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626
96화
한참의 침묵이 이어졌다.
귀모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술잔을 든 진무를 가만히 바라봤다.
“큭, 큭큭큭, 크핫핫핫!”
“…….”
객점 안이 쩌렁쩌렁하게 울리도록 웃어 젖히는 귀모의 모습에 진무가 얼굴을 찌푸렸다.
“뭣이 어째? 통보? 네가? 나에게?”
“…….”
“나더라 인계에서 물러나라고? 이거 원, 고작 만 년밖에 안 된 코흘리개 선인 놈이…….”
한참을 웃다 뚝 그친 다음 찾아온 것은 스산한 압박감이었다.
심연(深淵) 같은 검은 눈동자.
하늘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혼이 빨려 들어갈 듯한 그녀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진무는 이를 꽉 깨물었다.
이 정도였나?
조화의 힘을 깨달아 동등한 선상에 있다 여기고 있었건만, 아직 먼 모양이었다. 진의(眞意)가 담긴 귀모의 눈빛에 진무는 가슴에 천년거석이라도 올려진 듯 무겁고 답답함을 느꼈다.
힘에 차이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만약 이전이었다면, 조금 전 그 눈빛이 자신을 향한 순간 온몸이 가루처럼 부서져 허공에 흩날렸을 것이다.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것은 귀모가 가진 특유의 기백이다.
제왕(帝王)이 본디 그러하지 않은가.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공간을 가득 채우는 법이라, 상대가 절로 고개를 숙이게 만든다.
또한 노장(老將)이 그러하다. 오랜 세월 쌓아 온 경험이 몸속에 녹아들어 자신도 모르게 눈빛만으로도 상대를 주눅 들게 하는 분위기를 가진다.
펄떡펄떡 뛰는 힘찬 생선처럼 혈기 방장한 젊은 무인들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경험 많은 노고수들에게 목숨을 잃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위축되어 자신의 힘을 발휘하지 못해서.
태초의 진리에 가까워진 진무였으나, 귀모가 가진 세월의 힘을 어찌 뛰어넘을 수 있겠는가?
선인이 된 지 고작 만 년밖에 되지 않았을뿐더러, 마고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조화의 힘을 사용하기 시작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녀 말대로…… 코흘리개였다. 천지 분간하지 못하고 힘만 믿고 날뛰는.
하지만 진무는 알고 있었다. 이럴 때일수록 여유로워야 한다는 것을.
위축됐다는 것을 보이는 순간, 짐승은 날카로운 이빨로 목덜미를 노려 온다. 그렇기에 긴장을 풀고, 냉정한 마음으로 상대를 마주해야 한다.
또한 그러한 각오를 다져 주는 데 필요한 것은, 허세!
“후우…….”
“……?”
악물었던 이에 힘을 푼 진무가 깊은 한숨을 내쉬곤, 의자에 몸을 묻었다. 귀모와 똑같은 자세로 등받이에 몸을 밀착시키고, 뒤통수가 딱 붙도록 가져다 댔다.
그런 다음엔 천천히 다리를 꼬고, 무릎 위에 양손을 포갠 뒤…….
귀모보다 더 턱을 쳐들고 깔아 보며 웃었다.
“과연.”
“…….”
“나이를 뒷구멍으로 처드시진 않으셨나 봐?”
“뭐라?”
“이 마당에도 여유를 보이다니 말이야.”
진무의 말에 귀모의 코끝이 씰룩거렸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머릿속으로는 별의별 생각이 다 들지?”
“…….”
“눈깔이 그런데? 저놈이 어떤 힘을 가졌을까? 싸우면 이길 수는 있을까? 혹시나 이대로 삶이 쫑나는 건 아닐까?”
“이, 이 자식이…….”
“하긴, 당연할 테지. 모르니까. 태초가 어떻고, 마고가 어떻고……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아니 들었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겠지. 안 그래?”
진무의 말에 귀모의 눈가가 파르르 떨린다.
……역시.
그냥 한번 쿡 찔러 본 건데, 제대로 얻어걸린 모양이다.
본시 눈이란 마음의 창(窓)이니, 희, 노, 애, 락, 애, 오, 욕의 칠정(七情)이 그 안에 담기고 성품이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어떤 이들은 눈빛조차 들키지 않기 위해 철저히 훈련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아무리 감추려 해도 은연중에 드러나기 마련인 것을.
특히나 지금처럼 하찮게만 여기던 상대가 자신을 위협할 만큼 성장한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자존심이 크게 상했을 테니까.
자, 이걸로 대화의 주도권은 잡은 셈이니, 좀 더 여유로워져 볼까?
