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621
91화
쾅! 콰쾅!
살이 으깨지고, 뼈가 바스러졌다.
악구를 흡수했음에도 혼천은 한없이 무력했다.
분노한 진무의 주먹에 힘없이 몸을 내맡긴 채 산산이 부서져 갔다.
그러기를 얼마쯤.
휘몰아치는 폭풍이 가라앉고, 우뚝 선 진무의 발아래 누운 혼천의 모습은 처참했다.
“……빌어먹……을.”
더는 일어나지 못한 채 멍하니 하늘만 올려다보던 그의 입에서 허망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사아악.
그 말을 끝으로, 그가 아스라이 사라져 갔다.
“후우.”
고운 가루처럼 흩날리는 혼천의 모습을 감상하듯 응시하던 진무가 긴 숨을 내쉬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북리도천을 바라봤다.
히죽 웃는 진무를 무심히 바라보던 북리도천이 픽 웃음을 터트리곤 끼고 있던 팔짱을 풀며 다가왔다.
긴 세월의 거리를 따라잡듯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히 걸어온 그가 어느 지점에 이르러 우뚝 멈춰 섰다.
“시간…… 좀 줄까? 꽤 지쳐 보이는데?”
“…….”
그 말에 진무의 웃음이 진해졌다.
자존심.
이미 격차가 분명함을 알 텐데도 여유를 부리는 것이 그다웠다. 진무는 고개를 저었다.
“회복해 버리면, 이길 가능성조차 사라질 텐데?”
“하긴…… 지금의 널 보자면 그 정돈 접어줘도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순순히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인 북리도천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생각해 보니, 차라리 양손도 쓰지 말아 달라고 부탁할 것을 그랬나?”
“농이지? 내가 봐주는 게 더 싫을 듯한데?”
“큭, 짜증 나는군. 넌 너무 나를 잘 알아.”
“숙적이었으니까. 예전에도, 지금도.”
“숙적이라…… 그건 비슷한 상대에게 붙여 주는 호칭 아닌가? 내가 그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군.”
“오, 약하다는 걸 인정하는 거냐?”
“큭, 큭큭.”
마치 오랜 벗과 대화를 나누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으나, 말뿐이었다.
빠직, 빠지직.
거리를 두고 멈춘 둘 사이는 이미 전쟁이 한창이었다.
둘의 기운이 팽팽하게 맞서며 부딪쳐 대는 통에 땅이 쩍쩍 갈라지고, 돌이며 나무가 모래알보다 작게 부서져 나갔다.
하지만 북리도천은 알고 있었다. 마력을 한계까지 끌어 올리고 있었지만, 진무의 간격 안으로는 조금도 들어서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저 자연스럽게 서 있는 것이 고작인데.
“음…… 술부터 한잔하는 게 좋지 않을까?”
“굳이?”
“…….”
“술은…… 살아남는다면, 아니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때 나누지.”
북리도천이 천천히 자세를 취했다.
군더더기 따윈 없었다. 흠잡을 곳 없이 간결했으나, 작은 실수조차 용납지 않을 듯이 세심했고, 주의 깊었다.
진무의 눈동자에 차츰 감정이 사라지더니, 이윽고 완연한 무심이 자리 잡았다.
싸움이 끝난 뒤는 없을 것이다.
북리도천은 최선을 다할 것이다.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까지 절대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죽음을 각오한 싸움.
……술은 그의 무덤에 뿌려 주어야 할 것 같았다.
“후우, 좋아, 어쩔 수 없지. 시작하자.”
진무가 신목의 가지를 뻗어 겨누자 북리도천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 차올랐다.
동시에 발을 내디딘다.
쏘아진 창처럼 뻗어 나왔다.
쾅!
충돌.
신목의 가지로 쳐 낸 공격에 북리도천의 살점이 돌 조각처럼 부서진다.
하지만 떨어져 나가진 않았다.
부서지는 몸을 마력으로 꽉 움켜쥔 채 연거푸 공격을 이어 왔다.
손목에서 느껴지는 시큰함에 도리어 진무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둘은 더 이상 대화하지 않았다.
아니, 대화할 필요가 없었다.
부딪침은 그들의 고함이었고, 오가는 공방 속에 서로에게 하고 싶었던 수많은 말이 모두 담겨 있었으니까.
까아아앙!
때론 쇳소리가 울리며 불씨가 사방으로 튀어 올랐고.
쩌어엉!
때론 산악 같은 거암(巨巖)이 전력을 다해 부딪치는 듯한 굉음이 천지를 울렸다.
산이 어깨를 세워 거대한 해일을 가로막듯, 폭풍 앞에 놓인 거목이 부러질지언정 휘지는 않겠다며 버티는 듯.
산이 허물어지고 땅이 뒤집혔다.
하나 그들은 조금도 배려하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이를 쓰러뜨리는 것만이 삶의 마지막 목표인 것처럼, 서로에게만 집중했다.
진무와 북리도천. 오직 이름만으로 정과 마를 대표했던 두 명의 사내.
