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72
72화
“하하하! 어서 오게, 대공자.”
“오랜만입니다. 분가주님.”
제갈선이 환하게 웃으며 공손히 인사하는 사내.
마흔쯤 되었을까?
사내는 다름 아닌 무한 제갈분가주 제갈충언이었다.
네 곳의 분가 중 가장 어린 나이에 분가주에 오른 그였으나 그 누구도 그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무한분가는 오랫동안 본가의 대장로를 배출해 온 곳이었고, 정무맹이 위치한 무한을 대대로 지켜 왔을 만큼 정쟁(政爭)에 능한 가문이었다.
수많은 문파의 수뇌들과 머리싸움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곳을 맡았다는 것은 그 능력이 뛰어남을 입증함이었고, 더불어 본가 대가주의 신임이 지대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산산은 미리 도착해 쉬고 있네. 피곤한지 불러도 나오질 않더군.”
“뭐 하러요. 늘 보는 사이인데요.”
“그래, 육로로 오시기 불편하지는 않으셨는가?”
“예. 그저 달리기만 하였기에.”
제갈선은 형주 인근에서 받은 습격에 대해서는 따로 말하지 않았다.
개방에게 비밀로 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대공자님, 오랜만입니다.”
마중을 나온 이는 제갈충언뿐만이 아니었다.
미리 도착한 분가의 자제들이 제갈충언의 인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앞다투어 제갈선에게 아는 체를 해 왔다.
“오랜만입니다. 다들.”
서로 간의 인사가 오고 가는 중에 제갈충언이 멀찍이 물러나 기다리고 있던 제갈선의 일행 중 한 사람에게 시선을 두었다.
“이보게. 대공자.”
“예?”
“혹, 저분이?”
“아!”
제갈충언의 가리킴에 제갈선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이런, 제가 함께 오신 귀한 손님들을 소개해 드리지 않았군요.”
제갈선이 제갈충언을 안내해 등여평을 향해 다가갔다.
“무림의 소졸(小卒) 제갈충언이 백로 대협을 뵙습니다.”
“허허, 등여평일세. 소졸이라니 너무 과한 겸양이 아닌가? 내 일찍이 무한에 군자검(君子劍)이 있다는 위명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 왔거늘.”
“어디 백로 대협에 비하겠습니까? 이리 제갈분가를 찾아 주심에 본가의 가주님을 대신해 감사드립니다.”
둘의 인사에 진무가 쓴웃음을 지었다.
지랄들을 한다.
정파인들은 인사 하나에도 미사여구가 많고 거추장스럽다.
진무는 빨리 인사를 끝내고 거처를 배정받아 우글거리는 정파 놈들에게서 벗어나 쉬고 싶었다.
쉬기로 한 이상 몸에 달라붙은 먼지를 씻어 낸 뒤의 한잔 술 생각이 간절했다.
“이번에 용봉관주로 내정되셨다지요?”
“응? 그게 무슨 소린가?”
“저런, 소식이 닿지 않은 모양이군요. 지금 무한에는 백로께서 용봉관주가 되신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뭐라? 그런 말도 안 되는. 나는 그저 용봉회에 관심이 생겨 구경차 온 걸음이거늘.”
등여평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면 대군사와 맹주님을 만나 뵈셔야 하겠군요.”
“흠, 그래야겠구먼.”
제갈충언의 말에 등여평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흑의 무복을 입은 진무 일행을 바라보았다.
둘은 지친 표정이 역력했고 하나는 귀찮음이 덕지덕지 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당의 도사분들입니다.”
“아, 그러한가?”
제갈충언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오가다 만났겠지, 하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서둘러 인사를 끝내고 백로와 차라도 한잔할 생각에 제갈충언이 몸을 돌리는데.
“어!”
심드렁하기만 했던 진무가 제갈분가의 자제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야, 오랜만이네. 너도 용봉회에 참가하나 보지?”
진무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뒤를 향해 돌아갔다.
그리고.
“어? 너, 이 새끼?”
단강구 제갈분가의 이공자 제갈근.
분가의 자제들 틈에 끼어 있었던 그가 갑작스러운 진무의 지목에 자신도 모르게 그런 말을 중얼거리고 말았다.
제갈선 일행에 무당의 도사인 그들이 끼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도포가 아닌 흑의 무복이라 그저 호위라고 생각했었거늘.
