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8
8화
무당산을 오르다 보면 그 산어귀에 작은 연못과 누각이 있었다.
해검지(解劍池)와 해검각(解劍閣).
도가의 상징이 무당의 원시천존을 모신 자소궁을 비롯해 무수히 많은 도관이라면.
해검지와 해검각은 위세를 떨치던 무당의 자존심과도 같은 곳이었다.
과거 무당을 찾은 그 어떤 이도 말을 타고 병장기를 소지한 채 그곳을 넘을 수가 없었다.
이는 구파의 종맥(宗脈)이었던 무당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사숙. 무얼 그리 멍하니 보십니까?”
함께 벌을 받게 된 청우가 추억에 잠겨 있는 진무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알 리가 없지.
진무가 바라보는 곳.
그곳에는 이제 아무것도 없다.
누각은커녕 그저 연못 하나 덩그러니 남은 황량한 공터였다.
지키는 무인도 없고.
말을 매어 두던 수십여 개의 마목(馬木)도 보이지 않았다.
‘에휴, 그때는 좀 볼만했는데. 꼬라지가.’
진무가, 아니 혁련무강이 그리 만들었다.
과거 그가 찾아왔을 때 검진을 이루어 길을 막아섰던 명자 배의 무인들. 환하게 웃으며 그들의 목을 모조리 뽑아 버리고 수하들에게 명해 해검각을 통째로 부숴 버린 기억이 생생히 되살아났다.
‘그래도 핏기는 좀 가셨네.’
그 당시 무당의 피로 물들어 온통 붉게 변했던 해검지의 색이 옅어지기는 했다.
진무가 과거의 추억(?)에 잠겨 있다가 문득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쳐다보는 청우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근데…….”
진무의 시선이 청우의 뒤쪽 숲과 산을 오르는 계단을 살폈다.
“혼자야?”
“아, 예!”
아니, 지금 그런 명랑한 대답이나 듣자는 게 아니고.
이럴 리가 없는데?
분명 조회에 참석했었다.
아침마다 열리는 조회, 다시 말해 오궁과 일관의 대소사를 책임지는 일대제자들이 참석해 하루 일과를 논의하는 그 자리에 참석했을 때만 해도 인원을 보내 주겠다는 말을 분명 두 귀로 똑똑히 들었단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놈밖에 안 왔지?
진허가 부상당한 이후로 청우를 포함한 원화관 소속 청자 배의 제자들이 다른 궁에서 수련을 받게 되었다.
조회에서 통보한 바대로라면 그들이라도 왔어야 했다.
뭐지? 대체 왜…… 오호라!
진무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무언가 깨달은 듯이 손뼉을 쳤다.
돌아가는 꼴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니 대충 알 것도 같았다.
애초에 진무는 일대제자들과 교류가 적었다. 스승의 몸을 살피느라 충허암에서 두문불출하다시피 했으니 그럴 수밖에.
또한, 진무는 연고 없는 도동 출신인 데 비해 진무를 제외한 대부분의 일대제자는 나름 명가의 후손이었다.
즉, 출신이 다른 도동 주제에 자신들과 같은 위치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고.
그런 와중에 검공을 변화시켜 원화관의 진허를 때려눕혔다. 하찮은 놈이 자신들은 하지 못하는 일을 해낸 것도 모자라 문파의 존장과 수뇌들 앞에서 스스로를 당당히 증명한 꼴 아닌가.
하물며 그 십계를 어겼다.
그럼에도 징벌동이 아닌 해검지 마목 보수를 하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어딜 봐도 용서나 다름없는 처벌은 물론, 금하고 있던 육식까지 한시적으로 허용되었다.
즉.
“아놔, 이런 개새끼들이?”
“예?”
생각에 잠겨 있던 진무가 갑자기 상스러운 욕설을 뱉자 청우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주 엿 함 먹어 보라 이거지?”
치졸하기 짝이 없는 질투. 그것이 결론이다.
원래 굴러온 돌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혹시나 박혀 있는 누군가가 뽑혀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굴러온 게 금강석, 아니 야명주라면 더더욱.
“쯧쯧, 이러니 망해 가지. 계율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병신들. 계율만 지킨다고 되나? 아랫것들 단속이 안 되는데…….”
절로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역시 도사 놈들 겉과 속이 다른 게 어디 가겠느냐마는.
사제가 좀 잘났다고 음흉하고 비열하게 따돌림이나 시키다니…….
사파보다 더 사파 같은 노무 새끼들.
