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66
66화
“이보시오. 선주.”
“예?”
“본인은 제갈세가의 제갈선이라 하오.”
“아!”
선주의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이미 그들의 복장을 보아 제갈세가의 인물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의창 제갈분가에서 용봉회를 위해 출발하는 인물이겠거니 했는데, 분가가 아닌 융중 본가의 제갈선이라니.
호북성에서 상단을 운영하는 이들 중에 그의 지체 높은 얼굴은 보지 못했어도 이름을 모르는 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청원상단의 선주 노곡입니다.”
“과례는 삼가시오. 딱히 폐를 끼치려 신분을 밝힌 것은 아니니.”
고개를 숙이는 선주 노곡을 향해 웃는 그 모습이 지극히 예의 발랐다.
과연 중원 오대세가의 하나인 제갈의 자제라 할 만했다.
“내 이분과 친분이 있어 그러하니 어떻소? 내 저분들과 함께 제갈의 배에 모시고자 함인데?”
“예?”
“혹, 호위가 필요하다면 함께 온 의창분가의 무인들을 무상으로 돕게 하리다.”
“아, 그것이.”
“그것으로도 모자란다면 일간에 융중의 본가로 찾아오시오. 내 미리 연통을 보낼 터이니.”
“……!”
제갈선의 말에 노곡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이 무슨 길 가다 금덩이를 발견하는 상황이란 말인가?
분가도 아니고 융중의 본가라니. 더욱이 그냥 찾아가는 것도 아니고 초대라면?
살면서 이런 천재일우의 기회를 만나는 순간은 다시 없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말을 꺼낸 것이 다른 이도 아닌 제갈선이었다.
이건 무조건이다.
그리고 그의 말에 담긴 모든 선결 조건은 절대로 세 명의 무인들을 상선에 태우지 말아야 함을 깔고 있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내리게 해야지.
강제력을 동원해서라도 쫓아내야 할 일이었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노곡이 급히 상선에 올랐다.
“무사분들.”
“…….”
“내려 주십시오.”
선주가 받은 전낭을 내밀자 진무의 눈동자에 짜증이 어렸다.
아래에서 제갈선과 나누는 이야기를 못 들을 만큼 무공이 낮지 않았다.
저게?
진무가 제갈선을 째려보았다.
“싫소.”
진무가 딱 잘라 거절하자 선주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아니 왜요?”
“이미 거래가 끝났지 않소?”
“아니 계약서도 없는 구두 거래가 무슨 소용입니까? 지금 상단의 미래가 달려 있는데요.”
이런 망할 놈이!
상인이 되어서 신용이 어찌 이따위란 말인가. 아무리 제 이득을 위해서라지만 이리도 안면 몰수를 할 줄이야.
“정히 그러시면 원래 주신 금액에 웃돈까지 드리리다. 제발 부탁드리오.”
선주가 원래 진무의 것에 더해 자신의 전낭까지 꺼내 애원했다.
졸지에 돈이 새끼까지 쳐 온 상황이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 웬만하면 우리 배에 올라 편하게 가지 그러시오.”
제갈선이 웃으며 말을 보태 권하자 진무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내가 왜?”
진무의 말에 제갈가의 무인들이 언짢은 표정을 짓자 제갈선이 그들을 손으로 막았다.
“하하, 거, 꽤 까칠한 성격이신 모양입니다. 아마 이분을 이리 박대한 것을 알면 귀하의 어르신들께서도 그리 좋아하지 않으실 터인데요?”
“놀고 있네. 내가 왜 그딴 걸 신경 쓴다고 생각하지?”
“뭐요?”
“우리한테는 신경 끄고 거기 귀찮은 노인네나 태워 가.”
진무의 말에 제갈선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상한 도사다.
표정을 봐서는 자신들이 무당 도사라는 사실을 들켰음을 아는 눈치가 분명한데.
등여평의 신분까지 슬쩍 들먹이며 사문을 거론했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말투였다.
하지만.
“하하, 그러고 싶은데 어르신께서 꼭 그대들과 함께 가고 싶은 모양이외다.”
제갈선의 미소에 진무가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나 원, 별 오지랖 넓은 년을 다 봤네.”
“……!”
다행히 아무도 듣지 못한 혼잣말이었으나 제갈선은 그의 입 모양을 분명히 알아보았다.