‘젠장, 실수했군.’
그의 감탄사 자체는 대수롭지 않게 지나갈 수 있는 것이었으나 시선이 너무 집중되어 있었다.
무한분가주. 그리고 본가의 대공자. 거기에 무림의 명숙인 백로 등여평까지 있었다.
언행에 주의를 기울였어야 마땅한 자리였다.
제갈근이 실언을 했다며 사과하고 넘어가려 고개를 숙이는데.
“제갈근, 지금 뭐라 했는가?”
“예?”
“지금 뭐라 했느냐 물었다.”
제갈선의 싸늘한 표정. 평소와 다른 하대.
더욱이 목소리에 노기까지 느껴지자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갑작스레 폭우를 쏟아 내는 여름철 날씨처럼 급변해 버린 제갈선의 모습.
어이, 너 갑자기 왜 그래?
진무마저도 제갈선의 반응에 의아함을 느꼈다.
좀 전까지 알던 제갈선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어른에게 ‘새끼.’라고 한 건 잘못이지만 그 정도야 또래 남자들끼리 으레 할 수 있는 말인데.
“아니, 그게.”
제갈선의 표정에 제갈근이 어색하게 웃는데.
“단강구 분가에선 예를 가르치지 않는가?”
온화하기만 했던 제갈선의 날 선 목소리에 순식간에 주위의 분위기가 동토의 그것처럼 얼어붙었다.
과하다.
분가와 본가의 자제들이 가지는 격차에 대해서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본가의 대공자는 곧 다음 대 제갈의 주인이었다.
원칙대로 하자면 분가의 가주들조차 머리를 조아려야만 할 대상인 것이다.
하지만 한참이나 어린 제갈선이었다.
그저 말 한마디 실수한 것뿐인데 어째서 이리 화를 낸단 말인가?
나이로 따지면 무려 열 살이나 많은 제갈근이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수모를 줄 정도는 아니지 않은가?
기분이 더럭 언짢아진 제갈근이 고개를 쳐들며 말했다.
“대공자, 말씀이 너무 심하시오. 그저 잠시 실언을 한 것뿐인데.”
“닥치거라!”
“…….”
“말과 행동은 마땅히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할 터.”
제갈선의 날 선 목소리에 제갈근의 눈이 매섭게 변했다.
“그런데 실언? 실언이라는 말로 그따위 언사가 용서될 것 같으냐! 나도 아는 이분의 신분을 단강구 분가에 속한 네놈이 모른단 말이냐?!”
듣고 있던 제갈충언이 그녀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무당 도사의 신분이 무엇이길래?
물론 대공자와 함께 왔으니 손님일 것이다. 예를 갖추어야 함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지금 제갈선이 내보이는 노기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가 아는 제갈선은 진중한 성격이었고, 심계 또한 누구보다 깊었다.
그럼에도 제갈근에게 저리 화를 내는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으리라 여겨졌다.
“그의 이름이 진무일세.”
제갈충언의 곁으로 백로가 다가와 슬쩍 소곤거렸다.
“진무라면? 혹?”
“당대의 무당지검이라네.”
“예?!”
제갈충언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무당지검이라니?
그에 대한 소문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하면 제갈선이 육로를 선택한 것은 백로 때문만은 아니었단 말인가?
무당지검.
그 칭호가 가진 의미.
비단 무공적인 부분만이 아니었다. 그 이름 하나로 무당을 대표하는 신분인 것이다.
나이가 많고 적음은 관계없었다. 일파의 장문인에 버금가는 신분.
서로가 전쟁 중인 상황이 아닌 자리에서 만난다면 제갈의 대가주라 할지라도 마땅히 예를 갖춰 대해야 할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런 자를 손님으로 불러 놓고 분가의 자제가 이 새끼 저 새끼 운운한 것이다. 예와 법을 중시하는 제갈로서는 절대로 용납되지 않는 사실이었다.
또한, 전 무림이 무당과 제갈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같은 정파임에도 호북을 놓고 경쟁하는 두 문파. 더욱이 얼마 전 단강분가의 일로 제갈은 스스로 얼굴에 먹칠을 하지 않았는가.
이러한 상황에서 방금 제갈근의 언행은 이 자리에서라면 그저 실언으로 치부하고 넘길 수 있는 일일지 몰라도, 외부에 알려진다면 또다시 제갈세가의 치부가 되기 충분한 일이었다.
