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63
63화
“오, 어서 들어오게.”
명현이 명진을 반갑게 맞이했다.
“장문인을 뵙습니다.”
“이 사람, 정식 회의도 아닌데 뭐하러 그리 격식을 차리는가. 이리 와 앉게.”
“예.”
명현은 자리를 내주고 직접 차를 따라 명진에게 내밀었다.
명진은 그사이에 명현의 얼굴에 어린 수심을 읽어 내고 물었다.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십니까?”
“근심?”
“예. 그리 보이는군요.”
“그랬는가?”
명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맹주가 보낸 서신을 슬며시 내밀었다.
“이건?”
“맹주님께서 직접 보낸 서신일세.”
“음.”
명진이 서신을 읽다가 희미하게 웃었다.
“무얼 고민하십니까?”
“뻔히 보이는 수가 아닌가? 진무를 회유해 볼 속셈인 것일세.”
“그러네요.”
“그리 쉽게 대답할 문제가 아닐세.”
“보내면 될 일입니다.”
“뭐?”
“차라리 잘되었습니다. 이참에 청우와 청상도 용봉회에 보내시지요.”
안 그래도 고민인데 명진이 한술을 더 뜨자 명현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가?”
“장문인.”
“…….”
“오늘 진무가 제게 와서 표주를 떠나겠다며 허락을 구했습니다.”
“표주라고?”
“예.”
“아니 그 아이가 어째 표주를 나간단 말인가? 이미 그 아이의 무공이.”
“하나 경험은 일천하지요.”
“음.”
“조금 이르기는 하나 어차피 무당지검의 칭호를 받았으니 오대도문의 인장을 받아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이참에 강호 경험도 할 겸 표주를 보내 주시지요.”
“응?”
“무당지검은 중원 오대도문의 인장을 받아 오는 것이 전통이지 않습니까.”
“아!”
명진의 말에 명현이 제 무릎을 쳤다. 어찌 이 생각을 못 했단 말인가?
무당지검이 몇 대에 걸쳐 끊어졌었기에 그 생각을 깜빡 잊고 있었다.
“용봉회의 목적은 각 파의 이대제자들 사이에서 옥석을 가려내기 위함입니다. 이미 청상과 청우의 무공이 나이답지 않게 강맹하니 단연 발군의 실력을 보일 것입니다.”
“옳네. 무당의 이름을 세울 뿐 아니라 체면도 차릴 수 있지. 저들의 요구를 거절한 건 아니니까 말일세.”
“예. 오대도문의 인장도 받을 겸 진무를 인솔자로 두시고 인사를 전하게 하시지요.”
“옳거니. 찾아오라 했으니 찾아가 인사를 하고, 표주 중이니 회유는 정중히 거절하고.”
“예. 무당지검이 된 제자가 반드시 지켜야 할 전통이니 맹주께서도, 무풍개 어른께서도 과한 요구를 하며 잡지는 않으실 겝니다.”
“허허, 자네의 혜안(慧眼)에 탄복할 따름일세.”
“혜안이라니요. 저도 진무가 표주를 보내 달라 하지 않았다면 생각해 내지 못했을 일입니다.”
“알겠네. 하면 서둘러 채비를 하라 이르게.”
“예, 장문인.”
막상 진무의 표주에 대해 어찌 말할까 고민했던 명진도, 정무맹의 청을 어찌 거절할까 고심했던 명현도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물론 가장 득을 본 것은 진무였다.
* * *
정무맹주 집무실.
호피로 감싸인 의자에 느긋하게 앉은 중년의 사내.
고집이 묻어나는 얼굴에 용목(龍目)을 박아 넣은 듯이 부리부리한 눈.
의자 뒤 벽에 걸린 백색의 검과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그는 당금 정무맹을 이끄는 검성 철지량이었다.
위압감이 절로 느껴지는 외모만큼이나 그의 업적은 대단했다.
정사마를 통틀어 검으로 최고의 위치에 오른 무인.
맹주에 오른 지 십 년. 그는 다양한 노력을 통해 정무맹을 변화시켰다.
