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625
95화
한 걸음, 한 걸음.
진무는 북리도천이 싸움을 끝내고 쫓아올 만큼 천천히, 그러나 먼 거리를 걸었다.
어느샌가 사방을 후끈하게 데우던 열기가 옅어져 싸늘함이 감돌고, 모든 것을 부술 듯한 충격파도 느껴지지 않았다.
해가 뜨고 지지 않기에 밤낮 구분이 없고 내내 음침함만이 감도는 지계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포궁의 중심에 다가갈수록 마귀들의 공격이 집요해지고 강해졌지만, 그가 걷는 속도는 일정했다.
금혼과 여의가 진무의 곁에 그 무엇도 다가서지 못하도록 지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덧 도착했다.
갈색 암석으로 둘러싸인 황량한 공간 한가운데 머무는 작은 초옥.
싸릿대를 엮어 안쪽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담 안쪽에 놓인 평상에 앉아, 그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귀모(鬼母).
끼이익.
문이 저절로 열렸다.
손짓조차 하지 않았고 돌아보지도 않았지만, 진무가 발 들일 수 있도록.
“두고 오거라. 허락하는 것은 네놈뿐이니까.”
“…….”
귀모의 말에 진무가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서고, 여의와 금혼이 약속이나 한 듯 싸릿대로 만든 울타리 밖에 멈췄다.
진무는 태연히 귀모의 옆으로 다가가 평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발이 자연스레 닿는, 딱 좋은 높이였다.
“오랜만이네.”
“달라졌구나.”
“덕분에.”
“…….”
진무의 하대에도 귀모는 눈 한번 찡그리지 않았다.
사립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귀모는 강하다는 말로 표현되지 않을 만큼 진무가 성장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그는…… 음과 양의 극한을 깨닫고, 천계와 지계를 다스리는 옥황과 자신과 동등한 입장이 되었다.
인계의 대표자.
천지인(天地人) 셋으로 나누어진 세상에, 또 하나의 절대자로서 군림하게 된 것이다.
“기다릴 셈이겠지?”
“아마도?”
“걱정되나 보구나?”
“걱정은 누구나 해.”
“그런데도 잘도 맡겨 두었어.”
“믿으니까, 그를.”
“순조는 강하다.”
“알아.”
“괜찮겠느냐? 너의 믿음이 그의 승리를 가져다주진 않을 텐데.”
“뒈지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나중에 무덤 하나 만들고 술이나 한잔 뿌려 주면 그만이야, 그도 이해할 테고. 그리고, 네 표정을 보니 승부는 아직 팽팽한 것 같은데?”
진무가 히죽 웃자 귀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계에서 일어난 일도 알고자 하면 환히 아는 그녀가 자신의 거처에서 벌어진 싸움을 어찌 모를까?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상황은…… 비슷하군.”
“다행이네. 너도 예측하지 못할 만큼 그가 내 믿음에 화답하는 모양이야.”
“음…… 의외라는 건 부정치 않겠다.”
“설명해 주겠어?”
“싸움을 알려 달란 말이냐?”
“그 정돈 괜찮잖아? 우리 사이에.”
긴장감이라곤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태도에 귀모가 황당하단 듯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사이에…… 라.
“처음에는 북리도천의 패배가 여실해 보였다.”
“…….”
그를 지칭하는 말에 진무가 빙긋 웃었다.
우융이 아닌 북리도천. 더는 그를 자신에게 종속된 마왕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저런……. 하지만 처음에는, 이라면 중간부터 뒤집혔다는 뜻이지?”
“그래.”
“어떻게?”
“그의 힘이 사타가 가졌던 겁화의 권능을 뛰어넘었다.”
“오! 돌부리 하나 넘었구만!”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진무가 신이 잔뜩 난 얼굴로 귀를 기울이자 귀모가 무심히 고개를 저었다.
“하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순조는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야.”
“그럴까? 그럼 이렇게 하지.”
“……?”
“이제 그만 봐라.”
“뭐?”
“보고 있으면 재미없잖아?”
“…….”
“마지막에 결과만 확인하자고, 누가 이곳에 도착할지를 놓고.”
잠시 고민하던 귀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이기든 상관없다.
순조가 진다고 여기지는 않지만, 설사 그렇다고 해도 수호령 따윈 언제든 만들어 낼 수 있으니까.
“좋다, 그리하지.”
“호오? 순조가 이기리라 믿는 건가?”
“아니, 진 놈은 필요하지 않을 뿐이다.”
“잔인하군.”
“누구나 자신만의 방식이 있는 법이니까.”
“좋아. 대신 몰래 보기 없기야.”
“……미친놈. 넌 내가 누구라 여기는 거냐? 뱉은 말을 어기진 않는다.”
“하긴, 귀모가 그럴 린 없지.”
“…….”
