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92
92화
올라온 인물을 유심히 바라보던 백여린이 당황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다. 분명 저 얼굴은 십 년 전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린 백표였다.
어째서 지금? 네가 왜 여기서 나타나?
“뭐? 오라비?”
하지만 그녀의 말은 지금의 상황에서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하아! 이거 봐라? 아주 뒤로 호박씨를 제대로 까셨구만?”
마치 잘 걸렸다는 듯이 웃으며 노영찬이 기세를 피워 올렸다.
실수다. 자신도 모르게 뱉은 말이 전쟁의 빌미를 제공해 버린 것이다.
망할, 그토록 참아 냈거늘.
모든 노력이 한순간에 무너져 버렸다.
어째서 지금 오라비가 나타난단 말인가? 그동안 연락 한 통조차 없었으면서…….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 버텨 온 십 년인데.
“크크, 아주 좋아. 니들이 먼저 걸어 온 전쟁이야.”
노영찬은 놓치지 않고 기회를 잡아챘다.
“얘들아!”
그의 호기로운 외침과 함께 곧 전쟁이 시작될 터였다. 백여린은 눈을 질끈 감았다.
“얘들 같은 소리 하네.”
“……?”
끼이익, 끼이익.
짓밟힌 나무 계단의 비명과 함께 등장한 나른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
백표가 걸었던 계단을 따라 천천히 올라오는 새파랗게 젊은 무인.
그리고 그 아래 모조리 쓰러진 패력당의 무인들.
어?
순간 노영찬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잊어버렸다.
그것은 백여린을 비롯한 백가장의 수뇌들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의 이 상황은 뭘까?
따악!
“이 자식이 쓸데없이 분란을 만들고 지랄이야!”
이 층 끝에 오른 진무가 살기를 피워 내던 백표의 뒤통수를 거세게 후려쳤다.
“왜 때리십니까!”
“몰라서 물어? 기껏 밥이나 한 끼 사 주려고 했더니 난데없이 싸우기는 왜 싸워!”
“됐고, 비켜 주십시오. 은공!”
“이게 계속 봐줬더니 뒈질라고? 확!”
진무가 눈을 부라리며 손을 들어 올리자 백표가 움찔거리며 목을 움츠렸다. 여전히 스산한 살기를 뿌리면서.
그들은 마치 지금의 상황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듯한 모습이었다.
“어라, 이것 봐라. 익숙한 느낌의 인간들이 많네.”
백표의 앞으로 나선 진무가 패력당의 무인들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그제야 백표가 제멋대로 나선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제 생각났다. 계림의 패력당.
더욱이 그 반대편에 있는 여인이 백표를 보고 오라비라 했으니 당연히 백가장이겠지.
근데.
“니들 싸우냐?”
“…….”
진무의 말에 모두가 당황을 넘어 어이없는 표정이었다.
진무야 과거 속의 기억이 떠올라 팔십 노인으로서 말했지만 듣는 이들에게는 그저 새파랗게 어린 놈의 반말지거리였다.
“이런 어린놈의 새끼가!”
반응은 곧바로 터져 나온다.
십 년 만에 나타난 백표를 애 다루듯이 하는 진무였으니 백가장은 아직 정확히 상황판단을 하지 못했다. 시작은 당연히 패력당이다.
노영찬의 뒤에 있던 무인이 곧바로 주먹을 뻗어 왔다.
하지만.
탁.
가볍게 손목을 꼬아 잡은 진무가 슬쩍 비틀자.
휘릭. 쿵!
힘조차 쓰지 못하고 커다란 원을 그리며 돌아 바닥에 처박혔다.
“거, 새끼 성급하기는.”
“……!”
가볍고 단순한 동작이었으나 지켜보는 이들의 놀람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특히나 패력당의 무인들은 더욱 그러했다.
방금 진무를 공격한 자는 패력당의 외순찰을 맡은 서열 오 위의 고수 고학성이었다. 그런 그를 손목을 비튼 것만으로 쓰러뜨린 것이다.
“내가 오늘 기분이 좋거든? 그러니까 그냥 가라. 좋은 기회잖냐?”
진무가 눈을 휘어 웃으며 말했다.
“이 새끼…….”
쩍!
훌륭한 사파인답게 적의 강함에 굴하지 않고 말을 내뱉었던 패력당의 내당주 문추는 대가리가 뒤로 젖혀졌다.
아무도 그의 머리에 손이 닿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저 파리 쫓듯 손만 슬쩍 휘둘렀을 뿐이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도 갚는다고 옛 성현께서 말씀하셨지. 자, 누구 또 지껄일 사람?”
진무는 여전히 웃는다.
그 순간 모두의 머릿속에 박히듯 든 생각은 하나였다.
고수. 그것도 자신들보다 월등히 뛰어난 고수였다.
그것은 백가장으로서는 축복이었고 패력당에게는 저주였다.
‘이런 개 같은…….’
다 잡은 고기를 놓치는 것도 모자라 고기한테 살점을 뜯어 먹히게 생긴 노영찬이 얼굴을 굳혔다.
