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73
73화
진무 일행의 숙소로 배정된 곳은 무한분가 가장 안쪽의 전각이었다.
진무가 조용한 곳을 원했기에 그리 정해졌다.
조금이라도 사람들과 떨어져 있는 곳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보게, 제갈근.”
“……예.”
“예는 무슨. 처음 본 사이도 아니고 그냥 전처럼 말 놓지.”
“…….”
제갈근은 진무의 웃는 얼굴을 짓이겨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 망할 자식이.’
시비를 붙여 준다 했더니 편한 사람이 좋다면서 자신을 지목하는 바람에 제갈충언이 실수를 만회할 겸 냅다 붙였다. 잘 모시라 신신당부까지 하면서.
“……괜찮습니다. 제가 어찌 무당지검께 말을 놓겠습니까. 이게 편합니다.”
“아 그래? 이거 참 나이도 비슷한데…….”
비슷 좋아하네.
제갈근의 나이 스물여덟이다. 진무보다 여덟 살이나 많다.
저놈이 분명 일부러 반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망할 도사 놈이.’
제갈근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애써 삼켰다.
“음, 그럼 나 혼자 말을 놓는 것으로 하지. 괜찮겠지?”
“……그러……시지요.”
“어째 이를 꽉 다문 소리구먼?”
“……그럴…… 리가요.”
“뭐, 아니면 되었네.”
진무가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 무당이 자네 가문과 참 인연이 많아. 안 그런가?”
이놈이 또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고 보니 자네 말이 맞았구만. 나중에 꼭 다시 보자 했었지 않은가?”
“…….”
“그 콧수염 친구는 잘 있나? 우리 청상이를 시험하겠다 시비를 걸었더랬지. 아, 그러고 보니 이제는 버려졌으려나?”
뿌득, 뿌드득.
제갈근은 소리가 나지 않게 열심히 이를 갈았다.
“그러고 보니 아쉽겠어? 말로야 아니라고 하지만 일해상단을 어찌해 보려 이성상단을 움직였는데 말이야.”
“그런 일 없소.”
“이 사람, 다 지난 일이네. 탓하고자 하는 게 아니야.”
“…….”
“감시를 붙이지 않나, 암천대를 보내 나를 죽이려 하지를 않나.”
“그런 일 없다 하지 않습니까.”
제갈근이 최대한 웃는 표정을 하며 대답했다.
“허, 모두가 아는 사실을.”
“진무 도장…… 그런 일 없다고…….”
“어허, 왜 이러나. 그날 그 대결 이후로 자네 아버님이 다 인정한 사실이 아니었나?”
“…….”
제갈근이 눈가를 씰룩거리며 진무를 노려보았다.
“걱정 말게. 그런 일로 이제 와서 자네를 탓할 생각은 전혀 없다네. 나는 뒤끝 없는 사람이거든. 아주 깨끗하지. 청정수 같은 사람이니 걱정 말게. 하핫.”
“…….”
“무림에서 그만한 일이 어디 특별하겠는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오?”
“무슨 말은. 그저 지난 과거를 잊고 이제부터라도 잘 지내 보자 하는 것이지.”
“…….”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그럴싸하게 건네는 진무의 말에 제갈근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성격이었나?
시비 대신 자신을 청하였을 때만 해도 분명 자존심을 상하게 하려 한다 생각했다. 각오도 단단히 하고 온 참이었다. 그런데 저 깔끔한 표정은 다 뭐란 말인가? 생각했던 것과는 영 다르지 않은가?
자신이 오해한 것일까?
하긴, 무당의 도사들은 그랬다. 한없이 너그럽고 포용력이 넘친다.
일해상단의 일만 해도 그렇다.
모든 것은 제갈분가의 음모였다.
당시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무당은 어떠한 피해 보상도 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단과의 연결 고리 역할을 하는 진궁은 일해상단의 일이 있은 이후 제갈무린을 찾아와 잘 부탁한다면서 인사를 하고 갔고, 오늘 무한분가를 찾아온 진무는 심지어 반갑게 먼저 인사를 해 오기까지 했다. 화를 낸 것은 제갈충언과 제갈선이었다.
사죄하던 자신에게 날린 전음이 조금 걸리기는 했지만, 과거의 악연을 생각하면 그 정도 반응은 문제랄 것도 없었다.
“어떤가? 술이라도 한잔하며 우리의 악연 같지 않은 악연을 풀어 보는 것이?”
“아……”
진무를 오해했다.
그런 것이다.
그를 잘 알지 못하고 자신이 속 좁게 생각한 것이 틀림없었다.
환하게 웃는 진무의 얼굴을 보며 완전히 마음이 풀어진 제갈근이 피식 웃었다.
“좋소. 그럽시다. 진무 도장께서도 술과 고기를 즐기신다고 알고 있으니 내 이름난 주루를 예약하리다.”
“응? 그건 무슨 소리야?”
“……예?”
