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93
93화
‘이게 지금 뭐 하는!’
백가장으로 돌아온 백여린은 기분이 무척이나 언짢았다.
귀한 손님을 위해 잘 꾸며진 후원을 내어 주었기 때문이 아니다. 진무가 한 상 가득 차린 저녁을 거절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귀한 손님이 된 진무를 접대하기 위해 장주인 자신은 물론 장로들까지 모여 있는 자리였다.
슈슛! 스스슷!
백표가 펼친 검술을 모두가 쳐다보고 있었다.
백가장의 직계에게 전해지는 난파풍도가 엄청난 수준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공기조차 소리 없이 가르는 그 모습은 그가 하루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음을 보여 주었다.
문제는 그 대상이다.
진무를 대접하기 위해 백표가 잡아 온 노루 한 마리.
난파풍도를 고작 노루를 해체해 먹기 좋게 포를 뜨는 데 사용하고 있었다.
‘이런 치욕스러운…….’
아무리 가문에 은혜를 베푼 이를 대접하기 위함이라고 하지만 수치스러운 행동이었다. 명망 높은 가문의 무인이 도축장 소백정도 아니고 가문의 비전 도법을 고작.
그리고 백표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저 사악한 기운은 또 뭐란 말인가? 바람처럼 청량해야 할 백가장의 운기법에서 발생하는 기운이 아니었다.
마치, 마치…… 사파인들에게서나 보는 기운.
백여린은 솟구치는 화를 참느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비가 간악한 사패천의 천우명에게도 굴하지 않고 지켜 낸 의기가 가득한 백가장이었다. 자신이 사파의 수많은 억압과 공격에서도 버티며 지켜 온 백가장이었다.
난파풍도는 그 백가장의 의기를 대표하는 무공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고기나 써는 데 사용하고 있다.
최선을 다해서, 땀까지 흘리며.
치이익.
이번엔 굽지 않는가?
먹기 좋게 구워 진무의 앞에 공손하게 놓는다.
“드시죠.”
“어.”
진무가 고기를 입에 넣고 히죽 웃자 백표가 사이한 눈빛으로 만족스럽게 따라 웃는다.
더구나.
“너도 먹어라.”
“…….”
백여린의 앞에 놓인 접시. 그리고 그 위에 올려진 고기.
백여린은 쌍심지를 세워 백표를 노려보았다.
고작 이 꼴을 보이려 돌아온 것이냐? 자신에게 백가장이라는 거대한 짐을 떠넘기고 사라졌다가, 고작 이 꼴을 보이려고?
와장창!
“이런 쓰레기 같은 인간 말종 같으니라고!”
진무를 꾀어 자신들을 도와 달라 해 보려던 생각이 싹 사라져 버렸다. 백여린은 접시를 바닥에 던져 버리고 백표를 향해 솟구치는 화를 토해 내었다.
“…….”
백표는 우두커니 서서 땅바닥에 떨어진 고기와 깨어진 접시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주웠다.
그 모습에 백여린의 분노가 눈물이 되어 터져 나왔다.
“치워! 누가 그따위 걸 먹는다고!”
결국,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후원을 떠나 버렸다.
그 모습을 진무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저래? 맛있기만 한데.”
진무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둘의 사이였다.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이런 행동을…….”
“……?”
뭐를? 고기 구워 먹는 걸?
“가문의 자존심과도 같은 난파풍도를 고작 고기 써는 일에 사용한 것을.”
“아, 난 또 뭐라고.”
진무가 피식 웃었다.
하여간 정파라는 것들의 자존심이란.
그게 뭐가 문제가 된단 말인가? 어차피 무공이라는 게 싸우기 위함도 있었지만,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쯧, 그 때문에 고기가 훨씬 더 맛있는 것은 모르고.”
필요한 데 사용하면 그만이다.
진무의 말에 백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변해야 하죠. 굳건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이들은 전통을 지킬 수 있으나 재건하는 이들은 변해야 합니다. 때론 고기도 썰어야 하고 생선의 배도 따야 합니다. 필요하면 뭐든 해야 하는 건데 동생은 아직 그걸 모르는 것 같습니다.”
웬일로 백표가 제 모습을 찾아 맞는 말을 한다.