“그나저나 요 새끼들을 어떻게 한다? 어린놈들이 못된 것만 배워 가지고…….”
진무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진허를 두들겨 패 놓은 지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다.
처음에야 사람들의 놀람을 얻어 낼 수 있겠지만 너무 잦으면 눈 밖에 나게 된다.
“마음 같아서는 확 그냥…….”
일단은 참아야 했다.
딱 대제자가 되기 직전까지만.
“오냐, 두고 보자. 이 잡놈의 새끼들이 감히 나한테 비열함으로 시비를 건다 이거지? 크크크.”
사이한 기운이 떠오른 눈동자를 번들거리는 진무의 모습에 청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숙, 저…… 도무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청우야.”
“예?”
“가서 산돼지나 잡아먹자.”
“……예?”
청우가 깜짝 놀란 토끼 눈을 했다.
육식의 금기가 해제되었다고 해도 충허암에서 닭 다리뼈를 핥다가 장문인과 장로들에게 들킨 일이 바로 얼마 전이다 보니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리는 모양이었다.
“왜?”
“해검지 보수는 어찌하고…….”
“나 믿지?”
“……예.”
“가즈아.”
어차피 해검지 보수는 그저 구실에 불과하다.
한 달이라는 시간을 준 것은 자중하라는 의미가 강했으니 대충 말목이나 박아 놓으면 될 일이었다.
* * *
해검지를 보수하는 일은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이어졌다.
그런데.
오늘은 전날보다 늦게 내려온 청우의 뒤에 한 명이 딸려 있었다.
“응?”
청우와는 달리 꽤 잘생긴 데다가 훤칠한 체구를 가진.
매우 모자라고 우직한 청우와는 절대로! 친하지 않을 것 같은 녀석이었다.
“넌 뭐냐?”
“청상 사형입니다.”
진무의 물음에 청우가 대신 대답했다.
그래, 청상. 청자 배.
근데 사숙을 보고도 인사를 안 하네. 요런 싸가지 없는…….
“청상 사형이 이것저것 물어보시는데 마땅히 설명할 방법이 없어서 제가 데려왔습니다.”
“뭘 물어봐?”
“그러니까, 근래에 사숙에게 배운 것들이요. 몸으로는 되는데 말로는 도무지 표현할 수가 없어서…….”
청우가 해맑게 웃으며 뒷머리를 벅벅 긁어 대었다.
그래, 그랬겠지.
그게 말로 설명이 되겠냐?
특히나 네 녀석이라면…….
“청상 사형께서는 이미 유운검법을 오 성까지 익히셨다니까요?”
호오?
유운검(流雲劍)이라면 제법 상승 검공에 속하는 무공이었다.
청자 배가 오 성이라면 가진 재질이 보통이 아닌 것이다.
물론 진무에 비하면 조족지혈이고 보름달 앞의 반딧불 정도였지만.
“대단하죠? 물론 사숙께서 보시기에는 별거 아니지만, 동배들 중에서는 가장 뛰어납니다.”
청우가 마치 제 자랑인 것처럼 침까지 튀겨 대며 청상을 치켜세웠고, 청상은 조금 우쭐한 표정을 지었다.
제 놈이 잘난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근데 이상하게 매일 허드렛일만 하신다니까요.”
흐음.
“사숙들께서 잘 안 가르쳐 주세요. 제가 보기엔 아무래도 청상 사형의 출신이…….”
“청우!”
청상이 짐짓 화를 내듯이 나무라자 청우가 입을 다물었다.
딱 봐도 알 것 같았다.
출신에 대한 이야기에 발끈한다는 것은 본인이 비천하다는 뜻이다.
타고난 재능은 있되, 끈이 없으니 잘난 가문 출신의 도사 놈들에게 질투를 받고 있겠지.
망해 가는 문파의 놈들이 따지는 건 진짜 더럽게 많다.
어쨌든 이놈도 결국……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고.
‘귀찮은 게 또 하나 늘었군.’
하여간에 모자란 녀석.
하필이면 데려와도 이딴 놈을.
한숨을 내쉬던 진무의 머릿속에 갑자기 기똥찬 생각이 스쳤다.
‘잠깐만. 생각해 보니 이거 뭔가 재미있을지도 모르잖아?’
십계 중 하나인 육식의 금기가 해제되었다.
즉, 콧대 높은 무당이 지켜 온 전통이 근간부터 변화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그러다 만약 기어이 십계 전체가 무너진다면?
타락.
그래, 타락이다.