“도사가 사람들 다 보는 주루에서 술을 마실 수야 있나.”
분명 전에 방천현에서 아주 그냥 막 미친 듯이 먹는 걸 봤는데.
사람들 눈 같은 건 한 톨도 의식하지 않고.
“그냥 여기서 구워 먹도록 하세. 술도 사 오고.”
하긴, 방천현과는 다르다.
아무래도 정무맹이 있는 곳이 아니던가. 분명 신경 쓰이는 정도가 다를 것이다.
“그, 그러시지요.”
제갈근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하면 시비에게 고기와 술을 가져오라 하겠소.”
“왜?”
“예?”
“시비는 불편하다니까.”
“…….”
순간 제갈근은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하지 못해 입을 다물었다. 그 사이에 눈치 빠른 청상이 다가왔다.
“사숙, 불을 피울까요?”
“응? 니가 왜?”
“예?”
“여긴 제갈세가야. 안 그런가, 제갈근?”
진무가 웃으며 쳐다보자 제갈근이 멍청하게 진무를 마주 쳐다보았다.
“술 한잔하자니까? 고기도 굽고, 술도 마시고?”
“그래서 시비를…….”
“불편하다니까.”
그제야 진무의 말뜻을 대강 이해한 제갈근이 눈가를 씰룩거리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러니까 그 말은 내가 직접?”
끄덕끄덕.
“아!”
그리고 이어진 진무의 간결한 고갯짓으로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부려 먹겠다는 뜻이다.
“자, 자, 무엇 하는가? 불도 피우고, 고기도 가져와 굽고.”
이, 이 자식이.
제갈근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오해는 무슨! 이런 망할 놈의 도사 자식!
“왜? 싫어? 과거의 악연을 풀어 보자는데?”
“…….”
“무한분가주에게 직접 찾아가야 하나?”
제갈근이 진무를 매섭게 노려보다 거칠게 몸을 돌렸다.
“아, 배가 고프니 빨리 좀 부탁하세.”
“…….”
“아, 그리고 술은 금로주가 입에 맞던데. 그걸로 부탁하네.”
성난 걸음으로 정원을 빠져나가는 제갈근의 등 뒤로 진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핫, 이렇게 서로 간의 오해를 풀게 되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진무의 웃음에 제갈근의 얼굴은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무는 스스로의 관대함에 취해 연신 흡족하게 웃었다.
이 얼마나 너그러운가?
과거의 잘못에 대한 책임으로 배를 짼다든지 팔다리를 으깨 놓는다든지 하는 뒤끝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작은 봉사만 요구했을 뿐이다.
* * *
치이익.
폭풍 같은 시간이 끝났다.
어찌나 잘 처먹는지 쉬지도 않고 석쇠에 고기를 구워야 했다.
질기다느니, 육즙이 없다느니.
중간중간 비워진 술병을 얼마나 바꿔 왔는지 기억도 안 났다.
독째로 가져다 놓겠다니까 그러면 주향이 날아가서 술맛이 없어진다느니.
호랑말코 같은 도사 놈.
하도 쉴 틈 없이 뛰어다녀서 옷이 땀으로 흠뻑 젖을 지경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고기를 들이붓듯 처넣고 있는 저 돼지 같은 놈의 아가리라도 찢어 놓고 싶었는데 그때마다 제갈충언이 어쩌고 제갈선이 어쩌고를 들먹였다.
꺼억.
얼마나 처먹었는지도 모를 만큼 처먹고 나서야 배를 만족스럽게 두들기는 돼지 같은 놈. 이름이 청우랬던가?
“이거 참, 이리도 열성적으로 구워 주시니 미안해서 어쩝니까.”
살집으로 잘 보이지도 않는 눈을 휘며 뒷머리를 긁적인다.
“죄송합니다. 사숙께서 절대 나서지 말라고 하셔서.”
그러면 어떻게 좀 티 안 나게 돕기라도 하든가.
그냥 처먹기만 했다.
구운 고기가 언제 사라졌는지도 모를 정도로 빨리.
“청우야. 어찌 성의를 무시하는 게냐? 이게 다 제갈근 저 양반이 우리와 악연을 풀고자 하는 마음으로 한 것인데.”
진무가 되레 청우를 나무랐다.
“그런가요?”
“암. 그나저나 배부르게 먹은 게냐?”
“조금 모자라긴 한데…….”
“저런.”
청우가 제 배를 슬슬 어루만지고, 진무가 그를 안타까운 듯이 바라보자 제갈근이 콧김을 뿜어대며 눈을 부릅떴다.
지금까지 제 놈 혼자 처먹은 게 십 인분도 넘는데.
“하긴 나도 술이 좀 모자라긴 하다만.”
이미 굴러다니는 술병이 다섯이다.
“사숙, 밤이 늦었습니다.”
보다 못한 청상이 어색하게 웃으며 진무를 말렸다.
그나마 착한 녀석이었다.
하지만.