재건하는 자는 변해야 한다. 그의 말에 깊은 고뇌가 느껴지는 것은 물론 변화에 대한 갈망이 진하게 느껴졌다.
그 과정이 모두에게 지탄 받을 것을 알기에 처연함마저 담겨 있었다.
“한잔할래?”
진무가 웃으며 백표에게 술병을 내밀었다.
가는 걸음은 급하지 않다.
잠시 오랜 친구처럼 웃으며 한잔 건네는 시간을 보낸다고 해도.
* * *
“저, 어찌할까요?”
패력당의 수뇌들이 모인 자리.
노영찬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말하는 대상은 다름 아닌 목인겸이라는 자였다.
갑자기 찾아온 자. 그 이름 또한 가명임을 안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랴. 이 무림에 본명을 쓰며 돌아다니는 이가 몇이나 된다고.
그는 백가장과의 싸움이 시작되면 패력당을 돕겠다 했다.
이미 그의 무위는 확인하고 난 다음이었다.
그는 강했다. 다섯 명의 수하와 찾아왔지만 홀로 패력당의 수뇌를 모조리 꿇려 버렸다.
그는 단 한 가지만 원했다.
한 자루의 검.
백가장은 도문이 아니던가? 그런데 검이라니?
의아했으나 그들이 도와준다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검 따위 그가 갖든 말든 상관없었다.
그 길로 노영찬은 혼첩을 보내 백가장을 도발했다. 저들이 먼저 공격해 올 수 있도록. 그래야만 자신들에게 명분이 생긴다. 이참에 전쟁을 통해 백가장이라는 이름을 아예 지워 버릴 참이었다.
그런데 방해꾼이 끼어들었다. 자신들이 어찌해 보지 못할 정도로 강한 약관의 고수였다.
어쩌면 목인겸이라는 사내도 자신할 수 없었는지 나서지 않았다.
하지만 한번 끓어오른 탐욕을 잠재울 수가 없었다. 눈을 감기만 해도 미색이 출중한 백가장주가 떠오른다.
‘달덩이처럼 풍만한 그 엉덩…….’
갑자기 흐르는 침을 닦아 낸 노영찬은…… 하여간에 백가장이 가진 막대한 이권(?)에 대한 생각을 하니 조바심이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 고수는 손님이라고 하지 않던가? 곧 떠날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기다려야 하는가?
“백가장을 공격한다.”
“……예?”
고민하고 있던 노영찬은 목인겸의 말이 뱉어지자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오늘 밤 안으로 백가장을 계림에서 지운다.”
“하지만 명분이 없습니다.”
“명분? 그건 그대가 생각해야지.”
노영찬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정파와 사파는 다르다.
무인의 수로 따지면 패력당이 백가장보다 훨씬 더 앞선다. 하지만 백가장의 세력권에 있는 소규모 방파들이 열 개도 넘는다. 그들을 모두 합하면 패력당의 전력이 밀리게 된다.
소규모 방파들은 모두 열두 개 현에 퍼져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실리에 따라 움직이는 사파와 달리 명분에 움직인다. 그것이 그들의 협력 관계를 끈끈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에 굳이 백가장이 먼저 공격해 오도록 도발했다.
물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 백가장을 치고 이권을 나눈다. 알짜배기만 차지한 뒤 나머지를 나누어 주고 그들의 반발을 무마시키면 된다.
문제는 그들이 연합하기 전에 백가장의 본진을 무너뜨려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백가장이라는 구심점이 사라지면 아무리 정파라고 해도 뭉치기가 쉽지 않다. 그때부터는 명분보다 실리다.
명분을 제공하던 쪽이 사라진 바에야 돈 준다는 놈을 싫다고 할 놈은 없었다. 백가장이 무너지면 그들은 조금이라도 이익이 되는 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시간이 촉박하다. 모든 협상은 백가장이 완전히 무너지고 난 다음의 일이다.
저들이 주변에 도움을 청하고 원군이 오기 전에 무너뜨리자면 하룻밤 안에 끝내야 한다.
패력당만으로는 부족한 시간이었다. 또한.
“낮의 그 고수는 어찌합니까? 그가 백가장을 돕게 되면…….”
승산이 낮아지는 것은 물론, 하룻밤을 훨씬 넘기게 될지도 모른다.
