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82
82화
“은공!”
열두 번의 운기가 끝났을 때 백표는 진무를 향해 엎드렸다.
정신이 맑아졌고, 몸은 더없이 가뿐했다.
술에 의지해야만 견딜 수 있었던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
“이 은혜를 어찌 다 갚겠습니까!”
안 갚아도 된다. 은혜 갚으라고 한 것도 아니고.
천우명 때문이기는 하지만 나름의 책임을 느꼈기 때문에 부작용을 없애 준 것뿐이었다.
하지만 백표는 감격한 표정으로 눈물을 줄줄 흘렸다.
“거, 울지 말라니까.”
“예.”
진무의 말에 거짓말처럼 눈물을 멈춘 백표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치료한다고 했는데 생각지 못한 부작용이 남은 모양이다.
희(喜)와 애(哀)가 제멋대로였다.
“이봐. 그런데 다 고쳐진 건 아냐.”
“……예?”
“방금 내 힘으로 운기를 도와주기는 했다만 채기법을 익힌 사람은 다른 내공술을 익힐 수 없다.”
양의심공이라면 모를까.
“아…… 예? 그럼?”
“채기법밖에 못 한다고.”
“…….”
멍하니 바라보던 백표의 얼굴이 갑자기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런 천우명 개자식! 나한테 그따위 무공을!”
“…….”
“죽여 버리겠다!”
터져 나오는 백표의 분노에 진무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실망하지 말고 잘 들어. 채기법이 꼭 나쁜 건 아니야. 생기를 흡수하긴 하지만 적절하게 사용하면 매우 유용하다고.”
“……?”
“아주 조금씩만 흡수하는 거야. 즉, 죽이지 않으면 되는 것이지. 그럼 사기가 스미지 않으니까 부작용도 없을 것이다.”
“아!”
감탄만 몇 번이나 하는 건지.
“이른바 박리다매(薄利多賣)군요!”
백표가 갑자기 손뼉을 치며 좋아한다.
희와 애뿐 아니라 노(怒)와 락(樂)의 감정도 제멋대로인 것 같다. 정확히 말하면 인격이 여럿으로 갈렸거나 아예 미친? 뭐 언젠간 해결되겠지.
그리고 박리다매라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적진성산(積塵成山), 티끌 모아 태산에 가깝다.
뭐, 여하튼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은공께서는 어찌 그리 상세하게 아십니까?”
백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기, 대답하기 곤란하니까 그런 건 묻지 말고.
진무가 머쓱하게 웃는데.
“어쨌든 감사합니다. 대협. 이 은혜를 어찌 다 갚아야 할지.”
이거 정말 대가리가 어떻게 된 게 분명하다. 질문을 해 놓고 금세 잊어 먹고, 또 울고.
이쯤 되니 지겹다. 그냥 그때 다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쓸데없는 짓을 해서는.
“험험, 그래, 이제부터 뭐 할 거야?”
백표가 잠시 고민하더니 슬픈 표정을 짓는다.
“은공께서 저를 용서하시고 은혜까지 베푸셨다고는 하나 저의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죽으려고?”
“예. 하지만 일단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듯합니다.”
“계림으로?”
“예.”
“가서 어쩌려고?”
“동생이 있습니다. 그 아이가 백가장을 일으켜 세우도록 도와야지요. 그리고 그 일이 끝나면 제게 죽은 이들에게 모든 죄업을 밝히고 자진할 생각입니다.”
“자진한다고?”
진무가 백표를 바라보며 눈을 찡그렸다.
“예. 함부로 살생을 했으니…….”
무림인을 죽인 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칼 든 이상 죽음을 각오한 인생이니까.
하지만 일반인을 죽인 죄는 진무도 그다지 반기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죄가 천우명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불로초 때문이기도 했고.
진무가 몹쓸(?) 죄책감에 화제를 돌렸다.
“흠. 그런데 자네 살수라고 하지 않았어? 그럼 청부를 받는 쪽에 소속이 되어 있을 텐데?”
“예.”
“그들이 놔줄까?”
“놔 달라 해야지요.”
놔주겠냐? 아니 뭔 살수로 살아 놓고 살수들의 생리를 이렇게 몰라?
살수 집단의 특성상 치부가 드러나면 떼 몰살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해서 몰래 도망친다 해도 추격당할 것이고, 아무리 입을 다문다고 약조해도 살아서는 절대로 발을 뺄 수가 없었다.
“안 놔줄 텐데?”
“그래도 제정신으로 돌아온 이상 더는 살업을 행할 수는 없습니다. 죽더라도.”
백표가 굳건하게 다짐을 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은공의 은혜는 평생 가슴에 담겠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은덕에 보답하겠습니다.”
이름도 모르면서 보답을 해?
이런 미친놈.
