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74
74화
마치 달덩이가 지상에 떨어진 것 같았다.
빛이 난다. 빛이.
보는 순간 입이 떡 벌어졌다.
사패천에 두고 온 애첩 화양이? 비교가 안 된다. 보름달 옆의 반딧불 정도나 되려나.
연지를 바르지 않았음에도 입술은 앵두보다 붉었고 분칠을 하지 않았음에도 얼굴에서 희게 빛이 나는 듯했다.
한 발자국씩 내딛는 걸음은 황성의 교태전을 채운 여인들처럼 기품이 넘쳐흘렀다.
“하하, 아직 깨어 계셨습니까?”
“……?”
뭐지? 이 목소리?
이게 뭔 불협화음이란 말인가?
저렇게 아름다운 여인의 목소리가 이리 걸걸할 리가.
설마 누군가의 육합전성(六合傳聲)?
진무가 매서운 표정으로 고개를 휙휙 돌리는데.
“뭘 찾는 겁니까?”
“…….”
분명 그녀의 입에서 난 소리였다. 입 모양과 목소리가 정확히 일치하고 있었다.
“진무 도장?”
재차 사내의 목소리를 걸걸하게 내며 생긋이 웃는다.
그 엄청난 부조화에도 미소 하나만큼은 사람의 심장을 멎게 하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저 눈깔이 낯이 익다.
사슴처럼 동그랗게 뜨고 사람을 홀리는 요망한…….
“제갈……선?”
“네?”
“……뭐?”
고운 입술을 모아 대답하며 살풋 얼굴을 붉히는 모습에 진무가 눈을 끔벅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분명 제갈선을 불렀는데 어째서 니가 대답하냐?
설마?
남장 아래 감추었던 모습이?
“…….”
그 놀란 모습이 하도 엉거주춤했는지 여인이 오던 걸음을 멈추고 눈을 찌푸렸다.
“남장에 어울리는 소리만 내다 보니 원래의 목소리가 습관이 안 되어서…….”
“…….”
이게 말이.
“큼큼, 이제 좀 괜찮은가요?”
말이 되냐!
진무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헛기침 몇 번에 목소리가 외모만큼이나 아름답게 변하는데.
옥구슬? 청아함? 그런 걸로는 표현이 안 된다.
이건 뭐 신이 좋다는 걸 모조리 때려 박아 놓은 것도 아니고.
정말 말도 안 된다.
사람일 리가 없었다. 저 외모에, 저 목소리가 어떻게 사람이란 말인가?
놀람을 넘어선 경악이었다. 진무는 자기도 모르게 제갈선이 다가오는 만큼 물러났다.
“…….”
진무가 자꾸만 멀어지자 제갈선이 다가오던 걸음을 멈추었다.
“쳇, 굳이 그런 표정을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아무리 도사들이 금욕적이라지만 그리 싫은 표정을 지으실 줄 알았으면 그냥 남장을 할 걸 그랬네요.”
볼을 부풀리며 삐죽거리는 모습까지…… 예쁘다.
나이 먹고 이런 생각을 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제갈……서언이 맞는 거냐? 아니 맞는 거요?”
그녀에게 반말을 한다는 것조차 죄악처럼 느껴졌다.
“서언은 아니고, 이제부터는 산산입니다.”
“어? 뭐?”
“제 이름요. 제갈산산입니다.”
“제갈……산산?”
“예.”
아, 그렇구나.
진무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제갈선은 정무맹에 갔다가 제갈세가로 바로 돌아간 겁니다. 다들 그리 알고 있으니 모른 척해 주십시오.”
진무는 또다시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싫은 표정도 좀 지워 주시죠.”
어떤 표정? 내가? 지금?
아니, 나 지금 놀란 표정이라니까?
니 외모와 목소리에 놀라 자빠진 표정이라고.
“예, 예. 더 이상 다가가지 않을 테니 그만 물러나시고요.”
물러나는 게 아니라, 혹시나 때라도 묻을까 봐…….
“방금 정무맹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백로 대협께서는 용봉관주의 문제로 좀 더 머무신다 하여.”
“아.”
그딴 노인네 오든가 말든가.
“그리고 지난번 습격에 대해 확인을 해 보았습니다.”
제갈선, 아니 제갈산산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극비라며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더군요. 더욱이 그 소녀에 관해서는…….”
제갈산산이 뭐라고 열심히 설명을 한다.
귀에 들리지 않는다.
주책맞게도 진무의 눈에는 그녀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밖에 보이지 않았다.
빨갛고, 예쁘고…….
