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619
89화
치이익!
“이, 이런…….”
“놀라기는.”
혼천이 만든 혹한의 대지가 열기로 가득 차는 데는 한 호흡도 걸리지 않았다.
이래서 경험이라는 것이 중한 거다.
물과 불, 불과 물.
엎어치나 메치나 상황만 다르지, 실상 운용은 똑같다.
한때의 진무는 태초에서 극명하게 나누어진 것이 음양이라 여겼고, 오행 또한 음양에서 파생된 것이니 다르지 않다고 여겼다.
하나 잘못된 생각이었다.
한쪽으로 편중된 것은 제대로 된 힘을 내지 못하는 법이다.
음의 힘을 쓰든 양의 힘을 쓰든, 혹은 오행 중 하나의 힘을 사용하든 조화에 기초해야 한다. 양이 바탕이 된 상태에서 음을 쓰는 법이고, 음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양은 제힘을 발휘할 수 없다.
그러니 이미 치우친 자들이 만들어 낸 것들은 흉내에 불과하다. 진무의 그것에 비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고.
비록 혼천이 사용하는 것이 물이 아닌 혹한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추움의 상극은 더움이다.
와중에 사타 따위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열기를 제 놈이 어찌 상대할까? 제아무리 얼리는 재주를 지녔다 해도, 진무의 근처에만 오면 녹아 버리는데.
“다른 재주는 없는 거냐?”
“……이, 이놈.”
혼천이 진무와 함께 다가오는 열기를 피해 훌쩍 물러났다.
하지만 지가 물러나 봐야 손바닥 안이지.
봉인을 해하여 가진 힘이 고작 그 정도라면, 니가 살아날 방법은 없다.
사락!
일 보를 내딛자 산들바람처럼 흘러간 진무의 신형이 단숨에 혼천의 간격 안으로 들어섰다.
“헉!”
“어딜?!”
빠아악!
후려친 주먹에 혼천의 몸이 세차게 휘돌았다.
꽈악.
그러곤 채 튕겨 나가기도 전에 진무의 손에 잡혀 덜컥 멈췄다.
“이 새끼, 권능을 얻더니 싸움하는 방법까지 잊어버린 거냐?”
“……!”
“넌, 한무화였을 때가 훨씬 더 나았다!”
비웃음 가득한 주먹이 혼천의 몸에 묵직하게 때려 박혔다.
쾅!
일순 머리가 멍해질 만큼 거대한 충격이 그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으니…….
주먹이라기엔 망치 같고, 망치라기엔 그 무게가 거악과도 같은 진무의 주먹질에 혼천은 변변한 반격조차 해 보지 못한 채 유린당했다.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내내 얻어맞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반격, 반격을 해야 한다.
이대로는…….
하지만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몸의 쓰임을 잊은 지가 언제이던가?
권능만으로 충분했다.
모든 것을 얼려 버리는 한기는 자신의 곁에 어떠한 것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천연의 방어막과 다를 바 없었다.
마왕 중 자신을 넘어설 힘을 가졌던 것은 우융과 사타뿐이었다.
상극이었던 사타의 겁화조차도 팽팽히 맞설 뿐 무너뜨리지는 못했었다. 자신 역시도 겁화를 뿜어내는 사타의 근처까지 가 보지도 못했다.
그런데…… 진무의 저 빌어먹을 화기가 자신이 믿어 의심치 않고 있던 혹한의 권능을 쓸모없는 찬바람이나 진배없게 만들었다.
빠각, 빠가각.
“나, 나의 빙옥지신이?”
급기야 몸을 감싸고 있던 냉기의 막이 진무의 주먹을 버티지 못하고 부서져 나가기 시작했다.
금강석보다 단단했던 자신의 몸이…….
“빙옥지신(氷玉之身)?”
“……?”
혼천의 중얼거림에 그 몸에 올라타 함께 추락하던 진무가 픽 비웃음을 터트렸다.
“너한테 딱 어울리네, 이 빙신(氷身)아!”
“……!”
진무의 주먹이 혼천의 안면을 힘차게 강타했다.
“크아악!”
충격이 얼굴에 그대로 파고들었다.
빙옥지신…… 아니 빙신이 부서져 버린 혼천의 몸이 내쏜 화살처럼 곤두박질해 땅바닥에 처박혔다.
파악!
그의 몸에 머물던 냉기가 확 퍼지니, 마치 지상에 거대한 얼음꽃이 피어난 듯 보였다.
그리고 그 꽃의 중심.
“크어억…….”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바르작거리는 혼천의 눈동자에 서서히 초점이 사라졌다.
“…….”
허공에 멈춰 선 채 싸늘하게 내려다보던 진무가 손을 활짝 펴서 뻗었다.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일어나 그의 손에 어리자 혼천의 냉기가 피웠던 얼음꽃이 순식간에 녹아 사라졌다.