“사실, 당장 싸워도 상관없어. 넌 절대로 날 이길 순 없거든.”
“뭐라?”
“너희가 이어 온 음과 양의 힘이 어디서 온 건지 말했지?”
“…….”
“조화(調和).”
태초의 힘, 진무가 깨달았다는 그것이다.
사실 귀모도 이미 알고 있었다. 계속해서 살폈음에도 그의 힘을 정의할 수가 없다는 것을.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진무는 지금 희한한 존재감을 발현하고 있었다.
무언가 거대한 것을 품고 있는 듯 보이기도 했고, 무용한 것처럼 헛되어 보이기도 했다.
눈앞에 있음에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가늠할 수 없는 존재. 지금의 진무는 그랬다.
하여 자신감이 생기지 않았다.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라, 싸울 수 있다는 생각마저 들지 않았다. 마치 허상(虛像)을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음의 극한, 양의 극한.”
“…….”
“너희는 스스로 가진 게 최강이라고 생각하지. 하지만 겨우 원류의 일면을 흉내 낸 것에 불과해. 세상을 손에 쥔 듯 거들먹거리고 있지만, 모방이고 아류(亞流)에 불과한 하찮은 힘이지.”
귀모가 뿌드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갈며 진무를 노려봤다.
“저런, 화가 많이 났나 보네. 하지만 그러지 마라. 나이도 적지 않은데 아껴야지,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려면.”
“…….”
노인네 취급까지 하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것인지 귀모의 입술이 파들파들 떨리기 시작했다.
계획대로다.
애초에 말로 해서 물러날 상대가 아니지 않은가?
아마 곧 싸우게 될 것이다.
진무는 반드시 그녀를 쓰러뜨려야 했고, 승리하자면 준비 과정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지피지기(知彼知己). 일단 알아야 한다.
그녀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어찌 대응해야 하는 것인지.
하니, 그 속 깊은 곳까지 박박 긁어서 약을 바짝 올려 두는 것이 좋다. 싸움이 시작됨과 동시에 그녀가 자신의 모든 것을 꺼내 공격하도록.
“놈, 아주 기고만장하구나.”
“할 만하니까.”
“…….”
“그러니까 선택해. 딱 한 번만 기회를 줄게.”
“기회?”
“그래, 기회. 원래는 지계를 싹 쓸어버릴 생각으로 왔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너를 보니 딱해서 말이야.”
“…….”
“지금이라도 인계에서 물러나고, 내가 내거는 조건에 응하면 그냥 돌아갈게.”
진무는 일부러 얄밉기 짝이 없는 표정까지 지어 가며 귀모를 도발했다.
꽈아악.
“……!”
탁자에 올려진 귀모의 손이 꽉 움켜쥐어지고, 그녀의 분노에 반응하듯 대기가 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솥 안의 물처럼 끓기 시작한 것이다.
묵직한 압력이 온몸을 짓눌러 오는 듯한 느낌에 곧 공격이 시작되리라 생각한 진무가 자신도 모르게 피할 준비를 할 때였다.
그런데…… 어?
“미친놈.”
“…….”
별안간 귀모가 픽 웃어 버리고, 압력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를 흔들어 동요를 만들고, 헛손질이라도 시켜 볼 요량이었더냐? 얄팍한 놈 같으니.”
“…….”
“설마하니 내가 고작 그런 수에 당할까. 하지만 나 또한 알겠다, 네놈이 그런 얕은꾀를 내는 이유.”
“…….”
“내게서 허점을 보고 싶었던 것이겠지. 화가 나 미친 멧돼지처럼 날뛰는 사이에 말이야.”
순식간에 냉정함을 되찾아 버린 귀모의 모습에 진무가 아까워 죽겠다는 듯 혀를 찼다.
“멍청한 놈. 네 앞에 있는 내가 누구라고 여기는 것이냐?”
“…….”
젠장, 쉽지 않네.
싸우기 전에 약을 바짝 올려 놓고 허점을 노려 볼까 했더니, 이리도 금세 평정을 되찾을 줄이야.
하지만 이미 갈 데까지 갔다.
펄펄 끓기 전에 뚜껑이 열려 버렸지만, 귀모의 눈동자에 스친 진한 열기를 분명 보지 않았던가?
이왕지사 약 올린 김에…….
“나는! 귀…….”
“욕심쟁이 노파.”
“…….”
아마 ‘귀모다!’라고 하고 싶었을 테지만, 진무가 빨랐다.
그가 삿대질까지 하며 대뜸 말을 끊어 버리자 귀모의 입이 벌어진 채 돌처럼 굳어 버렸다.
