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86
86화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제갈산산의 설명을 듣고 있던 청상과 청우를 향해 긴 창을 비껴 든 사내가 다가왔다.
“제갈가의 영애가 아니시오?”
“아, 악 공자.”
“소저께서 참가하셨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이거 제갈 형님께선 벌써 세가로 돌아가신 모양입니다.”
“예.”
제갈산산에게 인사를 해 오는 사내.
산동 악가의 셋째 악평.
제갈선으로 살아오는 동안 몇 번 정도 본 적이 있는 인물이다.
“이거 섭섭합니다. 이번엔 제갈 형님과 술 한잔 나눌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럴 리가.
들어는 보았으되 신경 쓸 정도로 강한 무인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쭉정이.
제갈선일 때도 안면 정도 있는 게 고작이었다.
그런데 마치 대단한 인연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악평이 아쉽다는 표정으로 제갈산산의 옆에 있는 청상과 청우를 바라보았다.
“이분들은?”
무당의 도포를 입고 있으니 모를 리 없음에도 묻는다.
“무당의 청상 도장과 그 사제이신 청우 도장입니다.”
제갈산산의 소개에 청상과 청우가 공손하게 포권하며 허리를 숙였다.
“아, 무당의 제자…….”
악평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제갈산산을 바라보았다.
“한데 어찌 이곳에 계십니까? 그것도 망도추행에 있는 도문의 제자들과요.”
“…….”
비웃음이 섞여 있는 악평의 말에 제갈산산의 눈이 살짝 찡그려졌다.
망도추행(亡道追行).
망해 가는 길을 쫓는 걸음.
작금의 무당을 우화할 때 쓰는 말이었다.
망해 가는 도란 도가의 조종이었으나 지금은 사라져 버린 전진파를 일컬음이고, 그 뒤를 쫓는다 함은 소림과 더불어 태산북두로 군림했던 무당의 쇠퇴를 비웃음이다.
“악 공자, 말씀이 심하시군요.”
“하핫, 틀린 말도 아닌데 뭘 그리 과민 반응이오?”
다분히 의도적이다. 대놓고 무당의 제자들에게 쪽을 주려는 것이다.
수치라고는 모르는 것들.
하지만 다행히 청상과 청우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어쨌든 저쪽으로 가시지요. 제갈 소저를 보기 위해 다들 기다리고 있습니다.”
“…….”
제갈산산이 악평이 가리키는 방향을 슬쩍 쳐다보았다.
남궁창위를 중심으로 한 파벌의 오대세가 무인들.
제갈산산은 악평이 찾아온 이유를 금세 이해했다.
그들이 자신을 알 리 없었다.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으니 당연하다. 그녀에 대해 무림에 알려진 내용은 제갈선의 쌍둥이 동생이라는 것뿐이었다.
분명 소문과 옷차림으로 판단했을 것이고, 목적은 그녀를 자신들의 파벌로 끌어들이기 위함이리라.
하지만 그녀는 그들의 파벌에 들어갈 생각도 없었을뿐더러 악평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음탕하지는 않았으나 음흉하다. 보기 좋은 꽃이니 옆에 두면 자신들이 돋보일 것이라 생각하는 멍청이들의 눈빛이다.
“글쎄요. 저는 지금의 자리가 편하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하, 이거 참. 기회를 주었음에도 거절하시다니.”
기회?
제갈산산의 눈에서 차가운 빛이 흘렀다.
무엇이 기회인가? 고작 자신들의 파벌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 그들의 옆에 꽃처럼 서 있을 기회? 참으로 웃기지도 않는 자가 아닌가?
지금에 이르러 갑자기 만들어진 용봉관의 목적.
무언가에 대비하기 위함이 분명하다. 하면 응당 서로 뭉치고 발전하도록 노력을 해야 하거늘, 기다렸다는 듯 파벌이나 만들고 있다니.
제갈산산이 표독스럽게 쏘아붙이려는데, 또 한 사람이 다가왔다.
“허, 눈치 없는 조합이군.”
“…….”
제갈산산은 물론 악평과 청상, 청우의 고개도 돌아갔다.
어깨에 커다란 참마도를 걸친 무인.
구파에는 들지 못하나 그 규모가 구파에 필적한다는 형산파(衡山派)의 이대제자 상원영.
“정무맹이 한 그늘이라 하나 어찌 무당이 사사로운 이해를 추구하는 무가의 자제들과 함께하고 있는 것이지?”
“무슨 뜻이죠?”
“쇠퇴하여 그 힘이 본파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하더니. 무당도 다되었구만, 쯧쯧.”