‘어, 어찌 알았지?’
제갈선은 진무를 놀란 눈길로 쳐다보았다.
제갈선.
아니, 제갈산산.
그는 융중산 제갈세가의 무남독녀였다.
원래 쌍둥이로 태어났으나 오빠가 죽은 이후 어쩔 수 없이 남장을 하게 되었다.
제갈세가의 상황 때문이었다.
본가의 후사가 정해지지 않으면 양자를 들여야 한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나 그것은 융중산 제갈본가에 있어서는 치명타나 다름없었다.
본가의 직계가 아닌 양자가 후계가 되면 현 가주의 죽음 이후로 세력에 균열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정통성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원래의 이름 산산을 버리고 선이라는 이름을 택했으며, 사내처럼 입고 사내처럼 살게 되었다.
그것은 제갈본가의 가주와 가모, 그리고 일부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그에 관련된 내용은 가주의 명에 의해 외부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철저히 통제되었기에 본가의 핵심 인물 외에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다행히 가진 바 재능이 뭇 사내 열을 뛰어넘었기에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의심을 품은 자들은 많았으나 그때마다 가주가 막았고, 쌍둥이였던지라 조금 왜소하고 예쁘장한 얼굴을 가진 사내라 여겨졌다.
그리고 얼마 전, 본가에 경사가 생겼다.
동생이 태어났다.
사내아이가.
다행인 일이었으나 다시 여인으로 돌아갈 일만 남은 그의 앞을 기다리는 길은 하나뿐이었다.
정략결혼.
제갈산산은 절대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한 가문의 안주인으로 갇혀 살기에는 그의 능력이 너무 뛰어나기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 용봉회가 개최되었다.
가문에 속하지 않고 여류 무인으로 이름을 날릴 기회가 온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가주를 설득했고, 결국 허락을 받았다.
진정 여인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이번 무한행이 제갈선으로서의 마지막 여정이었다.
딱히 더 미룰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십 년간 지속해 온 남장이라 편하기도 했고, 어쩌면 애증의 산물일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시비에게 면사를 씌워 제갈산산으로 분장시켰고 자신은 제갈선의 모습으로 무한까지의 호위를 자청했다.
무한에 도착해 정무맹의 대군사 제갈협진만 만나고 나면 제갈선은 병을 얻어 은거하는 것으로 사라질 것이고 동생이 소가주에 오를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 그 사실을 아는 것은 오랫동안 자신의 곁을 지킨 율평과 사령뿐이었다.
한데 처음 보는 진무가 어찌 알고 자신의 정체를 단번에 파악한단 말인가?
태생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아름다운 외모를 완벽히 숨기긴 힘들었으나 같은 나이대의 여인처럼 분이나 사향(麝香)조차 쓰지 않았고, 십 년이라는 세월 동안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얼굴을 변장하고 말투까지 완벽한 사내로 행동해 왔었는데.
‘어떻게 알았지? 백로 어른도 눈치를 채지 못하는 것 같은데.’
제갈선은 진무에게 강한 호기심을 느꼈으나 스스로의 속내를 감출 줄 아는 자였다.
놀라긴 했으나 얼굴에 자신의 감정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다.
“뭐, 상황을 보니 이놈의 상선이 우릴 태우기는 물 건너간 모양이군.”
훌쩍 배에서 뛰어내리는 진무의 모습에 제갈선은 더욱 사내처럼 말했다.
진무가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린 것을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함께 가시겠소?”
“내가? 니들이랑? 미쳤군.”
“…….”
코웃음을 친 진무가 청상을 불렀다.
“야, 가서 말이나 구해 와.”
“예, 사숙.”
진무가 선주에게 돌려받은 두 개의 전낭을 청상에게 내밀었다.
사숙이라고?
그 말에 제갈선과 등여평은 또 한 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비슷한 또래이기에 그저 사형 정도로 생각했었는데.
“제길, 좀 편하게 배편을 이용해 유유자적하게 가려고 했더니 별 시답잖은 것들이 끼어들어서는. 결국 육로로 가게 생겼네. 귀찮게시리.”
짜증을 한 아름 쏟아붓고 그들을 지나쳐 가는 진무의 모습에 제갈선과 등여평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둘은 이미 그들이 무당의 도사임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마땅히 인격자여야 할 무당의 도사.