진무의 웃음에 귀모가 한숨을 내쉬며 권했다.
“기다리며 차라도 한잔할 테냐?”
“술 쪽이 더 좋아.”
“옳은 말이다.”
피식 웃은 귀모가 손을 휙 내젓자, 주변 풍경이 바뀌었다.
나무판을 덧대 만든 벽이나 곳곳에 매달린 등,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
익숙한 객점 풍경이다.
다만 넓디넓은 객점 안을 채운 탁자는 하나뿐이었고, 가득 채운 음식을 두고 앉은 이는 진무와 귀모뿐이었다.
“젠장, 부러운 힘이네.”
“고작 이따위 걸 말이더냐?”
“좋잖아, 언제 어디서든 손만 휙 저으면 자신이 원하는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
“너도 불가능해 보이진 않는다만?”
“그쪽으론 영 재능이 없는 모양이야, 싸움 쪽이면 몰라도.”
진무가 툴툴거리며 탁자 위에 있는 먹음직스러운 음식과 앞에 놓인 빈 잔을 바라본다.
굳이 서로의 잔을 채워 줄 필요는 없었다.
술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을 머금은 순간 이미 가득 차 찰랑이고 있었으니까.
정말 부러운 능력이란 말이지. 싸움이 끝나면 나중에라도 반드시 수련해 보고 싶을 만큼.
한 잔 들이켠 진무가 눈을 찌푸리며 입맛을 다셨다.
“흠, 맛이 인계만 못하네.”
“익숙함이 다를 뿐이지. 취하는 것은 똑같다.”
“그래도…… 꿈도 흉몽보단 길몽이 좋은 법 아니겠어?”
잔을 내려놓은 진무가 젓가락으로 집은 고기를 보며 투덜거렸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백표를 데려올걸.”
“백표?”
“고기는 그놈이 정말 잘 굽거든.”
“흠, 네놈이 그리 말하니 어떤 맛일지 몹시도 궁금하구나.”
“천상의 맛?”
“그다지란 소리군.”
“상투적인 표현이야.”
“…….”
“그나저나 궁금한 게 많은 표정이네?”
“저런,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거늘.”
“그래도 기다려. 도천이 도착하면 시작하지.”
“조바심이 난다만?”
“알아. 하지만 기다려,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까. 네가 막바지라고 했으니 곧 승부가 나겠지.”
진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귀모가 툭 의문을 던졌다.
“……축융이라 믿고 있겠지?”
“어? 눈치챈 거야? 나도 얼마 전에 알았는데.”
“강제적이었다곤 해도 황혼을 지났으니까. 북리도천에게서 느껴진 힘이 그것과 비슷해 물었을 뿐이다.”
“맞아, 하지만 확신할 순 없어. 오롯이 그의 선택에 따라 달라질 운명이니까.”
“음…….”
별안간 귀모가 미간을 찌푸렸다.
언짢은 기색이 역력하게 느껴지는 침음에 진무가 짜증을 부렸다.
“치사하게…… 본 거야?”
“음.”
“쳇! 철석같이 말해 놓고는 약속을 어찌 그리 헌신짝처럼 버리는지. 정말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네.”
“…….”
겉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진무는 내심 기분이 좋았다.
약속을 어기고 싸움을 살폈지만…… 찌푸리지 않았던가?
휘이익! 쾅!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언가 세차게 땅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잔을 채운 술에 파문이 생겼다.
“열어 주겠어? 결과는 대충 예상되지만, 확인은 하고 싶어서.”
“쳇!”
진무의 청에 귀모가 짜증스럽게 손을 휘젓자 굳게 닫혔던 객점 문이 활짝 열렸다.
초옥이 객점으로 바뀐 순간, 공간이 나뉘었을 것이다. 여의와 금혼의 힘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연결점이 생겼고, 비로소 공간 너머의 세상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바라본 객점 밖의 세상은 부서지는 중이었다. 땅이 푹푹 가라앉고, 뇌전이 사방에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두 마리 신수의 기운, 그 옆으로 느껴지는 미약하지만 선명한 존재감.
북리도천.
그가 몸에서 뚝 떨어져 나온 거대한 머리 하나에 등을 기댄 채 처참한 몰골로 웃고 있었다.
머리밖에 남지 않은 것은 당연히 순조다.
북리도천이 이겼고, 그가 졌다.
승부가 끝남과 동시에 진무를 뒤쫓아 온 것이다.
꽤 먼 거리였으나 오고자 하면 단숨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한 걸음에 수천 리를 걷는 그들에게 멀고 가까움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물론, 귀모가 승낙했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어쨌든 수호령의 죽음으로 인해 포궁이 붕괴하고 있다.
어쩌면 귀모는 이런 결과를 예측하고 미리 공간을 바꿔 놓은 것일지도 몰랐다.