“귀하는 누구요?”
역시 사파인들은 태세 전환도 빠르다. 실로 흐뭇하다.
나이가 무슨 상관이랴? 무림은 힘센 놈이 법이고 정의다. 사파인들에게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러니 방금의 그 존댓말이 너의 생명을 구했느니라. 최소한 너의 모가지는 따지 않으마.
“나? 혁…… 그냥 손님이야.”
오랜만에 느끼는 익숙함에 하마터면 혁련무강이라고 말할 뻔한 진무가 싱글거리며 둘러대었다.
손님?
자신의 신분을 감추려는 것임을 모를 리가 없었다.
“백가장과 어떤 관계를 맺고 계신지는 모르나 이것은 세력 간의 다툼입니다. 백가장 쪽에서 먼저 시작한.”
당연히 알지. 왜 모를까?
정사불양립(正邪不兩立)이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한자리에 모이면 반드시 싸우는 게 정파와 사파였다.
그리고 노영찬이 말한 의미.
세력 다툼이며 백가장에서 먼저 시작했으니 관계없는 놈은 꺼지라는 말을 돌려서 한 것이다.
그러나 진무가 어디 그딴 걸 신경이나 썼던가.
“그래서?”
“……뭐요?”
“그래서 뭐? 싸우려고?”
“…….”
“상관은 없는데. 내가 지금 니들 봐주려고 한 거거든? 근데 끝까지 해보자고 하면 마다할 이유는 없지. 귀찮긴 하지만 이 자리에서 전부 다 모가지를 따 주는 것도 나쁘지 않고.”
잔인한 말을 웃으면서 잘도 내뱉는다.
하지만 사실이다.
백표는 녹록한 실력이 아니다. 채기법으로 그 손속에 잔인함마저 머금게 되었으니 싸우면 패력당은 지금의 숫자로는 온전히 살아 나가기 힘들 터였다. 물론 그가 그렇게 된 데에는 진무의 책임이 컸지만 뭐 어떤가.
그리고 일 층의 무인들을 진무가 모조리 때려 눕혀 놓았으니 수적으로도 백가장이 훨씬 우세해져 버렸다.
그러게 막지 말라니까.
진무가 하나도 남김없이 쓰러져 있는 일 층의 무인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뭣 때문에 싸우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살려는 줘야지. 어른 알아보고 존댓말도 하는 착한 사파 놈들인데.
“한번 해볼래?”
“……!”
여전히 웃는 진무였지만 노영찬을 비롯해서 패력당의 무인들은 사방을 짓눌러 오는 압력에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었다.
진무가 뻗어 내는 기운. 거악과도 같은 압박감이 객점을 통째로 짓누르고 있었다.
‘새, 생각보다 훨씬 더 대단한.’
노영찬은 수장의 자존심으로 자신이 가진 기운을 모조리 끌어 올려 버텼으나, 발이 마룻바닥을 부수며 파고들고 있었다.
진무는 그사이 기세를 미묘하게 바꾸어 패력당의 무인 하나하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노영찬부터 시작해서 그 옆에, 그 뒤에…… 응?
어느 순간 진무의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
‘어쭈, 흘려?’
희한한 놈이 하나 걸려들었다.
아무리 모든 기운을 쓰지 않았다고 해도 제 놈들 수장조차 버티지 못하고 이를 악무는 판에 진무의 기운을 흘리고 있었다.
‘요 자식 봐라?’
진무가 기특한 마음이 들어 조금 시험해 볼까 하는데.
“무, 물러나겠습니다.”
이러다 무릎을 꿇게 생긴 노영찬이 다급하게 대답해 왔다.
화악!
그러자 진무의 기운이 씻은 듯 사라졌고, 압박당하던 패력당의 무인들이 가쁜 숨을 토해 내었다.
“그래. 잘 생각했다. 괜히 고집부리다 뒈지면 너만 손해지.”
진무가 빙긋이 웃으며 의자 하나를 당겨 앉았다.
“근데 너 이름이 뭐냐?”
“허억, 허억…… 저는 패력당의 노…….”
“너 말고.”
“예?”
진무가 짜증을 내며 손가락을 들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노영찬의 뒤편에 서 있는 무인이었다.
“아, 이분……. 아니 이자는 본방의…….”
노영찬이 퍼뜩 말을 바꾼다. 이분?
“너한테 안 물었어.”
“…….”
노영찬의 얼굴이 수치심에 와락 일그러졌다. 백가장의 무인들이 보고 있는 자리가 아니던가?
하지만 자존심보다는 사는 게 먼저였다. 자신들 전체를 짓누를 정도의 기세를 뿌리는 고수라면 싸우는 즉시 무조건 세상과 하직이다.
“너 이름이 뭐냐니까?”
이어진 진무의 물음에 지명당한 무인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목인겸입니다.”
“목인겸?”
들은 적이 없는 자다.
그리고 노영찬은 그를 짧게나마 ‘이분’이라 칭했다.
제 놈이 당주면서.
