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96
96화
왜 하필 도망친 놈을 찾는단 말인가?
“그, 그게.”
“그냥 뒈질래?”
사람 목숨 가지고 차분하게도 말한다.
“도, 도망간 것 같습니다.”
도망? 그럴 놈들이 아닌데?
진무가 눈살을 찌푸리며 노영찬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이게 어디서 개수작이야?”
진무가 눈을 부라리며 주먹을 들자 노영찬이 사색이 되어서 소리쳤다.
“저, 정말입니다! 믿어 주십시오!”
억울하기 짝이 없다. 개수작이라니, 지금 겁에 질려서 오줌이라도 쌀 판인데 뭐 하러 자신이 도망간 놈을 비호한단 말인가?
“저희는 정말 그 개자식과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대인.”
“지랄하네. 관계도 없는 새끼랑 함께 있었다고? 용서할 마음 자꾸 사라지게 왜 이러지?”
진무의 눈빛에 머금어진 살기가 짙어질수록 노영찬은 울고 싶어졌다.
그게 사실인데 눈앞의 괴물이 믿어 주지 않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어차피 그따위 놈들과 지킬 의리 따위도 없다. 노영찬은 벌벌 떨며 자신이 아는 바를 최대한 소상하게 설명했다.
목인겸이 자신들을 찾아온 순간부터 그가 했던 제안, 그리고 그들에 대해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끄집어냈다.
“검이라고?”
“예. 검만 하나 달라고 했습니다.”
“…….”
잠시 생각하던 진무가 백표를 슬쩍 쳐다봤다.
“백표.”
“예, 은공.”
“니네 집에 검 있어?”
“검이라면…….”
백표가 골똘히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백가장은 오랫동안 도문이었다.
“잘 생각해 봐. 목인겸이라는 새끼, 아무래도 내가 아는 놈들 패거리 같거든. 그런 놈들이 도망친다는 건 말도 안 돼. 그놈들이 뭔가를 노린다면 이유가 있는 물건일 거야.”
칼을 쓰는 문파에 누군가 노릴 만한 검 따위가…… 어? 설마?
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비슷한 게 있다. 백가장의 주인에게 대를 이어 전해지는, 자신이 떠나며 백여린에게 넘겨준 물건.
그리고.
“설마? 그들이 본가로 갔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백표의 눈이 부릅떠졌다.
“추측인데 아마 거의 확실할걸?”
“이런!”
백표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노영찬의 말을 함께 들은 뒤였다.
목인겸이라는 자는 홀로 패력당의 수뇌들을 무릎 꿇릴 정도로 뛰어난 자라고 했다.
그리고 그들이 패력당으로 오기 전 진무는 본가의 병력을 움직이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무언가 불안했다.
“젠장!”
백표가 진무의 허락도 듣지 않고 지면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가문이 걱정되었을 것이고, 동생이 걱정되었을 것이다.
“쯧, 성격하고는.”
순식간에 멀어지는 백표의 뒷모습에 진무가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노영찬.”
“예! 대인!”
“니들 그놈들과 관계없는 거 확실하지?”
“예!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입니다.”
“좋아. 병력들 전부 해산시켜.”
“……예.”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명색이 사패천 소속이라는 새끼들이 남에게 휘둘려서 전쟁 일으킨 걸 생각하면 죄다 대가리를 깨 버리고 싶으니까.”
차분하고 위협적인 말에 노영찬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한 놈도 여기서 움직이지 마, 내가 부를 때까지. 알겠어?”
“예!”
“좋아.”
진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패력당과 백가장.
누가 계림의 주인이 되어도 상관없는 일이다. 뭐, 패력당이 주인이 된다면 더욱 좋기야 하겠지만.
목인겸이라는 놈이 뭘 노리고 있는지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중요한 것은 그 무월루의 노인과 목인겸의 관계성이었다.
“이번엔 꼭 잡아서 물어본다.”
살기 어린 눈을 빛내는 진무의 모습이 땅을 박참과 동시에 쏘아져 나갔다.
* * *
“크윽!”
백여린이 진한 신음과 함께 밀려났다.
그녀는 자신의 도를 사선으로 움켜쥐며 습격해 온 인물을 노려보았다.
그들은 백가장의 무인들이 대부분 빠져나가고 난 다음 찾아왔다.
마치 기다린 것처럼.