백표가 힘겹게 진무를 향해 절을 올렸다.
절하는 데 뭐 이리 시간이 오래 걸리는지.
그리고는.
저벅, 스윽. 저벅, 스윽.
달팽이냐……?
방문까지 반 장이 조금 넘는 거리다. 한 발 떼고 스윽, 한 발 떼고 스윽. 거기다가 덜덜 떨기까지.
너무 애처롭다. 걷는 모양만 봐도 가슴이 아프다.
저 상태로 살수 집단에 찾아갔다가는 분명히 죽는다.
힘도 하나 없이 살수직을 그만두겠다고 해 봐야 동정표도 못 얻는다.
물론 채기법으로 내력을 채우고 찾아가면 승산이 있을지도 모른다.
기운만 좀 채우면 탄기급 무인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도법은 뛰어났으니까.
하지만 그뿐이다.
분명 일대다의 싸움이 될 것이다.
하아, 진무가 한숨을 내쉰다.
자신을 제약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진짜, 망할 놈의 선기.
서둘러 양의심공을 익히고 묵룡혼원공을 익혀야지.
이러다간 정체성에 혼란이 생길 것 같다. 자꾸만 착해지려 한다.
일단은.
“도와……주지.”
“예?”
“살수질 그만둘 수 있게.”
“아…….”
울지 마!
* * *
동정호 외곽지 부랑촌.
도박 빚에 인생을 망친 사람들과 수많은 범죄를 저지른 죄인들이 숨어든 곳.
그곳은 주인 없는 동정호에서도 가장 위험한 우범 지대였다. 관병은 물론 이름난 무인들조차 함부로 발길을 들이지 않았다.
무법 자체가 체계로 자리 잡은 곳이었기에 은밀한 자들이 몸을 숨기기에는 딱 좋은 곳이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부랑촌의 분위기는 어딘가 가라앉아 있었고 해가 드는 곳마저 어둡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침이 밝은 부랑촌.
밤늦도록 술에 찌들었던 취객을 위해 항상 일찍부터 문을 연 국수 가게로 흑의에 죽립을 쓴 거한이 찾아왔다.
도심의 관도에서라면 의심받을 만한 복장이었으나 부랑촌에서는 너무도 익숙한 복장이었다.
그곳에 있는 대부분이 자신의 신분을 들키려 하지 않았기에 그랬다.
“주인장. 여기 국수 한 그릇.”
거한은 미리 자리를 잡은 허름한 복장의 노인과 등을 맞대고 앉아 주문했다.
국수가 말아지는 동안 흑립 거한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백표에게서 소식이 없습니다.”
그 말에 젓가락질하던 노인의 미간이 살짝 찡그려졌다.
노인의 이름은 범용. 길거리에서 구걸이나 할 법한 복장을 하고 있었으나 실상은 동정호에서 제법 알려진 살수 집단을 이끄는 수장이었다.
“실패한 것인가?”
“모르겠습니다. 청부 대상은 살아 있고 백표는 거처에서 사라진 뒤 푸줏간에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흐흠.”
범용 노인이 살짝 의아한 표정을 했다.
의외였다.
범용 노인이 이끄는 삼살당(三殺堂)은 동정호의 밤거리에서 제법 은밀하게 이름이 알려진 살수 집단이었다.
자신을 찾아온 죽립의 거한 일살, 초립. 침묵의 살인자라 불리는 이살, 현묵. 그리고 삼살 백표.
삼살당이 보유한 특급 살수.
그들은 단 한 번도 살행에 실패해 본 적이 없었다.
특히나 백표는 뛰어난 살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 자였다.
평소에는 비리비리한 모습으로 항상 술에 취해 있었고, 특유의 섬뜩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기는 했으나 도무지 무인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차피 살수였다.
그들은 서로의 과거를 묻지 않았다. 죽여야 할 대상을 죽이고 돈만 벌면 되는 일이었다.
백표, 그는 몇 번 되지 않는 살행으로 단번에 특급 살수의 실력을 보여 준 자였다.
살해한 이들의 몸에 남은 너무나 깔끔한 흔적. 그가 평소 발골하는 소백정으로서 그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것만으로는 그 실력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또한 은신술이나 경공이 뛰어나지 않으면서도 지금까지 그를 본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평소에는 걷는 것조차 힘든 자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살행마다 무조건 성공시키니 살수계에서도 꽤 회자되는 이야기였다.
‘어찌 된 게지?’
젓가락을 놀리는 범용 노인의 눈매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여와루의 우칠에 의해 전달되는 그들의 은밀한 명령서. 명령서가 도착하면 어김없이 청부 대상은 다음 날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가 삼살당에 몸담은 이후 마치 하나의 일상과도 같이 반복된 일이었다.