진무를 향해 웃던 북리도천이 힘겹게 일어나 고개를 푹 숙였다.
귀모를 향한 인사일 것이다.
충성하지 않았다곤 했지만, 한때 몸담았던 곳의 주인에 대한 예의겠지.
귀모 또한 싫은 듯 고개를 홱 돌려 버리면서도 인사에 화답하는 양 손짓을 잊지 않았다.
“잠깐 보고 와도 될까?”
“죽을 정돈 아니다.”
“…….”
귀모가 손을 내젓자 객점 문이 닫혀 버렸다.
매몰차긴…….
그래도 좀 귀여운 구석이 있다. 믿고 있던 순조가 진 탓에 살짝 삐진 듯한 느낌이 아닌가?
아무튼, 북리도천은 금혼과 여의가 알아서 잘 챙겨 줄 것이다. 상처가 좀 심해 보이긴 했지만, 후환이 두려워 방치하진 못할 테니까. 공간이 붕괴한다고 해도 살아남지 못할 만큼 약한 녀석들도 아니었고.
“자, 그럼 묻지. 어찌 살아난 거냐? 그리고 네놈이 가진 힘은 대체 어찌 된 연유인 게지?”
“…….”
삐진 듯했던 귀모가 금세 눈을 반짝이며 호기심을 드러냈다.
“잔인하네. 순조의 죽음 따윈 안중에도 없는 거냐?”
“말했듯, 진 놈에겐 관심 없다. 수호령 따윈 언제든 만들어 내면 그만이니까.”
“냉정하다니까.”
“묻는 말에 답부터 해라.”
“성격도 급하고…….”
“놈!”
귀모의 눈동자에 시퍼런 불꽃이 스치자, 그제야 진무가 한숨을 내쉬며 본론을 꺼냈다.
“뭐, 좋아. 북리도천이 살아 돌아왔으니 굳이 더 기다릴 필요는 없지.”
“…….”
“혹시 마고라고 들어 봤어?”
“……마고?”
“저런, 못 들어 봤나 보네. 세상의 주인을 자처하면서 태초에 대해서도 모르고.”
“태초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청염이 가졌던 기록, 기억하고 있지?”
“…….”
“그거 위록이야. 거짓된 기록.”
“거, 거짓이라고?”
“그래.”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리 믿으면 더 할 말이 없는데?”
진무가 입을 닫자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귀모가 이를 악물고 쳐다봤다.
잠자코 있을 테니 계속하라는, 무언의 종용이었다.
“하아, 그런 눈으로 쳐다보니까 말을 안 해 줄 수가 없네.”
“…….”
“축융에게 남은 기록, 그건 그저 엿본 것에 대한 기억일 뿐이야.”
“엿봐?”
“그래. 태초의 세상에는…….”
진무의 길고 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신목이 전해 준 이야기, 마고의 아들임을 인지하는 순간부터 깨닫기 시작한 이야기.
그리고 모든 이야기가 끝났을 때, 귀모의 눈은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커다래져 있었다.
“모든 것이 하나였다고? 세상이 혼돈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고?”
“그래, 니가 아는 이야기는 그저 대를 거듭해 오며 만들어진 것들에 불과해.”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리 반응할 줄 알았지. 하지만 믿어. 내가 직접 다녀왔으니까.”
“그럼 선대 귀모들께서 거짓을 기록했단 말이냐?”
“뭐든, 그들에게는 그게 진실이었겠지. 진실이어야 했을 거고.”
“…….”
“그들에겐 자신들이 신으로 인정받을 당위성이 필요했을 테니까.”
“닥쳐라! 네놈의 말을 어찌 믿는단 말이냐? 인계가 세상의 시작점이었다니! 하면, 산은 마고라는 거신의 살점이요, 흐르는 강과 바다는 피라도 된단 말이냐!”
“응? 그건 무슨 생뚱맞은 소리야?”
“……?”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야. 마고는 마고고.”
귀모가 얼굴을 찡그린 채 진무를 응시해 왔다.
하아, 이걸 어찌 이해시킨다?
마고는 그냥 마고라는 신목의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자신의 기분이 비슷했을 것 같았다.
사실, 깨닫기 전엔 말해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인정하기도 싫을 것이고.
지금껏 신이라고 믿어 온 자신의 정체성마저 부정해야 하니까.
“어쨌든 믿고 말고는 네 선택이고, 중재자로서 내가 할 말은 하나야.”
“…….”
“사후는 알아서들 하고, 현세의 인계는 괴롭히지 마.”
“이놈이!”
대놓고 꺼지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다는 걸 깨달은 귀모가 벌떡 일어나 마력을 발산했다.
“귀모.”
“…….”
다시금 술이 채워져 찰랑거리는 술잔을 든 진무가 송곳니를 살짝 드러내며 담담히 말했다.
“이건 권고가 아니야. 통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