“쯧쯧, 아직 자정도 안 되었거늘!”
진무가 핀잔을 주며 혀를 찼다.
평소의 청상은 너무 물렀다. 수적 놈들 상대할 때처럼 좀 더 잔혹해지면 좋을 텐데.
이런 성격으로 어찌 용봉회에서 그 많은 무림의 자제들과 경쟁하겠다고.
하지만 이제 갓 하루가 지났을 뿐이고, 제갈분가에 기거할 날은 아직 나흘이나 더 남았다.
“뭐, 어쩔 수 없지. 오늘은 이쯤 먹고 그만 쉬도록 하자.”
진무의 말에 제갈근이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오늘은 이만하고 가 보게. 내 덕분에 모처럼 즐거웠네.”
오늘은?
“아, 내일 아침에는 해장국 좀 부탁하세.”
“…….”
“술 마신 다음에는 해장을 꼭 해야 해서 말이야. 내 분가주를 뵈면 자네 덕에 잘 보내고 있다고 꼭 전함세.”
“……예, 감사합니다.”
제갈근은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자, 그럼 우리도 이만 쉴까?”
“예, 사숙.”
진무 일행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가는 뒷모습에 제갈근이 이를 부득부득 갈며 일어났다.
“아!”
진무가 가다 말고 뭔가 생각난 듯이 그 자리에 멈춰 제갈근을 돌아본다.
“거, 치우고 가게. 도와주고 싶은데 자네가 다 해 주겠다 했으니 성의를 무시할 수도 없고 말이야.”
해 주겠다는 말은 한 적도 없는데.
“자, 그럼 내일 보세. 청상, 청우. 들어가자, 어서.”
“……예, 사숙.”
진무가 피곤한 듯이 크게 하품을 하며 채근하자 청상과 청우가 진무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
고기를 굽고 난 숯.
어지럽게 널린 술병들.
“이런 개…….”
제갈근은 화가 치밀어 참을 수가 없었다.
“두고 보자. 두고 보자. 두고 보자. 내 반드시 검성의 제자가 되어.”
그리곤 흉신악살과 같은 표정으로 같은 말을 반복하며 뒷정리를 시작했다.
그랬다. 진무는 뒤끝이라고는 모르는 대무당파의 너그러운 도사였다.
* * *
밤늦은 시간.
진무는 과하게 먹은 금로주로 인해 아랫배가 빵빵해져 옴을 느끼고 일어났다.
드르렁, 푸우.
야트막한 야산처럼 볼록하게 솟구쳤다가 내려가는 뱃살.
많이 고단했던 것인지 이리저리 뒤척이며 열심히 코를 고는 청우와 반듯하게 누워서 미동조차 하지 않는 청상.
자는 것마저 각자 성격들이 드러나는 모습에 진무가 피식 웃었다.
‘다음부턴 같이 자지 말아야지.’
어차피 앞으로 나흘만 더 지나면 한동안 볼 일도 없었다.
진무는 시끄럽게 방 안을 울리는 청우의 코골이를 피해 소피를 보러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거처로 배정받은 전각.
무당지검이라는 칭호 때문인지 아니면 제갈선의 입김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셋이 지내기에는 무척이나 넓은 곳이었다.
방이 네 개나 되는 전각 앞으로 꾸며진 뜰에는 작은 정자가 운치 있게 자리 잡고 있었고, 때마침 물골을 내어 만든 큼지막한 연못도 있었다.
쪼르르르.
시원하게(?) 볼일을 마친 진무는 잠에서 깬 김에 후원을 거닐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고즈넉한 분위기에 한동안 잊고 지냈던 과거가 떠올랐다.
사패천, 팔십 년의 세월, 충직했던 천우명, 비고에 쌓아 두었던 수많은 금은보화…….
혁련무강으로서 살아온 긴 세월.
후회하지 않았다.
누릴 것을 다 누려 보았으니까.
그래도 양의심공을 익히고 나면 반드시 찾으러 가야지.
정무맹 하나로 만족할 생각은 없다.
정무맹이든 사패천이든 주인은 그대로 두고 자신은 그 위에 군림만 할 생각이었다.
필요하면 마교까지라도 집어삼킬 생각이었다.
가능하면 황제까지……는 반란이니 나중에 생각하고.
어쨌든 모두가 기분 좋은 일이 아니던가? 생각만 해도 흐뭇하다.
생각에 빠져 한참을 걷던 진무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어?
어디지, 여긴?
정신을 차려 보니 자신들이 배정받은 전각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너무 많이 걸은 모양이었다.
“이런 멍청한. 누가 목숨을 노렸으면 꼼짝없이 뒈질 뻔했네.”
진무가 어이없이 웃으며 몸을 돌리는데.
“진무 도장?”
“……?”
누구?
처음 보는 여인이 진무를 향해 인사를 건네 왔다.
생전 처음 보는 여인이었다.
그리고…… 뭐가 이리 예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