“……내일 함께 가시겠습니까?”
“어, 뭐?”
“내일요.”
“아, 그래.”
“알겠습니다. 그럼 대군사님께 그리 전하겠습니다. 내일 맹주님을 만나 뵈러 가겠다고.”
“그러지…… 응? 뭐?”
“예?”
멍하니 있다가 얼결에 대답해 버렸다.
그런데 대군사? 맹주?
이 요망한…… 예쁜 여우한테 홀려서 내용을 하나도 못 들었다.
뭐라고 한 거지?
그런데 제갈산산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
아, 젠장.
정신을 차렸어야 했는데.
호랑이에게 물려 갔을 때는 잘만 차렸던 정신이 망할 여우에게는 안 되는 것인가?
* * *
“…….”
결국 거부하지 못했다.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청삼의 사내.
귀티가 좔좔 흐르는 얼굴에 학익선을 들고 웃는 모습, 흐트러짐 없이 양쪽으로 나누어진 단정한 수염은 누가 봐도 천생 학사의 모양새였다.
그리고 그 옆에 다소곳하게 앉은 제갈산산이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진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진무 도장…… 커허험! 아, 죄송합니다. 이 목소리가 습관이 안 되어서.”
“…….”
“이분은 정무맹의 대군사십니다.”
정말이지 적응 안 된다.
금방 옥구슬 목소리로 바뀌긴 했으나 저 얼굴에 저 걸걸한 목소리라니.
하여간 제갈산산의 소개에 학익선을 든 청삼 학사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정무맹 대군사 제갈협진이오. 근자에 위명이 쟁쟁한 무당지검을 뵙게 되어 영광이오.”
안다. 그것도 아주 잘 안다.
이 망할 학사 놈의 간계에 속아 패한 전투가 몇 번인지, 사패천이 입은 손해가 얼마였는지 추산도 안 된다.
무공이라면 정무칠성 앞에도 꿀리지 않는 그였으나 지략에서만큼은 정무맹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우월한 전력을 가지고도 패할 때마다 제갈협진이라는 야비한 군사 놈을 가진 정무맹을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제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까?”
빤히 바라보는 진무를 향해 제갈협진이 의아하게 물었다.
“아, 죄송합니다. 무당의 진무입니다.”
진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인사를 하자 제갈협진이 빙긋이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맹주께서 맞이하셔야 마땅할 것이나 선약이 있으셔서. 잠시 기다리셔야겠습니다.”
“아니 뭐 딱히 보고 싶지는.”
본능적으로 속마음을 말해 버렸다.
“……예?”
“아, 아닙니다.”
진무가 어색하게 웃자 제갈협진과 제갈산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빨리 가고 싶다.
팔십 년 세월이 허망하다. 고작 여인의 미색에 취해서 적진의 중심부……는 이제 아니지만 정무맹주실까지 내 발로 걸어 들어오다니.
“그보다 어떻습니까? 정무맹은?”
“……음, 크네요.”
“예?”
“…….”
멀뚱히 진무를 응시하던 제갈협진이 갑자기 크게 웃었다.
“하하! 이거 죄송합니다. 역시 무당의 도사다우시군요. 우문에 현답이라 해야 하나요? 제가 괜한 질문을 한 모양입니다.”
“…….”
제갈협진의 시원한 웃음에 되레 진무가 머쓱해져 버렸다.
우문에 현답은 무슨.
큰 걸 크다고 했는데 왜 웃지?
제갈협진이 물은 것은 정무맹의 분위기가 어떠한가였고, 진무의 대답은 본 그대로였다.
전각도 많고 높고 정갈하다. 사패천의 본성보다도 훨씬 큰 규모였다. 짓는 데 돈이 꽤 많이 들었을 것 같다.
“맞습니다. 크지요. 과하게 큽니다.”
“…….”
“하나 화이부실(華而不實)이지요. 크기만 할 뿐 실속이 없으니.”
제갈협진이 씁쓸하게 웃었다.
꽃은 화려하나 열매를 맺지 못한다. 겉만 번지르르하다는 말이었다.
“엄살이 심하시네요.”
진무는 그 말에 고소를 머금었다.
당대의 정무맹은 누대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강하다. 그것이 속세의 평이었다.
그리고 진무 또한 직접 경험해 본 적도 있었다.
정무맹주 검성 철지량은 대단한 인물이었다.
무공도 무공이거니와 세력을 활용할 줄 아는 진정한 지도자였다.
저 잘난 맛에 뭉쳐지지 않아서 유명무실하기만 했던 구파와 오대세가는 물론, 그 이하 중소 방파까지 규합했다.