상원영이 참마도를 앞으로 세워 땅에 꽂고 커다란 근육을 움직이며 말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제갈산산의 눈에 상원영은 그저 멍청한 근육 덩어리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또한 무당이 형산의 이름에 미치지 못한다고?
어이가 없다.
형산이 무당을 밀어내고 구파의 한자리를 차지하려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이대제자까지 이리도 노골적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어이, 말조심하지. 사사로운 이해를 추구하다니? 잘못하면 내 창이 그대의 입을 다물게 할지도 몰라.”
악평이 비릿하게 웃으며 비껴 든 창을 힘주어 움켜잡았다.
“하, 악평? 미친 건가?”
“뭐?”
“네놈의 얄팍한 창술로 나의 참마도를 어찌해 보겠다고? 이 자리가 용봉회가 아니었다면 좋았겠군.”
“오호? 그래? 그럼 나가서 한판 겨뤄 볼까?”
사내들의 쓸데없는 힘 싸움. 더욱이 있어 보이게 말하고는 있지만, 고작 위의 지시를 받고 파벌에 끌어들일 무인이나 탐색하는 놈들이다.
호랑이 등에 타면 제 놈들이 호랑인 줄 안다더니 딱 그 꼴이다. 파벌에서 말석이나 차지할 만한 실력들 주제에.
제갈산산이 미간을 찌푸리며 나서려는데 청상이 그녀의 소매를 잡았다.
“청상 도장?”
그녀의 의아함에 청상이 미소로 화답했다.
“저희는 괜찮습니다.”
“……예?”
“세인들의 평가에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그저 말뿐인 것을요. 저희는 그저 무당의 제자로서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담담하다.
분위기를 보면 자신들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는데 표정에 한 줌 변화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
왠지 쭉정이나 다름없는 자들에게 휩쓸려 화를 내려 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녀는 자신이 용봉회에 참가한 이유를 되새겼다.
운명을 바꾸고 싶은 것이다.
이제 더 이상 후계 역할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그녀는, 여인이라는 이유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한 사내의 아내로 살고 싶지 않았다.
가문의 위세나 여인으로서의 한계 따위를 무시하고 스스로 무인으로서의 삶을 개척하기 위함이었다.
고작 파벌의 힘에 기대어 살아가는 상원영이나 악평과 드잡이를 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두 분은 참으로 수양이 깊으시군요. 제가 너무 과민했나 봅니다.”
“뭘요. 저도 사숙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던 것을요.”
청상의 미소에 제갈산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멀리서 무당을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청우. 우리가 시험을 치를 차례인 모양이다. 속히 가 보자.”
“예. 사형!”
“사숙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예!”
청상의 말에 청우가 다시 한번 힘주어 다짐하고 시험관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모두가 관심 밖에 두었던 무당의 이대제자들이 용봉회에 참가한 이들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 * *
콰앙!
“……!”
제일 관의 시험감독을 맡은 정무반 교두 남로환은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저기, 합격인가요?”
실눈을 휘어 웃는 뚱뚱한 무당의 도사, 청우.
“하, 합격. 다음 시험으로…… 이동하게.”
“아, 감사합니다.”
남로환에게 합격지를 받고 신이 나서 청상을 향해 흔드는 청우의 모습.
다음 차례인 청상의 반응은 더욱 가관이었다.
“녀석, 어찌 이리 경박스러우냐. 그리고 그리 터트려 놓으면 다음 사람은 어떻게 해.”
“아, 뚫는 거 아니었나요? 내공을 사용해 있는 힘껏 때리라고 해서.”
“남들은 하지 못해서 안 한다더냐? 그냥 손자국만 내면 통과라 하지 않더냐.”
“……아, 헤헤. 사형께서 최선을 다하라 하셔서, 저도 모르게.”
“쯧, 사숙께서 보시면 내력 조절조차 제대로 못 했다고 화를 내시겠구나.”
청상의 말에 청우가 머쓱하게 웃으며 제 뒷머리를 벅벅 긁는다.
남로환은 물론 모두가 경악한 표정으로 그들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참가자들의 수준을 파악하기 위한 용봉회의 세 단계 시험.
그 처음이 참가한 이들이 모두 거쳐야 하는 정무반의 시험이었다.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한 치 두께의 철판. 그곳에 손자국을 남김으로 내력의 깊이를 측정하려는 것이다.
겨우 한 치였음에도 이미 무수히 많은 이들이 그 깊이가 옅어 떨어졌고, 아예 손자국을 만들지 못한 자들 또한 부지기수였다.
그런데 청우는 그것을 발경으로 아예 뚫어 버렸다.
최선을 다해서.