그런 일상에 변화가 생겼다.
청부 대상은 버젓이 살아서 걸어 다니고, 그는 거처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변화는 좋지 않았다.
무언가 불안했다.
“초립, 이살에게 전해라.”
“…….”
“백표의 뒤를 쫓는다.”
“예. 살주.”
흑립 거한, 초립이 짧게 대답하는 사이 국수가 말아져 나왔다.
둘은 더 이상 대화를 하지 않았고, 어느샌가 식사를 마친 노인은 구부정한 허리에 뒷짐을 지고 제 갈 길로 사라졌다.
* * *
“은공? 이곳에서 기다린단 말씀입니까?”
백표는 진무의 이름을 듣지 못했기에 그저 ‘은공’이라고만 불렀다.
“그래.”
단답형의 대답.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는 듯한 투였다.
백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작용에 대한 치료를 끝낸 진무는 그를 데리고 곧장 동정호의 한적한 거리로 이동했다. 푸줏간에도 가지 않았고, 백표가 살던 거처로도 가지 않았다.
그들이 있는 곳은 푸줏간 인근 길거리였다.
아침부터 그들이 한 행동은 그저 앉아 있다가, 사람 많은 곳에서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것뿐이었다. 행인들이 많았기에 그를 아는 이들이 있다면 금세 발견할 수 있는 곳이다.
만약 삼살당이 그를 뒤쫓는다면 일부러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째서?
“궁금해?”
“예?”
“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는지? 그리고 어째서 사람들 눈에 일부러 띄게 행동하는지.”
“……예.”
“멍청하긴. 너 삼살당인지 뭔지 하는 곳의 소속이라고 했지?”
“예.”
“위치 알아?”
“대충 부랑촌에 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정확한 위치는 모른다는 소리잖아.”
“……예. 저는 언제나 청부 쪽지와 청부금만 받았기 때문에.”
“그러니까. 가서는 안 되지.”
“……?”
백표는 궁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해 봐. 넌 청부받은 살행을 하지 않았어.”
“그런데요?”
“원래 끝났어야 할 일인데 우리가 하루를 더 기다렸으니까 그쪽에서는 의아해하며 널 찾고 있을 거야.”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사패천의 유명한 살수 집단인 살막(殺幕)을 수하로 부렸던 진무였다.
살수들의 생리라면 빠삭했다.
은밀한 놈들일수록 의심이 많다. 하물며 사람 목숨을 제 업으로 삼는 놈들은 더욱 그러하다.
“그런 와중에 정확한 위치도 모르면서 놈의 근거지로 찾아갈 순 없지.”
“그런가요?”
“…….”
도대체 왜 이런 걸 설명까지 해야 하지?
하지만 그 또한 부작용 때문이라 생각한 진무는 애써 친절하게 말을 이었다.
“놈들의 규모, 위치조차 알지 못하고 갔다가는 되레 피해를 보기 십상이다. 뭐하러 당당하게 찾아가서 위험을 자초해?”
백표는 영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으나 묵묵히 듣기만 했다.
“모든 싸움의 기본은 자신이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거야. 우리는 놈들을 모르니 우리가 유리한 곳으로 끌어들여야지. 이는 병법의 기본이기도 하다.”
“……그렇군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여 대답하고 있지만 전혀 모르는 듯한 백표의 표정을 보며 진무는 한숨을 내쉬었다.
광기와 마기가 옅어져 원래의 성격으로 돌아오긴 했어도 고작 하루밖에 되지 않았다. 뇌에 가해진 손상 또한 워낙 심해 완전히 회복되려면 한참이 걸릴 것이었다. 감정조차 들쭉날쭉하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서 잘 알지도 못하는 적진의 한가운데로 들어가자고? 하물며 지금 백표의 몸 상태로?
미친 소리다. 자신은 몰라도 살수들의 공격에서 백표를 지킬 수가 없었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아니, 그러게 채기법으로 내공을 좀 빨고 오자니까.
이유 없이 생기를 흡수할 수 없다며 그리 고집을 부리다니. 제 놈이 언제부터 정파였다고.
내기를 채흡하지 못한 백표는 서 있는 모습조차 비실거리는 게 당장 쓰러질 듯한 모양새였다.
“됐다. 됐어.”
진무는 이미 준비를 끝냈다.
백표를 사람이 많은 길거리로 끌고 나와 행적을 일부러 노출했다.
해가 서산을 넘어갔고 밤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어둠이 찾아왔으니 그림자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일 시간이었다.
백표가 몸담은 삼살당. 그들은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자, 갈까?”
“예?”
해가 서산을 넘어가며 땅거미가 지는 시간이 되어서야 진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님이 오신 것 같아서 말이지.”
진무가 히죽 웃었지만, 백표는 여전히 의아한 모양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