그리고 혁련무강. 사의 정점에 이르렀던 또 하나의 이름.
그들은 어느새, 한때 최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무인(武人)들로 돌아가 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자들의 싸움.
비록 그들이 만들어 낸 충격의 여파는 세상을 파괴로 가득 채우고 있었지만, 너무도 장엄했다.
어떤 미사여구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마력으로 검게 물든 북리도천과 하얀 섬광이 되어 헤집는 진무의 몸짓은 마치 태극이 그러하듯 서로 얽히면서도, 곁을 내주지 않고 팽팽하게 맞섰다.
다만 진무는 시종일관 여유로웠고, 북리도천은 시간이 흐를수록 부서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물러나지 않았다.
주먹이 으스러지면 으스러진 대로, 다리가 부러지면 부러진 채로. 이미 넝마나 다름없는 모습을 하고서도 악착같이 진무를 버텨 냈다.
그리고…… 끝나지 않을 듯하던 둘의 싸움도 결국은 종반으로 치닫는다.
신목의 가지가 앞을 가로막은 북리도천의 팔을 부수고 몸을 강타했다.
콰아아앙!
북리도천의 몸이 땅바닥에 처박혔다.
더는 일어날 수 없다.
좀 전의 팔 하나가 마지막이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몸뚱이와 머리뿐이었다.
팔과 다리가 떨어져 나가 버린 곳에서 피 대신 마력이 새 나오고 있었다.
한때는 온전히 그의 것이었으나, 이제는 누구의 것도 아닌 기운이 더 머물지 못하고 흩어진다.
곧 모든 힘이 빠져나갈 것이고, 그는 소멸을 맞이할 것이다. 다른 마왕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미 잔괴(殘壞)가 온몸으로 번지고 있지 않은가?
“도천…… 이만하자.”
“아직, 물어뜯을 입이 남았다.”
“…….”
북리도천이 포악한 짐승처럼 이빨을 드러내 진무를 위협한다.
몸도 일으키지 못하는 주제에…….
“입만 살아서는…… 그만하면 됐다.”
“놈! 차라리 죽여라! 서서히 죽어 가는 치욕을 겪게 할 참이냐!”
목까지 균열이 올라온 북리도천이 피 토하듯이 발악했다.
젠장…….
진무의 인상이 팍 구겨졌다.
“하아, 이놈의 오지랖!”
“……?”
진무는 짜증스레 한숨을 내쉬며 북리도천에게 다가가 앉았다.
“도천.”
“뭐냐? 임종이라도 지켜 줄 참이냐?”
“……임종 같은 소리 하네, 빌어먹을 새끼.”
“……?”
턱.
진무의 손이 북리도천의 가슴에 얹혔다.
“좀 더 살자.”
“뭐?”
“그냥, 조금만 더.”
“네, 네놈, 무슨 짓을……!”
운명의 끝자락.
소멸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던 북리도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아아아…….
진무의 손이 희뿌연 빛을 발하고, 흩어지던 북리도천의 마력이 올가미에 잡힌 듯 그 자리에 머문다.
“……너?”
“…….”
잘게 떨리는 북리도천의 눈동자에 희게 빛나는 진무의 재수 없는 송곳니가 투영되었다.
“흡!”
짧게 들이마신 뒤 멈춘 진무의 호흡과 함께 무지막지한 마력이 북리도천의 몸 안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콰아아아!
마력이 하늘이 뚫린 듯 쏟아지는 비가 되어 그의 몸을 적시고, 곧이어 사방을 휘돌아 지형을 바꾸는 홍수가 되어 그의 몸을 헤집는다.
까짓거 옥황도 하고 귀모도 하는 일이다.
그들 또한 하늘과 땅을 나누었는데, 세상이 된 자신이 못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죽음을 맞이한 것이 거름으로 화해 새로운 생명의 토대가 되는 것이야말로 조화의 이치.
그러니 너는 다시 태어나라, 북리도천.
진무는 눈을 감고 북리도천의 몸 안을 관조했다.
새로이 태어나는 그는 귀도 신도 아니어야 할 것이다. 더욱이 자신의 힘을 통해서도 아니어야 한다.
그저 그가 가진 원래의 모습으로…….
한참을 북리도천의 몸 안을 헤집던 진무의 손에 무언가가 닿았다.
몸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열기.
불의 기운이다.
……하긴, 축융이 이 몸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몸에 화기가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라 했었지.
그럼 끄집어내 주마.
진무가 오행의 화기로 깊은 잠에 빠진 북리도천의 잠재력을 깨우기 시작했다.
쩡! 쩌저정!
단단한 껍질을 연거푸 후려치자 잠에서 깬 화기가 짜증스럽게 몸을 일으킨다.
성이라도 내는 양 단숨에 진무의 힘을 밀어 내고, 북리도천의 몸을 집어삼켰다.
굳이 힘쓸 필요 없다. 남은 것은 그가 알아서 행할 것이니.
화아아악!