그렇다는 것은 그만한 신분을 가졌다는 뜻이다. 사파에서 한 방파를 이끄는 놈이 자신보다 강한 수하를 둔다는 건 말이 안 되니까.
사패천? 그럴 리가.
검강지경의 고수가 뿜어낸 기세를 흘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정도의 핵심 고수를 자신이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누굴까?
진무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목인겸이라는 자를 바라보는데.
“대인께서 허락하신다면 저희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노영찬이 고개를 숙이며 청해 왔다.
진무는 더 깊이 생각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목인겸에 대한 궁금증이 들었지만 그게 뭐가 중요할까? 저런 젊은 고수가 사파에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굳이 간다는데 말릴 이유도 없었다. 진무를 공격한 것도 아니고, 사파의 씨를 말릴 생각도 아닌데 뭐 하러 그들을 죄다 죽인단 말인가.
“어, 그래. 가라.”
“감사합니다. 대인!”
싸가지 없는 백표 놈과 달리 인사성도 밝다.
그래. 열심히 해라, 이 녀석들. 사파의 미래가 밝구나.
다시 한번 인사를 하고 가는 노용찬을 향해 진무는 속으로 응원까지 해 가며 기분 좋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들이 사라지자 백여린과 백가장의 장로들이 급히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대협!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
뭐 딱히 도와줄 생각으로 한 것은 아닌데.
그나저나 동생이라는 것이 십 년 만에 만난 제 오라비는 본 척도 안 하고 자신에게 먼저 인사를 하다니. 가족이란 게 원수를 져도 알은체는 하는 법인데.
하여간 정파라는 것들은…….
진무는 백표가 참 안됐다는 생각을 하며 속으로 혀를 찼다.
하지만 이제 이걸로 끝이다. 자신이 마음먹은 일을 드디어 완수해 냈다.
동생과 가신들이 있으니 집에 데려다준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장하다, 진무!
그가 썰어 주는 고기 맛이 그립긴 하겠지만 이제야 귀찮고 싸가지까지 없는 놈을 떼 놓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밥값도 굳었다. 집에 가서 먹겠지.
“자, 그럼 다들 수고하라고.”
“……예?”
진무의 급작스러운 인사에 모두가 당황한 듯 고개를 쳐든다.
“뭐? 할 말 있어?”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너무 갑작스러우셔서. 이럴 것이 아니라 본방으로 가셔서.”
“응? 뭐 하러?”
“예?”
진무의 반응에 백여린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뭔가 착각하나 본데, 난 그냥 집 나온 놈 집에 데려다주러 온 거야. 길까지 돌아가면서.”
“…….”
그제야 백여린이 자신의 오라비를 쳐다보았다.
새옹지마(塞翁之馬)라더니.
갑자기 집을 나가 자신을 십 년 동안 고생하게 만들었던 말 새끼가 암말도 아니고 전투 병력을 데려왔다. 그것도 패력당의 수뇌들을 혼자 압도할 정도로 뛰어난 고수를.
백여린은 절대로 그를 그냥 보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은 그의 도움으로 넘어갔지만 패력당을 비롯한 수많은 사파의 무리들이 백가장을 노리고 있었다.
이미 한 번 도움을 받고 또 청하는 것이 염치없긴 했으나 물러간 패력당이 가만있을 리 없었고, 백가장이 살자면 지금 눈앞에 있는 고수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만약 그와 연을 맺는다면 그동안의 울분을 떨치고 다시금 백가장이 계림의 패자가 될 기회일지도 몰랐다.
필요하면 자신의 미색……을 동원해 보기에는 너무 어리다. 아무튼 그래도 어떻게든 잡을 수밖에 없었다.
“은공!”
“…….”
또 은공이냐? 이젠 좀 귀찮다, 그 말.
진무가 눈살을 찌푸리며 백여린을 바라보는데.
“감히 은공께 부탁드립니다. 백가장을 도와주신 은혜를 갚고 싶습니다.”
“어, 필요 없어.”
너무도 단호한 거절에 뒤를 이어 갈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잡아야만 하는데.
“은공.”
그 사이를 백표가 끼어들었다.
“가시죠. 밥 먹게.”
“…….”
“고기, 맛나게 구워 드리겠습니다.”
“…….”
“제가 가진 모든 능력을 동원해서.”
백표가 차가운 살기를 흘리며 음산하게 웃었다.
그건 좀…… 땡긴다.
그래.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일단 먹고 출발해도, 뭐.
“어디로? 니네 집?”
“예.”
“그래.”
고민하는 듯하더니 순식간에 고개를 끄덕이는 진무의 모습에 백여린은 물론 장로들마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무엇들 하시오? 서둘러 안내하시오!”
“예? 아예.”
퍼뜩 정신을 차린 외당 장로 이임생이 안내하듯 앞서 걸었다.
백여린은 여전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고기? 뭔 고기? 뭘 맛나게 굽는다는 거지?
“장주님.”
“……예?”
“가시죠.”
“……예.”
“허 참, 대공자께서 저런 분을 데리고 오시다니.”
대장로 사마소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고 백여린은 가면서도 고기에 대해서 한참을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