치이익.
땅이 허연 김을 내뿜으며 끓기 시작했다.
폐허나 다름없던 황톳빛 대지가 벌겋게 달아오르고, 갈라진 틈에서 시뻘건 용암이 솟구쳤다.
얼음꽃의 크기가 작아졌다.
몸속으로 파고드는 지독한 열기에 마지막을 직감하며, 혼천은 손을 힘없이 떨궜다.
더는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것도 통하지 않는데…….
다만, 또다시 진무에게 앞길이 막혀 버린 것이 천추의 한으로 남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
열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뭐지? 어째서? 설마 놈이 내게 자비라도 베풀려는 것인가?
감았던 눈이 다시 뜨이고, 귓가에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혼천! 정신 차려라!”
“…….”
악구였다. 발설옥주의 마왕.
봉신을 해한 그가 자신의 모든 힘을 끌어내 진무에게 쉼 없이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혼자서는 힘들다! 어서 힘을 회복해라! 혼천!”
……으득!
혼천의 눈동자에 서서히 초점이 돌아왔다.
우두둑.
포기하듯 놓아 버렸던 주먹을 다시 움켜쥐자 냉기가 휘몰아치듯 모여든다.
진무의 힘이 끊어져서일까?
들끓던 대지가 혼천이 뿜어내는 한기에 차갑게 식고, 이내 동토의 그것처럼 허옇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어느새 몸을 우뚝 세운 혼천이 진무와 어우러진 악구를 바라봤다.
……아직, 포기하긴 이르구나.
협비, 교마, 악구.
이른바 하삼왕(下三王)이라 불리는 그들.
그중 악구가 가장 강하지만, 자신들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실력이다.
하니 그리 오래 막지는 못할 것이다. 자신조차 상대가 되지 않는 진무 놈을 악구가 어찌 막겠는가.
힐끗 시선을 돌려 살피니 우융은 멀리 떨어져 팔짱을 낀 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개자식, 끝까지 돕지 않을 생각이군.
제 놈이 아무리 강해도 진무 놈에게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인데.
하면, 결국 자신이 할 수밖에 없다.
일단은 힘을 회복하고…….
혼천은 악구가 진무를 막고 있는 동안 천천히 힘을 끌어모아 최후의 일격을 날릴 준비를 했다.
쾅! 콰쾅!
“…….”
한편, 별안간 끼어든 악구의 공격에 진무는 뒤로 물러나며 인상을 썼다.
젠장, 지열(地熱)로 구워 버리려고 했는데……. 웬 시답잖은 게 방해질이야?
“호오? 요놈 봐라?”
순간 진무의 눈이 흥미로 반짝였다.
느껴지는 권능은 교마나 협비와 비슷한 정도?
사타나 혼천에 비하면 정말 보잘것없는 힘이지만, 전투 능력은 되레 그들을 상회하고 있다. 순간순간 파고드는 공격이 소름이 돋아 오를 정도로 예리했다.
권능이 가진 힘에만 의지했던 협비, 권능의 사용법을 더욱 비열하게 사용했던 교마. 그들과 달리 악구라는 놈은 권능의 격차를 메우려 적잖이 오랜 시간 수련해 온 것이 틀림없다.
열심히 싸우는 주인 생각은 안 하고 청상과 함께 쉽디쉬운 마귀들이나 때려잡고 있는 여의를 불러다 소멸시켜 버릴까 했던 생각이 깨끗이 사라졌다.
그래, 아무리 마왕이라도 이런 놈이면 쉽게 죽일 순 없지.
어차피 마귀들 쪽은 청상 등이 우세를 유지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터.
아주 잠시 응해 주마.
권능을 부여받았음에도 불철주야 수련했을 너의 노력에 대한 대가다.
물론 그사이 힘을 회복한 혼천이 다시 끼어들겠지만…….
“한 놈이나 두 놈이나! 그게 그거지!”
히죽 웃은 진무가 본격적으로 악구의 공격에 응수하기 시작했다.
쾅! 콰쾅!
빛이 번쩍인다.
실력의 차이는 명확했으나, 신의 반열에 들어선 진무와 마왕의 싸움은 경천동지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였다.
뇌전을 부리고 열기와 한기를 휘두르는 힘의 향연은 없었다.
둘은 오직 몸의 쓰임만으로 격돌했다.
쩌어엉!
천둥소리 같은 굉음과 함께, 상상을 초월하는 충격파가 사방을 뒤흔들었다.
하나, 역시 명확한 실력 차.
시간이 갈수록 악구의 패색이 짙어졌다.
무인처럼 내상을 입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 외양이 눈 뜨고 보기 힘들 만큼 참혹하게 변하는 것이 그 증거였다.