그리고, 동배의 제자들에게 사숙이라 불리는 무당의 도사.
장로일 리는 없고 필시 일대제자…… 와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다.
고작 약관의 어린 도사는 지극히 말투가 거칠고 싸가지까지 없었다.
인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흠, 이거 본의 아니게 폐를 끼쳤구만.”
“아닙니다. 어르신.”
등여평의 사과에 제갈선이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마차가 좋겠습니까? 아니면 말이 좋으시겠습니까?”
“응?”
“쫓아갈 생각이시지 않습니까?”
“허허, 이 사람. 역시 제갈이 자랑할 만하이.”
“저희가 함께 모시겠습니다.”
“자네도 말인가? 이미 배를 전세 낸 게 아닌가?”
“하하, 배는 배대로 가면 될 일입니다. 서둘러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허헛, 그리하세.”
자신의 마음을 쏙쏙 알아채 주는 제갈선의 모습에 등여평이 흐뭇하게 웃었다.
“율평.”
“예. 대공자.”
“반은 청운상단을 돕고 반은 산산을 호위해 배편으로 이동하게. 나는 어르신과 함께 육로로 가겠네.”
“예? 수행 무인도 없이 말입니까?”
“수행 무인? 눈앞의 어른이 누군지 몰라서 하는 소리인가?”
제갈선이 고개를 내젓자 율평이 등여평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와 사령(四靈)들만이라도 따르게 해 주십시오. 마차를 구하면 마부도 있어야 하고 육로라면 가끔 야숙도 해야 할 것이니.”
“흠. 그러지.”
제갈선은 율평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의 비밀을 아는 자들이니 불편함은 없으리라.
* * *
“…….”
진무가 잔뜩 찡그린 미간으로 옆을 째려보았다.
청상이 구해 온 말을 타고 육로를 따라 달린 길.
일부러 마을을 지나 산기슭에서 야숙을 택했다.
그런데 저 거머리 같은 것들이 버젓이 따라와서 옆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같이 들겠소?”
“…….”
자신들과는 달리 함께 온 사내들이 숙영지를 만들고 마차에서 여러 가지 물건들을 꺼내 놓는다.
배편으로 간다던 놈들이 육포며 국물을 낼 건어물은 물론이고 야숙에 필요한 두툼한 털 담요까지 가지고 있었다.
“원래 우리가 준비성이 좋소.”
제갈선이 생각을 읽고 있는지 밝게 웃는 모습에 진무가 짜증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먹을거리를 구하러 간 청상 놈이 오늘따라 늦다.
청우가 매운 연기를 참으며 모닥불을 피워 올린 지가 언젠데.
“거 그러지 말고 이리 와서 뜨끈한 국물이라도 드시오.”
“그래. 사해(四海)가 동도(同徒)라지 않더냐? 이리 오너라.”
제갈선에 더해 등여평까지 권하자 모닥불을 피우던 청우가 코를 벌름거리며 눈치를 봤다.
“청우야.”
“예! 사숙.”
“요 며칠 수련을 안 했지?”
“…….”
“수련하고 싶냐? 돌을 한 서너 개쯤 더 달까?”
“아, 아닙니다!”
진무가 눈을 부라리자 청우가 사색이 되어서 모닥불 아래를 불어 대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빠져 가지고. 정신상태가 영 글러 먹었다.
진무가 수련의 강도를 더욱 올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거, 그러지 말고.”
등여평이 한 손에는 술병을, 한 손에는 불에 구운 육포를 들고 다가왔다.
“거 보니 술도 곧잘 하는 것 같은데 어떤가? 한잔 나누며 이런저런 이야기라도 하는 것이?”
이런저런?
귀찮게 이것저것 물어보기나 하겠지. 내가 당신을 모르냐?
한참을 달려온 터라 주향이 제법 군침 돌게 코를 찔러 왔지만, 저들과는 전혀 술을 나누고 싶지 않았다.
“본인은 제갈선이오. 그쪽은 무당의 도사분인 듯한데.”
이미 다 아는 이야기를 재차 꺼내며 제갈선이 다가오자 진무가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 꺼지라고 했어.”
“거참 빡빡하시오. 누가 잡아먹는 것도 아닌데.”
“웃기고 있네. 나보고 남장을 하고 본모습을 감춘 음흉한 계집 따위를 믿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