“그는 우리가 맡도록 하지.”
“…….”
엄청나게 강하던데.
나이는 어리지만 적어도 의기 이상은 되는 듯했다. 재수 없으면 그보다 더 강한.
하지만 노영찬의 의심스러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목인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이외에도 지원군이 대기 중이다. 공격을 시작하는 즉시 백가장을 칠 수 있게.”
“……!”
지원군? 그런 말은 처음 듣는데?
그런 게 있으면 왜 미리 말해 주지 않고?
목인겸이 그렇게까지 나오자 문득 의심이 생긴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패력당을 돕는 것인가? 그 검이라는 게 그리도 가치 있는 물건이었나?
하지만 이어지는 목인겸의 말에 의심마저 지워 버렸다.
“그대가 오늘 밤 안에 백가장주를 안을 수 있게 해 주지.”
툭.
때로 탐욕이 이성을 지배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기에 불나방은 죽을 줄 알면서도 불을 향해 뛰어드는 법이다.
백가장주를 안는다.
곧 백가장을 얻게 된다.
그 막대한 이권을 오늘 밤 안에 얻는 것이다.
노영찬은 단숨에 일어나 수뇌들을 향해 고함치듯 명령을 내렸다.
“뭣들 하느냐! 꾸물거릴 시간이 없다. 외당주는 지금 즉시 무인들을 끌어모으라!”
“예. 당주님!”
“놈들이 우리의 움직임을 알고 외부에 도움을 청해 인원을 모으기 전에 친다!”
“알겠습니다.”
애초에 싸울 계획이었다.
뜬금없는 고수의 등장에 잠시 머뭇거렸을 뿐이다. 더군다나 그 고수는 저자가 맡는다고 하지 않은가.
패력당에 무인이 모이는 동안 주변에 도움을 요청한다 해도 저들의 대응은 늦을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지원군까지 있다 했으니 시간은 충분할 터였다.
‘흐흐흐, 오늘 밤이 지나면 백가장의 막대한 이권과 그년을……품을 수 있겠구나.’
노영찬의 얼굴에 음흉한 미소가 떠올랐다.
준비는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명이 떨어진 순간 계림에 퍼져 있는 패력당의 무인들에게 소집령이 내려졌다.
“그럼 본진이 준비될 때까지 쉬고 있겠다.”
“알겠습니다. 적어도 한 시진은 걸릴 겝니다. 푹 쉬고 계십시오!”
탐욕에 찬 노영찬의 달뜬 목소리를 뒤로한 목인겸이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 * *
거처로 돌아온 목인겸은 곧바로 야행복을 갖춰 입었다.
노영찬에게 말했던 것처럼 휴식이나 취하고 있을 생각이 아니었다.
지원군은 그저 패력당이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거짓말일 뿐이었다.
“우리의 목표는 무혈(無穴).”
뒤로 돌아선 그의 앞에는 똑같은 복장을 한 다섯 명의 무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대랑께 약속드린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더 이상 기다리시게 할 수는 없다. 처음 계획한 대로 패력당이 백가장을 공격하는 틈을 노린다.”
대답은 없다. 아니, 필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명령에 충실하도록 훈련되었기 때문이었다.
명을 받고 계림으로 온 그들은 백가장을 유심히 살폈다.
백가장주 백여린.
그들이 노리고 있는 물건을 가진 인물이었다. 하지만 좀처럼 기회가 생기지 않았다.
그녀는 거의 외부 활동을 하지 않았다.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백가장 안에서만 보냈다.
그렇다고 백가장에 숨어들어 그녀를 공격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세가 기울었다고는 하나 범은 범이다. 발톱이 빠져도 이빨은 날카로웠고 마지막 순간에 적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힘을 가지고 있는 법이었다.
자신들만으로는 백가장 전체를 상대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패력당을 이용한 것이다.
백가장과 패력당. 계림을 놓고 싸우는 그들이었기에 이용하기가 너무도 쉬웠다. 약간의 탐욕만 충동질하면 충분했다.
“싸움이 시작되면 목표만을 취한다. 명심해라.”
목인겸의 말에 복면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어두워지기 시작한 밤.
땅거미에 숨은 여섯 명의 복면인들이 패력당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