지부를 신설해 지역 무림계를 통제하고 우수한 재원을 끌어들여 맹 예하 여섯 개의 무력 단체를 만들었다.
그들을 통해 정무맹 산하의 각종 분쟁을 해결하는 한편, 각 파의 명망 있는 고수들을 포섭해 맹에 상주시킴으로써 중앙 집권적 체계를 형성했다.
그로 인해 정무맹은 흩어지지 않고 뭉칠 수 있었고 일월마교, 사패천과 더불어 중원의 삼대 세력으로 떠올랐다.
누구나 인정하는 위업. 그럼에도 지도자로서, 권력자로서 어울리지 않는 소탈함으로 중원 정파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거인.
칠십에 이른 나이에도 모두가 연임을 의심치 않을 정도로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 그에게는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는 말조차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의 옆에서 바늘과 실처럼 따라다니는 이가 있었다.
철지량이 무력이라면 그는 그 무력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지혜.
바로 지금 그의 앞에 학익선(鶴翼扇)을 들고 앉은 고고한 자태의 학사이자 정무맹 대군사 제갈협진이었다.
“맹주님, 각 파에 용봉회에 관련된 서신을 모두 전달하였습니다.”
“그러한가?”
제갈협진의 보고에 철지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는 어찌 되어 가는가?”
“예. 이번에 신설되는 용봉관은 무관으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낼 것입니다.”
“교두들은 모두 선발하였는가?”
“예. 정무맹 예하 이름 높은 재야 고수들을 모두 초빙하였습니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은.”
“응?”
“용봉관주를 누구로 앉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흠.”
철지량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새롭게 신설되는 용봉관.
이는 정무맹의 두 기둥인 제갈협진과 양소방의 의견을 모아 진행한 것이다.
그 이면에는 의문의 세력인 ‘궁’에 대비하기 위함도 있었으나, 중원을 삼분하는 일월마교와 사패천보다 훨씬 강한 무력을 지니기 위함도 있었다.
가려지지 않은 옥석들을 선발해 정무맹 예하에 강력한 무인 단체를 장기적으로 육성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렇기에 구파일방, 칠대세가는 물론 정무맹에 소속된 중소 방파를 비롯해 상계의 무인들에게까지 소식을 전했고.
방을 붙여 재야의 재능 있는 낭인들까지 참가할 수 있게 했다.
계획대로 용봉관이 지어지고 제대로 운영만 된다면 장차 정무맹 최대의 무관이자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세력이 된다.
그렇기에 용봉관주를 누구로 앉히는가의 문제는 매우 중요했다.
오직 맹주의 명에 충성해야 했고, 흔들림 없이 곧은 마음을 가져야 했다.
“정무칠성 중에서 고르시면 안 됩니다.”
“음.”
자칫 맹주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력에 소속되지 않은 자여야 하고요.”
자파의 이득을 우선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땅한 자가 있는가?”
“백로(白鷺)는 어떠십니까?”
“백로를?”
“예.”
“음.”
분명 그의 이름을 꺼내기 위해 수도 없이 고민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백로(白鷺) 등여평.
올해 나이 예순둘.
호남성(湖南城) 석문의 등가장이라는 작은 무가 태생이었으나 이미 그의 무위가 정무칠성에 버금간다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권력욕이 없고 세력 다툼에도 뜻이 없는지라 가문의 주인 자리를 동생에게 물려주고 은거한 자였다.
“백로라면 모두가 납득할 만한 인사이긴 하지.”
“그렇습니다. 그분의 신상에 어떤 오점도 없을 뿐더러 맹주님과 작은 연조차 없으니 더욱 합당하리라 생각합니다.”
그의 고고함에 대해서는 철지량도 잘 알고 있었다.
정파 내의 세력 다툼에서 벗어난 중도파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
오죽하면 ‘백로’라 불리겠는가?
“하지만 그는 은거한 뒤로 신분을 감춘 채 강호 유람을 다닌다 하지 않았나?”
“예.”
답하는 제갈협진의 얼굴이 자신에 차 있자 철지량이 피식 웃었다.
“위치를 찾은 모양이군.”