백여린이 복면인들의 수장과 싸우는 사이 그의 뒤를 따른 다섯 명의 무인들은 백가장의 무인들을 막고 있었다.
깡! 까강!
“크악!”
사방에서 피가 튀어 오르고 비명이 들려왔다.
비록 다섯에 불과했지만 그들의 검에 수십이나 되는 백가장의 무인들이 도륙당하다시피 목숨을 잃고 있었다.
일그러진 백여린의 시선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복면인들의 수장에게 향했다.
이미 수십 초를 겨루었음에도 자신과 달리 호흡 하나 거칠어지지 않았다.
“패력당이 보낸 암살자인 것이냐?”
“…….”
백여린의 물음에 복면인이 그녀를 바라보다 말했다.
“무혈을 내놓아라. 하면 목숨은 빼앗지 않겠다.”
“……?”
무혈? 그게 뭐지?
의아함을 머금은 백여린을 향해 복면인이 손가락을 뻗었다.
그녀의 시선이 복면인의 손가락을 따라 자신의 목덜미를 향했다.
짤랑.
옷 밖으로 삐져나온 작은 소검(小劍).
대대로 백가장의 주인에게 전해지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은장도와도 같은 그것은 그저 백가장의 가주임을 증명하는 징표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리 힘주어 당겨도 검집에서 빠지지도 않는 장식용 물건에 불과했다.
한데 어째서 습격자들이 그것을 노리는가? 무슨 비밀이라도 있는 걸까?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위급한 순간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불손한 의도를 가지고 찾아왔다.
백가장에 남은 무인은 오십.
고작 여섯이라는 수로 그 많은 무인들을 압도할 만큼 뛰어난 자들이라 해도, 밤이슬을 맞으며 찾아온 습격자 따위에게는 백가장의 그 무엇도 내어 줄 수가 없었다.
그것이 오랫동안 물러섬 없이 계림의 패자로 존재해 온 백가장의 자존심이었고, 당대의 주인인 백여린의 역할이었다.
짜르르르.
백여린이 기운을 끌어 올리자 그녀의 도에 기가 피어오르고 칼날의 중심에 달린 둥근 고리들이 바람에 스친 풍경처럼 부딪히며 맑은 쇳소리를 냈다.
“백가장에서는 그 무엇도 가져갈 수 없다.”
“…….”
넘실거리는 도기를 뿜으며 매섭게 노려보는 백여린을 복면인이 지그시 응시했다.
그녀의 목에 걸린 소검, 무혈. 그들은 그것을 노리고 있었다.
패력당을 빠져나온 그들은 백가장 인근에서 전쟁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그들이 아무리 뛰어나도 일문의 수장을 노렸다가는 일의 성패를 장담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패력당을 빠져나가는 인물이 있었다.
낮의 고수.
잠시 뒤에는 백가장의 무인들이 줄을 지어 달렸다. 그들이 가는 방향은 패력당이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먼저 기습을 할 모양이라 생각했다.
더욱이 그 일행에 백여린이 빠져 있었다.
절호의 기회였다. 일이 너무도 쉽게 풀리고 있었다.
그들은 당연하듯 담을 넘었고, 모습을 드러낸 백여린을 공격했다. 오십여 명의 무인들이 달려들었지만, 복면인의 수하들이라면 충분했다.
지금 그의 역할은 더 이상 시간을 끌지 않고 목표물을 확보하는 것뿐이었다.
“어쩔 수 없군. 반드시 가져가야 할 물건이니 목을 베어서라도 챙겨 갈 수밖에.”
“……!”
복면인의 모습이 갑자기 흐릿하게 변하는가 싶더니, 좌측에서 싸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백여린은 다급하게 머리 위로 팔을 둥글게 돌렸다.
따다다당!
칼끝에 이어진 도기가 나선처럼 그녀를 감싸고 쇳소리를 만들었다.
그와 동시에 도기의 틈새로 날카로운 검극이 심장을 찔러 왔다.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허리를 꺾었지만, 검격이 옷을 찢어 내고 살갗을 베었다.
“큭!”
백여린은 짧은 신음과 함께 뒷발로 몸을 세우며 재빨리 도를 횡으로 그었다.
깡!
검을 튕겨 낸 그녀가 복면인을 찾으며 재차 도격을 뿌리려는 순간.