팔 하나는 잘려 나간 지 오래였고, 몸 여기저기가 진무의 손발에 담긴 힘을 이기지 못하고 뭉개졌다.
음, 이래서야…….
진무는 살짝 인상을 쓰며 악착같이 버티는 악구를 응시했다.
대체 왜 가진 권능을 사용하지 않는 거지?
다 죽어 가는 몰골을 하고.
그러다 어느 순간 그가 가진 권능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게 무엇이든 언제든 소멸시킬 힘을 가졌으니…….
어디 보여 봐라.
“후웁!”
숨을 참으며 뒤로 물러난 진무의 손에 시뻘건 화염이 몰려들었다.
화기, 불의 창.
쐐애액!
내뻗은 손을 따라 불길의 창이 악구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혼천 또한 막지 못했던 순수한 화기였기에 힘의 반도 담아 넣지 않은 채였다.
오직 그의 권능을 이끌어 내기 위한 것이기에.
그런데 그 순간 악구의 입꼬리가 치솟고, 내뻗은 손이 뿌옇게 빛났다.
[영경(映鏡)!]일순간 생겨난 하얀 원 속으로 불의 창이 쑥 빨려 들어갔다.
“……응?”
순간 진무의 눈이 커다래졌다.
빨려 들어갔던 불의 창이 하얀 원에서 쏘아져 나온 것이다. 자신을 향해.
황당함을 감추지 못한 채, 진무가 수기를 머금은 손을 뻗었다.
퍼어엉, 화르륵!
“…….”
수기와 닿으며 소멸한 화기. 분명 자신의 기운이다.
이게 뭔…….
진무가 어이없다는 듯 하얀 원처럼 생긴 법구를 손에 들고 웃고 있는 악구를 바라봤다.
“허어, 힘을…… 되돌렸어?”
생각지도 못했던 권능이었다.
도산옥주는 쇠의 기운을 이용한 검령을 사용했었고, 박피옥주 교마는 남의 껍데기를 벗겨 입고 다녔으며, 화갱옥주 사타는 겁화, 한빙옥주 혼천은 냉기를 사용했다.
해서 발설옥주라길래 황신처럼 귀에서 피가 날 것 같은 욕설로 음공 같은 거나 쓸 줄 알았더니…… 반사아?
그런데, 뭐지? 저 득의양양한 표정은?
해볼 테면 해보라 이거냐?
자신감 넘치는 악구의 표정에 진무의 입술이 고깝게 비틀렸다. 못된 성격이 또 머리를 쳐든 것이다.
몸뚱이가 엉망진창이나 다름없는 놈이 어디서!
하지만 그냥 죽일 순 없지.
당장에 소멸시키고도 남을 힘을 가졌지만, 그냥 죽이는 것은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상대가 힘을 가졌다면…… 더 큰 힘으로 압살한다!
“하압!”
높이 든 진무의 양손에 시퍼런 수기가 쐐기처럼 맺히곤, 이내 사방으로 분열됐다.
수기, 비의 창!
화아아악!
진무가 손을 내뻗자 하늘을 가득 메웠던 창날이 비처럼 쏟아졌다.
물론, 악구 하나에게 집중된 비였다.
하지만 원이 번쩍이며 수기를 모조리 흡수하고, 창이 진무를 향해 되돌아왔다.
콰아앙! 화르륵.
순식간에 솟구친 화염이 거대한 방벽으로 변해 창을 막아 냈다.
……이런 젠장, 자승자박이 따로 없네.
와중에 악구가 흡수했던 자신의 힘을 잘게 쪼개 놓은 것인지 원 안에서 수기의 창이 연거푸 쏘아져 나왔다.
내 힘을…… 같은 방법으로 써먹어?
이 빌어먹을 따라쟁이가!
이쯤 되면 다른 수를 모색할 법도 하건만, 진무는 조금도 그럴 생각이 없었다.
하기야 그 고집불통인 성격을 누가 말리겠는가?
생전에 정파, 사파, 마교, 황실까지 오직 힘 하나로 무너뜨린 진무다.
인계뿐인가? 천계 북방칠수의 장수를 모조리 패고 두장군에 올랐고, 지계에선 마왕과도 맞짱 뜬 이다.
이젠 조화의 힘까지 얻어서 옥황과 귀모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악구? 반사? 니까짓 게? 나를?
“오냐, 니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시험해 주마!”
송곳니를 한껏 드러낸 진무가 수기와 화기가 뒤섞인 기운을 마구잡이로 쏟아붓기 시작했다.
불타는 물, 용암(鎔巖)의 비.
이것도 한번 받아 봐라! 이 따라쟁이 쉐끼야!
이것도, 이것도, 이것도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