“누구로 보이냐며? 내 눈에 그렇게 보여. 지계에 만족을 못 하고 벼룩의 간까지 빼먹을 생각으로 인계를 공격해 집어삼키려고 하는, 성질머리 못된 빌어먹을 노파.”
“…….”
“다 늙어 빠져서는 주책맞게 그게 뭔 욕심이냐? 나이를 처먹었으면 뒷방으로 물러나서 어린 마귀들 똥 기저귀 갈면서 재롱이나 볼 생각은 안 하고…… 쯧쯧, 귀모라는 이름이 아깝다.”
“…….”
진무의 입에서 멸시 어린 말들이 둑 터진 듯 마구잡이로 쏟아져 나왔다.
그저 멍하니…… 진무를 바라보던 귀모의 초점 없는 눈동자에 다시금 불길이 치솟았다.
드드드드드.
공간 전체가 무너질 듯이 진동한다.
양손으로 탁자를 움켜쥔 귀모의 얼굴색이 형형색색으로다가 지랄 맞게 변하는 것을 본 진무가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됐다.
솥 안의 물이 다시 끓기 시작했다. 이전보다 더욱 뜨겁게.
“이…… 빌어먹을 개자식이!”
“…….”
“죽여 버리겠다!”
콰아앙!
눈이 완전히 돌아가 버린 귀모가 탁자를 뒤집어엎고, 그녀의 몸에서 엄청난 양의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 * *
진무와 귀모가 있던 공간의 문이 닫혀 버린 뒤, 북리도천을 치료한 여의와 금혼은 잔뜩 긴장한 채 숨죽여 기다렸다.
순조의 소멸로 포궁이 붕괴하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위협은 되지 않았다. 자신들이 서 있을 땅덩어리 하나 유지할 만한 힘은 충분했으니까.
다만 어느 순간 공간이 분리된 탓에 진무의 존재감조차 느껴지지 않으니,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알 수 없어 걱정스러울 뿐이었다.
“너무 오래 걸리는데?”
“음…….”
“혹시 벌써 뒈진 건 아니겠지?”
“설마? 그랬다면 귀모가 벌써 나오지 않았을까요?”
“……제길, 안타깝군. 그냥 죽어 버리면 좋겠는데.”
“예?”
진지하게 혼잣말로 아쉬워하는 여의의 모습에 금혼이 눈을 끔벅였다.
“뭐?”
“아니, 그, 주어가 생략돼서…… 의미가 좀 모호해서요.”
“…….”
“그러니까 죽어야 하는 대상이…….”
“당연히! 귀모지.”
“그, 그렇지요?”
“암! 귀모야, 귀모. 뭘 그리 깊이 생각하고 그래?”
“…….”
여의가 아무리 시치미를 뚝 떼 봐야 신뢰가 안 가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리고 실은 자신도…… 죽음의 대상이 귀모가 아닌 누군가였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 있었기에.
아주 약간, 티끌 정도?
그러다 지레 화들짝 놀라 자신은 아니었다고 속으로 부정하던 그때, 기묘한 광경 하나가 보였다.
“어? 저게…….”
“응?”
금혼이 바라보는 곳을 향해 홱 고개를 돌린 여의의 눈에 보인 것은 아지랑이였다.
뜨거운 열기로 인해 생겨나는…….
“땅이…… 엇! 뜨거!”
멍하니 바라보던 여의가 발바닥에 느껴지는 뜨끈함에 화들짝 놀라 뛰어올랐다.
금혼도, 북리도천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훌쩍 뛰어올랐다.
치이익.
땅이 끓고 있다. 일부가 아니라, 드넓은 포궁 전체가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이, 이게 대체?”
“음, 공기가 너무 뜨거운데요?”
“그러게?”
숨쉬기조차 힘겨울 정도로 데워지는 공기에 갑갑함을 느끼던 그 순간, 북리도천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피, 피해…….”
“응?”
“뭐?”
대경실색한 얼굴.
사시나무처럼 떨기 시작하는 북리도천의 모습은 이전과는 극명하게 달랐다.
이런 열기 속에서 오한이라고?
하지만, 금혼과 여의는 이내 깨달았다.
북리도천의 눈에 담긴 것이 지극한 두려움이라는 사실을.
“이런 쌍! 피하라고, 이 새끼들아!”
“……!”
토해 내듯 외치며 포궁 밖으로 쏜살처럼 내달리는 북리도천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둘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뛰기 시작했다.
우지직! 콰아아아앙!
별안간 허공에 실낱같은 금들이 생겨나더니, 공간이 돌 맞은 얼음장처럼 박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