“컥!”
옆구리에 진한 통증이 찾아왔다.
복면인의 주먹.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멈칫한 순간 다섯 개의 검격이 그녀의 몸을 토막 내려는 듯이 머리 위에서 쏟아졌다.
백여린은 아랫입술을 깨물어 고통을 참으며 도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짜라라라!
도에 달린 고리들이 미친 듯이 부딪히고 공기가 빠르게 잘려 나갔다.
땅! 따다다당!
위로 휘저은 도기와 복면인의 검이 맹렬하게 부딪쳤다.
“……!”
막았다 싶었는데 어느새 그녀의 가슴 아래에 박혀 든 일장.
푸학!
백여린이 피를 뿜으며 뒤로 밀려 나갔다.
“크으…….”
칼을 지면에 박아 겨우 몸을 세운 백여린.
일장을 맞아 고운 입술이 피로 물들었고, 찢어진 옷 틈새로 가슴께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여인으로서는 더없이 수치스러운 상황이었으나 백여린은 굳이 앞섶을 가리거나 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검극을 지면으로 늘어뜨리고 선 복면인.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한 모습.
강하다.
이제 막 탄기의 경지에 오른 그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고수였다.
그리고 그 움직임이 가히 신묘막측하다.
검과 손을 쓰는 연결점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또한, 어디서 날아오는지 예측이 안 될 정도로 간결하고 빨랐다.
“네놈은 도대체…… 누구냐?”
백여린은 거칠어진 호흡을 가라앉히고 들끓는 내기를 다스리며 말을 걸었다.
최선을 다해야 했다. 여인으로서 수치스러운 모습을 내보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배제할 정도로 전력을 쏟아야만 했다.
하지만.
“시간을 끌어 볼 참인가?”
복면인의 목소리에 비웃음이 느껴졌다.
“쓸모없는 짓!”
파앙!
복면인은 곧바로 바닥을 밟으며 백여린과의 거리를 좁혔다. 그의 손이 힘껏 당겨지고 수평으로 세워진 검이 횡으로 그어졌다.
‘망할!’
백여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늦었다.
복부를 맞은 충격이 아직 다 가시지 않았다. 피하기에는 너무 빠른 검격이 그녀의 목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생과 사의 경계에서 적의 검이 그녀를 지옥으로 밀어 넣으려 다가오고 있었다.
온 힘을 다해 잡은 도를 빠르게 당겨 올렸지만, 그 속도가 검보다 느림을 모를 리 없었다.
“여린!”
“……!”
그 순간 담벽을 넘어온 목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공기를 꿰뚫으며 날아왔다.
쐐애액!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깨닫기도 전에 손 하나가 그녀의 머리를 무지막지하게 눌렀다.
까아아앙!
뒤이어 터진 쇳소리와 비스듬하게 횡격을 그리는 복면인의 검.
탁!
허공의 무언가가 잡히고.
스스스슷!
무언가는 공기를 싸늘하게 갈라놓았다.
“……?”
어지러운 백색 선들이 전방을 가득하게 채우자 복면인이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백여린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커다란 등 하나를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손님과 함께 패력당으로 갔다던 백표였다.
언제?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백여린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데 백표가 자신의 윗옷을 벗어 돌아보지 않고 건네었다.
“밤바람이 차다. 입거라.”
“…….”
백여린은 말없이 그의 손에 들린 옷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훤히 드러난 그의 상체.
굴강하지는 않아도 오밀조밀하게 자리 잡은 근육들이 가득한 몸이다.
그리고 그 몸에는 제대로 치료되지 않은 수많은 상흔이 흉측하게 느껴질 정도로 가득 자리 잡고 있었다. 베이고 뚫린 자국들이 세어 보지 않아도 기십을 넘는 것 같았다.
짐승의 고기나 썰고 술이나 퍼먹으면서 살아온 이의 몸이라 생각할 수가 없었다.
‘아…….’
그것은 마치 수라의 전장을 지나온 전사의 모습 같았고, 지난 십 년 세월이 그에게 남긴 흔적 같았다.
그래서 저토록 사악하고 살기 어린 기운을 뿜어내는 것인가?
“입어라. 과한 놈이라 여유가 많지 않구나.”
툭.
백표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백여린에게 자신의 옷을 던지고 복면인을 지그시 노려보았다.