엄청나게 뚱뚱한 줄로만 알았던 무당의 제자가 지금까지 누구도 하지 못한 방법으로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키며 당당히 시험에 통과한 것이다.
“무당의 청상입니다.”
“어? 아, 그래. 시, 시작하게.”
놀라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기다리는 이들이 많아 빠르게 진행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자국의 깊이가 얼마나 되어야 합니까?”
“바, 반 치 이상만 되면 된다네.”
“알겠습니다.”
공손하게 대답한 청상이 천천히 걸어가서 철판에 손을 대었다.
“아, 아니 이보게. 때려야…….”
남로환은 다음 말을 이어 가지 못했다.
지켜보던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른 곳에서 시험을 치르는 이들마저 자신의 행동을 멈추고 청상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꾸우우.
청상의 손이 여래의 그것처럼 철판을 눌렀다. 때린 것이 아니라 민 것이다.
선명한 손자국이 철판 뒤쪽에 볼록하게 그 형상을 만들어 내었다.
그럼에도 너무나 호흡 한번 흐트러지지 않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충분합니까?”
“……토, 통과.”
“감사합니다.”
청상이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역시 사형은 못 따라가겠네요.”
청우의 천진난만한 감탄에 청상이 빙긋이 웃었다.
무척이나 쉽게 이루어 냈으나 청우가 뚫은 것보다 더욱 어려운 방법이었다.
때리는 것은 힘을 순간의 극점에서 그 효과가 극대화됨을 노리는 것이다.
반면에 누르는 것은 때리는 것보다 힘의 집중도가 적다. 그 중심이 손바닥 전체에 분산되기 때문에 그러했다.
하지만 청상은 눌러서 자신의 손자국을 남겼다. 그것도 한 치 이상의 깊이로.
“두 분 도우님께 부끄러운 실력을 보였습니다.”
시험을 마친 청상이 제갈산산의 옆으로 다가와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악평과 상원영은 너무도 놀라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고 제갈산산은 그 모습에 고소한 듯이 웃었다.
“두 분께선 잠시 기다리세요. 제 차례가 끝나면 다음 시험으로 함께 이동하시죠.”
“예.”
제갈산산의 말에 청상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이런 녀석들이 이대라고? 그 무당의?’
상원영과 악평은 여전히 놀란 눈빛으로 청상과 청우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들뿐 아니라 모두가 그리 보고 있었다.
망도추행의 무당.
이제는 누구도 그들을 신경 쓰지 않는다.
시험이 시작되기도 전에 무수히 많은 파벌이 생기고 있었으나 그 누구도 무당을 끌어들일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구파의 두 파벌의 핵심인 화산의 현선, 해남의 이백의, 오대세가 파벌의 핵심인 남궁창위와 황보웅.
그들은 무당 제자들의 이름을 머릿속에 담아야 했다. 파벌에 포함시킬 무인이 아니라 자신들의 위치를 위협하는 경쟁자로서.
그리고.
철판과의 거리를 재었던 제갈산산의 손이 가슴께로 당겨졌다가 가볍게 뻗어지며 철판에 닿는다.
쩌어엉!
움푹 패어 든 고운 손이 청상의 손자국 옆에 또 다른 흔적을 만들어 내었다.
엇비슷한 깊이.
“하, 합격!”
남로환의 외침과 함께 합격지를 받아 든 제갈산산이 청상에게 다가와 볼멘소리를 내뱉는다.
“아쉽네요. 청상 도장만큼의 깊이도 안 되고 청우 도장처럼 뚫지도 못하고.”
“그럴 리가요. 소저의 내력 조절에 감탄할 따름입니다. 우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지요.”
청상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 그럼 가실까요?”
제갈산산이 마주 웃으며 악평과 상원영을 째려보았다.
“비켜 줄래요?”
“……아, 예.”
갑무반에 포함될지도 모를 실력을 가진 제갈산산이 악평과 상원영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그나저나 진무 도장께서 두 분의 모습을 보셨다면 좋아하셨겠네요.”
제갈산산의 말에 청상이 고개를 저었다.
“보셨다면 한바탕 불호령을 내리셨을 겁니다.”
“예?”
“사숙께서 보시기엔 언제나 모자라니까요.”
“……하긴.”
듣고 보니 그렇다.
검성과 등여평 앞에서도 거침없는 진무의 말투와 성격이라면 정말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제갈산산이 생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사숙께선 어디로 가셨을까요? 고기나 굶지는 않으실는지.”
“어디인들 그분이라면 잘 드시고 지내실 거다. 그리고 분명 또 어려운 이들을 돕고 계시지 않겠느냐?”
“흠, 하긴.”
청우가 볼을 부풀리며 걱정스럽게 말하자 청상이 환하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