북리도천의 몸에서 붉은 화염처럼 열기가 치솟기 시작했다.
이내 균열투성이였던 육신이 쪼개져 떨어지고, 화기가 몸 안에 남은 마력을 불태웠다.
자정(自淨).
스스로 정화하고 있다.
진무는 죽어 가는 북리도천의 육신에 조화의 힘으로 그가 원래 가지고 있던 잠재력의 씨앗을 깨웠을 뿐이다.
화르륵!
길을 열어 주니 단숨에 뻗는다.
부서진 팔다리가 새로이 돋아나고, 몸이 재구성되었다.
그리고 시뻘건 화염이 사그라졌을 때, 진무의 손에 닿았던 이는 더 이상 우융이 아니었다.
붉게 타오르는 머리칼과 홍안.
색은 달라졌으되, 그 얼굴은 과거의 기억 안에 머무는 북리도천이었다.
“후우…….”
무리를 했기 때문일까?
머리가 핑 도는 듯한 현기증에 진무가 손을 떼고 털썩 주저앉았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황당해하며 눈을 깜박이는 북리도천의 곁에.
“이게 대체…….”
한동안 멍하니 있던 그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새로이 생겨난 손을 들어 빤히 응시했다.
분명 흩어진 마력과 함께 사라졌던 것인데.
꽉.
움켜쥔 손에서 느껴지는 힘이 너무도 생소했다.
마력도 신력도 아닌 뜨거운 열기.
북리도천이 누운 채로 고개만 돌려 곁에 앉은 진무를 쳐다봤다.
“힘을 나누어 준 것이냐?”
“설마 그랬겠냐? 내가?”
“뭐?”
“내 피 같은 힘을 너한테 준다는 건 말이 안 되지. 내가 얼마나 개고생해서 얻은 건데. 그리고 내 힘을 나누어 주면 귀모랑 다를 게 뭐냐? 나는 그냥 기회를 줬을 뿐이다.”
“……기회? 무슨 기회를 줬단 말이냐?”
“니가 원래 가진 잠재력을 사용할 수 있는 기회.”
“잠재력?”
“그래, 그리고 한 번 더 살 수 있는 기회다.”
“무슨 소리냐?”
“나는 혁련무강에서 진무가 되었고, 다시금 등선을 이루어 선인이 되었다.”
“…….”
“넌 아니지.”
“…….”
“너는 북리도천이었다가 망자에서 마귀가 되었으니까.”
“그게 무슨?”
“한 가지가 빠졌다는 거다.”
“한 가지?”
“그래. 나처럼 세상을 두 번 살진 못했잖아.”
“…….”
“그냥 두고 보기엔 영 찜찜하더라고. 왠지 운빨로 너를 이긴 것만 같아서. 하지만 이제 동등해졌다.”
“…….”
“다시 붙자. 동등한 조건에서…… 누가 더 센지.”
쪼그려 앉아 히죽 웃는 진무를 황당하다는 듯 쳐다보던 북리도천이 실소를 터트렸다.
“……미친놈.”
“아닌 적이 있었냐?”
“그렇긴 하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북리도천은 진무가 수줍어한다고 여겼다.
어차피 자신을 살린 것은 그인데……. 손가락 끝에 박힌 가시 하나 뽑아 주고서도 우쭐하던 생색쟁이 주제에, 잘도 참는구나.
“웃챠! 그만 일어나라. 마왕이 없어서 그런지 저쪽도 대충 정리가 되어 가는 것 같으니까.”
“…….”
먼저 일어난 진무가 손을 내밀자 잠시 고민하던 북리도천이 그 손을 잡았다.
“이제 어쩔 셈이냐?”
“어쩌긴? 막아야지.”
“막아?”
“그래.”
“…….”
“용납이 안 되거든. 천계와 지계의 싸움에 애꿎은 인계가 피해를 본다는 게. 우연히 그런 운명이 되어 버리기도 했고.”
북리도천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그랬던 것 같다.
사파 놈 주제에 잔정은 많아서, 무림인이 민가에 폐 끼치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가능할까?”
“뭐가?”
“귀모와 옥황은 강하다.”
“알아.”
“너와 싸워 본 나는 안다. 네가 강한 것은 인정하지만, 귀모만큼은 아니었다. 그녀는…….”
“…….”
말끝을 흐리며 미간을 찌푸리는 북리도천을 바라보던 진무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야!”
“응?”
“너 뭔가 착각하나 본데?”
“……?”
“설마, 내가 너랑 싸우면서 전력을 다한 줄 아는 거냐?”
“응?”
“……봐준 거야.”
“…….”
“내 참, 기껏 살려 줬더니 이게 어디서 무시를 하고 그래? 약해 빠진 주제에…….”
투덜거리는 진무를 멍하니 바라보던 북리도천이 풉 소리를 내며 웃고 말았다.
하여간에 변하질 않는 새끼.
그리고 하고 싶었던 한마디를 마음속에 깊이 담았다.
……고맙다, 살려 줘서. 이 빌어먹을 숙적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