즉, 좀 더 세속적으로 변한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조금만 힘을 보탠다면?
흐흐흐, 처음이 어렵지 그다음부터는…….
지금에야 육식 하나지만 그 뒤로는 뭐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
술이든, 여자든.
점잔만 빼며 뒤로 호박씨를 까던 도사 놈들이 대놓고 기녀를 끼고 술을 마시며 흥청망청하는 세상.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불로초를 먹고 진무가 된 이후 대제자가 되고자 했던 것은 양의심공을 익혀 원래의 무공을 되찾기 위해서였다.
그다음은?
아직 정해 놓은 것이 없었다.
불로초를 먹었으니 어차피 남는 게 시간이었다.
그래, 대제자가 되어 양의심공을 익힌다.
그리고 그럴듯한 놈을 장문인으로 앉혀 놓은 뒤에! 무당을 타락시키고! 나아가 정파 전체를 타락시키는 것이다!
‘흐흐, 으흐흐흐.’
진무의 머릿속에서 거대한 비약의 나래가 펄럭였다.
무당이 곧 사파가 될 것이며 정무맹이 곧 사패천이 되는 것이다.
세상을 비열함과 간악함으로 가득 채우리라!
아무리 생각해도 기가 막힌 계획이었다.
청우, 이 기특한 녀석.
귀찮은 쓰레기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사숙의 즐거움을 위해 몸소 새끼를 쳐 온 것이로구나!
진무는 속으로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자, 그럼 원대한 계획을 위해!
청상 너를 부하 이 호로 삼아 주마!
청우와 함께 타락의 씨앗으로 자라날 기회를 주지!
“청우!”
“예! 사숙! 하면 일단 토끼라도 한 마리 잡아 올까요?”
아, 이 멍청한 놈을 어찌해야 할고.
꼬시는 데도 순서가 있어야지.
대놓고 십계를 어기는 모습부터 보여 주면 어쩌자는 건지.
“토끼라니, 청우야. 게 무슨 생뚱맞은 소리냐? 해검지를 보수해야지.”
“…….”
청우가 말똥말똥 뜬 눈을 끔벅거렸다.
“저기, 돌 치워.”
진무의 손가락질에 청우의 고개가 슬쩍 움직였다가 빠르게 제자리로 돌아왔다.
“저, 저걸요?”
진무는 친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니 사숙. 저건 좀 무리가 아닐지……. 그리고 돌이 아니라 바위인데요.”
“돼.”
“그게…….”
“청우야.”
“예?”
“나 믿지?”
“……예.”
그래, 새끼야. 꼬시려면 뭔가 보여 줘야지.
그것도 상상 그 이상을 보여 줘야 효과가 있지.
청우가 마지못해 해검지에 박혀 있는 돌, 아니 바위 곁으로 다가갔다.
높이 네 자 여섯 치(138cm), 폭 두 자(60cm).
그냥 한 아홉 살 먹은 애만 하다.
무게는…… 들어 보면 알겠지. 허리가 빠지는가 안 빠지는가.
“잡어.”
“아무리 생각해도…….”
울상을 지으면서도 청우는 시키는 대로 양팔을 넓게 펼쳐 바위를 감싸 안았다.
“끄으응!”
얼마나 힘을 주는지 이마에 지렁이처럼 굵은 힘줄이 마구 솟구치고, 도포 자락 밖으로 보이는 팔뚝에 근육이 잔뜩 맺혔다.
진무는 힐끗 청상을 살폈다.
비웃듯이 피식거리고 있었다. 괜히 따라왔다고 생각하고 있을 터다.
아마도 무리라고 생각을 하고 있겠지.
타고난 신력이 있거나 지닌 내공이 적어도 반 갑자 이상은 족히 되어야만 가능할 크기였으니까.
하지만.
턱.
진무는 용을 써 대는 청우의 무릎 뒤를 슬쩍 눌렀다.
“어?”
청우의 자세가 낮아지고.
손으로 명문을 슬쩍 밀어 주자 허리가 펴져 곧게 섰다.
툭.
양발 끝이 안쪽으로 모이게 만들고, 무릎을 바위에 밀착하게 했다.
“끄으응!”
청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
청상의 얼굴에 놀란 표정이 떠오른다. 부릅떠진 눈이 끔벅거렸다.
크크크. 모든 일에는 요령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지.
“끄아아압!”
투둑, 투두둑.
청우의 기합성과 함께 애만 한 바위가 슬슬 밑동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투웅!
바위가 해검지 밖으로 빠져나와 바닥에 거칠게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