또한 최단기간에 맹의 예하로 여섯 개의 무력 단체를 만들기까지 했다.
그가 맹주가 되고 십 년, 정무맹은 단숨에 일월마교와 사패천을 밀어내고 중원을 삼분하는 거대 세력이 되었다.
물론 그것이 철지량 개인의 능력은 아니었다. 그 휘하에 제갈협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정무맹이 속 빈 강정이라는 것은 그저 욕심 많은 그의 엄살일 뿐이었다.
“하핫, 그렇습니까? 하지만 도처에 사악한 무리들이 득세함에도 그들을 모두 바른길로 인도하지 못하고 있음이니 어찌 안타깝지 않겠습니까.”
제갈협진의 말에 진무가 피식 웃고 말았다.
도처에 득세한 사악한 무리.
당연히 사패천과 일월마교를 이름이었다.
그리고 바른길이라 함은 그들을 밀어내고 중원의 패권을 잡겠다는 뜻.
역시 정파 놈들은 말발 하나는 끝내준다.
아주 입에 기름을 바른 듯이 저런 오글거리는 말이 잘도 튀어나온다.
“왜 웃으십니까?”
“그냥요. 그럴싸한 말로 포장은 되었는데 제법 야심만만하다 싶어서요.”
“…….”
순간 제갈협진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속뜻을 알아들었단 말인가?
좀 전까지만 해도 멍한 표정을 해서는 아무것도 모를 것 같은 도사였는데.
힐끗 보니 제갈산산은 이미 예상한 것처럼 미소를 짓고 있었다.
소문만 무성했던 그에 대해서는 지난밤 제갈산산에게 들은 바가 있었다.
누구도 몰랐던 제갈산산의 남장을 단번에 눈치채었다 했다.
더욱이 그들이 이동하며 만난 자들은 양소방이 뒤쫓고 있는 ‘궁’의 무인들이 확실했다.
제갈산산의 말에 따르면 그의 무위는 확실히 ‘강’의 경지였다.
그것도 단순히 묶어 두는 게 아니라 쏘아 내는 경지이니 이미 검환(劍丸)이 아닌가.
결국 그의 실력에 대한 가설은 두 가지였다.
원래부터 그는 강의 경지였다.
하지만 약관에 강의 경지에 오른 무인은 고금사 어디를 뒤져 보아도 없었다.
그 정도 경지였다면 양소방이 알아보지 못했을 리도 없었다.
더군다나 알아본 바로는 그는 일 년, 혹은 그 이전까지 무공조차 알지 못하는 도동이었다고 했다.
말이 안 된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면 단강구에서 양소방을 만난 이후 성장했다는 뜻이 된다.
검사에서 검강으로.
그건 더 말이 안 된다.
불과 한 달이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그건 검에 대한 깨달음이 중원의 그 누구보다 빠르고 깊다는 검성 철지량이라도 불가능한 성취였다.
‘이자는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
직접 대하고 나니 진무에 대한 의구심이 더욱 깊어졌다.
“왜 그리 보십니까?”
“아, 아니오. 내 진무 도장을 잘못 본 듯하여.”
잘못 보기는. 오늘 처음 봤다.
“하핫, 어쨌든 대단하시오. 그 나이에 강의 경지라니.”
“뭐…….”
제갈협진의 말에 진무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실력을 감추고 싶은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하긴, 제 자랑은 안 하고 시키지도 않은 사숙 자랑하기 좋아하는 놈들도 있는 판에.
“한데 어찌 저를 부르신 겁니까? 아직 용봉회가 개최되려면 나흘이나 남았는데요.”
그저 의문이 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제갈협진의 눈빛이 또 한 번 변했다.
그걸 놓칠 진무가 아니었다.
애써 표정은 감추고 있는 것 같았지만 미세한 동공의 움직임과 작은 떨림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니까.
“따로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하시죠. 쓸데없이 말장난하지 마시고.”
“아, 그.”
물론 뜻이 있으니 불렀겠지.
하지만 제갈협진은 자연스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이질적인 진무의 말투.
도사라는 고정 관념 때문이기도 했지만 너무도 직설적이다.
변초 없이 핵심을 그대로 찌르고 들어오는 한마디 한마디가 전형적인 도사와는 지나치게 판이하다.
“핫핫핫! 이거 대군사가 누군가와의 대화에서 당황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구만그래.”
열린 문과 함께 들어오는 두 명의 인물.
제갈협진과 제갈산산이 일어나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고, 진무의 얼굴은 와락 일그러졌다.
망할. 목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