 달랐다.
“내가 비를 퍼부어 줄게. 겁화고 나발이고 무조건 꺼 놓을 정도로 많이.”
“예?”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별안간 비라니? 지금 천지조화라도 부리겠다는 말인가?
신령들은 물론이거니와, 신수인 여의나 진무의 힘에 감화받아 힘을 각성해 가고 있는 금혼조차도 못 하는 일을 어찌 그녀가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저리 웃는 것을 보면, 허세를 부리는 것 같지는 않은데.
“진무와 싸우고 있는 마왕까진 힘들어도 화마들의 불길 정도는 충분히 지울 수 있을 거야. 뒤처린 네가 해!”
“당, 아니 사숙모께서 무슨 수로…….”
말릴 새도 없었다. 청상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당세령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단번에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상공으로 훌쩍 몸을 날렸다.
“연꽃?”
순간 그런 착각이 들었다.
마치 활짝 핀 연꽃이 환상처럼 나타나 불길로부터 그녀를 보호하는 듯한…….
“백련의라는 물건입니다. 극락정토의 보물이지요. 천수께서 훔쳐 오셨습니다.”
“예?”
“궁금하실 것 같아서…….”
옆에서 가만히 있던 비사의 설명에 청상이 눈을 끔벅였다.
극락정토의 보물인 건 알겠다.
그런데 훔쳤다고? 보물을?
“비가 내릴 겁니다. 천수께서 저리 작심한 표정을 하신 것을 보면…… 가진 불력을 모조리 쏟아부으실 모양입니다.”
“…….”
“폭우가 내릴 겁니다, 장맛비가 무색할 정도로.”
“그게 무슨?”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청상을 향해 빙그레 웃은 비사가 합장하며 말했다.
“저는 천수 님을 지켜야 할 모양입니다. 힘을 모두 쓰시고 난 천수께서 진 땅에 쓰러지도록 할 수는 없으니까요.”
“…….”
비사마저 당세령이 있는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어리둥절하기만 한 청상이었으나, 머뭇거릴 틈은 없었다.
그녀의 말이, 또한 비사라는 이의 말이 진짜라면 이제부터 적들을 쓰러뜨림에 박차를 가해야 할 테니까.
그사이 전장의 상공으로 날아가던 당세령이 화마를 바라보며 손을 쭉 뻗었다.
[수월(水月)!]마음속으로 외친 언령에 펼친 손 위로 불기가 어려 응축되고, 이내 하나의 형상이 되었다.
완만하게 휘어진 초승달 모양의 칼, 수월도.
손바닥을 파고든 찬 기운이 짜르르하니 몸을 울리는 느낌에 당세령이 하얗게 웃었다.
“비, 퍼부어 주마.”
법력을 모조리 끌어 올리자, 그녀의 몸이 은은한 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사라락.
흩날리는 머리카락 뒤로 광배(光背)가 나타나 환한 빛을 뿜어내고, 당세령의 발길이 사뿐히 허공을 밟는다.
마치 땅 위에 있는 것처럼 한 걸음 한 걸음 찬찬히 걷는 그녀의 손길을 따라 수월도가 바람 가르듯 허공을 노닐었다.
궤적은 더해지고, 움직임은 자연스레 이어진다.
검무(劍舞).
신령들은 싸우는 중이라는 사실도 잊어버린 듯 그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천상의 무녀가 춤을 추듯 시작된 그녀의 움직임에 하늘의 색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쿠르릉!
천둥소리가 요란히 울리고, 먹구름이 몰려와 해가 진 듯한 어둠을 만들어 낸다.
이내 춤이 빨라진다.
수월도의 궤적을 따라 바람이 일자, 먹구름이 경쟁하듯 모여들어 하늘을 가득 채웠다.
꽈릉! 콰르르릉!
검은빛 먹구름 새로 번쩍이며 우레가 토해진다.
푸른빛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하늘.
그리고…… 검무가 멈췄다.
땀으로 흠뻑 젖어 버린 머리카락이 치렁치렁 늘어져 얼굴에 착 달라붙었다. 손에 쥔 칼을 하늘을 향해 곧추 뻗으며, 당세령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쏟아져라.”
한마디였다.
그 한마디에 수월도에서 밝은 빛이 창처럼 쏘아져 먹구름을 꿰뚫었다.
쏴아아아!
비가, 아니 폭우가 시작되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쏟아붓기 시작한 비가 순식간에 땅을 적셔 진창을 만들어 버렸다.
치이이이…….
그리고 불이 꺼졌다.
언제까지나 타오를 듯했던 화마들의 몸이 젖었다.
“……후우.”
모든 법력을 소진하고 힘없이 웃은 그녀가 툭 지상으로 떨어졌다.
덥석.
대기하고 있던 비사가 냉큼 그녀를 받쳐 안았다.
“고마워, 비사…….”
“하여간 뒤가 없으시다니까.”
“……헤헤, 그래도 또 도와줬다. 저 녀석, 감동한 건 아니겠지?”
“…….”
비사의 품에 안긴 당세령이 고개를 힘없이 돌려 사타와 싸우고 있는 진무를 쳐다봤다.
“천수께서 환속을 말씀하신 이유인 모양이네요, 그가.”
“어. 오래 기다렸거든, 이 순간이 오길.”
“어쨌든 쉬세요, 뒤는 저들이 알아서 할 것 같으니까.”
“넌 안 도와?”
“천수께서 이러고 있는데 어찌 돕습니까? 물먹은 솜 같구만.”
“그건 그러네.”
“하아, 정말 못 말리겠네요.”
비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당세령을 안고 신령들이 지키는 팔괘진 속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사타와 싸우던 진무가 뚝 움직임을 멈췄다.
“……진짜 껐어?”
설마하니 화마들의 불길을 꺼 버릴 정도로 많은 비를 쏟아 낼 수 있는 법구를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뒷걸음질로 쥐 잡던 당세령 소가 또 해냈네.
물론 사타의 불길은 꺼지지 않았다.
마왕이 괜히 마왕이겠는가?
하지만, 드디어 방법이 떠올랐다.
세령이의 법구. 그 법구의 힘을 조화의 힘으로 증폭시킨다면?
“…….”
진무의 송곳니가 또다시 빛을 발했다.
딱 기다리고 있어라, 사타야. 금방 와서 패 줄게.
이번엔 막대기 아니고 물(水)로다가.
물 싸다구라고 들어 봤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