“비흔께서 도움을 주셨습니다. 의창에 있다는군요.”
“의창? 근처에 있었구만.”
“어찌할까요?”
“음. 그를 용봉관주로 앉힐 수만 있다면야 더없이 좋은 일이네만.”
그의 성정을 잘 아는 철지량은 반신반의한 표정을 했다.
“그런데 그가 승낙을 할까? 예전에도 맹의 장로직을 권했다가 거절당했지 않은가?”
“그랬었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만한 인물은 없습니다.”
“음, 좋네. 일단은 그를 초빙해 보게. 허나 다른 인물들도 염두에 두는 것이 좋을 게야.”
“예. 이미 차선책으로 용무 여월협 대협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흠, 용무는 좀 그렇지 않겠나?”
제갈협진이 거론한 인물에 철지량이 껄끄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용무(龍武) 여월협.
등여평에 비하면 모자라지만 일파의 장문인에 버금갈 정도로 뛰어난 무인이었다.
또한, 곧은 성정만을 따진다면 등여평에 못지않기에 이견이 없을 것은 분명했다.
문제는 철지량과의 인연이었다.
너무 깊다.
어렸을 때부터 형 동생 하며 자란 막역한 사이니만큼 그가 막강한 힘을 가진 용봉관주가 된다면 주위의 시선이 곱지 못할 것이었다.
필경 인맥에 의한 인사니 하며 호사가들의 입을 오르내릴 것이 자명했다.
“일단은 차선책일 뿐입니다. 만약 백로께서 거절하신다면 어쩔 수 없이 강행해야 하지만 승낙하신다면 그분께 부관주의 직위를 청해 볼까 합니다.”
“알겠네. 두 사람 모두 모자람 없는 인물이니 잘 판단해서 처리하리라 믿네.”
“예.”
“어쨌든 이번 용봉회에 참석하는 이들 중 이름이 제법 알려진 녀석들이 많은 모양이더군.”
“예. 특히나 비흔 어른께서 천거하신 무당의 제자는 단연 발군인 듯합니다.”
“흐음.”
철지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궁’이라 불리는 이들을 은밀하게 쫓던 중에 만난 무당의 제자.
제갈분가와의 마찰에서 모익상을 꺾었다.
그것도 그냥이 아니라 개 패듯이 해 두어 다시 재기가 어려울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검사를 사용하고, 양소봉의 쇄심파를 똑같이 흉내 내었다고 들었다.
궁금증이 일어 알아보니 사패천 수적의 하나인 천수채까지 토벌했다지 않는가?
개방에서 은밀하게 전해 온 소식이라 아직 무림에 그의 이름이 자세하게 소문이 나지는 않았으나 실로 놀랄 만한 일이었다.
“안 그래도 내 무당 장문인께 직접 서신까지 보냈다네.”
“예. 들었습니다.”
“그래. 아, 그러고 보니 자네 가문에서도 천재라고 소문난 제갈선의 쌍둥이 동생이 참석한다지?”
“예.”
“흠, 아깝구만. 그 제갈선이라는 아이를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가문의 대공자니 어쩔 수 없지.”
철지량이 그 이름을 거론하자 제갈협진이 어색하게 웃었다.
‘실은 그 아이가…….’
제갈협진은 무언가 말을 감추는 듯했다.
“허허, 다행일세. 재능 있는 젊은 무인을 최대한 많이 모아야 함이야. 그들이 장차 우리 정무맹을 이끌 핵심이 될 테니 말일세.”
“옳은 말씀입니다.”
“어쨌든 차질 없이 준비하도록 하게.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 정무맹은 또 한 번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될 것이네.”
“예. 맹주님.”
제갈협진이 공손하게 인사하고 밖으로 나간 뒤 철지량이 창가로 다가갔다.
멀리 완공되어 가고 있는 용봉관의 공사 현장이 보였다.
“흐음, 백로라.”
좋은 일이었다.
그가 관주직을 허락한다면 용봉관의 위상은 한층 높아질 것이 틀림없었다.
“호기심이 많은 성격이니 어쩌면 수락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