자신들에게 망신을 준 무당지검을 손님으로 초대해 놓고 무시한 졸렬한 가문이 되는 것이다.
제갈충언은 제갈선이 갑자기 화를 낸 이유를 이해할 것 같았다.
그것은 무마였다.
그가 화를 냄으로써 실수를 인정했으니, 모든 것은 진무에게 실언을 한 제갈근의 한 명의 잘못으로 국한되는 것이다.
물론 제갈근이나 다른 분가의 자제들은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지만.
‘쯧쯧, 멍청한 것들. 어찌 이리도 아둔한가?’
제갈충언은 자신이 나설 때를 알았다.
지금의 상황을 모두에게 알려 주어야 했고, 무엇보다 질책을 받고 있는 답답한 자리를 언제까지 유지할 수는 없었다. 풀어 주어야만 했다.
“이놈, 제갈근!”
“……?”
“어서 사죄드리지 못할까!”
“예?”
“감히 무당지검에게 그따위 언행이라니! 지금 네놈의 실언으로 오랫동안 제갈이 이어 온 이름이 더럽혀졌음을 모른단 말이냐!”
“…….”
진무가 아니라 무당지검이었다. 제갈충언의 호통에 분가의 자제들이 진무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제갈세가의 인물들은 그제야 제갈선이 화를 낸 이유를 눈치챘다.
제갈충언의 한마디로 인해 방금까지 제갈선의 행동이 과하다 여기는 듯하던 이들의 눈빛이 제갈근에 대한 질책으로 바뀌었다.
“이런, 이런. 몰라뵈어 죄송합니다. 무한분가의 가주 제갈충언이 이놈을 대신하여 무당지검께 용서를 구합니다.”
“아, 뭐……. 예.”
제갈충언의 사과에 진무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마주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제갈충언이 제갈근을 잡아먹을 듯한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제길.’
제갈근은 결국 내키지 않음에도 진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단강구 제갈분가의 차남 근이 무당지검께 무례를 범하였습니다. 용서하십시오.”
“…….”
진무가 눈앞의 상황을 묘하게 바라보았다.
그저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제갈선의 노성, 제갈충언과 백로 사이에서 오간 말들과 뒤이은 제갈충언과 제갈근의 사과.
대충 느끼기에 뭔가 복잡한 것들이 마구 얽히고 지나간 듯한 느낌이었다.
가문의 체면이라든지 문파 간의 보이지 않는 싸움이라든지.
여하간에 뭔가 둘이서 북 치고 장구 치고 한 것 같은 느낌인데.
그래서 뭐?
뭔가 숨겨져 있다고 해도 그것은 진무와 아무런 관계도 없었고, 그러니 복잡하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진무의 눈에 보이는 것은 숙어진 정수리 하나.
제갈근의 대가리.
그게 중요했다.
‘요 새끼. 큭큭, 꼬라지 좋은데?’
진무는 속으로 음흉하게 웃었다.
그저 닷새 동안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차에 놀 거리가 생긴 것뿐이다.
“이거 미안하오. 예서 보아 반가운 마음에 괜히 알은체를 하여 곤란하게 했습니다.”
진무가 웬일로 예를 다해 마주 사과를 한다 싶어 고개를 들려던 제갈근의 귓가로 전음이 파고들었다.
[그래, 그래. 앞으론 그렇게 고개 숙이고, 눈도 깔고.]진무의 전음이었다.
‘이런 쌍놈의 새끼가…….’
도로 고개를 푹 숙인 제갈근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해해 주신다니 다행입니다.”
“큰일도 아니었소.”
진무가 대수롭지 않게 손을 저었다.
“하면 저는 동생과 함께 정무맹에 들를 일이 있으니 먼저 쉬고 계십시오.”
“그러시지요. 저희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예.”
제갈선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나도 함께 가세. 아무래도 나 역시 맹주님과 대군사를 만나 보아야 할 듯하니.”
등여평이 함께하겠다는 말에 진무의 얼굴이 밝아졌다.
“예, 그럼 먼저 쉬고 있겠습니다.”
진무는 진심을 담아 둘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래, 잘 생각했다.
어서 가라. 웬만하면 다시 오지 말고. 귀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